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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지 9 - 아아, 백제여! ㅣ 김정산 삼한지 9
김정산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성충은 죽기 전 육군은 탄현에서 막아야 하고, 수군은 백강의 기벌포에서 막아야 한다고 충심으로 아뢰었었다. 하지만 의자왕은 피를 토하며 죽어간 충신의 말을 믿지 않았고, 때문에 그가 일러준 두 곳을 경계하지 않았다.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땐, 다급한 나머지 자신이 귀양 보낸 흥수를 찾았고, 흥수마저도 성충과 똑같은 말로 방어를 논하자 총기를 잃은 의자왕은 그의 말도 믿지 않는다. 자신이 죄준 신하이니 앙갚음 하려는 마음에 정반대의 의견을 냈을 거라고 생각한 것. 딱 자신의 소갈딱지만한 믿음이었다. 자신이라면 그럴 테니, 당연히 성충도 흥수도 그럴 거라고 여긴 그 좁아터진 마음. 역시 백제가 살길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뿐이던가. 신라에 골품제가 있어서 뼈다귀마다 등급을 매겨 사람을 차별하고 나라의 앞길을 막았다면, 백제는 8성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권세가 나라의 앞길을 막았다. 나라가 위급해졌을 때 자신의 재물과 군사를 내어 나라를 돌보려고 한 자가 없었으니, 백제의 앞날은 이미 뻔히 정해진 결과였다.
19페이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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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동맹국도 스스로 망하는 나라를 돕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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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나라를 무슨 수로 일으켜 세울 것인가. 백제 전역의 군사를 모두 모은다면 족히 8만은 건질 수 있는 지경이었다. 전성기 때 20만을 넘었다지만, 지금도 나라를 방어하지 못할 숫자는 아니건만, 계백이 백제 마지막 결사대를 끌고 나갈 때 군사 숫자는 불과 5천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백제의 현주소였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은 망국 가야의 후예였다. 가야의 백성들이 신라에서 살면서 어떤 설움을 겪었는지 몸으로 체험하여 알고 있는 자였다. 때문에, 그는 백제로부터 버림받은 백성들의 마음을 돌볼 줄 알았다. 준비된 통일이랄까. 기울어 가는 나라와 차오르는 나라의 차이는 이토록 선명했다.
처자까지 죽이고 결사대를 이끌고 나온 계백. 10배 숫자의 신라군과 맞서 조금도 물러섬이 없던 그들. 700년 사직이 무너지는데, 이처럼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이가 없다면 얼마나 비참했을까. 조선왕조 500년 사직이 무너질 때 매천 황현은 자결을 택했다. 계백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김춘추는 작게는 죽은 딸의 원수를 갚았고, 크게는 삼한통일의 큰 발자국을 내디뎠다. 의자왕과 태자 융이 수모를 당하는 장면은 망국의 책임자로서 과한 정도는 아니었다고 본다.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렇지, 백성들의 고초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춘추의 마지막을 진평왕과 선덕여왕과 마찬가지로 암살로 마무리했는데, 이는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라고 본다. 그런 개연성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 알려진 바 없는, 지극히 소설적인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김춘추는 백제 멸망의 끝을 보고 젊은 아들 문무왕(김법민)에게 다음 세대를 넘겨 준다.
그리고, 666년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라는 큰별이 지고 만다. 그의 크기가 얼마만큼이었는지는, 그가 죽고 난 뒤 불과 2년 만에 무너진 고구려의 사직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철통같이 지켜지던 요동이 단숨에 뚫리고 마는데, 연개소문에게 불만이 있다면 그의 무자비함이 아니라 자식 농사를 잘못 지었다는 데에 있다.
668년, 고구려가 무너지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을 무려 20만 명이나 강제로 이주시킨다. 당시의 인구수가 어느 정도였는지 장담할 수 없지만, 무시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이는 고구려 내에서 장정의 씨를 말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당나라가 고구려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고구려는 그렇게 멸망했다. 이제 남은 일은 삼한 일통의 과제. 신라가 과연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는 10권에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