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선감의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0
이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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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에 이어 세번째로 읽는 문학동네 한국 고전 문학 전집이다. 제목의 ‘창선彰善’은 다른 사람의 착한 행실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뜻이니, 소설의 제목 ‘창선감의록’은 ‘사람의 착한 행실을 세상에 알리고 의로운 일에 감동받는 이야기’라는 의미라 한다. 우리나라 고전 소설의 주제가 거의 '권선징악'인 것을 생각하면 조금 더 강조한다 한들 유별나 보이진 않는다. 작품은 명나라 가정제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소설이다. 작품이 쓰여진 시기와 정확한 저자는 알수 없지만 대략 17세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관계도다. 화씨 집안의 아들 화진과 윤씨 집안의 딸 옥화가 정혼을 하게 되고, 간신배 엄숭의 박해로 화를 입은 남씨 집안의 딸 남채봉이 윤씨 집안의 양녀로 들어가서 화진에게 동시에 시집을 간다. 옥화의 쌍동이 남동생 윤여옥은 진채경, 백씨, 엄월화까지 세 여인을 아내로 맞는다. 관계도에서도 보이듯이 일부다처제가 일반화되어 있다. 주인공 화진이 의붓어미와 형에게 박해를 받았던 것도 아비가 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덕분이었다. 대놓고 '효'를 지극 강조하는 작품인지라 그런 어미도 어찌나 효성으로 돌보는지 현대를 사는 독자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화진의 아비 화욱이 살아있을 적에 큰 아들 화춘을 나무라는 장면을 보면 어느 아들이 비뚫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아우를 본받아 화씨 집안이 네 손에서 엎어지지 않도록 해라!"라니, 내가 화춘이어도 서럽고 분할 것 같다. 화춘과 그 어미 심씨 부인이 잘한 일은 없지만 화근은 아비가 이미 심고 갔다고 생각한다.  

 

위 사진은 작품이 진행되는 공간적 배경이다. 숫자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의 이동 경로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서 도망가는 이, 귀양을 가는 이, 혹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입신양명하는 공간들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의 이동 경로를 명나라 당대의 역로도와도 흡사하게 설정해서 사실성을 높였다. 때로는 지리지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말이다. 확실히 중국 땅이 넓기는 넓다. 과거 급제자도 336인이라고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 전시까지 올라가는 숫자가 33인인 것을 생각하면 10배의 규모다. 땅과 인구의 규모로 따진다면 그 이상 뽑아도 할 말은 없을 것 같지만. 

수백 년 지난 작품인지라 이야기 자체가 옛스러울 수밖에 없다. '충'과 '효'를 강조하고 '권선징악'의 뚜렷한 구분 등은 지극히 평이한 구조지만 그래도 캐릭터들은 제법 개성을 갖고 있다. 주인공 화진은 그야말로 교과서적 사내여서 매력이 덜했지만, 윤여옥은 보다 장난스럽고 입체적인 느낌을 주었다. 화진에게 동시에 시집온 남채봉은 손 윗 동서(를 가장한 화춘의 첩)에게도 당당히 할 말은 하는 여자였다. 집안이 화를 입자 윤여옥에게 시집 갈 수 없다고 판단한 진채경이 윤여옥에게 꼭 어울릴 법한 규수를 직접 정해서 혼사의 상대로 꾸미는 장면도 이색적이었다. 당사자라면 황당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어쨌든 무척 주체적으로 등장한다.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것 중 하나가 '용모'에 관한 것이다.  

"한림의 옥 같은 용모를 보니 천하의 군자였소. 사내대장부가 되어 이런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소?" -135쪽 

"선비님의 얼굴을 보니 전혀 그런 죄를 지을 분이 아닌데, 어이 그런 심한 말씀을 하십니까?"-167쪽 

이런 식의 기술은 작품 내내 등장한다. 주인공 화진이 누명을 쓰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황제를 설득할 때, 혹은 제시된 내용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말하는 근거는 화진의 용모였다. 단지 '인상'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됨됨이였다. 고전 작품의 주인공 '영웅'에게 으레 갖추어진 풍모가 여기서도 비켜가질 않는다.  

그런데 또 재밌게도 의외성을 보여줄 때가 있다. 주인공이 사실은 신선계의 인물이었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기억을 도울 약을 내미는 어느 노인에게 화진이 마다할 때의 모습이다.  

"소생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헛되이 천상의 일을 안다고 해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쓸데없이 마음만 어지럽힐 것입니다. 또한 설령 이 약을 먹고 신선이 된다고 해도 소생에게는 홀어머니와 형이 계십니다. 제가 어떻게 어머니와 형을 버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183쪽 

호기심에라도 천상의 일을 알고 싶겠건만 기꺼이 마다하는 마음이라니, 게다가 그 이유가 자신을 모질게 핍박한 의붓어미와 형 때문이라니, 이 사람 참말로 대인배인 것만은 확실하다. 잘났지만 잘난체하지 않는 모범 주인공이다. 또 나중에 개과천선한 계모 심부인이 아들의 양자로 들인 아이를 친손자가 생긴 뒤로도 집안의 장자로 삼은 것은 박수를 쳐주고 싶다. 뿐아니라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내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준 노비를 신분 해방시켜 시집을 보내주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반면 한 남자를 두 명의 의자매가 함께 남편으로 맞고, 공주와 시녀가 또 한남자의 부인과 첩이 되는 것 등은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참 불편했다. 뭐 당사자들이 의좋게 살고 있으니 어쩌겠냐만은, 화진의 지나친 효성으로 범법자를 두둔하는 것 등은 눈을 찌푸리게 했다.  

작품에는 실존인물도 꽤 등장하다. 명대의 대표적인 간신배 엄숭도 실존인물이고, 그의 아들도 실존인물이다. 화지을 키워주느라 명장군 척계광을 부수적인 인물로 전락시킨 건 다소 기분이 나빴지만 애교로 넘어가주자. 원말 명초의 장수 유통해가 등장하는데, 그 아버지 유정옥의 이름을 보는 순간 김혜린 작가의 '비천무'가 떠올랐다. 주인공 유진하의 아버지 유장옥과 이름이 너무 흡사하고 시대고 겹치니, 혹시 작가님이 작품 구상할 때 이름을 빌려온 것은 아닐까 혼자 상상해 보았다.  

서술 중간중간에 '가정 42년 정월에 말하노라'와 같이 연대를 짐작할 수 있는 서술이 작품에 어떤 현실감을 준다 하면, 등장 인물이 도술을 부리고 요술을 펼치는 장면 등은 명백한 허구성을 부여한다. 이런 모든 대목들이 당대의 독자들을 열광시키는 하나의 장치가 되었을 것이다. 확인된 필사본만 해도 260여 종이라고 하니 얼마만큼의 베스트셀러였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인쇄본도 아닌 필사본으로 그렇게 다양한 버전이 있었으니 긴밤을 지새워 작품을 읽고 베끼던 독자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제목도 다양한 버전으로 남아 있꼬, 이본에 따라 내용도 상당수 달라진다. 한글본과 한문본 모두 전하는데, 한문본에서의 화춘은 악하기보다 어리석고 소심한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한다. 맨 앞에서 인용한 구절처럼 엄한 아버지 밑에서 주눅이 들고, 잘난 동생 덕에 자존감도 낮았다면 그의 캐릭터가 더 쉽게 이해가 가게 된다. 더불어 그의 급작스런 개과천선도.  

작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도 느껴지고 명나라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관점도 읽혀진다. 요즘처럼 자극적이고 재미나고 흥미로운 것들이 쏟아지는 세상에서는 쉽게 눈길을 주지 않게 되는 고전 문학이지만, 그 안에서 찾아낼 수 있는 매력도 만만치 않다. 깊어가는 가을 날에 고전의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ps. 204쪽에 나오는 '함매'를 사전 검색해 보니 한자가 다르게 나온다.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다. 둘 다 '재갈'의 의미니 같이 쓰이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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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4 18: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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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4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