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 선조실록 - 조선엔 이순신이 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선조실록이 몹시 궁금했었다.  앞서 다른 실록의 내용도 모두 궁금했고, 알찼고, 만족스러웠지만 유독 선조실록이 궁금했던 것은, 손에 꼽을 만한 여러 인물들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앞 이야기는 율곡 이이에게, 그리고 뒷 이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각각 주인공이라고 친다면 내가 기다렸던 인물들도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줄을 타고 있던 선조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궁금했었다.

많이 기대한 것에 비하면 '뜻밖의' 사실들은 그닥 나오지 않았다.  이는 선조실록이 워낙 유실된 내용이 많았고, 수정선조실록으로도 그 부족분을 다 채울 수가 없었으며, 작가가 밝혔듯이 그런 이유로 현대의 저작물에 많이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기존에 접했던 자료들과 중복이 되어서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을 뿐, 이번 편도 몹시 유의미한 독서가 된 것엔 틀림이 없다.

선조가 왕이 되었을 때의 조선은 이중적 입장에 처해 있었다.  앞서 숱한 피바람을 몰아왔던 사화를 잠재우고 사림이 집권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집권 사림이 분열하였고, 오랜 기간의 평화로 인해 오히려 나태하고 늙어버린 왕조국가의 균열을 잔뜩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썩어가던 조선에도 희망의 싹들이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율곡 이이인데, 그는 동인과 서인을 화해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인물이었으며, 이황처럼 재야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의 폐해를 걷어내기 위해서 발로 뛰었던 사람이다.  비록 그의 의지와 달리 후세인들에 의해서 서인의 종주로 추종받았지만, 선조가 살아 생전 율곡에게 보여주었던 그 놀라운 신임은 다른 이에게서 다시 찾기 힘들었다.(물론, 율곡이 죽자 그 마음은 식는다.ㅡ.ㅡ;;;)

참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이는 애석하게도 명이 짧았다.  마은아홉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가 못 이룬 '경장'의 꿈은 곧 조선개혁의 좌절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기의 국제 관계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책에서는 북쪽에서 움트고 있던 여진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그들을 제외하더라도 쇠퇴해가는 명나라와 급부상한 일본의 움직인은 조선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어떻게 평정했는지, 또 그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의 세계정벌 야심은 허무맹랑하게 여겨왔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얕잡아 보거나 혹은 다른 상대를 추켜세웠던 것일까.  통계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판단하고 싶지 않은 나름의 선입견이 있었던 것을 책을 보면서 나직이 인정하게 되었다.(쓴웃음과 함께..;;;)

일본군의 진격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여지 없이 무너지던 조선군의 모습은 망신살 그 자체였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지배층들의 행태란 오늘날의 정치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은 그대로 망하지 않을 운명이었던 듯 하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을 너무 성웅으로 추켜세워 조작된 위인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7년 전쟁 동안에 이순신이 이뤄놓은 업적이란, 선조가 아무리 그를 미워하고 공을 깎아내리려고 했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과연 조선이 그때 망하지 않고 300년 넘게 더 버틴 것이 복이었겠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아무튼 조선은 망하지 않았고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거기엔 임금 선조나 그를 호종한 대신들의 공이 아닌 이름 없고 힘없고 보상 받지 못한 백성들의 땀과 눈물과 희생들이 있었다.  모든 백성이 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과연 그런 나라와 그런 역사가 있었을까.) 누구보다 박수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작은 힘을 보태었던 민초들과 또 가산을 털어가며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번 편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는 감정을 절제하며 진행되었다.  사실 강조하려고 든다면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절절하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대가 그러했고 또 역사적으로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작가는 일부러 감정을 아낀 듯했다. 그렇게 객관적인 눈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실록'을, 역사를 보여주려던 게 아니었을까.

온후한 성품의 그 유성룡도, 자신의 입장이 난처할 때에는 전쟁의 큰 책임이 있는 김성일을 비호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임금의 분노를 살까 이순신을 몰아세우던 모습도 보여주었는데, 좋게 말하면 인간적으로 느껴졌고, 솔직히 말하자면 좀 실망스러웠다. 사람은 다 비슷하구나... 하는 동정도 물론 들지만.

왕조국가에서 왕이란, 결국 출생에 따라서 정해지는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하늘이 내려주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이었다.  비록 정통성에 있어서 가장 취약한 임금이긴 했지만, 그래도 선조는 영리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형님들을 제치고 서자 중의 서자이면서도 왕이 될 수 있었다.  전쟁을 만나고 나서 보여준 그의 행적들은 그의 정통성의 문제가 아닌 그의 '그릇'과 '사람됨'의 크기를 보여주었다.  평화로울 때의 임금이었다면 혹 달랐을 지도 모르지만, 전쟁을 만난 조선에서 필요한 임금은  그같은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역설적이게도 그와 마찬가지로 정통성이 약한 광해군은 그와 달리 준비된 임금이었지만, 아버지 선조에 의해서 날개를 펴기 참 힘든 삶을 살았다.  그러니 앞으로 보아도 뒤로 보아도 선조는 영 점수를 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이순신과 원균에게 보여준 입장의 간극은 '열등감'이 얼마나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가를 확연히 보여준다. 

워낙 사건이 많았던지라 책이 빵빵한 두께를 자랑한다.  여전히 약해지지 않는 유머감각에 즐거웠고, 날카롭고 냉정한 지적들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작가의 건강 사정으로 책의 출간이 늦어졌다고 했는데 속히 건강을 찾아서 광해군 일기에 박차를 가해주었으면 한다.  이 책이 20권 계획이라고 했으니 이제 절반 지점에 닿았다.  작가는 더 열심히 달리고, 독자는 더 열심히 응원하기를...

덧글)신사임당을 심사임당이라고 표기한 것과, 연표에서 율곡 이이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약간의 옥의 티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