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분명히 인간이 일으키는 것이나, 이상하게도 마치 어떤 자연의 필연성을 갖고 있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해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렇게 닥친 전쟁은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간다. 인간은 인간을 죽일 수 있을 뿐, 되살릴 능력은 불행히도 그의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죽어간 인간의 영혼을 받는 것 역시 그의 일이 아니다. 그 압도적인 무력감 앞에서 인간은 당연히 종교적이 될 수밖에…….
-5쪽
아직도 우리는 ‘정의로운 전쟁’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전쟁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믿는 것일까? 역시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직 평화주의자가 아닌지도 모른다. 선뜻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만큼,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이다.
-7쪽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현실을 왜곡하는 형태가 아니라, 아예 현실 자체를 사라지게 하고, 그것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전쟁은 사라졌다. 조종석이 스크린 위에서. 핵폭발은 사라졌다. 사이버 공간 속으로.
그렇다고 정말로 전쟁과 핵폭탄이 사라진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스크린으로 전쟁을 대신할 수 없고, 시뮬레이션으로 핵폭탄을 대체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의식 ‘안’에서 전쟁과 핵폭발의 가공함을 지울 수는 있어도, 그것이 우리 의식 ‘밖’의 참혹한 현실까지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참혹함이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그 현실이 우리의 의식에 현실로 등장하는 것을 제지당한다면? 어차피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63쪽
장인과 처남에게 "누가 저 자살 공격을 계획했느냐"고 묻자, 매우 당혹스러워한다. 이제까지 그런 질문은 한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물음이 없어야 비로소 저들은 조국을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 호국의 영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을 덮어두는 데에서 성립한다. 도대체 저 아이들을 무의미한 자살공격에 몰아넣은 사람은 누구일까? 아직까지도 나는 이 미친 작전을 기안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 일본인들도 모를 것이다. 알 필요도 없고, 별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알아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74쪽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호국영령’이라는 말도 실은 일본 군국주의 문화의 잔재다. 일본인은 예로부터 다신교를 신봉했고, 때문에 일본에는 약 900만 종의 신이 존재한다고 한다. 어느 분야에서든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은 곧 ‘신’으로 추앙되는 전통 때문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신이란 ‘인간 존재의 자기 완성’이라는 존재미학의 목표를 의미한다. 물론 이 존재미학은 정치에 오용되어 곧바로 군사문화로 옮겨질 수 있었다. 실제로 태평양전쟁에 나선 일본 병사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으면 신이 되어 야스쿠니 신사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한다.
-77쪽
이것이 호국영령의 개념이다. 이 개념 속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정치적 요구는 종교적 숭고함의 외피를 입는다. 사실 어떤 것을 위해 스스로 제 목숨을 던지는 자살공격은 더 이상 정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 현상, 더 정확히 말하면 종교 차원으로까지 올라간 극단적인 정치의식의 발로다. 정치는 현세만을 약속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목숨을 버리라고 명령하는 정치적 요구는, 그 명령을 따르는 이들의 희생을 내세라는 종교적 약속으로 보상해야 한다. 그래서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은 죽어서 ‘신’이 되었다. 머나먼 태평양에서 호국영령이 되어 돌아와 일본인의 가슴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78쪽
자살공격은 전세가 불리한 쪽에서 사용하는 전술로, 그 자체가 그들의 좌절과 절망을 반영한다. 그것은 압도하게 우세한 적 앞에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수단이자 절망에 빠진 자들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여기서 정치의식은 극단화하여 종교와 하나가 된다. 그것은 정상의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군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종교의 힘을 빌린다. 그 가망 없는 몸짓으로 기적의 창조를 바라는 것도 실은 종교적 심성에 가깝다. 전사자들은 순교자가 된다. 이 점에 관한 한 가미카제와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서로 다르지 않다. 나아가 자유주의가 발달한 서구 사회가 아니라, 강한 집단주의와 공동체 의식을 가진 사회를 배경으로 한 전술이라는 점에서도 둘은 일치한다.
-82쪽
실러의 말대로 "신들이 더 인간다웠을 때, 그때 인간은 더 신적이었다." 신들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에서는 인간이 제 존재를 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이런 사회의 문화는 자연스레 유미적 성격을 띠게 된다. 신화 속의 신들은 선악의 도덕에 구애받지 않기에, 신이 되고 싶은 인간들은 선(善)이 아니라 ‘우수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한계를 초극하여 신이 되려는 자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이 아니라 초인의 ‘미학’이다. 가미카제가 주는 감동은 윤리적 감동이 아니라 예술의 감동. 그것은 ‘신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라는 종교적 코드가 아니라, ‘인간의 자아 초극’이라는 존재미학에서 흘러나온다.
-83쪽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다르다. 가미카제가 ‘영웅’이라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순교자’다. 가미카제가 희생으로 제 존재를 ‘완성’하려 했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존재로 제 존재를 ‘포기’하려 한다. 가미카제가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초인’의 경지로 자신을 끌어올린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한갓 신의 뜻을 실현하는 ‘소도구’로 자신을 끌어내린다. 가미카제가 극단의 ‘우월함’이라는 미학을 실천한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마찬가지의 극단성을 가지고 ‘겸손함’의 도덕을 실현한다. 가미카제가 인간 세계에서 ‘불멸의 명성’을 얻어 영원성에 도달한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자살의 대가로 신으로부터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과 낙원을 약속받는다.
-83쪽
과거에 인간의 기술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이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는 인간의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기술이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숭고한 것은 기술이다. ‘충격과 공포’ 작전에서 우리는 숭고함의 경지에 도달한 기술의 파괴력을 본다. 이 압도한 파괴력에 대항할 기술이 없는 사회의 성원들은 이 거대한 제2의 자연에 도대체 무엇으로 맞서야 할까?
-85쪽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래 미군은 ‘충격과 공포’ 효과를 위해 원자폭탄을 무인도에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한 과학자가 "효과를 보려면 폭탄을 사람이 사는 곳에 덜어뜨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대로 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 기대하던 효과를 거두었다. 그토록 격렬히 저항하던 일본 군부도 단 두 개의 폭탄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원폭을 민간인 거주지역에 떨어뜨려야 한다고 했던 오펜하이머는 순수 기술 면에서는 현명했다. 충격과 공포 작전이 이라크에서 애초에 노렸던 효과를 보지 못한 이유는, 그 폭격이 민간인을 겨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격과 공포 효과는 일정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87쪽
반면 미․영 동맹군은 또 다른 종류의 충격과 공포 효과를 체험해야 했다. 이라크 군의 ‘자살공격’이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자살공격은 개인주의 문화를 배경으로 자라난 미국과 영국군 병사들에게는 아마도 상상할 수 있는 한계 밖에 있는 현상이었으리라. 대의를 위해서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이슬람의 윤리, 그 역시 인간의 상상 규모를 초월한 것이고, 그 앞에서 앵글로색슨 병사들은 아마도 또 다른 형태의 숭고한 ‘충격과 공포’의 감정을 체험했을 것이다.
-87쪽
가공할 파괴력을 무기로 한 가학의 숭고함과 초인간적 희생을 무기로 한 피학의 숭고함. 한쪽은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해 숭고한 효과를 연출하고, 다른 쪽은 봉건적이고 종교적인 심성을 동원해 또 다른 숭고한 효과를 연출한다. 한쪽에는 감정이 메마른 차가운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괴물이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뜨거운 파토스로 가득 찬 종교적 비합리성이라는 괴물이 서 있다. 이 두 괴물이 서로 맞붙어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는 숭고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라크 전선에서는 이렇게 두 개의 숭고함이 부딪치고 있었다.
-88쪽
숭고함의 미학과 윤리는 정치적으로 겁탈당하여 전쟁의 원리가 되었다. 침략자와 독재자는 인간의 척도를 넘어선 이 두 개의 숭고함으로 서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려 했다. 하지만 이 숭고한 놀이의 대가를 몸으로 치러야 했던 사람들은? 그들은 결코 숭고하지 않은 민간인들이었다. 침략자의 파괴력을 방어할 고도의 기술도, 순교하라는 독재자의 요구에 부응할 광적인 신앙심도 없는 사람들. 그저 평균 수준의 합리성과 평균 정도의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
-89쪽
오늘날 독재자 후세인을 만든 것은 미국이며, 그 미국이 후세인의 생화학무기가 이란을 향할 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그 독가스가 정작 쿠르드족을 학살할 때는 과감하게 묵인해 주었다는 것을, 그(복거일)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 저렇게 징그럽게 넉살을 부리는 걸까? 이 더러운 전쟁의 진짜 목표가 이라크의 유전을 접수하고, 친미 괴뢰정권을 세워 이란과 시리아를 견제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그는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괜히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만약 전자라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후자라면 양심이 불량한 것이리라.
-94쪽
언제부터 미국이 이라크 인민의 자유에 관심을 가졌던가? 전세계 모든 독재정권을 옹호한 게 미국 아니던가? 도대체 전세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은 독재정권이 있었던가? 후세인이라는 독재자를 서아시아의 실력자로 키운 것이 누구였던가? 미국이다. 어느 잡지의 사진 속에서 "이라크의 자유"를 외치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독재자 사담 후세인과 다정하게 악수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라크인들이 자유로웠던가? 게다가 미제 폭탄이 언제 ‘정권과 인민을 명확하게 구분’하던가? 정밀하다는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이 어디 정권 수뇌부던가? 무참히 학살된 1,300명의 희생자. 5천 명의 부상자는 모두 그들이 해방시킨다던 ‘인민’들이었다.
-98쪽
캐나다와 멕시코는 아예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대미 의존도가 우리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나라는 파병은커녕, 미국의 전쟁에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주권 국가로서 타국의 부당한 요구에 제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거기서 비롯하는 외교 갈등은 그 후 다시 해결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당연한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거기에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정신병 증세가 있다.
-111쪽
한미동맹교. 그것은 우리 사회의 낡은 우상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 우상은 흠모의 대상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청와대에서 국회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의 지도층을 온동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우습게도 워싱턴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벨 소리였다. 숭배는 공포의 소산이다. 누가 미국을 신으로 만들었는가? 우리의 두려움이다.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북한 공산주의를 두려워하고, 다른 이들은 자유주의 미국의 힘을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에게 미국은 우리를 구할 자비의 신이며, 다른 이들에게 미국은 배교자를 징벌하는 복수의 신이다. 다분히 과장된 이 두 가지 공포가 합쳐져 미국이라는 나라를 신성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
-112쪽
그리스도는 목숨 하나로 인류 전체의 죄를 대신 씻어주고, 그렇게 죽은 다음에는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이라크인들은 예수보다 운이 나쁜 편이다. 2천 개의 목숨을 합하여 기껏 한 사람의 죄를 씻어주고, 그렇게 죽은 다음에는 사흘이 넘도록 아직 부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제사장 부시는 시퍼런 칼로 제단 위에서 양들의 멱을 딴다. 몇 마리의 목을 땄을까? 이 귀찮은 질문에 사제들은 대답한다. "희생양의 수를 집계할 계획이 없다." 양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이 광경에 경악하는 우리에게 파월 사제가 태연히 말한다. 후세인의 죄를 씻기에 저 정도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양들의 침묵은 기가 막혀서일까?
-131쪽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이 하루 식량으로 배급받은 것이 건빵 크기의 조그만 빵조각 하나였다. 그것으로 보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을 테지만, 그 예문에는 조국을 지킨 인민들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강조하느라 바빠 희생자의 수는 미처 언급할 틈이 없었다. 이렇게 양측이 조그만 도시를 놓고 피차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집요하게 전투를 벌인 것. 그곳이 남부의 유전과 소련의 공업지대를 연결하는 전략 요충지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도시에 우연히 ‘스탈린’ 동지의 이름이 붙어 있었던 것, 그것이 그 전투를 더욱 더 집요하고 치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도자의 이름이 붙은 도시의 함락은 전략의 의미만이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국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6개월에 걸친 포위작전으로 도시는 초토화되고, 수십만의 시민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138쪽
후세인의 서재에 들어가본 어느 기자는 그의 책장에는 오로지 스탈린에 관한 책만 꽂혀 있었다고 전한다. 스탈린이 아마도 그의 인생의 모범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의 통치는 실제로 스탈린의 것과 비슷했고, 그러다가 스탈린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러시아 인민의 어깨에서 공산주의의 멍에를 벗겨주러 왔다는 히틀러의 군대에 포위됐고, 바그다드는 사담에게 억눌린 이라크 민중에게 자유를 주러 왔다는 부시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침공하는 부시와 침공당하는 후세인, 어느 편이 옳은가? 침략하는 히틀러와 침략당하는 스탈린, 정의는 어느 편에 있을까? 침략당한 독재자와 침략하는 제국주의자,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이라크 민중의 해방자는 누구일까?
-140쪽
후세인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해방투쟁을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를 위해 바그다드 전체가 옥쇄할 필요는 없다. 그가 가진 것은 오로지 무력뿐이나, 무력은 더 큰 무력 앞에서 무력한 법. 하지만 오로지 무력만 갖고 있기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 무력으로써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하고, 그것을 통해 이권을 챙기려 할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과 그들이 추구하는 이권 사이의 괴리, 이 틈을 영원히 무력으로 메울 수는 없는 것이다.
-146쪽
미군은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 안에 포위됐다. 군사적 싸움의 시기는 지나고, 이제 그들 앞에는 지루한 정치적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군사력으로는 압도한 우위를 자랑해도, 사담이 사라진 이상 그들의 정치적 우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제부터 그들이 해야 할 싸움은 불행히도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격의 것이다. 그들을 환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은 깨끗이 패배하는 것, 즉 이라크의 미래를 이라크인들의 손에 맡기고 조용히 그 땅을 떠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게다. 때문에 그 정치적 열세를 군사적 우위로 상쇄하면서 그들은 계속 그곳에 머무르려 할 것이다.
-149쪽
근대사회에서 개인의 폭력 행사는 금지된다. 사형(私刑)이나 복수할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 폭력의 권리는 국가에 위임되고, 국가의 폭력 행사는 법의 통제 아래 놓인다. 이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은 사법체계를 통해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된다. 개인의 폭력적 잠재력은 교육과 제도를 통해 최소한으로 억제된다. 단순 무식한 중세의 전사(戰士)는 교양과 매너를 갖춘 신사(紳士)가 된다. 전사를 움직이는 것이 명예라면, 신사를 움직이는 것은 이익이다. 이런 이기적인 신사들이 만든 사회에 사는 낭만적인 전사들은 당연히 권태를 느낄 수밖에 없다. 전사들은 자신의 폭력성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으나, 그 욕망은 사회에 의해 엄격히 통제된다. 이 검열을 피해서 억눌린 폭력의 욕망을 승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160쪽
그 방법이 있다. 즉 국가가 승인하는 폭력을 통해 개인의 공격 본능을 맘껏 발산하는 것이다. 국가가 승인하는 폭력.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 속에서라면 야수 같은 공격성도 범죄의 기질로 비난받지 않는다. 외려 사적으로는 남성다운 아름다움으로, 공적으로는 애국주의와 영웅주의의 미덕으로 칭송받는다. 미시마가 "우익의 남성미" 운운하며 느닷없이 웃통을 드러내고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들고 근육 자랑하던 것을 생각해보라. 미시마와 고바야시가 산업사회의 권태를 말하며, 전쟁을 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게 어디 일본만의 일인가? 우리 정부가 파병을 결정하자, 모 전우회에서 자기들도 덩달아 참전하겠다며 누렇고 뻘건 해프닝을 벌였다. 원시 본능을 승화하고, 억눌린 성 에너지를 방출할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이다.
-161쪽
미국은 이 전쟁에 ‘이라크의 자유’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그들이 이라크에 자유를 주려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알다시피 이번 전쟁의 원인은 이 지역에 걸린 미국의 이해관계다. 오늘날 전쟁은 이렇게 산문적인 원인을 갖는다. 우리나라가 파병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명분 없는 파병의 유일한 명분은 ‘국익’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에게 이보다 더 강한 설득력을 갖는 논증은 없다. ‘이익’이라는 말 앞에서 우리의 인성은 전쟁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이것이 봉건의 야만성을 대신해 들어선 근대의 야만성이다.
-165쪽
적어도 오늘날 전쟁 자체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전쟁은 사악하지만 불가피한 것이라 말한다. 그나마 전쟁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게 된 것이 근대라는 시대의 성취다. 에라스무스 이전에는 전쟁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는 어법 자체가 없었다. 전쟁은 늘 신성한 것이었다. 물론 근대에 들어와서도 우세한 것은 여전히 ‘정당 전쟁론’이었다. 한마디로 전쟁도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한 정당한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조차 ‘불의의 전쟁’과 ‘정의의 전쟁’을 구별하며, 후자를 긍정한다. 사회주의 조국전쟁,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민족해방전쟁, 억압받는 민중의 혁명유격전 등은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이다.
-166쪽
미국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선사한다고 하나, 칸트는 어떤 국가도 타국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나라는 결국 그 나라 인민의 ‘인권’도 침해할 수밖에 없는 것. 이라크에 자유를 주러 간 미군은 지금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하고 있다.
-168쪽
"주적은 제 나라 안에 있다." 베를린의 반전시위에서 본 어느 플래카드에 적힌 구절이다. 옳은 말이다. 평화의 적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제 나라 안에 있다. 각자 제 나라 정부의 전쟁을 막는 것이 세계시민의 의무다.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시민의 태도에 달려 있다. 가령 시민의 대다수가 반대하자 스페인 정부도 결국 파병 계획을 철회해야 했다. 전쟁은 막을 수 있다. 문제는 평화주의 역량을 강화하여, 그것으로 국가가 저지르려는 전쟁에 대한 시민 사회의 내성을 기르는 것뿐이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고? 그렇게 전쟁이 하고 싶은가? 그럼 제발 ‘정치’를 하라. 내가 다니던 베를린 자유대학의 화장실 벽에 누군가 이렇게 써놓았다. "정치는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전쟁의 연장이다."
-171쪽
빌라도는 고대 수사학의 전통에 따라 유대인들이 그에게 뒤집어씌운 죄목을 나열한 후, 이어 피고인 예수에게 변론의 기회를 준다. 이 경우 피고인들은 대개 용서를 빌거나 자신을 변명하느라 혀가 바빠지기 마련. 하지만 예수라는 사내는 달랐다. 그는 빌라도가 제시한 게임의 규칙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변론을 포기하고 아예 생사에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 모든 것을 신이 자신에게 건네준 쓴잔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한마디로 빌라도의 웅변적 수사학이 지극히 인간적이었다면, 예수의 침묵의 수사학은 완벽하게 신적이었던 것이다. 빌라도는 크게 당황한다. 그리하여 그를 가리켜 감탄하여 외치기를,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
-172쪽
사실 우리의 것은 빌라도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이라크인을 넘겨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살해행위에 적극 가담했기 때문이다. 더 나쁜 것은 그 짓을 하고도 빌라도처럼 대야에 손 씻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려 전쟁이 끝나자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직 이라크 복구사업에서 얼마나 많은 이권을 따낼 것인가 하는 얘기뿐.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이익이 떨어지기는 하는 걸까? 남이 흘린 피로 얻어낸 그 이익으로 앞으로 우리 배에 정말 자르르 기름기가 돌까? 예수를 못 박은 후, 그가 달린 십자가 밑에서 로마의 병정들은 그가 입었던 옷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성경의 이야기는 인류 사회에서 늘 벌어지는 어떤 사건들의 상징이자 원형인 모양이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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