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이 침묵하는 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단 한 번도 책임을 묻지 못하고 다만 학살의 진상만을 밝힌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미 흙이 되어버린 주검의 살과 뼈들이, 오래전에 바람과 파도가 삼켜버린 비탄의 신음 소리들이, 구천을 헤매야 하는 그 수많은 영혼들이, 아니 그보다도 역사가, 그렇게 밝혀진 불완전한 진상만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중정기념당에 있는 장가이섹의 그 오만한 좌상 앞에서 고개를 들고 물었던 똑같은 질문을 2.28기념관에서 다시 묻고 있었다. 그건 2.28학살에 대해서이기도 했지만, 1980년 한반도의 남단 광주에서 벌어졌던 그 참혹한 학살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자행되었던 학살들, 나아가 세계사에 은폐되어 있는 세상의 모든 학살들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224-225쪽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전리품으로 1895년의 시모노세키조약을 얻었다. 이 강화조약으로 청은 일본에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랴오둥 반도, 대만과 펑후제도를 양도했다. 대만은 이때부터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 놓여야 했다. 일본의 식민지 쌍생아로서 조선과 대만은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다. 1916년까지 대만에서는 무장독립투쟁이 존재했고, 1928년에는 대만공산당이 독립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조선과 대만에 대해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무단통치와 문화통치, 일어 공용, 창씨 개명 등 조선과 대만에서 같은 시기 동일한 방법의 식민 통치가 행해졌다. 심지어 징용과 위안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적 운명은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항복을 받아들였을 때에조차 같았다.-225쪽
조선과 대만의 해방은 카이로선언(1943년 11월 27일)과 포츠담선언(1945년 7월 26일)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쌍생아로서 조선과 대만도 해방 후만큼은 그 운명이 같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 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어져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했다. 마찬가지로 카이로와 포츠담이 결정한 대만의 해방은 장가이섹 국민당군의 진주와 귀속을 앞두고 있었다. 1945년 국민당군은 북베트남에도 진주했는데, 구종주국인 프랑스가 돌아올 때까지란 단서가 붙어 있었다.(같은 이유로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했다.)-225-226쪽
그러나 카이로선언은 만주와 대만을 중국이 되찾을 것임을 명시한 선언이었고, 마지막 전시 회담 선언이었던 포츠담선언은 카이로선언을 재차 확인한 것이었다. 대만에 진주한 국민당군은 단순한 해방군이 아니라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돌아온 중국이었다.
포츠담의 자식임과 동시에 얄타의 자식인 조선 해방은 소련과 미군이 진주하면서 잉태된 비극이 한국전쟁으로 이어졌고, 대만의 중국 '귀속'을 보장한 카이로와 포츠담의 대만 해방은 2.28학살로 이어져야 했다. -226쪽
장가이섹의 국민당군이 대만에 진주했을 때 대만인들의 눈에 그들은 외성인이었다. 외성인들은 무궈(母國)를 자처했다. ...... 그러나 중국이 또는 중화민국이 대만의 무궈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 진주한 국민당군을 ㅗ한영했다고 해서, 대만인들이 중국을 무궈로 받아들였다고도 볼 수 없다. ...... 1945년 대만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대만인들이 원했던 것은 말하자면 자치였다. 대만의 지식인들은 근대적 국민국가인 중화민국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국민당 또는 장가이섹은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무궈 대신 또 하나의 약탈자와 식민 통치자가 되기를 너무도 간절하게 원했다.-227-228쪽
대만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북방어를 궈유(國語)로 강제하는 외성인들은 창씨개명과 일어를 강요했던 일제와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가 대만인들을 이류 국민으로 차별하고 멸시하기 위해 일어를 강요했던 것과 동일한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궈유의 강요는 궈유를 말할 수 없는 대만인들을 정치와 행정,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이류로 만들었다. 총을 들고 섬에 진주한 외성인들은 손쉽게 대만인들을 정치와 행정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제외시킬 수 있었다. -229쪽
대만인들이 계층을 막론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빼앗기고 완벽한 타자가 되고 있는 동안, 이른바 외성인들은 섬의 모든 것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 약탈은 사유재산과 공공재산을 가리지 않았다. ......부와 권력을 독점한 외성인들의 부정과 부패는 극에 달했다.-229-230쪽
대만인들은 경찰서와 헌병대로 몰려가 살인범의 처단을 요구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총으로 화답했다. 이전과 달리 대만인들은 항쟁의 거리로 나섰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인간이었다.-234쪽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던 항쟁의 기운은 장가이섹이 보낸 병력이 섬에 도착하면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참극으로 발전했다. ...... 그들이 섬에 발을 딛던 바로 그 순간, 부두를 지키고 있던 노동자들이 차가운 바닷물에 힘없이 쓰러졌고 앞바다는 금세 피로 물들었다. 상륙하는 순간 부두 노동자들에게 총을 갈기며 섬에 등장한 국민당군은 대만인들을 상대로 진압이 아닌 전투를 시작했다.-236쪽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에서 오관영과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조국을 말한다. 아마도 그는 2.28의 비극 속에 죽어간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바로 그 조국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에게 조국이 있었다면 그 조국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대만이란 섬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억압받는 자들이 지켜야 할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대만이라느 이름 외에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왔던 이 섬은 유럽 제국주의와 청, 일본 등 수많은 지배자들이 거쳐 간 식민의 땅이자 수탈의 땅이었다. 그들에게 조국이 있다면, 그건 근대적 의미에서의 국가도 아니며, 민족도 아닐 것이다. 그건 억압받는 자들, 섬에서 태어나 혈통을 이어온 사람들과, 관리와 귀족들의 수탈을 피해 대륙으로부터 섬으로 도망 온 사람들 모두, 단 한 번도 제 땅의 주인이 되어보지 못했던 사람들 모두가 꿈과 희망으로 보듬었던 미래란 이름의 조국이었을 것이다. -239쪽
장가이섹은 계엄령을 선포해 대만의 38년 계엄 시대의 문을 열었다. 1987년 해제될 때까지 대만은 38년 간 계엄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28항쟁 역시 그 기나긴 어둠의 장막 뒤에 묻혀 있어야 했다. 다시 또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2.28은 겨우 고개를 내밀고, 한때 항쟁의 주역들이 봉기를 호소했던 바로 그 라디오 방송국 건물에 기념관을 세우고 항쟁의 날에 군중들이 모였던 공원에 기념탑을 세울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학살의 주역 중 그 누구도 심판대에 오르지 못했다. 대륙의 극악무도한 쓰레기들을 대만으로 밀어내 섬에 피비린내와 악취를 선사한 중국공산당은 오늘 대륙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섬의 독립 불가를 윽박지르며 제2의 국민당이 되고자 하고 있다.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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