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7
이철수 지음 / 삼인 / 2006년 12월
구판절판


감기가 들어와 지내는지 꽤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같이 살자는 생각인지 나갈 생각을 않네요.
눈치도 주고 나가라고 약도 쓰고 했는데 뻔뻔한 녀석인지 아직 버티고 있습니다.
내 안으로 들어왔으니 그도 내게 속하는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건강하면 감기도 뭣도 못 온다니, 결국 내 탓이라 해야지요!
마음에 드는 병도 그렇겠지요?
들어오고 나면 나가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18쪽

분단보다 더 완강하게 우리를 가르는 장벽은 사회적 신분에 따른 사람대접의 벽인 듯합니다. 제 아이가 아직 어리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아빠, 나는 더하기는 되는데 빼기가 안 돼!"하더라구요. 그 뒤에는, "곱하기는 되는데 나누기가 안 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비를 닮아 셈이 서툰가보다 했습니다. 그런 능력으로도 무난히 공부를 마치기는 했으니 다행이지요. 제 둔한 아이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사회도 '나누기'에는 참 서툰 듯했습니다.
별것 아닌 는ㅇ력의 '차이'를 지나치게 과장해서, 기회와 보상의 극단적 '차별'로 몰아가는 교활한 지배의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세상은 갈수록 지옥의 모습을 닮게 될 테지요? 세상은 나눗셈의 시험을 계속 '과락'하는 중입니다. -20쪽

날씨 차가워서 뜰에 내린 눈이 오래 그 자리에 있다. 마음에 생긴 상처를 보는 듯하다. 한 오십 년씩 살고 나면 마음이 상처투성이겠지?
양지의 눈은 쉬 녹고 음지의 눈은 오래가듯, 마음도 그럴 거라! 집에서는 가장이라고, 직장에서는 상사라고, 속내를 드러내 하소연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인생이 대부분일 거라! 마음의 뜰에서 녹아내리지 않는 눈밭이 만만찮게 넓다고 느끼는 오십대의 송년이다.
겨울 깊어가고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해는 바뀌지만 시린 겨울은 아직 많이 남았다. 인생이 언제나 양지바르기를 바란다면, 그건 ㅇ나직 철이 덜 들었다는 뜻이겠지? 음지 양지에 한눈파느라고 해 떨어지는 것 잊고 살아서도 안 되는 게 인생 아닌가? 기쁘고 슬픈 일, 아프고 보람 있고 행복했던 것 두루 우리 재산이라고 생각해야, 연말 손익계산이나 인생 결산이 허탈해지지 않을 것 같은데?-24쪽

에보 모랄레스라는 사람을 좀 연구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볼리비아의 대통령 당선자, 사상 첫 인디오 출신 대통령. 아직은 그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당선자 자격으로 외국 순방 길에 올랐는데, 알파카 스웨터 한 벌로 네 나라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는 가십성 기사를 보고 호기심이 동했습니다.
외교적 결례라는 의견도 있다지만, 그보다는 신선하고 유쾌하다는 느낌이 더 컸습니다. 대통령과 털 스웨터! 재미있어 보입니다.
진골, 성골 출신의 대통령이라면 이렇게 파격적인 발상을 하기는 어려웠을 테지요? 그런 마음가짐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길을 열어주는 '괜찮은 권력'이 되었다는 소식도 듣게 되면 좋겠네요. -40쪽

운동화 한 켤레 값이 무서워 고민하는 수녀님을 만나면 세상이 문득 밝아 보입니다. 진료비 2만 원이 너무 부담스럽다는 신부님을 봐도 세상이 환해집니다. 먼 길 걸어오시는 스님을 만나면 머리카락 없는 얼굴이 그대로 연꽃등이지요. 값싼 점심을 청하는 저명인사, 다시 보게 됩니다. 이름과 제복이 존재의 밝은 빛을 가려버리지 않아서 밝습니다.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오신 분들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 가운데 제일 가슴 아프게 듣는 이야기는, "한국인들은 친구건 가족이건 모여 앉으면 돈 이야기만 한다"입니다. 영혼의 안부보다 재산의 안부를 더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건가요? 존재의 촛불을 꺼뜨리지 않게 되기를......, 돈이 우리를 삼키게 되지 않기를.-48쪽

-제가 좋아하는 글쟁이는 원고료가 너무 많으면 그렇게 많은 돈은 못 받는다고 사양하신다네요. 원고지 한 장 메우는 값이 양파 한 수레와 같으니 손끝을 까딱여 받는 수고비로는 용납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라고 했답니다.
-받아서, 어려운 데 주지.... 하시는 이도 계십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정답을 찾기가 어려운 문제인 듯합니다.
-제 손으로 지은 쌀을 어려운 이들을 위한 시설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유기농 쌀을 시설에 보내게 된 일을 두고 누군가 물었습니다. "일반 쌀을 사주면 곱절은 보낼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있지요. 터무니 없는 말씀은 아닌 듯도 합니다. 하지만, 제 아내의 대꾸가 좀 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은 좋은 쌀 좀 먹으면 안 되나요?" 해답은 없지만, 마음은 통한 셈입니다. 그렇게, 살아보는 거지요, 뭐.-98쪽

손은 쓸데 없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묵묵히 일할 따름.
손은 움켜쥐는 힘이 펼치는 힘보다 셉니다. 움켜쥘 때 이기적이라면, 펼칠 때 이타적입니다. 손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일하는 손은 정직하지만, 얻은 것을 감추는 것도 손이 하는 일입니다. 나눔은 손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나눔은 부끄러움을 씻는 일이기도 합니다. 두 손 가득 움켜 내게로 당겨오지 않고 들어 이웃에게 드리면 넉넉한 나눔의 손길이 됩니다. 거룩한 데 올리듯 높이 들어 나누는 손길은 나눔의 예배이기도 합니다.-122쪽

나누는 손이 아름답지만, 가난하여 나눌 것이 적은 손은 순정합니다. 가난보다 더 깊은 기도는 없음을 빈손이 알려줍니다. 일하는 손도 아름답지만 ㅁ쉴 때 쉬면서 그 손을 조용히 살피는 성찰의 시간도 소중합니다. 일만 하다 죽으라는 인생 아닌 것을 빈손의 묵묵함을 통해 다시 깨닫습니다. 몸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살아가는 손에게 몸이 하는 대답도 있어야 합니다. 존재가 두루 무상해서 하루하루 나이 먹다 보면, 힘없이 앙상해진 손을 가슴에 품어 안고 살아온 날들 되돌아보게 될 테지요. 손이 기억하는 한 평생이-선한 것이건 악한 것이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난을 위해서 쉬지 말고, 맑고 투명한 존재와 마음을 위해 쉬는 손을, 나태해진 손이 아니라 성찰과 기도로 간절해진 손을 꿈꾸어야 합니다. 마음 곳간이 넉넉해지면 손은 가난 속에서 오히려 여유로워집니다. 그것을 일컬어 청빈이라 합니다. 청빈의 서늘한 손끝을!-124쪽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에 사람들 발걸음이 바쁩니다.
비에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도 여유작작한 건 어린 학생들뿐입니다.
이미 젖은 몸이다! 오려면 오고, 가려면 가라! 하는 표정으로, 비 젖은 길을 걷는 아이들이 예뻐 보였습니다. 더위도 피해 살고, 햇볕도 피해 살고, 추위도, 눈 비도 피해 삽니다. 불편한 인간관계도 피해 살자고 드는 세태지요? 남는 건 외로움뿐!-134쪽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시설에서 뭘 좀 거들어달라고 연락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각별히 마음 써야 할 소외된 사람들로 손꼽아야 할 상대가 그이들입니다. 우리 눈에도 선 사람들이지만, 그이들 입장에서 우리 사회는 더 할 수 없이 낯설고 물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땅일 테지요? 여기 와서 험한 일하며 뿌리내리고 살자면 겪게 될 아픔과 슬픔 그리고 노여움도 많을 것 짐작이 갑니다. 대단한 도움을 주지 못해도, 마주치면 웃어주는 일이야 못하려고요?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것 분명합니다. 오래 함께 살아야 할 새 이웃입니다.-210쪽

세상에 밥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있나요? 밥 못 먹고 사는 사람 있나요? 또 다른 가난이 있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갈라놓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밥 한 그릇이 없어 허기졌다는 소식은 드물어졌습니다. 지난 가을 비바람에 드러누워버린 벼 포기를, 긴 막대 끝으로 들어 올려가며 벼 베기 하는 논을 보았습니다. 한 가마에 고작 14만원 하는 쌀값에도 다 익은 벼 이삭을 논바닥에 깔아버릴 수는 없다는 가상한 농심의 발로인가보다 생각했습니다.
배불러지고 보니, 언제고 어디서고 그저 있는 것이 쌀이려니 여기는 분위기가 흔해졌습니다. 자동차 생산 공장 파업이 국가적 관심사가 되고, 전철 운행이 한 이틀만 불편해도 국민들이 아우성이지만, 쌀 수입이 자유로워져 값싼 외국 쌀이 쏟아져 들어온다는데 세상은 나 몰라라!
그 많던 담배 농사는 행방이 묘연해졌지요? 고추 농사도 지어봐야 헛수고지요? 배추 농사도 헛발질이지요? 참깨, 콩, 마늘...... 어느 것 하나 제값 받고 팔 농사가 아닙니다. 농산물 수입 개방 탓입니다. 농약, 방부제 칠갑을 한 정체 모를 먹을거리에 당해도 크게 당할 겁니다. 내 땅의 물, 햇살, 바람은 어디다 쓰려고 농사를 다 버리자 하는 것인지? 기계 팔아 쌀 사다 먹으면 크게 망합니다.-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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