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요 언덕을 기억하나요. 들꽃과 제비와 순이와 용이가 뛰놀던 곳. 잘가요 언덕을 기억하나요. 별과 바람과 만남과 헤어짐이 살았던 곳. 잘가요 언덕을 기억하나요. 엄마 잃은 아기 호랑이에게 젖 먹이던 산골 마을. 그 평화 어느덧 사라지고 슬픔만 남게 된 잘가요 언덕을 기억하나요.-5쪽
호랑이들은 우리가 이곳에 마을을 만들고 정착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 산에서 살고 있었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생각을 해 보게나. 사람에게 해가 된다고, 혹은 조금 불편하다고, 혹은 조금 이득이 생긴다고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면 세상이 어찌 되겠는가? 설령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일지라도,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일세. 짐승과 더불어 살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과도 더불어 살 수 없는 법일세.-25쪽
지금 논바닥에는 일본군도 호랑이 마을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고 있습니다. 새끼 제비는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해낼 것입니다. 합심해서 송장처럼 쓰러졌던 벼를 모두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생명이 끊어져가던 벼가 살아나겠지요. 다시 살아난 벼 이삭은 더 많은 쌀 알갱이를 품어 키워낼 것입니다. 그 쌀 알갱이들은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되어 지치고 배고픈 누군가의 생명을 지탱해 줄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들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생명일지라도,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일회성이 아닌 연속성을 가진, '살아 있음' 그 자체라는 것을 새끼 제비는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109쪽
어머니, 다시 어머니를 못 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보고 싶습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비열한 일본군 장교로서 어머니의 품에 안기느니, 용서를 구하는 한 인간으로서, 죽어서라도 어머니의 마음에 안기겠습니다.
불효자 가즈오 마쯔에다 올림-133쪽
"모르겠어. 용서를...... 어떻게 하는 건지." 용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용서'라는 말이 흘러나옵니다. 백호를 잡아 복수하겠다던 용이가 변한 걸까요? 아니면 홀로 지낸 세월에 지친 것일까요? "빌지도 않은 용서를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띄엄띄엄 말을 잇는 용이의 얼굴은 깊은 외로움을 머금고 있습니다. "용서는 백호가 용서를 빌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엄마별 때문에 하는 거야. 엄마별이 너무 보고 싶으니까. 엄마가 너무 소중하니까." 잠잠히 순이의 말을 듣고 있는 용이의 커다란 눈동자에 밤하늘의 별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17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