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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크롬선이 칼이 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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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눈이 왔다. 뽀얗게 내려앉은 작은 알갱이가 고왔다. 바닥을 덮은 하얀 풍경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돌린 시선 끝에 아직 공중을 맴도는 작은 싸라기들이 있었다. 휘날리는 하얀 점에 절로 손이 갔다.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잡으면 어쩐지 소원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환상.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멍하니 손을 움직이던 짠돌씨는 손끝에 닿은 싸라기 조각을 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현실 도피는 여기까지.
이른 눈이 왔다. 짠돌 씨네 집 안에. 동글동글한 스티로폼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린 거실은 눈물 나게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집 꼬라지가 왜 이런지 설명해줄 사~람? 이왕이면 육하원칙 맞춰서 100자 이내로."
정전기 때문에 통통 튀며 굴러 온 스티로폼 알갱이를 발로 쳐내며 짠돌씨는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스티로폼을 마구 뿜어내는 괴물이 집에 쳐들어온 게 아닌 이상 범인은 어차피 뻔하다. 바닥을 덮은 하얀 알갱이들 위에서 괴성을 지르며 뒹굴던 막희를 억지로 붙잡고 머리카락을 애써 털어내던 아내 김씨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막신이가 자유탐구 과제가 필요하대서 같이 스티로폼을 자르다가 이 꼴이 됐어. 좀 큰 알갱이는 막희가 1인용 소파 터뜨렸을 때 튀어 나온 거야. 내일이 토요일이라 다행이지."
“요구사항에 맞춘 깔끔한 답변 고마워 자기야. 왜 터뜨렸는지는 굳이 안 물을게."
“내 잘못이야 아빠. 막희가 스티로폼 알갱이를 너무 좋아하길래 그만 소파 안에 많다고 불어 버렸어…."
“굳이 안 들어도 될 말까지 억지로 해줘서 정말 고맙다 아들아."
발끝을 바닥에 문질러 알갱이를 떼어내려 애를 쓰던 짠돌씨는 결국 양말을 벗어 던졌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옷가지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 하필이면 정전기의 산실인 울 소재였다 -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아들 딸 앞에서 그런 비교육적인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짠돌 씨는 알갱이를 털어낸 양말을 화장실에 던져 넣고 돌아와 아들의 어깨를 툭 쳤다. 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줄을 반쯤 놓은 채 스티로폼 알갱이를 손톱으로 꾹꾹 누르고 있던 막신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유탐구 과제는 아직 못 했지? 일단 그것부터 처리하자."
“아빠…."
“자기야. 칼날이 나갔는지 스티로폼이 잘 안 잘려. 이 꼴 보면 알잖아~. 알갱이 한 두 개 더 늘린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좀…."
“깨끗하게 잘 잘리는 칼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걱정 마. 내가 만들어 줄게."
모처럼 온 활약 기회를 공으로 놓칠 순 없지!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난 짠돌 씨는 다리를 탈탈 털며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장 윗서랍에는 필요한 공구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분명히 필요할 거라고 본인이 우겨 모아놓은 아이스크림 막대들도.
“이게 정말 쓰일 날이 있구나. 난 우리집 신발장이 아이스크림 막대에 눌려 무너지는 줄만 알았지."
“…자기야, 맺힌 한은 나중에 풀고 지금은 실험에 집중하자? 응?"
“그런 의미에서 질문! 아빠, 이 선이 뭐야?"
“알아서 분위기 파악까지 하다니, 장하다 우리 아들! 이건 니크롬선이야. 니켈과 크롬의 합금이고 다리미나 헤어드라이어 안에 들어 있어. 왜 그런지 한 번 맞혀 볼래? 힌트는 지금 아빠가 하는 실험!"
“음…, 열이 잘 난다?"
“오, 정답! 니크롬선 같은 금속 안에는 원자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전자들이 있는데, 금속 양쪽에 전압을 걸어 주면 이 전자가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이게 전류야. 그런데 전기가 흐를 때는 거의 대부분 이 흐름을 방해하는 힘이 작용한단다. 전기저항이라고 하지. 전기저항이 큰 금속일수록 작은 양의 전류로도 많은 열이나 빛을 낼 수 있단다. 니크롬선도 전기저항이 커서 전류가 그대로 흐르지 않고 열이나 빛으로 잘 바뀌어. 단 이번 실험에서는 1.5v 건전지 두 개만 사용했기 때문에 빛은 나지 않아."
“그럼 지금 스티로폼이 잘 잘리는 것도 저항 때문이야?"
“응. 아까 니크롬선이 열을 잘 낸다고 했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건전지가 연결된 니크롬선은 뜨겁게 달궈져 있어. 앗! 자기야, 막희 좀 말려! 아주 뜨겁지는 않지만 손으로 만지면 위험하다고!"
오랜만의 등장에 심취한 탓일까. 어느새 다가와 전지에 연결된 니크롬선을 만지려 드는 막내둥이의 손에 기겁한 채 짠돌씨는 펄쩍 뛰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깨끗하게 잘려 나가는 스티로폼을 보고 있던 김씨도 함께 펄쩍 뛰며 막희를 꼭 안았다. 품에서 버둥대던 막희는 “저거 만지면 손 다쳐서 너 좋아하는 물놀이 못 해"라는 김씨의 말에 헛된 저항을 멈췄다. 짠돌씨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스위치를 내렸다. 스티로폼도 다 잘랐겠다, 더 이상 위험한 짓은 그만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뭐, 어디 불붙을 정도로 아주 위험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열이 나고 있어서 화상을 입거나 살을 베일 가능성은 크니까 독자 여러분도 절대 맨손으로 만지지 마세요~!"
“아빠, 그런데 스티로폼이 왜 잘리는지는 설명 안 해줬잖아."
“아, 미안! 음, 그러니까 스티로폼의 주성분은 발포 플라스틱인데 얘들은 열에 약하거든. 그래서 뜨거운 니크롬선이 지나가면 그 부분이 녹아서 잘려 나가는 거야. 니크롬선이 가늘고 팽팽할수록 깨끗하게 잘린단다. 단 한 자리에 너무 오래 대고 있으면 주변의 스티로폼까지 다 녹아 버리니까, 한 번에 쫙~ 하고 잘라야 해."
“그렇구나~! 설명도 멋지고, 실험도 잘 하고 아빠 최고! 그럼 난 과제하러 갈게!"
“아니 그럴 것까지야~. …가 아니라, 어디 가?! 아빠 혼자 이걸 다 치우라고?!"
가지런히 잘린 스티로폼 조각을 안으며 벌떡 일어난 막신은 방으로 사라졌다. 협박에 입은 다물었지만 여전히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고 있는 막희를 달래느라 아내 김씨도 안방으로 들어간 지 오래다. 거실에 남은 건 정전기 댄스를 추며 어지럽게 널린 하얀 알갱이들과 역할을 다 한 전기칼과 짠돌씨뿐. 대체 이놈의 글쓴이는 내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매 번 나만 골탕 먹이는 거야? 투덜대는 짠돌 씨의 움직임에 따라 바짓단에 들러붙은 스티로폼들만 요리조리 흔들거렸다.
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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