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보약’, ‘상차림이 부실해도 맛깔 나는 밥 한 그릇 하나면 족하다’라는 말이 있다. 밥 한 사발에도 이토록 민감한 미각을 가진 민족의 입맛을 오늘날까지 지켜온 비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반찬 맛이 손맛이라면 밥맛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일까. 비밀의 열쇠는 바로 밥솥에 있다. 가마솥 밥맛이 좋은 이유는 솥뚜껑 무게와 바닥 두께와 밀접히 관련된다.
가마솥의 생산과정에는 선인의 슬기와 전통과학의 힘이 배어 있다. 우리 겨레가 오래전부터 뛰어난 주조 기술과 제작 경험을 축적해왔음은 이미 고고학 자료를 통해 충분히 소개되어 왔다. 또한 각 제작 과정에 쓰인 도구와 관련 용어들은 오랜 세월동안 내려온 생생한 경험과 노력이 숨 쉬는 과학용어인 셈이다.
가마솥의 솥뚜껑은 무게가 무거워 온도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며 높은 온도를 유지 시켜 주어 맛있는 밥이 된다. 뚜껑이 가벼우면 수증기가 쉽게 빠져나가지만 무거우면 덜 빠져나가게 되어 내부압력이 올라간다. 그러면 물의 끓는점이 올라가 밥이 100도 이상에서 지어져 낮은 온도에서보다 더 잘 익게 되고, 따라서 밥맛이 좋아진다.
쌀이 잘 익으려면 대기압(1기압) 이상의 압력이 필요하다. 전통 가마솥 뚜껑 무게는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데 이러한 원리를 전기압력밥솥이 그대로 적용하였다. 하지만 전기압력밥솥에 이런 무거운 장치를 얹을 수 없기 때문에 내솥과 뚜껑에 톱니바퀴 모양의 돌출부가 만들어져 있다. 뚜껑을 닫고 손잡이를 돌리면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리게 돼 공기와 수증기가 빠져나갈 수 없다. 여기에 압력조절장치를 달아 일정 압력(2기압) 이상이 되면 기체배출구를 통해 내부 기체가 빠져나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한 가마솥은 밑바닥이 둥그렇기 때문에 열이 입체적으로 전해진다. 바닥의 두께가 부위별로 다른 점도 한몫을 한다. 대부분의 가마솥에서 불에 먼저 닿는 부분을 두껍게 하고 가장자리 부분을 얇게 만들어 열을 고르게 전달시킨다. 열전도율을 훌륭하게 적용한 것이다.
전기압력밥솥의 기술도 점점 발전 중이다. 전기압력밥솥은 1990년대만 해도 대부분 밑바닥만 가열하는 열판식이어서 아래부터 천천히 가열되어 한 번에 많은 양의 밥을 지을 경우 층층밥이 되곤 했다. 그래서 가마솥처럼 입체적으로 열을 가하기 위해 전자유도가열(IH : Induction Heating) 방법을 적용한 통가열식 전기압력밥솥이 등장했다. 통가열식은 밥솥 둘레 내부에 구리코일이 감겨 있고 여기에 전류가 흐르면 자기장이 변화돼 무수한 2차 전류(유도전류)가 흐르게 된다. 이 전류가 밥솥의 전기저항으로 인해 뜨거운 열에너지로 전환된다. 장작불 대신 전류를 이용한다 해서 ‘불꽃 없는 불’이라 불리는데, 사방에서 열이 전달되면서 쌀이 구석구석 잘 익는다.
IH압력밥솥은 쌀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밥의 영양분파괴를 줄인다. 취사속도가 빠를수록 영양분 파괴가 적기 때문에 최근에는 취사시간을 9분대로 줄인 제품도 출시되었다. 이 기술의 핵심은 밥솥의 측면 화력을 두 배 이상 향상시켜 밥의 단맛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열전도율을 높게 하기 위해 내솥의 바깥부분을 금이나 구리로 얇게 입히기도 한다. 솥의 주요 재질인 스테인리스강은 열전도율이 낮아서 쌀에 열이 전달되는 속도가 느린 반면 구리는 12배, 금은 9배 정도 스테인리스강보다 열전도율이 높다. 단, 도금이 지나치게 두꺼울 경우 코일의 전류가 내솥까지 닿지 못해서 가열이 잘 안 되므로 얇게 도금을 입힌다.
기존의 전기밥솥은 보온과 취사만 가능했다면, 이제는 밥맛을 자유자재로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백미, 잡곡, 된밥, 진밥 등을 가족들의 식성에 따라 지을 수 있고, 빵이나 갖가지 요리도 가능하게끔 기술이 발전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뚜껑과 기체배출구 등에 끼어 있는 이물질을 제거해주는 기능을 포함해 여러 가지 부가 기능을 갖추고 있어 주부들의 편의성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추세라면 머지않아 쌀 한 가마를 넣어두면 끼니때를 기억해 두었다가 알아서 물을 맞춰 맛있게 밥을 지어 놓고, 쌀이 떨어지면 메시지를 보내는 밥솥도 나오리라 예상된다.
첨단 과학으로 만들었다는 이들 밥솥 역시 가마솥의 원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울러 온고지신이라는 말처럼 겨레의 과학슬기는 첨단과학을 뒷받침하는 버팀목으로 응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를 여는 열쇠라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글 : 윤용현 연구관(국립중앙과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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