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21에 쓴 글입니다.

 



 미국의 슈퍼맨은 지구를 구한다. 하지만 한국의 금나라(박신양)는 사채 빚에 시달리는 서민을 구한다. 물론 금나라는 하늘을 날지는 못한다. 그는 배가 고파 쓰레기를 뒤져 먹고, 돈을 돌려받기 위해 조폭들에게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다. 그러나, 금나라는 그렇게 몸을 굴려 신용불량자와 노숙자들이 드글거리는 '낮은 곳'으로 임하여 슈퍼맨도 해결 못할 사채 빚을 대신 갚는다. 엄밀히 말해 SBS <쩐의 전쟁>은 사채에 관한 드라마가 아니다. 사채 빚을 진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종의 '슈퍼 히어로'물이다. 잘나가던 펀드 매니저 금나라가 사채업자 마동포(이원종)에 의해 부모가 죽고, 전설적인 사채업자 독고철(신구)의 지도를 받아 뛰어난 능력의 사채업가 되는 과정은 곧 슈퍼 히어로의 탄생 과정과 일치하고, 육체적인 초능력은 없지만 악성 채무자에 대한 가짜 장례식을 치러 부조금을 받아 빚을 해결할 정도로 뛰어난 금나라의 두뇌와 조폭들의 폭력에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는 '사채업자 버전'의 초능력이다.




 그래서 <쩐의 전쟁>의 재미는 금나라가 자신의 개인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뛰어난 능력으로 어떻게 '악당'들을 때려잡고, 서민들을 구하느냐에 있다. 매 회 사채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가진 자들에 맞서 싸우는 금나라의 활약상은 에피소드마다 문제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미국식 슈퍼 히어로물의 구성과 닮아 있다. <쩐의 전쟁>은 한국 드라마가 미국식 장르 드라마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을 보여준다. MBC <히트>와 SBS <외과의사 봉달희> 등 일련의 전문직 장르 드라마는 설정의 디테일과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성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서 의사들은 더 이상 '병원에서 연애'하지 않고 병원에서 메스를 들 수 있었고, <히트>는 남녀 주인공의 멜로드라마보다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땀을 흘려가며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이 더욱 재미있었다. 반면 <쩐의 전쟁>은 사채업계의 디테일을 깊숙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금나라를 제외한 사채업자들이 돈을 돌려받는 방식은 폭력이나 신체 포기각서 등을 이용한 협박 밖에 없고, 조폭으로부터 돈을 돌려받기 위해 조폭에게 가짜 정부 요원을 등장시키는 설정은 현실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만화적이다.




 대신 <쩐의 전쟁>은 서민들과 떨어져 있는 전문직 대신 서민들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을 내세워 그들에게 밀착, 서민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끌어낸다. 노숙자 분장을 하고 거리를 굴러다니고, 쓰레기를 주워먹는 박신양의 연기가 화제가 되는 것은 단지 연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드라마가, 그리고 회 당 몇 천만원을 받는 톱스타가 지금 서민들이 가장 공포스러워하는 현실들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언제 어떻게 금나라처럼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가진 서민의 정서가 몸을 사리지 않는 박신양의 연기를 통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시청자들은 금나라가 독고철에게 얼마 안되는 시간동안 수업을 받고 곧바로 초인적인 사채업자가 된 것에 대한 현실성을 따지는 대신, 박신양에게 감정 이입 돼 그가 여러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을 응원하기 시작한다. 이는 한국 드라마의 '대중성'의 기준에 대한 흥미로운 변화다. 같은 시간대에 방영하는 MBC <메리 대구 공방전> 역시 돈 없는 청년 실업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메리 대구 공방전>은 그 백수의 시절을 그들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기 위한 유쾌한 시간으로 바라보고, 상식을 뛰어넘는 재치있는 대사와 상황 설정으로 그려낸다. 그것은 <메리 대구 공방전>이 다른 한국 드라마와 차별화되는 빛나는 부분이지만, 지금 다수의 시청자들이 선택한 것은 백수의 즐거운 언어유희대신 신용카드로 자기 손목을 긋고, 금나라가 동생에게 "돈 벌어서 반드시 구해줄께"라고 말하는 독하고 절절한 정서다. 드라마에서 지금까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밑바닥'의 정서가 공중파 드라마에 등장한 것이다.




 <쩐의 전쟁>의 원작이 되는 동명의 만화도 대본소 만화를 주로 작업하던 박인권 작가가 스포츠 신문을 통해 발표한 작품이었다. 대본소와 스포츠 신문에서 남성들을 상대로 펼쳐지던 거칠고 질퍽거리던 세계가 공중파 드라마로 치고 올라온 것이다. <쩐의 전쟁>에서 조폭이나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릴 수 밖에 없었던 서주희(박진희)를 제외하고 금나라가 돈을 돌려받는 사람들이 구걸로 돈을 벌며 사채 빚은 일부러 갚지 않는 거지, 명품에 중독된 여성 등 서민의 시선에서 '얄미워' 보이는 유형의 사람들이라는 점은 <쩐의 전쟁>이 누구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쩐의 전쟁>이 6회만에 시청률 30%를 넘기는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것은 시청자들, 더 넓게는 한국인의 정서가 지금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강남의 고급 의류 매장에서 마음껏 옷을 갈아입는 신데렐라를 꿈꾸는 재벌 2세의 이야기를 지나, 이제 그들을 구원해줄 '사채 히어로'의 등장에 열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쩐의 전쟁>의 대중성을 돕는 요소지만, 반대로 <쩐의 전쟁>의 완성도를 저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원작의 금나라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주는 슈퍼 히어로라기 보다는 기발한 방법으로 돈을 돌려받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함이 더 돋보이는 캐릭터였다. 반면 공중파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금나라는 자신이 사채 업자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금나라는 사채 빚에 시달리는 사람을 구해주려면 사채업자가 돼야 하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이 현실적인 딜레마는 금나라가 사채 빚에 시달리는 채무자들을 멋지게 구해주는 비현실적인 쾌감과 상충된다. 그래서 <쩐의 전쟁>은 금나라의 고민을 깊게 다루는 대신 금나라가 해결하는 개별적인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추고, 금나라에게 돈을 갚도록 요구하는 악덕 사채업자도 현실적인 위협을 가하기 보다는 가끔씩 나타나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 정도로 묘사한다. 그래서 개별적인 에피소드는 흥미롭지만 드라마 전체에 흐르는 캐릭터의 스토리는 힘이 약하고, 금나라와 라이벌 관계를 이루는 하우성(신동욱)은 금나라와 대립하는 장면 외에는 자체적인 생명력을 갖지 못하고 작품에서 겉돈다.




 <쩐의 전쟁>은 사채업에 대한 유혹에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요즘 서민들의 고단함을 드라마에 끌고 와서 성공했지만, 사채업의 현실을 단순화시켜 '정의로운 사채업자'를 정당화 시킨다는 점에서 조폭을 미화시켰던 기존의 조폭 코미디가 가진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과연 한국 드라마는 이 한국적인 '사채 히어로'를 통해 단순한 분풀이성 쾌감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지금 한국의 '처절한' 현실을 반영하는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글 : 강명석(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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