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에 대처하는 기린의 자세 [제 770 호/2008-06-11]


육상에서 가장 키 큰 동물은? 누구나 쉽게 짐작하다시피 기린이다. 기린은 어느 동물보다도 월등히 크다. 아마도 공룡 이래로 가장 키 큰 동물의 지위를 계속 유지해 왔다. 기린은 새끼 때에도 타 동물 보다 역시 키가 훨씬 크다. 그래서 기린이 분만 할 때 보면 그 긴 새끼 목이 마치 떡 기계에서 가래 떡 뽑아 나오듯 스르륵 하고 서서히 빠져나오는 걸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머리가 그저 툭하니 빠져 나온다.

이처럼 긴 목을 가진 기린은 여러 가지 용도로 목을 사용한다.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따 먹을 때 편리하게 이용하기도 하고, 짝짓기를 위한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목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린은 일부다처제의 습성을 지녔는데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싸움은 격렬해서 때론 다투다가 한쪽이 죽기도 한다. 이때 그들이 목을 번갈아 부딪치는 싸움을 ‘넥킹(necking)’이라고 한다.

사실 기린은 독특한 신체 구조 때문에 화를 내고 싶어도 절대 내서는 안 되는 동물이기도 하다. 사람들도 고혈압이 생기면 화를 죽이고 살아야 하듯 기린은 선천적으로 고혈압 환자라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기린은 키가 5m가 넘고, 심장에서 머리까지 3m나 된다. 강한 압력으로 심장에서 머리로 혈액을 뿜어주는 것이다. 기린의 혈압은 160~260mmHg로 사람의 두 배나 된다. 이토록 혈압이 높게 유지되려면 가장 강해야 할 것은 물론 심장이다. 그래서 심장의 근육도 두껍고 심장 크기 또한 몸의 비율에 비해 크다. 11㎏에 달하는 기린의 거대한 심장은 강한 힘으로 펌프 운동을 하고, 뇌로 혈액을 급속히 올려 보낸다.

기린의 혈관계에는 다른 동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혈압조절계라는 특수조직이 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기린은 물조차 마시지 못한다. 목을 숙이면 기린의 머리로 다량의 피가 몰리게 되는데, 특수조직이 조절해 주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몰린 피가 뇌의 모세혈관을 전반적으로 파괴시켜 바로 뇌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그래서 조물주는 기린에게 ‘원더네트(wonder net)’ 와 ‘정맥판’이라는 놀라운 특수혈관조직을 선물로 주었다.

원더네트는 목과 머리 사이에 동맥피와 정맥피가 얽혀있는 모세혈관 다발로 되어있다. 이 원더네트는 마치 역의 개찰구처럼 피의 뇌 입·출입을 조절한다. 심장에서 오는 동맥피는 이곳을 거쳐야 뇌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을 거치는 동안 높은 혈압의 피는 정상적인 혈압으로 완충이 되어 뇌로 들어간다. 목 정맥은 정맥판을 작동시켜 뇌로 정맥피가 역류되는 것을 방지한다.

기린뿐만 아니라 펭귄도 원더네트가 있어서 극지방에서 추위를 견디는 것이 가능하다. 원더네트를 거치면서 심장으로부터 오는 따뜻한 동맥피는 적당히 차가워지고 발끝에서 올라오는 정맥피는 적당히 따뜻해진다. 발바닥 온도는 몸보다 낮은 수준에서 얼지 않을 만큼 적당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특수조직이 무리하게 사용되지 않도록 기린도 목을 숙일 때 스스로 다리를 벌려 몸을 최대한 낮추어 목에 걸리는 부하를 경감시키려 노력한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장치들은 가동시키는 데 준비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포식자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기린은 물을 마실 때 항상 몇몇씩 모여 교대로 마신다. 그리고 물을 한꺼번에 많이 마신 다음 오랫동안 마시질 않는다. 몸의 수분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오줌도 굉장히 농축시켜서 내보내고 똥도 마치 토끼 똥처럼 둥글둥글 구슬모양으로 ‘후드득’ 하고 항문에서 말 그대로 쏟아져 내린다.

이 밖에도 기린은 흥미로운 점이 많은 동물이다. 다른 동물과는 성대가 달라 소리를 못 낸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초음파를 보낸다는 설도 있다. 기린은 툴툴거리는 듯한 소리를 낼 수 있으나 매우 조용한 동물이라서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워낙 드물다.

또한, 기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기관 중 하나가 바로 40cm가 넘는 혀이다. 혀의 앞부분은 검고 뒷부분은 빨갛다. 검은 부분은 단단한 조직으로 되어 있어 가시가 달린 가지도 문제없이 감아 올 수 있다. 기린의 뿔은 보통 높게 솟은 두개만 보이지만 피부 위에 솟은 돌기를 모두 뿔이라고 본다면 코 위에도 뿔이 하나 있고 귀 뒤에도 각각 하나씩의 뿔이 있어 모두 5개를 가진 셈이 된다. 기린의 뿔은 별다른 기능은 없다. 다른 동물을 헤치기 위해서라면 뿔이 날카롭고 크겠지만 기린의 뿔은 작고 뿔에 살이 돋아나 있어서 싸우는 용도로도 적당치 않다.

기린은 큰 키 때문에 초원의 초식동물들에게 거의 맏형이나 같은 존재이다. 기린 주변에 여러 초식동물들이 모여 사는데 그들은 기린이 뛰면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달린다. 그건 틀림없이 위험한 동물이나 물건이 반경 2km안에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기린도 위기에 몰리면 긴 다리를 이용해 주로 앞발공격을 한다. 그 발차기에 제대로 걸리면 아무리 사자라도 견딜 수 없다.

기린은 걷는 모양 역시 특이하다. 다른 동물들은 앞발이 나가면 반대쪽 뒷발이 동시에 나가는 지그재그 방식인데, 기린은 한쪽 다리가 일시에 이동하고 나서 이번에 반대쪽 다리가 이동한다. 예를 들면 왼쪽 앞·뒷다리가 동시에 이동한 다음에 오른쪽 앞·뒷다리가 동시에 이동하는 것이다. 뛸 때는 또 다르다. 앞쪽다리가 동시에 이동하고 그 다음에 뒤쪽다리가 동시에 이동한다. 기린은 참 알면 알수록 특이한 동물이다.

더구나 초원의 마지막 수호자로 불리는 기린은 자연 파괴의 ‘바로미터’가 된다. 기린이 살 수 없는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닐 것이다.

글 : 최종욱 광주우치동물원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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