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마술사, 사라지는 벽을 보여주마 [제 971 호/2009-08-21]


갓 태어난 첫 아들을 품에 안은 그 순간부터, 짠돌 씨는 결심한 것이 있었다. 아이에게 다양한 체험을 시켜주되, 나이에 걸맞지 않은 볼거리는 절대 금지하리라. 아이가 원하는 삶을 인정하되, 상식과 도덕을 어기는 짓은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딸이 태어났을 때 여기에 하나가 더 붙었다. 이 아이는 깨끗하고 맑고 순수하게 키우리라 재차 맹세했다. 아내인 초보주부 김 씨는 짠돌 씨의 그런 맹세를 보며 ‘혼자 무슨 광고 찍느냐’며 어이없어 했지만.

그리고 약 10년. 짠돌 씨 나름대로 잘 해왔다. 첫째 막신이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의젓하게 성장했고, 둘째 막희는 가끔 사고를 치기는 했지만 무엇이든 쑥쑥 흡수하는 지적 능력을 타고나 부모를 기쁘게 했다. 짠돌 씨는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한 맹세를 지켜온 10년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아빠! 마술해 줘, 마술!”
“막희야~. 아까부터 얘기했잖아. 아빠는 마술 못 해….”
“싫어! 마술 보여 줘~! 아니면 어제 그 마술사 다시 보러 가자~! 막희 마술 좋단 말이야!”

다양한 체험을 시켜준다는 항목을 어기지는 않았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짓을 허용한 것도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도덕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딸은 아직 순수하고 맑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주말에 가족과 함께 놀이공원에 간 게 무에 그리 큰 잘못이란 말인가.

“거 봐. 내가 얘기했지? 막희에게 마술쇼 보여주면 안 될 거라고.”
“아들아, 네 직언을 받아들이지 못 한 내가 바보였다…만. 이 상황에 그 말을 들어도 전혀 위로가 안 되는구나.”

놀이공원 특설무대에서 펼쳐지는 마술쇼를 막희와 함께 관람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마음에 드는 걸 발견하면 질려서 내버릴 때까지 그것만 파고드는 딸래미가 마술쇼를 보자마자 마술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아내와 막신이가 말릴 때 들었어야 하는데…. 마술을 다시 보여달라고 칭얼거리다가 결국 소리 내며 울기 시작한 막희를 멍하니 보며 짠돌 씨는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간단한 동전 마술도 제대로 못 하는 자신의 손재주를 저주하며.

“으이그….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여튼 감당할 수도 없는 사고부터 치고 보는 건 부녀간에 똑같아.”
“아니 그게 아니라…. 헉, 그건 뭐야?”
“뭐긴 뭐야, 마술 도구지. 거치적거리니 일단 비켜 봐.”
“우와, 엄마! 마술해 주는 거야?”
“이건 비밀인데, 엄마는 사실 마술사거든~. 멋진 마술을 보여줄 테니까 대신 막희 울음 뚝! 알았지?”
“응!”

엄마는 막신이에게 종이를 접어 상자를 만들라고 시켰다. 다 만들어진 상자에는 막희가 편광필름을 붙이도록 했다. 두 아이들의 손재주에 감탄하던 (우리 애들 다 컸구나!) 짠돌 씨.

옆에 서서 마술준비를 들여다보던 있는 짠돌 씨는 다 만들어진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갸우뚱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엄마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상자 안쪽으로 새롭게 벽이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가짜 벽이. 이 ‘마술 같은 현상’에 눈만 껌뻑거리던 짠돌 씨.

아내는 의기양양 진짜 마술사 같은 표정과 연기실력을 과시하며 볼펜 하나를 집어 든다. (아이들이 보기엔) 분명히 존재하는 벽을 아무런 문제없이 슬쩍 뚫고 나오는 볼펜.
곧 박수 소리가 쏟아진다. 짠돌 씨는 초보주부 김 씨의 재주에 입까지 떠억 벌렸다. 나랑 연애할 때도 그런 ‘고혹적’인 표정은 안 지었잖아 당신!

“와아! 엄마 멋져! 진짜 마술사 같아~!”
“어머 얘는~. 아까 얘기했잖아. 엄마 진짜 마술사 맞다고.”
“여보, 이 벽은 대체 왜 생긴 거야? 거기다 내 쪽에서 보면 왜 안 보여?”

“안해도 될 말을……. 쯧, 뭐, 됐고. 이건 편광의 마술이야.”
“엄마. 편광이 뭐야?”

“빛은 사실 파도처럼 진동하면서 직진하고 있어. 그 진동이 우리 눈에 안 보일 뿐이지. 그리고 진동은 여러 방향으로 이뤄진단다. 그런데 빛이 특수한 물체를 만나거나 반사되면 한 방향으로만 진동하게 돼. 이걸 ‘편광’이라고 하지. 편광필름은 빛을 강제적으로 한 쪽으로만 진동시키도록 하는 역할을 하지.”

“웅, 잘 모르겠어.”
“쉽게 설명해 볼까? 막희랑 막신이 나란히 서 봐. 사이에 아빠가 통과할 틈을 남기고. 옳지. 자기는 막희랑 막신 사이를 걸어서 통과해. 오케이~. 이번에는 누워서 구르면서 틈으로 가 봐. 애들 다리에 세게 안 부딪히게 조심하고.”

“이 좋은 일요일 오후에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식은땀과 함께 미소를 삐질삐질 흘리던 짠돌 씨는 속도를 조절해가며 옆으로 굴렀다. 당연히 아직 가늘고 짧은 두 쌍의 다리에 어깨와 허리가 걸려 더 이상 구르질 못한다.

“아. 편광필름이란게 지금 아빠처럼 ‘서 있을 때’만 통과시켜 주는 물건이라는 거죠?”
“그래. 빛도 마찬가지겠군. 편광필름을 갖다 대면 틈에 맞는 진동만 통과하는 거지.”
“응, 자기 말대로야. 이론에는 그런대로 강하네? 만약 이런 필름 두개를 직각으로 갖다 대면 어떻게 될까?”
“세로 틈을 통과한 세로 진동이 가로 틈은 못 빠져 나가니까…. 앗! 그래서 아까 필름 두 장을 겹쳤을 때 시커멓게 보인 거구나. 빛이 아예 통과를 못 해서.”
“정답! 이런 틈을 ‘편광축’ 이라고 해. 편광 되는 방향을 지시하는 축이지. 아까 나는 필름 두 장의 편광축이 수직을 이루게 상자에 붙였어. 그럼 그 부분은 빛이 완전히 차단돼서 어둡게 보이거든. 없던 벽이 눈에 보이는건 그 때문이야.”

다시 한 번 상자에 넣은 볼펜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는 아내, 상자의 위아래 빈공간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막신, 엄마의 ‘마술’에 연신 박수를 치며 즐거워 하는 막희. 엄마의 활약에 자신이 있을 공간이 사라진 짠돌씨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쓴웃음을 짓는다. 문득 시선을 돌린 초보주부 김 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 쉬며 손을 까닥였다.

“자기도 이리 와. 같이 보고 얘기해요. 신기하지 않아?”
“으응, 확실히 신기해. 마술도 척척, 설명도 척척! 자기 진짜 멋지다~.”
“칭찬해도 아무 것도 안 나오네요. 작은 애보다 커다란 애가 더 속을 썩이니 어쩌면 좋을꼬.”
“커다란 애? 엄마.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니 너 말고, 네 옆에 있는 저 덩치 큰 ‘애’. 너희들보다 저 큰 애가 손이 더 간단다.”

엄마의 말뜻을 알아들고 자지러지게 웃는 막신과 막희. 자신 덕분(?)에 즐거워하는 가족들을 보며 짠돌 씨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절대, 두 번 다시 마술쇼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리라 새삼 다짐하면서.





[실험TIP]
- 편광필름은 과학 상품 전문 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 편광필름을 붙일 때는 필름의 방향에 주의하세요. 겹친 부분이 검게 보이도록 방향을 조절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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