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지식을 ‘정보’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해하고 외우고 꺼내 쓰고, 그것이 지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한번 생각해보자. 정말 지식이 정보일 뿐인지. 만약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지식을 알게 됐다고 치자. 그럼 우리는 그 정보를 이해하고 외우고 꺼내서 쓰는데 그칠까?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당장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칠 것이 뻔하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지구 멸망이라는 단순한 정보지만, 그로 인해 우리 모두가 내일 죽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처럼 ‘깨달음’도 지식의 일부분이다. <지식채널e>는 이처럼 치환된 지식, 즉 ‘깨달음’의 영역에 있는 지식을 ‘메시지’라고 표현한다.
-31쪽
<지식채널e>의 정치적 입장은 ‘보수’에 가깝다. <지식채널e>가 말하는 기본적인 메시지가 ‘착하게 살자’는 일종의 ‘보편적인 선’이고, 이것이야말로 보수적 가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67쪽
언론은 권력과 불편한 관계에 있어야만 정상이다. 언론 본연의 기능이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찮고 불편하다고 해서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권력이 못마땅하다고 해서 언론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나서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권력,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하는 언론, 둘 다 불행해진다. 또 그러한 권력과 언론을 둔 나라, 그 나라에 사는 국민 모두 불행해진다. 언론의 자유는 곧 국민의 자유고, 국민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다.
-69쪽
흔히 소외된 이들을 다룰 때 제작진은 그들의 어려운 현실만을 집중적으로 부각한다. 이렇게 하면 상황은 잘 묘사할지 몰라도, 자칫 그들 역시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있다. 즉 사람이 아니라 그저 불쌍한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우리와는 다른’ 혹은 ‘우리보다 못한’ 어떤 존재가 되고 만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겉모습은 사람이지만 사실 사람은 아닌 존재다. 그러나 비록 가난하고 비참하더라도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그걸 잊을 때 인간은 다른 인간을 대상화하게 되며 이는 또 다른 의미의 소외이다.(복지를 단순한 수혜로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더라도 대상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97쪽
누군가 소외당한다는 건 반드시 그들을 소외시키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소외당한 이들의 고통만을 보여주고 끝나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일부분만 드러내고, 일부분은 외면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을 소외시키는 누군가, 혹은 그런 소외를 만들어내는 ‘구조적 문제’를 반드시 담아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의할 점이 있다. 지나치게 이 두 가지를 부각하면 시청자들은 자칫 분노에만 그칠 수 있다. 물론 분노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소외된 이들 자체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더구나 분노는 감정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이를 해소하는 데 가장 큰 집중을 하게 된다. ‘감정적 배설’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쓴다는 말이다. 따라서 분노가 감정적 배설로 끝나지 않고 이성적인 ‘문제의식’으로 자리 잡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101쪽
하지만 모든 감정이 다 승화되지는 않는다. 일부 분노는 승화되지도 못하고 배설되지도 못한 채로 내면에 남는데 그건 일종의 ‘무기력함’일 것이다. 아무리 문제의식을 가져봤자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 않는 데서 느끼는 절망 말이다. <지식채널e>를 보고 느끼는 ‘먹먹함’이라는 감정도 바로 이게 아닐까. 그러나 이 ‘무기력함’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느낌은 다름 아닌 소외된 이들이 체험하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시청자는 소외된 이들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나마 그 입장에서 그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무기력함을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체험할 수 있다. 소외 문제에 있어서도 백 마디 말보다는 한 번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나은 법이고, 이는 문제의식이나 비판의식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핵심적이다.
-102쪽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살 만한 이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 가난한 자들의 삶을 알기 어렵게 됐다.(사실 여기에는 언론의 책임이 더 크다.) 어려운 이들이 경제적으로 소외된다면, 먹고살 만한 이들도 세상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소외를 겪는 것이다.
-135쪽
그 이름이 무엇이든 중요한 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마음이다. 바로 그러한 마음을 나는 ‘선한 욕망’이라고 부른다. 흔히 ‘욕망’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욕망 그 자체에 옳고 그름이 있다기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욕망하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당연히 ‘선함’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욕망이다. 보통 사회 비판적인 매체들은 선한 욕망을 격려하기보다는 악한 욕망을 꾸짖는 경향이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네거티브’하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사안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꼭 잘못된 점을 지적해야 한다. 다만 네거티브하기만 할 경우 자칫 선한 욕망을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144쪽
또한 선한 욕망은 일종의 ‘대안’을 뜻한다.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말에 100% 공감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해야 할 무엇을 알려주지는 못한다. 아무리 네거티브해도 반드시 ‘포지티브’한 것을 포함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비판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비판적 시각에는 ‘악한’ 욕망에 대한 꾸짖음과 ‘선한’ 욕망에 대한 격려가 모두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선한 욕망이 훨씬 더 중요하다.
-145쪽
악을 없애는 것이 그 자체로 선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지만, 선을 실현하면 그 안에 있는 악은 자동적으로 없어지는 것과 같다.
-146쪽
꾸짖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제작진에겐 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 하나는 아무리 예민한 사회 이슈라도, 속된 말로 ‘까야만 한다’는 강박이 없다 보니 예민하지 않게 다룰 수 있다. (...) 꾸짖지 않아서 좋은 또 한 가지는 제작진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꾸짖는다는 건 은연중에 꾸짖는 내가 우위에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비판’의 목적이 제작진이 우위에 있다는 걸 자랑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비판에 몰입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비판당하는 대상보다 비판하는 자신이 좀 더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147쪽
케네디의 말처럼 신화는 거짓과 다르다. 굳이 표현하자면 신화는 왜곡이나 과장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가 완전한 거짓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통념’이다. 통념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받아들이면 매우 ‘편하다’는 점이다. 바면 ‘진실’은 대개 통념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 흔히 ‘불편한 진실’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 이유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관, 즉 신화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거짓말만 아니라면 진실보다는 신화를 선택한다.
-170쪽
대부분의 위인들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인생 전체가 전기에 담기는데, 이상하게 헬렌 켈러의 경우엔 20세 전까지만 담겨 있다는 점이다. 어째서 그런 걸까? 헬렌 켈러는 20세 이후 진보적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즉 그녀는 당시 미국의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날선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반체제 인사’였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가치에 일치한 20세까지의 이야기만 남고 20세 이후의 삶은 전기에 기록되지 못한다. ‘일부의 사실’이 마치 ‘전부의 사실’인 것처럼 기억되는 것이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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