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최민우.강승민.김호정] 뮤지컬 동호회 '레씽 뮤지컬'의 운영자 박영준(37)씨는 올 연말께 동호회 내 '공연팀'과 함께 창작 뮤지컬 한 편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그는 "지난 2년간 모두 여섯 번 아마추어 공연을 했다. 공연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기존 공연을 그대로 따라하다 보니 조금 답답했다. 그래서 우리끼리 하나 만들어보자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비록 유명 뮤지컬처럼 잘 나오진 않겠지만, 그러면 어떤가. 하는 것 자체를 즐기면 된다"고 말한다. 뮤지컬 관객이 진화하고 있다. 그저 여가 활용으로 뮤지컬 한 편 슬쩍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다. 중복 관람은 기본이요, 뮤지컬을 공부하기도 하고 심지어 제작에까지 나서고 있다. 소비와 생산을 동시에 하는 이른바 프로슈머(Prosumer)의 행태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순천향대) 교수는 "전 세계 어디에도 한국처럼 능동적인 관객은 없다. 최근 한국 뮤지컬의 빅뱅은 이런 프로 관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푹 빠져서

같은 공연 100번 넘게 본 열성팬 수두룩

#1단계 - 몰입

뮤지컬 관객 진화의 출발은 '보고 또 보고'식의 중복 관람이다. 대표적 작품은 뮤지컬 '헤드윅'. 2005년 4월 초연된 이 작품은 열렬한 팬들의 중복 관람 덕분에 2년째 장기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10번 넘게 본 관객은 500여 명, 100번을 넘게 본 관객도 50여 명에 이른다. 150회 이상 봤다는 회사원 손성희(30)씨는 "지금껏 '헤드윅'에 출연한 남자 주인공이 모두 9명이다. 배우마다 색깔이 매우 다르다. 또한 공연의 속성상 아무리 같은 배우라도 매번 다른 느낌이 온다. 한 달에 '헤드윅'보는 데만 50만~60만원이 들지만 그만한 가치를 느낀다"고 말한다.

3월부터 공연된 '쓰릴 미'도 매니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품.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 30회를 넘게 본 관객이 생겨날 정도다.

현재 왕성히 활동 중인 뮤지컬 동호회는 10여 군데. 동호회별로 적게는 5000명, 많게는 2만 명까지 회원이 있으나 1주일에 최소 한 편 이상 보면서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이른바 '뮤지컬 폐인(廢人)'은 3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뮤지컬 관람이란 오프라인의 경험을 토대로 온라인상에서 굳건한 연대감을 갖고 여론을 주도해 뮤지컬 흥행을 좌우하는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성장했다. 한 뮤지컬 제작사 관계자는 "이들은 주로 초반에 작품을 관람한다"며 "이들의 입소문은 온라인을 통해 급속도로 퍼지기 때문에 제작사로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부하다 …

전문가 초빙해 노래.춤 배우는 모임 활발

#2단계 - 학습

동호회 '송 앤 댄스'회원 10여 명은 지난 1년간 세계적인 뮤지컬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의 음악을 함께 공부했다. 가사를 한국말로 번역해 음미하고, 음악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탐구하는 등 사실상 연구에 가까운 작업을 했다.

이 동호회엔 회원 20여 명이 함께하는 노래 소모임도 있다. 뮤지컬 배우를 모셔다 직접 강의를 듣고 정기적으로 발표회를 갖는다. 지난 5년간 뮤지컬 공연이 없는 매주 월요일마다 빠짐없이 모임을 가졌다. 최근에 배운 노래는 겨울나그네 중 '캠퍼스의 봄'. 조만간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명곡들도 익힐 예정이다. 회원인 이미옥(30)씨는 "지난 겨울에 미스사이공.지킬 앤 하이드 등의 주요 노래들만으로 발표회를 열었다. 연습할 땐 힘들지만 '이 순간만큼은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다'란 느낌 때문에 놓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뮤지컬에서 빠질 수 없는 춤을 전문적으로 배우기도 한다. 동호회 '웰컴 투 브로드웨이'엔 탭댄스를 배우는 '탭풍'이란 소모임이 있다. 춤은 노래와 달리 여러 명이 함께 동작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회원 간의 호흡을 맞추는 것이 우선이다. 윤희경(28)씨는 "얼마 전 유명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오프닝 탭댄스를 익혔다. 요즘엔 뮤지컬을 봐도 춤만 눈에 들어온다. 사뿐사뿐 추다 보면 마치 내 몸이 악기가 된 것 같아 행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아예 배우로

동호회가 직접 작품 만들어 발표회까지

#3단계 - 직접 제작

'레씽 뮤지컬'은 2005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여섯 번 공연을 가졌다. '싱 레가토''가스펠' 등 고전이 주 레퍼토리였다. 지난해 10월엔 서울 송파 청소년회관에서 '아이다' '루나틱' 등 유명 뮤지컬의 주요 장면만을 추려 공연도 가졌다. 이틀간 총 4회 무대를 열었고, 출연진만 40여 명에 이르렀다. 이 공연을 위해 회원들은 4개월 전부터 매주 한 차례 모였고, 공연 한 달을 남기고는 거의 매일 연습하다시피 했다.

음악은 제작사로부터 건네받기도 했지만, 구하기가 어려울 경우엔 자체적으로 녹음을 했다. 비록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이었지만, 300여 석의 객석은 4회 내내 꽉 찼다. 몇몇 열성적인 회원은 이참에 아예 전문 뮤지컬 배우로 나서려고 한다"고 말했다.

특정 배우를 위해 콘서트를 열기도 한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서울 대학로 소극장에서 열린 '김다현과 음악친구들'이란 공연은 뮤지컬 배우 김다현씨를 좋아하는 팬 손민정(36)씨가 만든 것. 기획.섭외.홍보 등 제작의 모든 걸 손씨 혼자 힘으로 해결해 김씨가 등장하는 단독 무대를 꾸렸다. 공연 기획사에서 선뜻 열지 않는 '돈 안 되는 공연'을 직접 만들어서 본 셈이다. 공연 당일엔 객석 100석이 꽉 찼다. 손씨는 "고등학교 교사이던 나를 거리에 포스터를 붙이게끔 만든 건 뮤지컬에 대한 열정"이라며 "차려진 상을 받아먹기만 하던 뮤지컬 팬덤 문화는 이제 옛날 이야기"라고 말했다.

최민우.강승민.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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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5-1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앤댄스는 어찌나 회원관리가 철저하던지..^^;;;
그나저나 쓰릴미 봐야 하는데...공연 연장 되어서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