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 권정생 선생님이 들려주는 6.25 전쟁 이야기 평화 발자국 1
권정생 지음, 이담 그림 / 보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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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살펴보니 '평화 발자국 시리즈'는 전 권을 소장하고 마지막 권 '재일 동포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만 아직 읽기 전이다. 의도한 바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시리즈를 거의 섭렵한 셈이 되어 버렸다. 그 중에서 가장 궁금했던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는 생각보다 늦게 읽게 되었지만. 

전쟁을 경험했던 세대에게서 나오는 문학은 그 기억을 비켜갈 수가 없는 듯하다. 그것이 2차 세계대전이건, 한국전쟁이건, 베트남전쟁이건... 혹은 제주의 기억에서든 광주의 기억에서든,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고 떨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증언과, 그런 사람의 연필 끝에서 나오는 문장의 힘은 감히 무시할 수가 없다. 권정생 선생님도 그런 분 중의 하나이다.  

 

그림 분위기가 스산하다. 골짜기에 봄이 번지고 있는 고요한 달밤의 풍경이란 몹시 운치 있을 것 같은데, 글의 배경이 되어주는 전쟁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여서 그런지 그림조차도 어둑스산하고 메말라 있다.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는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두 사람은 소쩍새 울음 소리를 들으며 고향 집 풍경을 떠올린다. 곰이의 고향은 함경도, 오푼돌이 아저씨의 고향은 평안도 대동강 근처라고 한다. 두 사람이 함께 떠올리는 고향 풍경은 아득해도 아름답건만, 두 사람의 마지막 기억 속 고향 땅은 추억처럼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다. 

 

곰이네 집은 고향 집을 지키겠다고 홀로 남으신 할머니만 남겨두고 피난을 떠났더랬다. 아버지 어머니는 피난길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셨을 지, 할머니는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실지 궁금하지만 곰이는 알 길이 없다. 곰이는 이미 30년 전 피난 길에서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참상은 아직도 곰이에겐 현재진행형이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선 폭격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달아나다가 서로 엉키어 넘어졌고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곰이의 육성으로 들려주는 그날의 기억은 먹먹하기만 하다.  


"아저씨, 전쟁을 피해 달아나려 했는데도 전쟁은 우리 뒤를 금방 따라온 거예요. 살려고 갔는데도 난 죽은 거예요." 

곰이는 인민군이었던 아저씨에게 누구와 싸웠냐고 물었다. 오푼돌이 아저씨는 국군과 싸웠다고 대답하셨다. 

"국군은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야."
"어느 나라를 지키는 사람인데요?"
"이름만 다르지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야."
"똑같다니요?"
"다 같은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들이니까......" 

다만 한 쪽은 북쪽에서 살았고, 또 다른 한쪽은 남쪽에서 살았을 뿐 다른 게 없었는데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도록 싸웠던 기억이 우리에게 있다. 외세에 의해서 분단된 독일도 서로 합하는 데에 오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는데, 서로 싸우고 헤어진 우리의 통일은 지나치게 아득해 보여서 아찔할 지경이다.  

오푼돌이 아저씨의 가슴에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다. 30년이 지났지만 멈출 수 없는 핏자국이다. 아저씨의 가슴에만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니다. 아저씨가 쏜 총에 맞은 그 누군가도 그렇게 피흘리며 긴 시간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 죽음의 덧없음에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인민을 위해 싸운 건데, 죽은 건 모두가 가엾은 인민들뿐이었어." 

 

곰이는 오푼돌이 아저씨의 손을 잡고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 이야기를 아저씨에게 들려주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님달님의 이야기를.... 

그리고 그때 호랑이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해님달님의 한국전쟁 버전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할머니를 잡아 먹어버리고는 오누이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오두막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흡사 엄마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아이들을 꾀어내는 호랑이. 앞문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엄마라고 여기는 누나와, 뒷문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엄마라고 생각한 남동생. 두 오누이는 서로 의견을 합치지 못했고, 위기가 닥친 것도 모른 채 양쪽 문을 모두 열고 말았다. 그 결과 두 마리의 호랑이는 누나와 동생을 하나씩 물고는 반대쪽으로 달아나버린 것이다. 서로를 애타게 부르짖지만 누나 해순이와 동생 달순이는 따로따로 호랑이에게 물려 가버렸다.  

 

서로를 삼키려고 했던 두 마리 호랑이 앞에서 꼭 이들 오누이 같았던 우리네 역사가 서럽게 다가온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시간을 되돌이킬 수는 없는 일. 더 애석한 것은 아직도 반성보다는 서로를 원망하며 손가락질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1980년대에 쓰인 것이다.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 시절에 인민군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지어졌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랬던 책이 오래도록 살아 남아 그림책으로 다시 태어나기 직전에 권정생 선생님이 하늘로 돌아가셨다. 당신께서 계신 곳은 전쟁도 없고 미움도 없는 모두가 사랑하며 사는 평화로운 세상이기를... 그리고 이 세상도 그 세상 닮아가기를...... 

평화 발자국 시리즈의 첫 걸음이 되어준 이 책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이런 책이, 이런 책을 읽는 사람들의 결기들이 모여서 분단을 뛰어넘고 평화의 땅을 일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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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6-0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은 다시 보고 또 봐도 볼때마다 울컥하지요.
이담 그림이 글내용을 돋보이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요.

마노아 2011-06-08 10:44   좋아요 0 | URL
그림이 주는 힘도 꽤 커요. 글과 그림이 무척 잘 어울려서 더 울컥하게 해요.

수퍼남매맘 2011-06-12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무지 좋아합니다. 아이들에게 꼭 읽어 주려구요.
특히 남북분단을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인용하여 쓴 부분은 정말 기가 막혔어요.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들이 다 모여 있네요. 그것도 정성 가득 담긴 리뷰와 함께 말이에요.
반갑습니다.

마노아 2011-06-12 22:04   좋아요 0 | URL
권정생 선생님은 평생을 아이들과 통일 문제에 헌신하셨던 분 같아요.
해님달님 이야기는 기막힌 비유였어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죠.
수퍼남매맘님, 반갑습니다. 우리 권정생 선생님 리뷰 대회에서 같이 당선되었지요?
그것도 축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