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마취제가 있어야 할 곳 [제 890 호/2009-03-18]


사람이 먹는 음식이 따로 있고, 동물이 먹는 사료가 따로 있듯이 마취제 또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마취제와 동물에게 사용하는 마취제가 따로 있다. 말 못 하는 동물을 다루는 것이기에 수의사들은 신중하게 동물 마취제를 선택하고 사용량에 있어서도 최대한 남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치료한다.

안전성이 높아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진정 마취제인 럼푼(Rompun)은 주로 소를 진정, 근육 이완, 최면, 마취시킬 때 쓰는 동물 마취제의 상품명이다. 체중 10kg당 0.1ml의 소량으로도 소를 마취시킬 수 있어 아직 소 임상에서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마취제로 통한다. 소의 정맥에 주사했을 때는 4분, 근육에 주사했을 때는 5~15분 후 마취 효과가 나타난다. 이 마취제가 다른 동물에 쓰일 때는 마취 전에 하는 진정작용 밖에는 효과를 나타내지 않고 다량 썼을 때는 경련이나 호흡마비 같은 부작용이 생겨 다른 동물들에 쓸 경우 다른 마취제와 병행해서 사용한다. 말의 경우는 체중 10kg당 0.4ml, 개와 고양이는 체중 10kg당 1.5ml를 사용한다.

가축이 수송되는 도중에 생기는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데는 주로 베트랑킬(Vetranquil)이라는 진정제가 사용된다. 수송 중 생기는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는 중에 생기는 스트레스나 흥분을 억제할 때도 효과적이다. 분말 형태로 되어 있어서 사료나 물에 섞어 경구투여하고 장시간 동안 진정이 필요하면 12시간 간격으로 다시 투여해야 한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신종 마약 ‘스페셜 K’의 원료인 케타민(Ketamine)은 효과가 빨리 나타나서 가벼운 수술이나 화상 치료에 쓰이는 전신 마취제이다. 일반적으로 영장류에 쓸 경우 체중 10kg당 0.6~3mg을 사용한다. 케타민은 체내에서 분해되어 원형이 남지 않기 때문에 모발이나 소변 검사로 검출되지 않는다는 점이 악용되어 마약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케타민 대용으로 많이 사용되는 동물 마취제로는 졸레틸(Zoletil)이 있다. 다른 마취제의 경우 본격적으로 마취를 시작하기 전에 럼푼으로 진정을 시켜 마취가 잘 되도록 조치하는데, 졸레틸은 진정제와 마취제가 혼합되어 있어 빠른 시간 안에 마취가 된다. 또한 동물에 투여할 때 투여량에 따라 마취시간이 자유롭게 조절되는 특성이 있다. 처음에는 수의사들도 마취 전 진정제 투여가 필요한 케타민 대신 졸레틸이 충분히 대체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졸레틸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용량 과다로 인해 동물들이 마취사 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거의 잊혀진 사건이지만 한 유명가수가 바로 이 마취제의 과다주사로 인해 사망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물 마취제는 동물을 위해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하지만, 이처럼 사람에게 사용되거나 남용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예를 들면 케타민은 다량으로 사용하면 환각이나 분열 작용을 일으키고 기억력 손상과 호흡장애가 나타나 미국에서는 1999년부터 마약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최근 럼푼으로 여성을 마취시킨 후 성범죄를 저지른 사건도 있었다. 원래 주사제로 제조된 것을 먹어서는 거의 효과가 발휘되지 않기 때문에 다량의 럼푼을 술에 타 먹여 수면상태로 만들었다. 의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사람에게 사용할 때 안정성 실험이 입증되지 않은 동물마취제를 적용하는 행위는 불법의료행위를 넘어서 거의 살인 미수행위라고 할 수 있다.

동물 마취제에 의한 범죄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나라 동물 의료체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동물마취제 구입이 쉬워 일반인들도 자기 동물치료에 한해서는 아무런 처방전 없이 원하는 대로 동물약품을 사다가 스스로 치료행위를 할 수 있다. 이런 후진적인 제도로 말미암아 동물들은 각종 항생제를 비롯한 다양한 약품들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고 또한 동물약품이 역으로 사람 범죄로 악용하는 사태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동물약품에 의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외국에서 안정하게 쓰고 있는 동물 마취제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판매를 허용하지 않거나 여러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겨우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동물 마취제가 상품명 M99으로 불리는 에토르핀(Etorphine)과 케타민이다. 에토르핀은 일반 모르핀의 50~100배의 위력을 가지고 있어 주로 기린이나 코끼리 같은 대형 초식동물 마취에만 쓰이는 동물 마취제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되나 우리나라에서는 마약으로 분류되어 수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케타민 역시 동물병원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던 마취제였지만 사람들의 오남용으로 마약류로 분류되어 허가받은 사람만 취급할 수 있다.

동물 마취제에 대한 정부의 규제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동물 마취제의 오남용에 대한 심각성 인식이다. 모든 것은 적재적소에 있을 때 효과를 최대로 발휘한다. 동물 마취제가 온전히 사용되어야 할 데는 오직 동물뿐이다.

글 : 최종욱 수의사(광주우치동물원)

http://scent.ndsl.kr/View.do?type=1&class=200&seq=4082&B4Class=All&onlyBody=FALSE&meid=1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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