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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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편지 글이다. 'D'란 이 글을 쓴 앙드레 고르의 부인 도린을 가리킨다. 이 책을 관심갖게 만들었던 어느 리뷰의 제목 때문이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던'...으로 진행되던 제목. 직접 지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본문 중에 그 대목이 나온다.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통증을 주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니... 

지은이 이력이 놀랍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이자 언론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독일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스위스로 갔고 다시 파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영국인 아내를 만나 2년 뒤 결혼했다. 아내는 고르의 협력자이면서 위로자였고 경제적 후원자이기도 했다. 유능하고 우아하고 검소하기까지 했던 부인. 그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자 사르트르로 하여금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 평가받았던 이 사상가는 모든 공적인 활동을 접고 20여 년간 아내를 간호했다. 그러다가 2007년 9월 22일에 자택에서 아내와 동반자살했다. 이 책은 그가 죽기 1년 전에 아내를 향해 썼던 편지글을 모아 출판한 것이다.(출판은 그들이 살아있을 때 이뤄졌다.) 

존댓말로 진행되는 이 편지는 그들의 첫 만남부터 인생의 황혼에 이르기까지의 긴 여정을 담고 있다. 그들은 거의 60년 동안 삶을 함께 나눴다.  그런 아내에게 바치는 연서는 그 자체로 고품격이었다.

당신은 이제 곧 여든 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자연스러운 문장의 매끄러움은 번역자의 공도 상당 부분 차지할 것이다. 이런 존댓말 어투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고르의 편지 곳곳에서는 아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가득 묻어난다.  

   
 

 직관도 감동도 없다면 지성도 없고 의미도 없음을 당신은 인지과학을 공부하지 않고도 알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은 전달될 수 있지만 증명해 보일 수는 없는, 그러나 당신이 몸소 겪어 얻은 확신의 토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런 판단의 권위-그것을 '윤리'라고 합시다-는 논쟁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반면 이론적 판단의 권위는 논쟁으로 설득시키지 못하면 무너지고 맙니다. "왜 당신은 항상 옳은 거지"라는 내 말에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내 판단이 필요하기보다는, 내게 당신의 판단이 더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죠. – 53쪽

 
   


어려서 이미 어른을 믿지 않는 아이로 성장했던 아내는 상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어루만져 주는 평온함을 지녔다.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했던 그녀가 남편을 생각해서 포기하는 모습은 희생이라는 말보다 사랑이라는 말이 더 어울려 보였다. 

   
 

 당신은 베케트, 사로트, 뷔토르, 칼비노, 파베제를 읽었습니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강의도 들었어요.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해서 필요한 책을 사기도 했지요. 나는 말렸습니다. "나는 당신이 독일어를 한마디라도 배우는 게 싫소. 난 다시는 독일어를 하지 않을 거요." 당신은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의 이런 태도를 이해해주었습니다. – 50쪽

 
   


남편이 논문을 완성하고 여러 권의 책을 완성하는 동안에는 그녀가 그 시간들을 뒷받침해주고 견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내가 불치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할 때는 남편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녀만 바라보며 헌신했다. 이렇게 이상적인 부부가 있을 수 있을까.  

당신 없는 나를 상상하지 못하고, 나 없는 당신을 견뎌내지 못했던 그들이 선택한 것은 결국 동반자살이었다. 여든 둘, 여든 셋에 이른 나이였으니 단명은 아니건만, 그럼에도 스스로 택한 죽음은 분명 안타까움을 동반한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절이 아닌 영원한 동행으로 느껴진다.  

문득 넬의 '멀어지다'란 노래가 떠올랐다. 노래 가사에 보면 어쩌면 우린 사랑이 아닌 집착, 욕심, 운명이 아닌 우연, 영원이 아닌 여기까지인가 보다란 읊조림으로 마무리된다. 씁쓸하고 쓸쓸한 노래다. 그래서 더 오래 남기도 하지만. 

반면 이들의 사랑은 집착이 아닌, 욕심이 아닌, 우연이 아닌, 영원의 사랑인 것이 아닐까. 90쪽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 그러나 편지라고 한다면 무척 길 이 연서의 마지막 사진이 그들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책 표지의 젊었을 적 모습보다 황혼의 이들이 더 빛나고 아름답게 보인다. 서로의 깡마른 어깨에 기댄 우정과 연민과 사랑의 감정의 진하게 전해온다.  

그들의 삶을 대변한 이 한 문장을 오래오래 기억해야겠다.  

There is no wealth but life.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오랜 연인에게 경의의 박수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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