우리 가족이 살아온 동네 이야기 그림책으로 만나는 지리 이야기 1
김향금 지음, 김재홍 그림 / 열린어린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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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손녀딸까지 3대에 걸친 아홉살 소녀들의 살던 동네 이야기를 엮었다.
해방되던 해에 아홉살 소녀였던 할머니의 고향은 전남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
세 곳의 고향 마을이 나오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풍경을 보여준 것은 할머니 편이었다.
특히 첫 그림으로 나온 장면은 새벽 물빛을 잔뜩 머금은 투명한 느낌이 종이를 뚫고 질감으로 느껴질 것만 같았다.
김재홍 작가님의 그림 실력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유난히 곱고 고와서 감탄을 거듭했다.

이어 바쁜 농사철의 아침 풍경이 이어진다. 아직 새벽녘의 안개가 덜 걷힌 마을은 벌써부터 분주함으로 가득 차 있다.
낮이나 밤이나 대문을 반쯤 열어 두고 살던 마을의 정겨움이 한 폭의 그림 속에 가득 채워져 있다.

오 리나 떨어진 학교지만 책보 메고 씩씩하게, 신나게 걸어다녔을 할머니의 모습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굵은 나뭇가지에 묶인 튼튼한 그네 줄도 멋지고, 등교 길 나무 위에 올라가 열매 따다가 이웃 아재께 혼나는 악동들 모습도 깜찍하기 그지 없다.
히라가나를 먼저 배웠던 할머니는 해방되면서 아에이오우를 열심히 외쳤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나물 캐는 와중에 각시풀 뜯어 인형놀이도 했던 할머니의 유년시절이 눈부시다.

쇠꼴 먹이다가 개울에 풍덩풍덩 몸을 던지고 놀던 개구진 소년들,
엄마 따라 장터 갔다가 한껏 졸라 먹게 된 팥죽 한 그릇을 이웃 마을 사내 아이랑 부딪혀 쏟고 만 이야기는 그림만 보아도 하하핫 웃음이 나온다.
짧은 단발머리 선머슴 같던 아홉살 할머니는 엉엉 울어댔고, 할머니의 엄마는 그런 아이를 달래느라 땀을 빼고, 그 모습 지켜보던 이웃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으신다.
그렇게 원수 같던 사내아이랑 가시버시 맺을 줄 그때는 어찌 알았을까.

스무 살 갓 넘어 이웃 광평리로 시집가 북동댁이라 불리던 할머니.
아이 둘 낳곤 서울로 훌쩍 떠났던 신랑이 서너 해 만에 돌아와 고향을 뜨자고 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살이, 얼마나 낯설고 낯설었을까.
그 낯선 동네에서 엄마가 자라셨다.
엄마가 살던 집은 청계천 영미 다리 건너 중앙시장 언저리,
다닥다닥 붙은 고만고만한 지붕들에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엄마는 한 반에 70명이 넘는 아이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꽉 찬 교실에서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 수업을 받았더랬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엔 왜 그리 자주 똥이 마렵던지......
동네 아이들이 귀신 나온다고 벌벌 떨던 공중변소에서 덜컹거리는 문짝을 붙잡고 힘을 주던 아홉살 엄마.
그 아홉살 소녀에게 공중변소 밑은 세상에서 가장 깊고 깊은 곳이었다.

개량 한옥집엔 유리 문이 달렸고, 부엌 아궁이는 신식으로 바꿔 연탄을 땠다.
빨랫줄 가득 널려 있는 옷가지에는 엄마의 부지런함과 사랑이 햇볕을 만나고 있고, 학교 갔다 돌아온 아이의 재잘거림과 반가워 꼬리 흔드는 강아지의 수다스러움도 부딪쳤다.
좁은 골목 길에서 고무줄 하는 아이들은 힘든 것도 모르고 배고픈 것도 모르고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가. 엄마의 아홉살 적 모습보다 한참 후배인 나도 어릴 때 저렇게 고무줄 놀이하는 것 참 좋아했다.
한 고무줄도 재밌고 두 고무줄 세고무줄 모두 재밌었다. 그때 부르던 노래들은 신났고, 때로는 만화 영화 주제곡에 맞추어 새로운 고무줄 놀이 기법을 창조해내기도 했다.
지금도 어릴 적 해보았던 놀이 중 가장 해보고 싶은 게 바로 고무줄 놀이다.
이제는 그때의 팔짝팔짝 뛰던 체력을 감당해낼 수 없어서, 노래 한 곡을 다 뛰어낼지 자신이 없지만, 그렇게 신나게 놀던 추억이 내게 남아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긴다.

청계천을 덮는 공사가 진행되고 엄마네는 몇 차례나 동네를 옮긴 끝에 외할머니가 꿈꾸던 빨간 벽돌의 이층집을 지었더랬다.
그 집에서 시집을 간 엄마는 아빠와 결혼해서 신혼집으로 이사를 갔다.
새 살림을 차린 집은 아차산과 광나루 사이에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 동네.
거기서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한 엘리베이터를 나눠 쓰는 옆집 사람과 멋쩍은 인사를 나누게 된다.
한폭의 그림 같던 외할머니의 집같은 멋도 없고, 옹기종기 모여있던 엄마네 한옥 마을 같은 맛도 없지만, 그래도 이곳도 사람 사는 곳,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자라는 곳이다.
3대가 함께 또 따로 기억하고 저장한 그들의 소중한 동네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마음이 촉촉해져 왔다. 내가 살았던, 내가 지내온 내 추억의 공간들은 어떠했나 앨범을 뒤적여 보았다.

어린 시절의 사진은 많지 않다. 특히 집을 찍은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에 담아둘 만한 집이 아니기도 했지만, 사진을 찍어볼 여유라는 게 없었던 게 맞을 것이다.
이 사진은 삼촌이 한 밤중에 집에 카메라를 빌려와서 급히 찍고 돌아간 덕에 남은 사진이다.
엄마가 시집올 때는 장농은 못해도 미싱은 해가던 시절이었다며, 좋은 미싱을 장만해 갔는데 도둑이 핵심 부품을 훔쳐가서 써보지도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던 붉은 재봉틀이 보인다.
쌀통도 보이고, 촌스럽지만 능청스러운 TV도 보인다.
다리만 반짝 나온 것은 할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축대에 기대어 선 것은 초등 6년 때 소풍 다녀오면서 친구가 찍어준 모습이다. 역시 통통하구나.
그나마 동네 어귀가 보여서 고른 사진이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옆의 골목인데 지금도 저 비슷한 모습은 남아 있다.

이 책이 좋은 것은 그들 3대가 살아온 동네 이야기를 엿보는 재미와 멋드러진 그림을 감상하는 감동이 있지만, 그보다도 나의 추억을 재생시키는 동기가 되어준다는 것이 더 고맙다. 당신만의 이야기, 당신의 소중한 추억도 꺼내보시라. 뭉클 몽글한 감동이 분명 뒤따라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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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6-10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너무 좋습니다!
어머님이 참 고우십니다.^^
그리고 마노아님은 너무 귀여우세요 ㅎㅎ

마노아 2011-06-10 15:10   좋아요 0 | URL
헤헷,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김재홍 작가님 작품 중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2011-06-10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1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