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성출혈열 백신을 찾아낸 의학자, 이호왕 [제 1238 호/2010-10-25]


#1. 1차 세계대전 중(1914~1916년) 영국군 1만 명이 원인 모를 병으로 사망했다. 2차 세계대전(1939~1945년) 당시에도 러시아군과 일본군 1만여 명이 집단 괴질에 걸렸다. 일본과 러시아에서 각각 인체실험까지 강행했지만 병원체를 찾지 못했다.

#2. 1950년 6‧25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유엔군 600여 명이 집단 괴질에 걸려 사망했다. 정전 이후에도 괴질은 계속되어 1954년까지 철원, 포천, 김학 등에서 3,000여 명의 미군 환자가 발생했다.

이 괴질의 정체는 1930년대 말부터 알려진 바이러스성 전염병으로, 1942년에야 비로소 ‘유행성출혈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행성출혈열은 야외활동이 많은 농민, 군인에게서 많이 발병하며 세계적으로 매년 약 50만 명이 감염되는 병이다. 이 병은 발병 이후 특효약이 없어 사망률이 7%에 이른다.

특효약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예방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 병원체와 면역체를 발견하고 예방백신을 개발한 사람은 한국의 의학자이자 미생물학자인 이호왕 박사다. 그가 만든 예방백신이 없었다면 이제까지 유행성출혈열로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수는 꾸준히 증가했을 것이다.

‘한국의 파스퇴르’라 불리는 이호왕 박사는 1928년 10월 26일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났다. 옛날 어른들은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점을 봤는데 이호왕 박사는 어른이 되기 전에 죽는다고 나왔다. 집안 어른들은 일부러 이호왕 박사를 ‘장수돌이’라고 불렀고, 그래서인지 대학까지 별 탈 없이 건강하게 다녔다.

이호왕 박사는 1954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내과의사가 되길 원했다. 그 당시엔 6‧25 직후라 뇌염,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 환자가 넘쳐났는데, 내과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염병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대학에서 미생물학을 공부하다가 일본뇌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일본뇌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1년에 6,000~8,000명이 감염되어 그 중 3,000~4,000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호왕 박사는 1959년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뇌염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던 중 1960년대 중반 일본에서 일본뇌염 백신이 개발되면서 환자수는 급격히 줄었다.

일본뇌염이 극복되면서 이호왕 박사는 5년 간 연구했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연구과제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유행성출혈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군인에게서만 발견되던 병이 민간인에게도 발견되기 시작해 그 심각성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이미 유행성출혈열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많았고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태였다. 이호왕 박사 역시 연구를 시작하고 처음 5년 간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 ‘형광항체법’을 도입해 연구하면서 회복기 환자에게는 급성환자에게 나타나지 않는 항체들이 대량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기간이 길어지며 위기도 찾아왔다. 이호왕 박사 연구팀은 연구를 위해 등줄쥐 3,000여 마리를 잡아 일일이 조사하며 특이한 항원을 찾아내는 작업을 했는데, 연구원 중 한 명이 동두천 송내리에 쥐를 잡으러 갔다가 유행성출혈열에 걸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2년여 간 병원체를 찾다가 우연히 쥐의 폐에서 특수한 항원을 발견했다.

드디어 1976년, 이호왕 박사는 유행성출혈열 병원체를 발견했다. 한탄강 주변에서 서식하는 등줄쥐의 폐조직에서 바이러스를 발견했기 때문에 ‘한탄바이러스(Hantaanvirus)’라는 이름을 붙였다. 등줄쥐는 우리나라 쥐의 90%를 차지하는 종으로 병원균을 옮기는 역할을 한다.

이호왕 박사는 이렇게 발견한 바이러스로 진단법을 만들고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서울에서 한탄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 때 야외에서 연구하던 연구원과 실험실에서 바이러스를 분리하고 조직배양을 하던 연구원 8명이 유행성출혈열에 걸렸다. 이에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안전한 연구 환경을 제공해 주는 문제가 급선무로 떠올랐다. 이호왕 박사는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백신을 개발해야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

1981년부터 한탄바이러스 예방백신을 만드는 연구에 몰두한 그는 1989년, 비로소 백신 만들기에 성공했다. 이 예방백신은 임상실험을 거친 후 1991년부터 ‘한타박스(Hantavax)’라는 이름으로 시판됐다. 그 결과 최근 한국에서의 출혈열 환자 수는 2,000명에서 500명으로 감소했다.

한편 이호왕 박사는 연구에만 소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한국 정부로부터 유행성출혈열 연구비가 전혀 지원되지 않자,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미국국립보건원(NIH)에 연구 계획서를 제출해야 했다. NIH는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곳. 연구계획서는 영어로 체계적으로 써야 했고 연구비를 지원 받으면 일 년에 한두 번 보고서도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호왕 박사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행성출혈열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그 후 30여 년 동안 유행성출혈열 연구비는 NIH에서 지원받았는데, 그간 제출한 연구계획서와 보고서만 해도 40여 편에 이른다.

이호왕 박사는 한 인터뷰에서 “내 유전자는 실패를 해도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유전자인 것 같다. 내가 연구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유전자를 갖고 있어 계속 연구를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이호왕 박사처럼 병원체를 발견하고, 그 진단법과 더불어 예방백신까지 개발한 연구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랜 연구기간 동안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은 그의 열정이 결국 많은 사람들을 무서운 전염병으로부터 구해낸 것이다.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의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이호왕 박사에게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글 : 유기현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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