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이 시청률 50%를 향해가며 연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 선덕여왕이 첨성대 건립을 언급하며 백성에게 하늘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첨성대가 정말 별을 관측하는 곳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누가, 언제, 어떻게 기록을 했던 것인지 자세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여대 사학과 정연식 교수는 첨성대가 천문관측대가 아니라 선덕여왕의 상징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과연 첨성대는 별을 보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일까?
우선 첨성대의 모양과 구조는 천문대임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상원하방(上元下方)의 우아한 형상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元地方)설을 상징하고, 첨성대를 만든 365개 안팎의 돌은 1년의 일수를 나타낸다.
27단의 몸통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인 것과 관계가 있고, 꼭대기 우물 정(井)자 모양의 돌을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데 이는 음력 한 달의 날수와 일치한다.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상단 12단과 하단 12단으로 나뉘는데 이는 각각 1년 12달, 합치면 24절기에 대응한다.
고대 문헌기록도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고, ‘서운관지’와 ‘문헌비고’에도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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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에서 어떻게 별을 관측했을까? 사진 제공. 신라역사과학관> |
첨성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학자들도 대부분 천문관측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첨성대 위에 목조건물과 혼천의(渾天儀)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다거나, 첨성대가 개방형 돔(dome) 형태의 관측소라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첨성대 자체가 해시계의 바늘 역할인 규표(gnomon)의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 천문기상학자 와다(和田)는 첨성대를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꼽았다. 그는 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에 ‘경주첨성대 설’을 내놓으며 목조건물과 혼천의 등을 첨성대 위에 설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첨성대를 살펴보면 남쪽 창문 아래턱에 사다리를 걸어놓았을 것 같은 자리가 있다. 학자들은 여기에 사다리를 대고 첨성대 내부로 들어간 뒤에 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관측을 위해 매일 교대로 오르내리는 데 불편한 점이 많고, 그 위에 목조건물을 세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만일 우물 정(井)자 모양의 꼭대기에 널판을 깔고 위에 혼천의 등을 설치했다면 관측자가 올라갈 계단이나 사다리를 따로 만들어야 하므로 상설 천문대로 사용했다는 의견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에 첨성대는 개방형 돔 형태의 천문대라는 주장도 나온다. 첨성대는 석탑의 중앙부가 중천을 향해 개방돼 있고, 27단 내부에는 자리를 깔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다. 그러니 관측자는 남쪽 창문으로 올라가서 자리에 누워 중천을 쳐다보고, 별이 자오선을 지나는 남중시각과 각도를 측정해 춘․추분점과 동․하지점을 예측했다는 의견이다. 우물 정(井)자 모양의 정상은 관측자의 시야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동현 전 덕성여대 교수는 “첨성대는 탑 중앙부가 중천을 향해 네모나게 개방돼 있는 점이 오늘날의 개방식 돔과 다를 점이 없다. 역대의 관상감들은 사각형으로 개방된 돔을 통해 중천을 보고 별이 자오선을 통과하는 시간과 각도를 측정해 1년의 달력과 춘추분, 동·하지는 물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고 행성의 운행을 관측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개방식 돔으로 관측을 하기에도 첨성대의 내부는 불편한 구조다. 첨성대 내부는 매끈한 외부와 달리 내부의 석재는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뒀기 때문에 자리에 누워 천체관측을 하기에 마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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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내부에는 흙이 가득 차 있다. 신라인들은 첨성대 남쪽으로 난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타고 위로 정상으로 올라갔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진 제공. 신라역사과학관> |
이에 전상운 전 성신여대 교수는 첨성대가 규표(gnomon)을 중심으로 한 다목적 관측대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규표란 일종의 해시계 바늘로 옛날부터 동지점(冬至點)을 관측하기 위해 땅에 세우고 그림자의 길이를 재던 수직막대를 이르는 말이다. 즉, 첨성대는 태양광선에 의해 생기는 해그림자를 측정해 태양고도를 알아내고, 춘추분점과 동하지점 특히 동지점과 시각을 결정하는데 쓰인 측경대(測景臺)였다는 말이다.
첨성대 실측 당시 주위에 석재가 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중 일부는 비교적 질서정연한 상태였다. 이 같은 점을 미루어 원래는 그 일대에 표지석이 있어 해그림자를 측정했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전상운 교수는 “첨성대는 규표의 기능을 주로하며 내부에서는 자오선을 통과하는 별을 관측해 4분지점을 맞춰보는 등 다목적의 관측대”라고 설명했다.
물론 첨성대를 천문관측기구가 아니라 종교재단이라는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단순히 상징적인 탑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 모양이 불교경전에 나오는 상상의 우주인 ‘수미산’과 닮았고, 높이가 10m 밖에 안 되며 오르기도 불편해 천문관측대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관련 기록을 통해 첨성대에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역시 첨성대를 통해 하늘을 바라봤을 가능성이 높다. 또 첨성대를 세운 선덕여왕 대를 기준으로 기록을 분석해보면, 천문기록의 양이 무려 4배나 늘었고, 특히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오행성에 관한 기록도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막대를 세워 그늘을 재고 해와 달을 관측한다. 대 위에 올라가 구름을 보며 별을 가지고 점을 친다’는 고려시대 시 한 수만 전할 뿐 첨성대에서 어떻게 천문을 관측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하지만 첨성대는 하늘을 알고자 했던 신라인의 지혜가 담긴 천문관측과 선덕여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건축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글 : 박태진 동아사이언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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