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12월 14일 새벽,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왕의 대열은 남문을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다.  산성에 갇힌 47일 동안 조선 조정의 싸움은 거의 대부분 언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임금은 삼남에 친서를 보내 근왕병이 달려오기를 재촉했고, 청군 진영으로 사신과 서찰을 보내 물러가 주기를 간청했고, 명나라로 국서를 보내 원병을 호소했다. 

모든 언어 행위는 무위로 돌아갔다.  지방 의병과 관군들은 남한산성에 도착하기 전에 적을 맞아 궤멸되었다.  청의 압박으로 궁지에 몰린 명은 조선에 원군을 보낼 수 없었고, 청군 진영으로 들어갔던 사신들은 "살고 싶으면 투항하라"는 청 태종의 협박을 왕에게 전할 뿐이었다.

성밖을 기마부대와 포병부대를 선봉으로 삼는 25만 명의 적병이 포위하고 있었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너희가 살고 싶으면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해서 황제의 명을 받으라. 
너희가 죽고 싶거든 성문을 열고 나와 결전을 벌여 황천의 명을 받으라!"

이것이 남한산성 안으로 들여보낸 청나라 군대의 투항권유서였다. 
죽을 길과 살 길은 모두 성문 밖에 있다. 성 안에는 죽을 길도 살길도 없다.

남문은 정문임으로 죄인은 드나들 수 없다.  너희 임금은 마땅히 서문으로 나오라!(청군 장수 용골대의 통고)

1637년 1월 30일 새벽에, 인조는 세자를 앞세우고 서문을 나왔다.
농성은 희망이 없었고, 기약이 없었고, 대책이 없었다.
농성은 전투도 아니고 투항도 아니었다.  농성은 다만 대책 없는 버티기였을 뿐이다.

왕은 곤룡포를 벗고 청나라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것이 청 태종이 요구한 투항의 패션이었다.

청군은 삼전 나루터에 수항단(항복을 받아들이는 제단)을 쌓아놓았다.  수항단은 3층이었다.  청 태종은 맨 윗단 위에 의자에 앉았고, 조선 왕은 두번째 제단에서 무릎을 꿇었고, 세자는 첫 번째 계단에서 무릎을 꿇었다.  조선의 군신들은 마당에 무릎을 꿇었다.  왕은 청태종에게 술을 따라올리고 네 번 절했다.  세자와 군신들도 따라서 절했다.  왕이 절할 때 풍악 소리가 높아졌고, 조선 여자들이 소매깃을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청 태종은 조선 왕에게 백마 한 마리와 옷 한 벌을 상으로 주었다.

11개의 항복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다.  그날, 임금은 버리고 떠난 한양의 대궐로 돌아갈 수 있었고, 청 태종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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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2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사 책 한 귀퉁이에 적어두었던 메모를 옮겨 본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반가웠던 것은 이 짧막한 한 토막의 글이 너무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