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지다 -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강요배 지음, 김종민 증언 정리 / 보리 / 2008년 4월
품절


3.1 대시위

1947년 3월 1일, 제주 읍내에 탐라 개벽 이래 최대로 운집한 3만 군중은 진정한 민족 해방을 갈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1947년 3월 1일 제주 지역 곳곳에서 열린 3.1 시위 투쟁에 역사상 최대 인파가 참가했다.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에만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가 참가했다. '4.3'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시위 군중이 관덕정 앞을 지나간 뒤 발생했다. 관덕정 앞에서 우연한 일로 소란이 일어나자 겁을 집어먹은 경찰이 총을 쏴 주민 6명이 죽은 것이다.

경찰 발포로 주민 6명이 죽자, 이에 대한 항의로 3월 10일에는 역사상 희귀한 '관민 총파업'이 벌어졌다. 제주 도총을 비롯한 관공서와 학교, 은행, 통신 기관과 일반 사업체까지 참여해 관과 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어났는데, 해방 후 제주도 상황을 모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총파업이었다.

서청 입도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 청년단(서청)을 파견했어요.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라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지요.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어요? 그 한 예가 제주도인데, 조병옥 박사가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4.3 사건이 나자마자 저를 불러 제주도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경찰 전투대를 편성한다고 5백 명을 보내 달라기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문봉제. 당시 서북 청년회 단장. 북한 연구소 발행 <北韓> 1989년 4월호 127쪽

넘치는 유치장

제주 유치장은 한국의 어떠한 형사 시설보다도 넘쳐 나는 죄수를 수용하는 것으로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10*12피트(약3.3평)의 한 감방에 35명이 수감되어 있다.

-미 군정청 특별 감찰관 넬슨 중령, <특별 감찰 보고서>(1947년 11월12일~1948년 2월 28일)

고문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되어 버리자 우리는 졸지에 '폭도 집안'으로 몰렸어요.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당시 열세 살이던 나까지도 서북 청년회에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옷을 모두 벗긴 채 고문을 했는데,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리거나 고춧가루 탄 물을 코와 입에 부어 댔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입을 다무니까 쇠붙이를 사용해 이빨 사이를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이가 다 부러졌어요. 전기 고문을 받은 곳은 살이 썩어 갔어요. 토벌대는 우리가 오빠를 숨긴 채 밥을 날라 주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며 윽박질렀습니다. 기절하면 물 뿌려 깨운 뒤에 또 고문했어요. 결국 서청은 도피자 가족이라며 어머니를 총살했습니다. 그때 언니랑 나도 함께 끌려갔는데 서청은 우리한테 '어머니가 죽는 것을 잘 구경하라'고 하면서 총을 쏘았어요. 난 그때의 충격으로 성장이 멈춰, 다 자란 후에도 몸무게가 30kg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집니다."

-정순희. 2007년 72세, 서귀포시 강정동.

입산

"우리 학교 김용철 학생이 조천 지서로 끌려가 고문치사를 당한 후, 서북청년회와 경찰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악질 경관 처단하자!'라고 쓴 삐라를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막상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벌어져 소위 반동이라고 지목받은 사람이 살해당한 것을 보고는 어린 마음에 '아, 어떻게 이럴 수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서청과 경찰로 인해 도무지 마을에서 살 수가 없어 1948년 8월경 산에 올랐습니다. 조천 중학교 2학년 때지요. 그땐 사태가 그렇게 오래갈 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달랑 여름옷 하나 입고 올랐겠습니까?"

김민주. 1994년 63세. 일본 동경도, 천엽현. 당시 조천 중학교 학생.

공격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쯤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붉게 봉홧불이 타올랐다. 남조선 노동당(남로당) 제주 도당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약 350명으로 추산되는 무장대는 제주도 내 경찰지서의 꼭 절반인 12개 지서를 일제히 습격하고, 경찰과 서북 청년회(서청)같은 우익 청년단 간부들의 집도 습격했다. 평화의 섬은 피의 섬이 되었다.

부모들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도 버젓이 저질러졌다. 토벌 작전을 펴면서 13명의 목을 잘라서 시내를 두루 다니며 구경시키기도 하고, 서북 청년회에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이런 짓을 하게 했다. 토벌대가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놓고 발가벗긴 채 매질을 하고, 남녀를 지목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짓'을 하게 했다. 또 자식을 맨 앞줄에 세워 놓고 부모가 총살당할 때 손벽을 치고 만세를 부르게 했다. 잔혹 행위는 끝이 없었다. 과거 나치나 일본군이 저질렀던 대살도 빈번히 발생했다. 남편이 산에 올라갔다고 아내를 죽이고 자식이 입산자라고 부모를 죽였다. 도피자 가족으로 여자나 노인, 어린아이 같은 주로 노약자들이 끌려가 살해되었다.

天鳴
"그날 새벽 총소리가 요란하자 젊은이들은 황급히 피신했어. 그러나 난 어린 아들과 딸 때문에 그냥 집에 남아 있었지.'설마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이겠느냐.'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집집마다 불을 붙이는 군인들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 무조건 살려 달라고 빌었지.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어. 세 살 난 딸을 업은 채로 픽 쓰러지니까 아홉 살 난 아들이 '어머니!'하며 내게 달려들었어.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 '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하며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해.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어. 그들이 나가 버리자 우선 아들이 불에 딸까 봐 마당으로 끌어낸 후 담요를 풀어 업었던 딸을 살폈지. 그때까지만 해도 울지 않았기 때문에 딸까지 총에 맞았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그런데 등에서 아기를 내려 보니 담요가 너덜너덜하고 딸의 왼쪽 무릎이 뻥 뚫려 있었어. 내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이 담요를 뚫고 딸의 왼쪽 다리까지 부숴 놓은 거야. 그날은 마침 딸의 두 번째 생일날이었는데, 그 일로 딸은 장애인이 되었어."
양복천. 1915년생 조천면

붉은 바다

"1948년 12월 14일 오후 5시쯤 갑자기 군인과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향사로 집결시켰습니디ㅏ. 그들은 열여덟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의 남자들과 얼굴이 고운 처녀만을 골라 밧줄로 묶어 표선리로 끌고 갔습니다. 그 후 남자는 12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표선 백사장에서 학살당했고, 여자는 군인들의 노리갯감이 되다가 군대가 이동하게 되자 최종적으로 12월 27일에 표선 백사장에서 총에 맞은 후에 또 칼로 찔려 죽었습니다.

김양학, 1998년 58세. 표선면 토산1리

젖먹이

"우리 마을 북촌리에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 아침부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 동쪽부터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연설이 있으니 학교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했습니다. 군인들은 우선 경찰 가족, 군인 가족을 따로 분리시키더군요.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은 사돈의 팔촌이라도 경찰이 있으면 경찰 가족 쪽으로 줄을 섰습니다. 군인은 우선 민보단 간부를 불러내 바로 총살했습니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김석보, 1998년 63세, 조천읍 북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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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4-14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의 5.18과 더불어 가슴 아픈 현대사~~~ ㅠㅠ

마노아 2008-04-14 22:51   좋아요 0 | URL
가슴 아픈 이야기가 너무 많지요. 오늘 식코 보고 왔더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