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바이올린 - 베트남, 아무도 묻지 않았던 그들의 속내 이야기
정나원 지음 / 새물결 / 2005년 1월
품절


1945년에 북부를 휩쓸었던 대기근 이후로 베트남에서는 늘 '먹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게다가 수십 년을 이어진 전쟁의 여파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폐해로 인해 반세기 동안 기아선상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이머이 이후 이베 베트남은 미국, 태국에 이어 세계 제3위의 쌀 수출국으로 발돋움해 있다. -41쪽

우리 세대는 거의가 젊은 시절을 전쟁터에서 보냈어요. 전쟁 때, 사람은 아주 단순해져요. 그 단순함 때문에 한순간에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자랐어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니깐 무서운 게 너무 많아지더군요.
제일 공포스러웠던 건 역시 가난이었지요. 우리가 전선에 있을 때 ,심지어 전쟁이 막 끝나고도 '위'에서는 그러더군요. 조국이 통일만 되면 순식간에 나라가 일어설 거라고, 우리는 지상 낙원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그때 우리가 쇠고기를 한 달에 300g씩 먹도록 돼 있었거든요. 한 주일이나 두 주일에 한 번씩 배급을 타 왔나봐요. 집에 와서 100g도 안 되는 고기를 장기판의 말처럼 아주 잘게 썰어요. 그런 다음 생선젓갈에 버무려 양념이 다 스며들면 프라이팬에 볶아요. 그걸 다시 병 속에 넣어두고는 매일 두 조각씩 꺼내 먹는 겁니다. 다음번에 배급을 탈 때까지 단백질도 '계획적으로' 섭취해야 됐지요. 단백질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욕망과 꿈도 계획적으로 조절을 해야 했어요. -131쪽

'쯔엉선'이란 '기다란 산'이라는 뜻이다.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으로 1,000km가 넘게 뻗어 있는 이 산맥을 따라 1번 국도가 함께 내려간다. 호찌밍 정부는 이를 이용해 1959년부터 쯔엉선 산속에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군사작전 통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것이 '호찌밍 트레일'이다.

1965년에서 1968년 사이에만 약 7만여 명의 여성들이 호찌밍 트레일을 건설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대했다. 미국전생 시기만이 아니라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에도 군수품 보급부대에 동원되었던 약 2만 6천 명의 자원부대 가운데 절반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통일 이후 하노이 정부는 '반동계급'으로 분류된 남베트남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일명 재교육촌이라고 불리운 수용소를 세웠는데 약 40여 개소에 2백만가량이 수용되었다고 한다.-136쪽

원래 우리네 풍습으로는 누가 죽으면 처음에 봉분을 씌운 자리에 한 3년 뒀다가 꼭 이장을 해야 돼요. 3년쯤 지나면 살이 다 썩고 뼈만 남질 않소. 우리는 그 뼈에 죽은 사람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뼈만 추려가지고 다시 새로 묻어줘야 돼. 그래야 죽은 사람의 영혼이 푹 쉴 수 있는 거라고.
호찌밍은, 그때가 1969년이었으니까 전쟁 통에 죽었질 않소. 유언에서는 화장을 해달라고 했어요. 통일이 되면 자신의 유해를 베트남의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에 뿌려달라고 했지. 베트남 시골에 가면 어느 마을에나 사당이 있질 않소. 그이도 그런 조그만 사당이나 하나 지어달라고 그랬어. 주변에 나무나 몇 그루 심어서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거기 앉아 좀 쉬었다 가기도 하고, 애들은 나무 그늘 밑에서 놀다가 가고 그랬으면 좋겠다고.-142쪽

호찌밍은 우리한테 그런 존재였어요. 누구한테나 허물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중국의 '마오 주석'이나 북한의 '김일성 수령'하고는 좀 다르다는 얘기지.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우리가 그이를 보고 '엉클 호'라고 불렀다고 그러는데, 그것도 뭘 모르고 하는 얘기야. 미국 애들이야 외숙이고 백부고 다 엉클이니까.
그게 삼촌은 삼촌인데 예사 삼촌은 아니고, 우리말로 '박호(Bac Ho)'는 큰아버지라는 뜻이에요. 거, 집안에서도 아버지한테 직접 못할 얘기는 큰아버지나 삼촌한테 가서 하고는 하잖소. 어리광도 부리고 하소연도 하고. 그러니까 집안에 대사가 나면 나서서 처리도 하고, 집안에 분란이 나면 식구들을 다독거려서 집안이 화목하도록 이끌어 가는 역할이란 말이지. 나는 박호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142-143쪽

우리 옛말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문을 열면 바람도 들어오지만 먼지도 들어온다."
도이머이 이후에 물질적인 여건이 나아지고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해요. 내가 독립운동에 뛰어들 때만 해도, 내가 이 나이가 뙜을 때는 베트남이 엄청나게 발전된 사회주의 국가가 돼 있을 줄 알았지. 이 프렌치 빌라를 다 차지하고 살고 있을 줄 알았다고. 그런데 아니야. 아직도 아니지.
그래도 우리는 나라 이름 아직 안 바꿨어요. 소련은 문패 갈았지만, 우린 아직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라고.-153쪽

베트남에서는 어느 집에 들어서든 그 집 조상을 모시는 제단과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어 있다. 늘 드나드는 출입문 바로 맞은편에 두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들에 나갈 때도 조상 앞에 고하고,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제일 먼저 조상에게 고한다. 아무리 삶이 궁핍할지언정 매일 아침 물 한 그릇과 들꽃 한 송이 올리는 일을 잊지 않는다.
하노이 구시가의 들머리에 들어서면 자그마한 사당과 마주하게 된다. 사당은 늘 열려 있어 향내음이 그윽하고 그곳엔 늘 누군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노이에서 나고 자란 이들 가운데 30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세상을 달리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271쪽

사당을 돌아 나오면 제단 물품이며 장례식용 물품들이 거리를 따라 이어진다. 구정이 다가오면 이 거리는 제단을 손질하고 향로를 새로 바꾸는 사람들로 그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게 된다. 향로나 꽃병은 베트남인들에게 가장 신성한 일상 용품이며, 집안에 두어 개의 제단을 모시는 풍습은 지난 반세기 동안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종교적인' 전통이다.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온 베트남인들에게 제단은 망자들의 혼을 달래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산 자들이 거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모태와 같은 곳이다.-271쪽

1975년부터 배급제가 폐지되는 1989년까지 약 1백만 명이 베트남을 떠났다고 한다. 현재 베트남의 해외 동포는 3백만 명에 이르며 70여 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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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4 17: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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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4 17: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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