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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지 않는 아이
펄 벅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대지>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탄 펄벅의 자전적 글이다. 선교사였던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서 성장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역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녀의 첫 아이 캐롤은 건강한 아이였는데 말이 너무 더뎠고, 몇가지 부자유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다. 아이가 세살이 되어서야 장애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 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모든 장애아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왜?'라는 질문을 던졌고, 대답은 누구도 해줄 수 없었다. 아이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서 찾아보지 않은 의사가 없었지만 아이는 정신의 성장이 멈춘 채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숨김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였고, 하늘에서 내려준 운명의 일부라고 여겼으며 그 자체로 존중했다. 따라서 개인이나 가족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국인의 이런 철학은 펄벅으로 하여금 캐롤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반면 중국에서는 딸을 낳으면 버리는 관습이 있었으니 이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펄벅은 아이의 미래를 고려해야 했다. 그녀가 죽고나면 누가 캐롤을 돌볼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국에서 중국인과 같은 시선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펄벅은 첫 남편과 이혼을 했고 줄곧 중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다른 친척들의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가 아이를 받아줄 수 있는 시설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를 인격체로 상대해줄 수 있는 마인드를 가진 재단을 마침내 찾아냈을 때 그녀는 그곳의 아이들이 다른 시설의 아이들과 달리 밝고 자유로울 수 있는 까닭을 물어보았다. 그곳의 교장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으로 대했을 뿐이죠." 너무도 당연한 그 대답이, 그 시절로서는 파격을 넘어선 충격이었다는 것을, 책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도 변치 않는 진리이며, 잘 지켜지지 않는 숙제임도 아프게 상기할 수 있다.
펄벅이 아이를 맡긴 그때가 1920년대 말이었다. 장애아가 있다는 사실을 가문과 혈통의 수치로 여기던 시절이었으며, 그 아이들의 인권을 생각지 못했던 사회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펄벅이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의 아이를 세상에 공개한 것은 1950년이었다. 그때 이후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펄벅 자신이 가장 많이 변하였다. 그녀는 일곱 명의 아이를 입양해서 키웠고 아시아인과의 혼혈아를 미국 가정에 입양시킬 수 있도록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흑인 아이를 백인 가정에 입양시키는 일도 주선하였다. 아이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시작한 글쓰기로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유명해졌고,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은 사회적 봉사활동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아이를 통해서 느꼈던 그녀의 슬픔은, 그녀와 같은 아픔을 가진 많은 사람들과 공유되어지면서 고통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정신 지체아들을 위한 연구를 촉구하게 되었으며 많은 사회적 관심과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그녀가 책에서 기술한 내용들은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잘못된 정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장애아 가족을 둔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하여 시대를 거슬러 깊은 공감과 위로를 얻었다.
책은 펄벅이 쓴 내용에 이어 그녀가 죽은 뒤 캐롤의 후원자가된 펄벅의 첫째 입양아(캐롤의 동생)인 재니스가 후기를 실었고, 다운증후군 아이를 가진, 그리하여 이 책을 통해 많은 위로를 얻은 재블로가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로 구성되어 있다.
장애아 가족이 느끼는 혼란과 슬픔에 대하여 독자 역시 큰 공감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가 장애아에 대해서 어떤 편견을 갖고 있는지, 또 그 아이들이 이 사회에서 해낼 수 있는, 마땅히 해야 하며 또 누려야 할 것들에 대한 정보도 같이 얻을 수 있다.
여러 인상적인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 펄벅이 대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1차적 원인은 캐롤이 있지만, 그 바람에 유명해진 그녀는 사회 활동으로 가족들에게 시간을 많이 내어줄 수 없었고, 그 바람에 그녀가 입양한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의 차가움을 목격하며 상처를 받은 채 자랐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녀가 가족들에도 완벽한 어머니였다면, 오히려 그녀의 이 이야기들이 덜 설득적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결핍은 다른 충족을 불러냈지만, 하나의 충족은 또 다른 결핍을 부르고 만 그 순환의 고리들. 그것이 인생이라는 생각도 퍼뜩 들었다. 뜻하지 않게 불현듯 읽게 된 책에서 오랜 여운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