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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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로만 상상했던 '애도하는 사람'은 좀 더 고전적인 분위기였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를 상상했고, 표지 속의 저런 옷을 입은 주인공을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애도한다'는 의미의 이름을 아들에게 주었던 영조를 생각했다. 그때의 '애도'는 이 책의 '애도'와 사전적 의미가 같음에도 의미가 너무 달랐지만.  

애도하는 사람. 이것은 주인공 시즈토에게 사람들이 붙이 별명이다. 그는 어느 날부터 죽은 사람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했다. 라디오나 신문 등을 통해서, 혹은 길을 가다가도 꽃이 놓여있는 장소를 발견하면 곧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서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죽은 사람이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세 가지였다. 죽은 이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지, 또 누구를 사랑했는지... 누가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지... 그의 애도 자세는 이랬다.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 손은 머리 위로 올려 공중에 떠다니는 뭔가를 잡는 것처럼 끌어모으고 왼손은 대지의 숨결을 퍼올리기라도 하듯 땅에서부터 끌어올려 두 손을 가슴께에서 포갠다. 그리고 그가 알아낸, 혹은 짐작하는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망자를 향해 애도를 표한다.

이 독특한 사람을 이 책은 세 사람의 화자를 통해 설명한다. 첫번째 인물은 주간지 기자인 마키노 고타로. 그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들로 지면을 채우며 위악을 떨며 살았던 인물인 그가 애도하는 사람-시즈토와 마주쳤다. 진심으로 '애도'를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을 인정할 수 없던 그는 시즈토의 뒤를 밟으며 그의 진의를 파헤치려 애썼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변화되어가는 자신을 느끼며 당황한다.  

두번째 인물은 시즈토의 엄마인 사카쓰키 준코다. 그녀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입원 치료에 더 이상 기댈 수가 없어서 재택 케어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녀는 시즈토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인물로서 그가 왜 '애도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키를 쥔 사람이었다. 정작 그 자신은 아들의 속 마음을 제대로 모른다고 판단했지만, 그녀가 느낀 그대로가 곧 시즈토가 애도하는 사람이 된 까닭이었다.  

그리고 세번째 인물은 남편을 살해한 죄로 징역을 살고 막 출소한 여인 나기 유키요다. 그녀는 남편을 살해했던 그 장소에서 남편을 애도하는 시즈토와 마주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혼란과 절망에 사로잡힌 채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유키요는 시즈토의 뒤를 따르면서 남편의 죽음과 자신의 생의 의미를 찾아내 보려고 애쓴다.  

가급적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신경쓰면서 애도 여행을 진행하는 시즈토. 때로 그는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되어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하고 유족들의 경계를 사며 분노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애도 행위를 위선으로 보는 이도 많았고, 주제 넘는다 판단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오히려 유족의 상처를 더 헤집는 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의 애도에 감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세상에 왔다가 불행히 떠났다는 것에 서러운 눈물을 짓는 부모님, 비극적인 끝을 맞았지만 사실은 사연 많은 삶을 살았던 이들이라며 추억하기를 원하는 친구까지... 시즈토를 경멸하는 눈동자만큼이나 그에게서 위안을 얻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과연 어떨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 본다. 쉽지 않은 대답이다.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죽음에 대해선 그의 애도에 고마움을 느낄 테지만, 만약 내가 분노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인물의 죽음이라면, 더군다나 그게 피해 당사자라면, 그런 사람도 똑같이 애도받는 것에 대해선 혼란을 느낄 것 같다. 그에게도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사랑하고, 또 고마워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상상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건 사형제를 폐지에 대한 감정과 비슷한 결론이다. 혼란스러울 독자를 대신해서 시즈토의 입을 빌려 작가는 말한다.  

"살인사건이나 음주운전으로 일어난 교통사고를 접할 때는 감정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노와 원통함을 앞세우다보면 기억에 남는 것은 고인이 아닌, 사건이나 사고 혹은 범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죽은 아이의 이름보다 그 아이를 죽인 범인의 이름이 먼저 뇌리에 떠오르는 식으로요. 죽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본질'이란 단어가 마음에 남는다. 우리가 인간인지라, 더군다나 죽은 사람과 깊은 연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의 마지막 모습에 집착을 하기 마련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생각하고 떠올리는 게 더 올바르단 생각을 하게 된다. 내게 있어선 아빠가 그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고, 젊은 날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심지어 오늘 떠나 버린...ㅜ.ㅜ-연예인들도 그렇다. 생전의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 그렇게 애도하는 일. 그것이 남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인연의 끈이 아닐까.  

소설은 내가 짐작했던 것과 달리 덜 '영적'이었다. 어쩌면 나는 좀 더 신비스런 무언가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즈토의 애도는 분명 흔하지도 않을 뿐더러 평범하지도 않지만, 그가 해내는 애도는 분명 인간의 것이었다. 비록 제3자가 보기엔 충분히 구도자의 삶 같았지만 그는 분명 감정과 감각을 가진 인간이기도 했다. 좀처럼 감정을 보이지 않고 늘 억제해오던 그가 자신을 드러내고 그 마음 속을 꺼내 놓을 때는 그랬기에 더더욱 인간적으로 보였던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준코와 그녀의 남편, 곧 시즈토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죽은 오빠의 생명을 대신 살고 있다고 느꼈던 준코. 그리고 어린 나이에 공습으로 죽어버린 형의 그림자를 안고 살던 다카히코. 같은 아픔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를 위로하며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그 죽음의 그림자는 이제 아들을 따라다니며 그를 유랑하게 만들었고, 열심히 살았지만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던 준코는 이제 스러져가는 삶의 끄트머리에 닿아 있고, 그녀의 딸은 새 생명을 잉태했다. 그렇게 마치 윤회하고 있는 느낌으로 생명과 죽음을 함께 얘기한다.  

시즈토의 애도를 경멸하는 사람은 그의 애도를 하나의 해프닝으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의 애도에 진심으로 고마워했던 사람은 오래오래 그 고마움을 간직할 것이다. 세상에서 사랑받을 수 없다고 여기는 가여운 영혼도, 누군가 자신을 위해서 진심으로 애도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의 마지막은 분명 덜 외로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분명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만약 시즈토와 같은 사람에게 나의 응원 한 마디를 보탤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애도를 계속해 달라고. 세상에서 가장 위로받고 싶은 영혼들이 그 애도 속에서 쉴 수 있도록.
그러나, 어디까지나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해달라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ps. 그런데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말줄임 표에는 점 여섯 개 뒤에 마침표가 없다. 옥의 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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