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지 3 - 살수에 뜨는 별 김정산 삼한지 3
김정산 지음 / 예담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삼한지 제3권은 온통 여수대전에 할애했다.  수나라 양제가 113만대군(통칭 2백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진격할 때에, 요동 8성의 성주들이 을지문덕의 명을 받들어 철통같이 성을 사수한 이야기, 거기에 살수대첩이라는 놀라운 전공이 이 책을 덮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서 보는 탓인지, 또 우리가 이긴 전쟁임을 알기 때문인지 읽으면서 통쾌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을지문덕 장군이 지략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연한 느낌뿐이었는데, 이번 편을 보면서는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장군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대가 앞서 있으니, 이순신 장군이 을지문덕 장군의 현신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다.  차이가 있다면, 이순신은 선조의 지나친 견제로 생고생을 하였지만, 그에 비해서 을지문덕은 영양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한몸에 받고서 싸웠으니, 주군 복은 더 있다고 하겠다.

병법에 이르기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하였는데, 수나라 수백만 대군을 맞닥뜨린 을지문덕이 펼친 전술이 딱 그 방법이었다.  그들이 추운 겨울에 군사를 일으켜 강물이 절반만 얼어 있을 때 도착한 점을 보고서 수양제에게 지략을 갖춘 책사가 없음을 간파하였고, 단순히 그 막대한 군사와 물량으로 상대를 압도시켜 항복시키는 것이 최대의 목적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을지문덕이 내놓은 첫번째 전술은 시간끌기다.  저들이 먼저 지치게 만들고, 군량도 떨어지게 만드는 것.  그렇게 시간을 벌면 오히려 지쳐 나가 떨어지는 것은 수나라 군사들이라는 것을 을지문덕은 바로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비책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성질 급한 장수들에 의해서 간혹 희생이 따르기도 했지만, 요동 8성은 거의 대부분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다.

뿐아니라 평양성까지 적을 끌어들이되 하루에 일곱번을 싸우고 일곱번을 후퇴하며 적을 지치게 만들었고, 굶주리고 지친 적들이 하룻밤 묵을 진지의 평지까지 없애어 편한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 점, 기습하는 시늉을 하여 그들의 밤을 불안하게 한 점 등등이 모두 적은 노력으로 큰 수확을 거둔 전술이라고 하겠다.

이에 비해서 수양제의 설레발과 삽질은 가히 코미디 수준이라고 하겠다.  자신에게서 모든 명령이 들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그의 명령으로 수백만 군사의 움직임이 더딜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적군에게 휴식시간을 내주었으니 이토록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을지문덕의 항복하겠다는 약속을 철썩같이 믿으면서 오히려 고구려의 논밭을 갈아주며 사면령을 내리고, 그 자리에 세울 총독을 정하는 등 어찌나 이른 김칫국을 마시는지 우스워서 지켜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고구려의 옛 땅을 오래 전 자신들이 다스렸었던 것을 전제로 땅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또 얼마나 우스웠던가.  이에 대한 을지문덕은 너희가 지나온 땅은 모두 너희 땅이라고 우기는 오만불손한 생각을 거두라고 호통을 치는데, 읽는 내가 속이 다 시원할 정도였다.

그밖에도 을지문덕의 행보에 놀란 일이 많았다.  수레 열대의 곡식으로 적진을 교란시킨 일이 대표적인데, 오래도록 굶주린 적을 자중지란으로 무너뜨리는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모두가 함께 굶을 때는 상관 없었지만, 적은 곡식만으로도 그많은 군사들의 심리를 흔들어 놓고 서로 싸우게 만드는 계책은, 그가 심리전에도 능숙한 장군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영양왕 앞에서 내관과 군사를 시험할 때의 일화도 놀랍다.  상과 벌 앞에서 평정심을 잃어버려 제 목숨을 무시한 책 욕심을 앞세우는 내관과, 능히 할 수 있음에도 벌이 두려워 일을 그르친 군사의 이야기를 보면서는 제갈공명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수대첩에서 30만이 넘는 군사 중 살아돌아간 자가 2천7백을 헤아리는데, 정말 눈부신 전공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도망가는 적들을 바로 따라붙지 못하게 만든 지혜도 남달랐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고양이를 무는 법!  퇴로를 열어줄 명분을 내주어 그들이 죽기 살기로 덤비지 못하게 만들었고, 또 한쪽 진영에는 빈정거리는 시를 보내어 두 장수의 마음이 어긋나서 내분이 일어나게 만들었으니, 을지문덕은 대단한 군사전문가라 할 수 있겠다.

그저 숫자만 믿고 무식하게 밀어붙였던 수양제는 흡사 영화 "300"에 나오는 페르시아 황제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의 살수대첩도 영화로 제작된다면 영화 300의 스펙터클을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231페이지에 나온 <사서>의 기록에 눈길이 간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을 위한 출사의 성대함이 임신년 수나라 군대와 같은 예가 없었으나,

또한 대군의 몰패함이 고구려 살수에서와 같은 경우도 유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을지문덕은 말년복이 부족했으니, 영양왕이 죽고 뒤를 이은 영류왕을 군주로 섬겨야 하는 데에서 벽에 부딪힌다.

을지문덕은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여기서 포기할 인물이 아니고, 그를 살려둔다면 장차 고구려의 큰 우환이 될 것이기에, 이참에 여세를 몰아 중원으로 말을 달릴 결심을 한다.  실제로 을지문덕 장군이 그같은 결심을 했는지 나로서는 확신할 길이 없지만, 적어도 광개토 대왕 시절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하는 데까지는 욕심을 부렸을 법하다.  이것은 연개소문에 관한 역사가 전해지는 중국 북경 내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계획했던 일은 더 이상 진척시킬 수가 없게 되었으니 바로 영류왕이 막 당나라를 세운 고조 이연에게 알아서 기면서부터 일이 틀어지고 만다.  당시 수나라가 망하고 중원 땅에는 각지에서 군왕이 출연한 때였고 민심도 흉흉했으며 군량도 충분치 않았던 때였는지라, 고구려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영류왕은 중국 내에서도 아직 제왕의 위치에 서지 못한 당나라에 너무 몸을 굽히고 들어갔다.  사실상 조선 효종의 북벌 계획보다도 을지문덕의 북진 정책이 더 설득력 있고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였는데,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당시 고구려가 전쟁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은 뒤였기 때문에 정복전쟁을 치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신라와 백제가 가만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영류왕처럼 쓸데없이 필요 이상으로 몸을 굽혀서 나라의 위신을 깎아먹는 일은 찬성할 수 없다.  과거의 조공 관계라는 것이 외교상의 관례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좀 더 대등한 입장에서의 양국 관계가 설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는데, 스스로 깎아내린 그 기회가 아쉽고 안타깝고 그런 마음이다.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 중 하나는 고구려 시조를 '추모왕'이라고 부르고, 광개토 대왕을 '호태왕'이라고 제대로 이름자를 살렸다는 사실이다.  많은 책에서 '주몽'이라고 적고 있지만, 광개토대왕비라는 1차 사료에 입각한다면 정식 명칭은 '추모왕'이 옳다.  작은 부분일 수도 있지만 사실 중요한 명칭인지라 작가가 어떻게 묘사할지 신경이 쓰였는데, 사료에 입각한 충실한 자세를 보여주니 작품에 대해서 더 믿음이 가고 마음에 흡족하다.

이번 3권에서는 커다란 전쟁을 보여주었기에 연도로 따진다면 몇 해에 걸친 이야기만 진행이 되었다.  차지하는 이야기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이야기만 할애되었다.  전체 10권 분량의 책을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전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의 맨 뒤에는 중요 전쟁이 있었던 지형도가 두장 나오는데,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앞서 이야기에서도 지도의 부재가 아쉬웠는데 전쟁을 쓰면서는 아무래도 필요하다고 작가 역시 생각했나 보다.

이제 을지문덕이라는 큰 장군의 이야기는 들어갈 것이고, 다음 세대의 주인공인 연개소문이 등장할 것이다.  다음 4권에서 연개소문의 활약과, 이제 성인으로 자라고 있을 김춘추, 김유신 등의 활약을 기대해 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