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지 않는 아이
펄 벅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3년 12월
절판


이 세상에, 자라지 않는 이 아이들처럼 죄 없고 순수한 존재는 없다.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 설사 부모에게 아이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해도 그런 일을 방치했을 때 결과는 끔찍하다. 처음에는 힘없는 아이들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힘없는 노인들을 죽이는 것으로 확대될 수도 있고, 이렇게 양심이 무뎌지면 편견만으로 사람을 죽이게 된다. 피부색이나 종교 등만으로 사람을 구분해 죽이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 죽는 사람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안락사라는 말은 듣기 좋은 말이지만 사실 무시무시한 현실을 듣기 좋은 말로 감춘 것에 불과하다.

-64쪽

나와 같은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았을 때에는 정말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나와 같은 짐을 진 사람이 많다고 해서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슬픔을 지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 사람들을 보고 나도 그럴 수 있으리란 걸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68쪽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고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한다고 해서 떨쳐 버릴 수 없는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원망하고 탄식하는 데 힘을 다 쏟아붓지도 않았다. ‘왜’라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지도 않았다. 가장 큰 변화는 나와 나의 불행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아이 생각만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삶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삶에 순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견디기조차 힘든 삶이다. 그렇지만 중심을 조금만 옮겨도, 쉽지는 않지만 슬픔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74-75쪽

나는 행복이 아이의 환경이 되게 해주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에 대한 기대, 긍지도 모두 버리고, 있는 그대로 아이를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다만 흐릿한 아이의 정신에 어떤 빛이 반짝일 때 감사하기만 하겠다고 결심했다.

-79쪽

아이들은 자기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알아야 할 너무나 중요한 사실인데 정작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었다. 자라지 않는 아이들도 사람이고 사람처럼 고통을 받는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깊은 고통을 느낀다.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것이다.

-86쪽

언제까지고 어머니가 아이를 감싸고 보호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 아이도 사람이고, 자기 몫의 조그만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97쪽

이 아이들은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감정은 지능과는 무관하다.

-105쪽

아이의 삶은, 그것이 얼마나 단순하든 간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력한 아이지만 무언가 세상에 기여할 부분이 있다. 아이가 그런 상태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고, 그 원인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이 자체는 낫거나 변하지 못할 지라도, 이 아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로 인해 다른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107쪽

미국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과학적 진보 중 대부분은 사설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이다. 공공 자금으로는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과학적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가장 절실한 분야, 정신지체의 원인과 치료법 연구는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소규모 사설 기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연구를 관장하는 기관이 있어서 연구가 중복되지 않도록 조정해야 할 것이다.

-113쪽

이 위대한 여인, 나의 어머니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업적을 남겼지만, 그런 한편 상처받은 삶을 남겨 두고 떠났다. 내 형제들과 내가, 생부와 생모에게 버림받은 우리들이 나중에는 우리 양모인 펄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캐롤이 우리가 버림받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어머니가 글을 쓰도록 만든 1차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138쪽

유명인으로서 어머니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었고 그녀의 관심과 동정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말에 귀 기울이고 어머니의 노고를 이해하는 온 인류에게 관심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어머니가 캐롤을 낳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가 남긴 유산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단언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나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39쪽

윈스턴 처칠이 사회적 다윈주의에 기반을 두어 ‘정신적 퇴화자’에게 강제로 불임시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얼마 전 영국에서 밝혀졌다. 1910-11년 영국 내무장관 재직 중 처칠은 이 사람들을 시설에 강제 수용하는 것보다 이 방법이 차라리 더 인간적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신지체인들의 생식을 막으면 대영 제국에서 정신박약 인구를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처칠의 생각은 영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적국의 아돌프 히틀러가 저지른 만행의 전조가 되었다.

-150쪽

여러 대기업(매리어트, 피자헛, 맥도날드, 보잉, 유나이티드 항공, IBM 등)에 수천 명의 정신지체인이 고용되었다. 일례로 피자헛은1,012명의 장애 노동자를 고용했는데(그 중 73%는 정신지체이다), 이들은 비장애인보다 직장에 4~5배 가량 더 길게 머물렀다. 낮은 이직률 덕분에 피자헛은 신입사원 모집, 고용, 교육비용 220만 달러 이상을 절약할 수 있었다.

-170쪽

어쩌면 인류의 가장 큰 진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내딛은 조그만 발걸음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인종주의는 아시아인, 흑인, 백인이 현관 앞에 나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내딛는 아주 작은 한 발에서 무너지기 시작하는지 모른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직장 동료가 사무실 밖에서 우정을 나눌 때마다 동성애 혐오증은 그렇게 조금씩 수그러들고 있는지 모른다. 딸이 성추행을 당한 경험을 이야기할 때 아버지가 귀를 기울이는 순간 남성은 여성을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될지 모른다. 통계 자료와 도표, 연구 자료가 아니라, 나의 여섯 살배기 조카가 말하듯 ‘진짜 진실’을 말하는 개인의 이야기가 산을 움직이고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173쪽

나는 1974년 처음 <자라지 않는 아이>를 읽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내 첫 아이가 태어나고 난 직후였다. 24년 전에 출간된 책이었고 책의 어떤 부분은 약간 구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펄 벅의 이야기에서 정말 큰 위안을 얻었다. 그녀는 나의 고통을 알았고 나는 그녀의 고통을 알았따. 그녀는 나에게 지지와 희망을 주었다. 오늘날 그리고 훗날에 다른 가족들에게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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