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 1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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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화된 세상에 나가보길 꿈꾸나 이 궁궐에서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할 처지이니 네가 부럽구나.

왕비의 목소리가 땀에 젖어가는 그녀의 귀에 흰 구름처럼 일렁거렸다.

-너는 사랑을 얻어 개화된 세상에 먼저 나가는 것이니라. 서러워 마라.

리진은 춤으로 나무가 되려 하고 불이 되려 했다.

-다른 세상에 가서 여태의 족쇄를 풀어버리고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익혀 새 삶을 가지거라.

리진은 춤으로 땅이 되려 하고 쇠가 되려 했다.

-조선의 여인으로 먼 길을 떠나는 건 네가 처음일 게야.

드디어는 물이 되려 했다.

-너를 보내는 이 가련한 나라를 잊지 말아라.-28쪽

씻어서 깨끗해지는 건 더러운 게 아니다. 그냥 뭐가 묻은 것이야. 누더기를 입은 사람을 더럽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러운 게 아니라 가난한 것이지. 가난한 것은 그 사람 허물이 아니다.-62쪽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블랑은 크게 세 번 놀랐다. 첫번째는 이 작고 외딴 나라에 자기들만 쓰는 말과 글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양반들이 주로 쓰는 청나라 문자 말고도 그들 고유의 문자가 있다는 것은 적잖은 놀라움을 주었다. 두번째는 서책 때문이었다. 초가지붕 안에도 서책이 있고 글을 모를 것 같은 여종들도 이야기책을 필사해가며 나눠 읽고 있었다. 세번째로 블랑이 놀란 것은 조선인들이 죄다 대식가라는 점이었다. 큰 밥사발에 가득 담긴 밥을 어린아이조차 단숨에 비워내는 걸 보고 그만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때로 어떤 이들은 아무 반찬이 없이도 그저 큰 밥사발의 수북한 밥을 물에 말아서 먹었다. 감자밥, 강낭콩밥, 골동반, 보리밥, 찰밥, 콩탕밥 등 밥의 종류가 수십 가지 종류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된 후 블랑은 조선인의 강인한 체구가 밥에서 온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배를 곯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먹을 기회가 찾아오면 한껏 엄청난 양을 먹어대곤 했다.-71-72쪽

그러나 두 사람이면 마음도 두 갈래인 모양이었다. 웅덩이 앞에서는 냇물을, 냇물 앞에서는 강물을, 강물 앞에서는 바다를 찾는 게 인간의 생리이기도 하다. 바다 앞에서도 물이 모자라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인간뿐인 것이다. -129쪽

블랑 주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콜랭의 마음이 과연 언제까지나 저럴 것인가. 열정에 차 있을 때의 맹세는 식으면 잊혀진다. 지금의 저 맹세를 어찌 믿겠는가. 선교라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와 살면서도 블랑 주교는 가끔 자신의 신분을 잊었다. 이따금 이게 옳은 일인가 싶은 회의에 빠질 때가 있었다. 이들은 이들의 방식대로 살게 두면 안 되는 것인가.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차지하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목재, 쌀, 석탄, 진주들을 프랑스로 실어날랐다. 그것이 제국주의다. 그 아래서의 선교활동이 과연 올바르기만 한 것인가. 그런 회의를 무마하기라도 하려는 듯 블랑 주교는 조선의 고아원에 지금보다 더 많은 지원을 해줄 것을 파리의 외방전교회에 청하곤 했다. 지금 리진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콜랭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만도 없는 게 주교의 마음이었다. 인도차이나의 진주나 상아 같은 아름다운 것들을 파리로 실어나르는, 떠나온 곳 프랑스처럼 혹시 콜랭이 리진을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깊은 우려가 들었다.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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