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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아란타로 가다 ㅣ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13
설 흔 지음 / 생각과느낌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조선의 한 소년이 있다. 역관 출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가졌던 중인 계급의 아이는 부산의 거부 역관 이정의 딸을 연모한다. 이정의 딸 연희를 각시로 삼기 위해 출세하고팠던 소년은 인삼 밀매를 조건으로 조선통신사 행렬에 따라가게 된다. 이 사건이, 소년의 인생 행로를 확 바꾸어 버린다.
통신사 행렬에는 이언진이라는 역관이 있었다. 천재 시인 소리를 듣던 이언진은 통신사 일정 중에 있었던 숱한 고비에서 소년을 구해주었고 의미심장한 질문들을 던지며 우물 안 개구리였던 소년의 작은 틀을 깨어부순다. 작은 나라 조선 안에서, 또 신분이라는 굴레 안에 갇히어 오로지 부자가 되겠다는 나름의 포부만을 품고 살던 소년은 이언진을 만나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이 책이 조선판 성장 소설로 읽힐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년 청유는 일본에 도착해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조선에서 일본은 늘 미개한 나라였다. 그들의 문화와 풍속은 오랑캐의 것이었고 손가락질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청유의 눈으로 목격한 일본은 별천지였다. 조선과 구별되는 지극히 다른 풍속과 문화야 어찌 평가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이 일궈낸 '문명'은 진일보된 것이었고 조선이 따라가지 못한 세계였다. 그 까닭을 이언진은 '개방'으로 설명했다. 나가사키 항에서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허락했던 일본, 때문에 서구의 과학문명과 기술을 일찌감치 받아들인 그들은 이미 조선을 저만치 따돌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기한 경험은 소년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선 땅에서 괴퍅한 천재 박지원으로부터 망신을 당했던 이언진의 시는 일본 땅에서 없어서 구하지 못하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의 천재성을 일본 땅의 사람들은 알아주었지만 이언진이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조선 땅이었다. 그리고 줄어들지 못한 그 간극이 이언진을 죽게 만든다. 실존인물인 이언진은 실제로 박지원으로부터 참혹한 평을 받은 것에 몹시 마음 아파했고 그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해 37의 나이로 요절한다. 박지원은 그의 천재성이 자만심으로 망가질까 하여 나름의 애정있는 충고를 했던 것이지만 그의 차가운 애정은 뜨거운 이언진이 소화시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언진은 소년 청유에게 문을 두드리지 말고 박차고 나가라고 하였다. 그가 제시한 명제는 뚜렷했고 해답처럼 보였으나 정작 그 자신은 스스로를 둘러싼 문을 두드리지도 박차고 나가지도 못한 채 그 안에 갇히어 애석한 죽음을 맞고 만다. 혈육은 아니었지만 혈육의 정만큼이나 가까웠던 이언진의 죽음은 소년을 더욱 매섭게 단련시키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에 이정이 연루되어 있고, 연희는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이미 시집을 간 상태다. 소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문을 받차고 나가는 대신 다른 세계의 문을 열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바로 '아란타'(네덜란드)로 가는 것이다.
낯선 나라 일본보다도 더 낯설고 험할 게 분명한 아란타. 그곳에서 소년이 새로 일궈나갈 삶이 장밋빛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조선 땅에 의지할 이 아무도 없는 청유에게는 '도전'이라도 가능한 그곳이 더 큰 가능성을 줄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는 것만 알 뿐이다. 기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문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지만, 스스로 쌓아 가둬버리는 자아의 문도 분명히 있다. 안타깝지만 이언진은 그 문을 뚫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소년 청유가 아란타로 떠나면서 작품이 끝났기 때문에 청유가 과연 새 문을 어찌 열었을지 알 수 없지만 독자는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새길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하고 또 응원할 뿐이다.
닫힌 사회 조선에서 가진 재능을 다 펼쳐보지 못한 이가 어디 이언진 뿐이었겠으며, 새로운 문을 열고자 발버둥친 이가 어찌 소년 청유뿐일까. 그것은 200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서도 여전히 통용되는 질문이 될 수도 있다. 오늘, 낮에 시내에 나갔다가 국제 엠네스티에서 활동 중인 시민 단체 사람들을 만났다. 홍보 활동에 잠시 귀를 기울였는데 자신들과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한다. 당장 내 앞가림도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거절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는데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맺힌다. 우리의 인권을 누가 대신 찾아주지 않는다고.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백번 옳았다. 옳았고 동의하기 때문에 더는 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모두가 행동가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누군가의 희생과 봉사에 무임승차하는 것 같아 생계를 걱정하는 내 변명이 스스로 구차했다.
나를 둘러싼 문을 생각해 본다. 한 달 이상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지만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의사 샘께서는 아마도 스트레스가 원인일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게 정답일 거라고 나 역시 생각했다. 내 안의 문이 너무 견고해서 좋은 약을 먹고 꼭 필요한 치료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나에게 해방을 주지 않는다. 근본적인 대책은 다른 데에 있다. 그 문을 깨부수는 것이 나의 몫이다. 이언진처럼, 좌절할 이유들이 내게 많다. 하지만, 그가 그랬듯 좌절하다가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안 되는 이유를 자꾸 생각지 말고, 될 수 있는 이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유를 만들어 보자. 소년 청유처럼 새로운 문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용서'라는 단어다. 용서할 수 없는 이유를 자꾸 생각지 말고, 용서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것. 그래야 내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내일부터는 사흘 정도 자숙(?)의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나를 가둔 문을 박차고, 부수고 나갈 힘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다. 결과를 알지 못한다. 다만 노력할 뿐이다. 소년 청유도 어린 나이에 도전했다. 나도 해보자.
갑작스레 흥분해버려서 개인적인 얘기를 너무 많이 쏟았다. 책의 포장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작가의 이름은 설흔이다. 본명인지 모르겠는데 무협작가 이름 분위기이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라는 책을 지었다. 선물받은 책인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이 책으로 인해 작가의 전작에도 더 관심이 쏟아진다.
책의 표지가 감각적이다. 소년이 고래를 붙잡고 유영하는 이미지인데 작품 속 꿈과 관련이 있다. 그림만으로 보면 꼭 치마 입은 댕기머리 소녀같지만, 댕기동자라고 생각하자..;;; 푸른 표지의 노란 띠지가 거의 보색을 이루는데 촌스럽지 않고 강조하는 포인트로 보인다. 청소년 소설을 표방했지만 어른들이 읽기에도 나쁘지 않다. 책의 맨 뒤에 조선통신사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보태어져 있는데 그림과 함께 즐겁게 참고할 수 있다. 다소 짧은 페이지가 아쉽게 느껴진다. 별 넷 반 정도 생각했는데 반점을 줄 수 없어 별 다섯이다. 오늘 나에게 '문'이라는 화두를 던져준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