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라미닌 > 막 11:1-11(3) 주께서 쓰시겠다.

 

막 11:1-11(3) 주께서 쓰시겠다.


신약성경은 로마시대에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로마시대를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제국은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환영하기 위하여 몇 달 또는 몇 주 전부터 환영 준비를 하였다고 합니다. 개선장군이 화려하게 장식된 백마를 타고, 호위병에 둘러싸여 개선문으로 들어오면 로마시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주피터 신전까지 바닥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주변에는 아름다운 꽃과 화분이 장식되어 있었고, 꽃가루가 하늘에 흩날렸고 각종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장군 휘하의 군단병력이 오와 열을 맞추어 씩씩하게 따라 들어왔고, 전쟁터에서 빼앗은 갖가지 진귀한 전리품들이 햇볕에 반짝거렸고, 노예로 사용될 포로들이 힘없이 끌려왔습니다. 로마시민들은 개선장군의 환영행렬을 보며 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초라한 입성행렬

개선장군의 환영행렬과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규모가 차이 났습니다. 개선장군의 환영행렬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으나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개선장군의 환영식은 몇 달 또는 몇 주 전부터 준비되었으나, 예수님의 환영식은 즉석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개선장군은 화려하게 장식되고 잘 훈련된 백마를 탔으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겉옷을 안장 삼아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 그것도 아주 볼품없는 새끼 나귀를 탔습니다./ 개선장군 곁에는 창검으로 무장한 호위병들이 둘러서 있었으나, 예수님 곁에는 지금은 신나 있지만 나중에는 도망칠 겁쟁이 제자들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개선장군은 붉은 양탄자 위를 지나갔으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존경의 의미로 펼쳐 놓은 떨어지고 헤어진 겉옷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개선장군 주변에는 아름다운 꽃과 화분이 장식되었고 꽃가루가 하늘에 흩날렸고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으나, 예수님 주변에는 사람들이 귀한 사람을 환영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기도 하였고 손으로 흔들기도 하였습니다./ 개선장군 뒤에는 진귀한 전리품이 실려 왔고 노예로 사용될 포로들이 끌려왔으나, 예수님 뒤에는 예루살렘에서 명절을 보내려는 시골 사람들이 앞서기도 하였고 뒤따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입성행렬

그러나 개선장군의 환영행렬과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성격이 달랐습니다. 개선장군의 환영행렬은 말을 탄 전쟁영웅을 환영하는 행사였습니다. 개선장군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적군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습니다. 로마시민들의 환호 속에는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피맺힌 절규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전쟁은 승리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선장군의 환영행렬은 사람이 사람을 환영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준비된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나귀를 탄 평화의 왕을 환영하는 행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슥9:9) 사람들의 찬송 속에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염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예언된 행사였습니다. 개선장군의 환영행렬은 화려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피를 묻힌 죽음의 행렬이었다면 예수님의 입성행렬은 초라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릴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입성행렬을 위하여 

예수님의 입성행렬을 위하여 숨은 봉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전에 제자 둘을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2-3절)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제자 둘을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이 베다니 마을에 가 보니 예수님 말씀대로 새끼 나귀가 문 앞에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줄을 풀었더니 어떤 사람이 (누가복음 19장 33절을 보면 나귀 주인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주인은 나귀를 가져가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귀가 어디 있었는지 주인이 무슨 말을 할는지 알고 제자들에게 대답할 말까지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 모두 나옵니다.(마21:1-11;눅19:28-40;요12:12-19) 중요하기 때문에 모두 나오는 겁니다. 그렇지만 나귀를  빌려준 주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베다니 마을에는 예수님의 친구인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요11:1)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베다니 마을에 들리곤 하셨습니다. 나귀 주인은 한번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을 겁니다. 나귀 주인이 예수님을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모르지만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에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선선히 내주었습니다. 고대시대에는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동물은 신성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민19:2;신21:3;삼상6:7)


주님은 주인이고 우리는 청지기

우리는 주께서 쓰시겠다는 문장 중에서 ‘주’라는 단어에 주의해야 합니다. 주는 헬라어로 ‘퀴리오스’입니다. 주님은 주인이고 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주인이고 나는 종이기 때문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 라는 뜻입니다. 나의 시간도 주님의 것이고 나의 물질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나를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시간도 내 것이고 내가 가진 물질도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나귀 주인이 나귀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어주지 않았다면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나귀를 빌려서 타셨을 겁니다. 우리는 3절 하반 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난외주를 보면 즉시 돌려보내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 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고 기록하였고 공동번역 개정판은 “주님이 쓰신다 하고 곧 돌려보내실 것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고 돌려주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어 놓으면 주님께서 쓰시고 돌려주시겠답니다. 물질을 내어 놓으면 주님께서 쓰시고 돌려주시겠답니다. 주님은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맡겨 놓으셨다 가 필요하시면 달라고 하시고 쓰시고 나면 다시 돌려주시겠답니다.


예전에 시골에는 수동식 우물펌프가 있었습니다. 물을 한 바가지 퍼 다가 안에 넣고 펌프질을 하면 우물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만약 물이 아까워 한 바가지를 넣지 않는다면 우물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한 바가지의 물을 퍼 넣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가지고 귀하게 사용하시고 돌려주십니다. 나귀 주인이 새끼 나귀를 내주었을 때 주님은 영광스럽게 사용하시고 돌려주셨습니다. 소년이 도시락을 내주었을 때 주님은 성인남자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나 거두셨습니다. 성경에는 나귀를 빌려준 주인과 도시락을 제공한 소년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빈 공간에 우리들의 이름이 기록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어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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