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등학교 때 미술 과제로 시화를 만들어오는 게 있었다. 마음에 드는 시를 하나 고르고,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오는 것. 그림의 주제와 재료, 형식은 모두 자유였다. 당시 내가 고른 시는 에드가 앨런 포의 '애너벨 리'였고, 그림은 만화원고지에 펜촉으로 그리고 스크린 톤을 붙였다. 당시 내 꿈은 만화가였던 터라 곧잘 만화 재료를 이용해서 습작을 하곤 했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림을 그리고 시를 옮겼는데 생각외로 점수는 형편없었다. 스크린톤을 붙인 만화 그림이 너무 튀었거나, 아님 그림이 형편없었거나... 

그 후로 오래도록 애너벨 리를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이 책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라니... 뭔가 엽기적인 것 같기도 하고 반전을 예상케 하는 제목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애너벨 리 시 전문에 나오는 표현이라는 걸 다시 시를 찾아 읽다가 알아버렸다. 오랜 시간 흘렀더니 이렇게 잊혀진다. 애석하게도... 

오에 겐자부로의 책은 처음이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전후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의 작품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다. 그가 쓴 작품들이 내 보관함에서 숨을 쉬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며 집필한 책이다. 22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가 2007년에 마지막 작품이라 예상하며 심혈을 기울인 작품. 이 작품의 특징은 앞머리에서 소설 속 소설가와 아들을 통해서 제시된다. 

   
 

 아직 백 살까지는 시간이 있지.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 (11쪽)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 저명학 작가가 오래도록 소설을 쓰고 있지 못하고 있을 때에, 이미 중년이 된 지적 장애 아들의 질문에 노년이 된 작품 속 주인공이 대답하는 말이다. 설정으로 볼 때 이미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대입시켜 실제와 소설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진행시키는 이야기들은 자주 본다. 이 책은 그 형식성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좀 더 특별한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야기의 첫 시작은 일흔을 넘긴 노년의 작가가 30년 만에 옛 친구를 만나면서 과거에 미완으로 끝났던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원래 한국의 김지하 시인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으나 유신 시절에 투옥되어 계획이 무산되고 작품 속 겐자부로는 그의 석방을 위한 단식투쟁을 하던 장소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맡아달라고 찾아온 영화감독 고모리와 여주인공 사쿠라를 만나게 된다. 실제로 오에 겐자부로는 김지하의 석방을 위해서 애썼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실제 사건과 소설 속 허구가 겹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여기에 또 몇 개의 이야기들이 중복되어 표현된다. 때문에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금세 이야기의 중심축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 책이 250쪽이 되지 않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만만하게 읽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 속 겐자부로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연극을 직접 올린 경험이 있다. 마을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농민봉기 일화를 극으로 올려 지역 주민들에게 큰 반응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쿠라는 원래 시나리오 예정 중이었던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의 배경을 일본으로 옮겨와 겐자부로 어머니와 할머니가 올렸던 연극의 내용으로 다시 각색할 것을 요구했다. 그녀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메이지 유신 직후의 농민봉기 이야기로 시나리를 바꾸기로 합의하는데,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그녀에게는 또 다른 사연과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는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중첩된다. 작가의 평생의 은사인 와타나베 교수의 죽음으로 소설을 쓰지 못하던 그가 사쿠라와 만나면서 다시 작품을 쓸 마음을 먹게 되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연극을 올리면서 가슴에 쌓인 '한'을 풀고, 그 연극을 보았던 주민들도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내는 과정을 겪었다. 가장 큰 상처와 치유의 주인공은 사쿠라였다. 아역스타로 성장한 그녀(그녀가 출연한 영화 제목이 '애너벨 리'다)가 미국인 후원자에게 시집을 가서 그 상속자가 된 채 이 영화의 제작에까지 손을 대며 완성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자신이 알지 못하지만 은연 중 느끼고 있는 과거의 기억과 상처에 대한 치유였다. 

그 상처들과 치유들은 한꺼풀 한꺼풀씩 등장하며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의 켜를 쌓는데, 작게 보면 한 개인의 이야기가 되지만 큰 울타리로 보면 전후 일본이 안고 가지만 좀처럼 드러내지 못하는 상처들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한다. 인물들의 설정에서도 현실과 허구가 겹치기도 하고 반영되기도 하지만 주제 의식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것이 아닌 은근히 내비치는 솜씨가 일품이다. 역시 대가답다는 감탄이 나온다. 

30년 전에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영화의 작업은, 다시 30년 뒤에 다른 형태로 재차 시도된다. 이제는 과거의 상흔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된 노년의 그들이 어깨의 힘 잔뜩 빼고 정말 해야할 말들로 '진짜' 극을 완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쿠라는 '그래봐야 야구, 그래도 야구'라는 말에 빗대어 'It's only movies, but movies it is!'라고 말했다. movie라는 말 대신에 '문학'이라고, 혹은 인생이라고 대입해 보아도 공감하게 된다. 더불어 작가 이름을 집어넣어도 역시 수긍하게 된다. 짧고도 굵은 대가의 작품! 

ps. 여담이지만,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는 표지가 정말 잘 빠진 듯하다. 블랙으로 통일했지만 표지의 질감과 느낌이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해당 작품의 분위기에 잘 드러맞는 듯하다. 표지 때문에 시리즈를 다 갖추고 싶은 욕심이 마구 생긴다. 이러면 안 되는데......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0-03-16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 여고때 에네벨리 열심히 외웠는데...
낭송테이프를 갖고 있는데 백만년 만에 들어봐야겠네요. 지금도 슬플려나~

마노아 2010-03-16 08:09   좋아요 0 | URL
낭송 테이프라니, 완전 로맨틱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침 자습 시간에 두 명씩 조를 짜서 시를 낭송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한 명은 시 준비하고 한 명은 음악 준비하고... 처음엔 뻘쭘해하던 친구들도 나중엔 굉장히 즐겁게 참가했던 기억이 나요. 아, 추억이 방울방울이에요.^^

2010-03-16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4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4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