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원조는 페르시아야. 페르시아를 점령한 칭기즈칸 군대가 증류법을 배워 중국과 고려에 전파했지. 최근까지 개성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고 했다는데 증류식 소주를 아라비아어로 '아락'이라고 한다니까 증거가 될 만하지? 일리 있어요. 그 당시 페르시아는 증류로 향수를 만들 정도의 기술이 있었으니까요. 일제 때 우리 증류식 소주를 막지 않았으면 우리도 좋은 술을 많이 가지고 있을 텐데... 그 생각만 하면 분통이 터져. 곡물을 사용해서 술 빚는 걸 막으니까 청주가 없어졌지. 밑술인 청주가 없으니까 당연히 증류식 소주도 사라졌지.-156쪽
세상에... 처음 알았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에 소주를 1천만 병씩 마신단 말이야? 병 값이 원가에 영향이 많겠죠? 모두 새 병을 생산해서 쓴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다행히 6병 출고시키면 5병이 회수될 정도로 재활용이 잘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민주 하면 소주라고들 하는데 서민들이 즐겨 마셨스무니까? 아닙니다. 다른 술이 여름에는 자주 상하니까 술을 증류시켜 소주를 만들어 양반들이 마셨습니다. 서민들은 꿈도 못 꿨죠. 가격이 싼 희석식 소주가 나오면서 국민 대다수가 부담 없이 이용하게 된 거죠. -181쪽
몇 년 전에는 소주병을 따서 맨 윗부분을 '고수레'하면서 버렸지요. 미신 때문에요? 그게 아니고 윗부분의 메탄올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공정이 좋지 않아서 메탄올이 섞여 있을 수 있었답니다. 소주 반 잔 정도 버리는 것이 소주 매출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렇겠지. 요즘 식당에서 숟가락, 젓가락을 놓을 때 냅킨을 한 장 까는 경향이 있는데 그 한 장의 냅킨이 많은 매출을 올린대잖아. 냅킨을 까는 것보다 젓가락 받침을 사용하는 것이 위생에도 좋고 쓰레기도 줄이니까 더 나은데 왜 안 하는지 원...-189쪽
잔을 돌려가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수작이라고 해요.(갚을 수, 술 작) 술 마시는 사람끼리 서로 술잔을 권하고 받은 잔을 비운 다음 반드시 술잔을 돌려주고 술을 따라주는 걸 수작이라고 하는데 고려 인종 때 수작을 하도록 규정했고 조선조 성종 때 일반화됐어요. 잔을 주고받아 돌려마시는 흔적이 있는 곳이 경주에 남아 있는 포석정입니다. 물길을 구불구불 흐르게 만들어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돌아가면서 마셨던 거예요. 또 조선조에는 '승정원에게 문서를 왕께 올리는 날에는 왕이 신하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이때 술은 큰 술잔에 담아 돌려가며 마셨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런 수작 문화는 왕실의 호사스런 생활로 간주되기 쉽지만 왕과 신하들 사이의 결속을 뜻하는 정신적 행위였고 그 이면에는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깊은 의미가 있지요. 왕과 신하들뿐 아니라 요즘도 가끔 큰 대폿잔에 술을 부어 돌려가면서 마시는 것도 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급하게 마셔야 하고 많이 마시게 되는 단점이 커요. -190쪽
우리말에 까불거나 음모를 꾸미는 걸 수작 떤다고 얘기하는데 같은 뜻이야? 응, 한문이 같아.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는 저서 '사소절'에서 '남에게 술을 굳이 권하지 말 것이며 어른이 나에게 권할 때 아무리 사양해도 안 되거든 입술만 적시는 것이 좋다'라고 기록했죠. 수작의 전통에 따르면 술좌석에서 잔이 한 바퀴 도는 것을 1순배라고 하고 7순배 이상은 돌리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석 잔은 훈훈하고 다섯 잔은 기분 좋고 일곱 잔은 흡족하고 아홉 잔은 지나치다. -191쪽
1973년 일입니다. 정부는 소주 시장의 과다 경쟁과 품질 저하를 막는다고 한 도에 소주 업체를 하나만 허락했어요. 1976년엔 지방 산업을 보호한다고 자도주 구입제도를 만들어 주류 도매상들이 전체 소비 구입량의 50% 이상을 그 지역의 소주 업체에서 구매하도록 했고요. 그 이후 소주는 지역마다 다른 술로 자리 잡았어요. 사람들은 자기 고장의 술을 더욱 애용했고 소주 산업은 강한 지방색을 갖게 됐죠. 하지만 이 제도는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폐지됐고 전국적인 소주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지방 소주 회사로는 부산의 '대선', 경남의 '무학', 대구와 경북의 '금복주', 광주와 전남의 '보해', 전북의 '보배', 대전과 충남의 '선양', 충북의 '충북 소주', 제주의 '한라산', 1993년에 두산에 합병된 강원도의 '경월'이 있었지요. 1996년 그 법이 폐지되기 전까지는 서울에서 마시는 소주를 부산에서 마실 수 없었죠.-193쪽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5대 파사왕은 태자와 함께 사냥을 나갔었다. 그때 왕의 일행을 위해서 이찬 허루는 산해진미가 갖추어진 술상을 차려냈다. 흥겹게 취한 태자는 여기서 장래의 왕비를 만났고, 춤추는 아가씨들과 어울려 흐뭇해진 노왕은 한 마디했다. "이곳의 지명이 대포라고 했던가? 이렇게 성찬과 좋은 술을 차려내어 잔치를 베풀어준 공에게는 마땅히 '주다(酒多)'라는 벼슬을 주어 진급을 시킴이 마땅하리라." 그로부터 '술을 많이 낸다' 또는 '많은 술을 준다'는 말은 값진 선물을 베푼다는 뜻이 되었고, 나중에는 벼슬인 각간(혹은 술간)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후 '대포'라는 지명은 술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대포 한잔하세'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풍습이 되었다. -205쪽
조광윤은 송나라의 개국 황제이다. 그는 공제 때 송주귀덕군 절도사로 있으면서 960년 진교에서 반란을 일으켜 황제에 올랐다. 나라가 안정되면 창업 시기 장수들에 대한 뒤처리가 항상 고민되는 법. 조광윤은 거의 매일 무장들을 궁에 불러들여 주연을 베풀었다. 그러고는 석수신, 왕심기 등 장령들에게 고관후록의 조건으로 병권을 내놓도록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이들은 병을 핑계로 군대의 요직을 내놓았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배주석병권'이라 하니, 곧 술잔으로 병권을 내놓게 한 것이다. 조광윤은 또 전쟁의 살벌한 분위기를 일소하고 온 나라에 태평성대의 기상을 펴 보이기 위해 민간의 유력자들에게도 酒食을 크게(大) 베풀어(鋪) 마음껏 놀게 하였으니, 이것이 송 태조의 '대포'고사다.-205쪽
세종 때의 청백리이자 명재상인 유관이 '대포의 고사'를 내용으로 상소를 올리자, 세종이 이를 받아들여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아 대소 관료들에게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술을 마시고 놀며 즐기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대포'가 술을 뜻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205쪽
술 광고는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세게 할 수 없다. 죽탄수로 술을 만든다는 것은 술병에 붙은 라벨 옆쪽에 써져 있으나 그걸 보는 소비자는 없다. 와인 라벨은 열심히 읽으면서... 소주를 한문으로 쓰면 어떻게 써야 할까? 당연히 燒酒(사를 소, 술 주)일 게다. 하지만 아니다. 燒酎(사를 소, 전국술 주)다. 소주병에 붙은 라벨 옆을 보면 확인 가능하다.-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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