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에 띄운 편지
발레리 제나티 지음, 이선주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스라엘에서 성장한 프랑스 작가가 쓴 탓인지, 이 책은 영화같고 지극히 소설같은 전개를 취하면서도 또 지독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17세 소녀 탈은 어느 날 자기 옆집이 테러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도 평화가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편지 한통을 쓴다.  병 속에 담겨진 편지를 가자에서 군복무중인 오빠를 통해 바다에 띄워달라는 것.

오빠는 바다 대신 모래 위에 병을  꽂아 놓았고, 그 편지는 가자에 사는 20세 청년 나임의 손에 들어간다.

탈이 남긴 메일 주소로 2주 뒤에 나임은 메일을 보내어 그녀의 치기어린 행동을 양껏 비웃는다.  그러나 어떤 형식으로든 돌아온 답장에 탈은 기뻐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무시당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계속 메일을 보낸다.  끝끝내 무답장으로 일관해 오던 나임도, 탈이 95년에 암살된 이자크 라빈의 이야기를, 그때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느꼈던 절망에 대해 진실되게 이야기하자 끝내 답장을 보내게 된다.  여전히 빈정거렸지만 적어도 그녀가 편지를 보내는 진실된 마음은 인정한 것.

그렇게 둘 사이에 이메일을 통한 편지가 계속 오간다.  탈은 자신의 꿈인 영화감독에 관한 일을, 또 자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남자친구, 학교 이야기 등을 정감있게 얘기하지만 나임은 자신의 나이도 가족도, 무엇 하나도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다.  이제는 답장을 보내긴 하지만 오픈 마인드는 소원해 보인다.

그러다가, 팔레스타인 쪽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한다.  탈은 혹시라도 나임에게 문제가 생겼을까 봐 애태우고, 꽤 시일이 지나고 나임은 자신이 무사함을 알린다.  내내 차가운 듯 표정을 감추지만, 사실 나임은 끊임없이 그녀를 떠올리며 거기에 휘둘리는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 이스라엘의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 받는 사실이 알려질까 봐 늘 두려울 수밖에 없고 이메일은 확인하는 즉시 지워버린다.  심지어 그녀가 보낸 그녀의 사진마저도.

그리고 이제 정반대의 사건이 터진다.  이스라엘쪽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고 지점에 그녀가 가기로 되어 있었던 것을 알았던 나임은 걱정으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몇번이나 이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답장이 왔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사고 현장에 있었지만 화는 면했던 탈은, 그러나 사고로 인한 충격으로 이미 넋이 나가 있는 터였다.

평화를 갈망했던 그녀는 '테러'의 진면목을 눈으로 확인하고서 그들이 그토록 원한다 하여도 너무나 멀 수밖에 없는 현실의 평화를 실감하며 절망하고 만다.  이제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는 것은 나임의 몫이 된다.

두 사람은 채팅을 하면서 좀 더 마음을 열게 되고, 탈은 가족들의 도움으로 혼란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그런데 여기서 일종의 반전이 생긴다.  그녀는 두 사람이 우연히 알게 된 사이라고 믿었는데, 어느 정도는 강제력이 동원된 사이였다.  오빠는 그녀의 편지를 먼저 읽어보았던 것이고, 편지가 든 병을 일부러 적당한 지점에 꽂아놓고 누군가가 집어가기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임이 편지를 읽는 것까지도 목격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일종의 우연이었다고 한다면 둘 사이의 필연은 그 다음에 밝혀진다.  바로 나임과 탈은 이미 오래 전에 서로 알고 있었던 사이라는 것.  나임이 이스라엘을 체험하고자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이스라엘인으로서 팔레스타인인 자신에게 열린 마음을 보여주었던 이가 바로 탈의 아버지였고, 나임은 그녀의 집에서 자기도 하고 식사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탈의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던 것이다.(헌데 이름을 알고도 왜 몰랐을까???)

이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나임은 더 큰 꿈의 실현과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려고 캐나다로 출발한다.  출발 직전에 탈에게 마지막 메일을 보내면서 답장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3년 뒤 로마에서 보자고 한다.  로마의 휴일의 그 장면처럼.

엔딩 부분은 상당히 작위적이어서 식상한 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작품은 별 다섯을 후히 주고도 남는다.  그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현재 모습을, 과거를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음이고, 그들의 골깊은 감정과 상처가 또 얼마나 큰지를 현실적인 수치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우리와 똑같은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이 있고, 학교와 선생님, 학생들이 있는데,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와 너무도 다르다.

나임의 어머니는 그를 낳으면서 더 이상 회임이 불가능하게 되었는데 가자에서 거의 유일할 외동아들이라는 그의 설명이 안타까웠다.  (요즘같은 시대에도 '죽음'의 위협 때문에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한다는 현실이라니, 얼마나 끔찍한가.)

테러를 직접 목격한 뒤 울부짖는 탈의 얘기 중, 그곳에 사는 그들조차도 그렇게 막연하게 느끼는데, 고작 텔레비전이나 신문기사, 아니면 그것도 접하지 않는 전세계의 그 누구가 그들의 공포와 절망을 피부로 느낄까... 아닌 게 아니라 그건 바로 우리의, 나의 이야기이지 않은가.

내게 이 책이 더 가슴에 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읽은 한 페이퍼 때문이었다.  이라크 현지를 다녀온 지기님의 3년 전 글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아플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참고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000091)

인간은 희망 없이 살기는 너무도 나약한 존재다.  때로 그 희망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는 머나먼 것이기도 하다.  허나,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한, 포기될 수 없는 한 인간은 버틴다.  그리고, 그를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희생하기 시작할 때 희망은 한걸음씩 다가온다.  작품 속 탈의 아버지가 30년을 노력하고도 달라지지 않는데 포기하지 않냐라는 딸의 물음에 "30년이란 시간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보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다"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어쩌면, 그 모든 수고로움의 대가와 열매는 당대에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본인에게는 너무나 소원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건 어찌보면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다.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테러라는 극도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희생'과 '평화', '희망'을 바라는 것은 너무도 태만하고 또 오만한 부탁같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포기하랄 수가 없다.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했지만, 미래를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작가는 분명 그들의 미래가 탈과 나임의 바람대로 평화를 향해 더 다가가는 시대라고 믿고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믿고 싶다.  아니, 믿는다.   그리고, 이건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지역구도로 갈라져 있는, 그밖의 여러 대립으로 나눠져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