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가지 사랑의 언어 - 개정증보판
게리 채프먼 지음, 장동숙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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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의 욕구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본능이 아닌 이성과 선택에서 나온 사랑을 알고 서로 진정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사랑받을 만한 무엇인가를 보고 나를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누군가에 의해 사랑받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랑은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만일 배우자의 삶이 나의 노력에 의해 풍성해진다면 나 또한 정말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낄 것을 알고, 열심히 배우자의 유익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선택이다. 이것은 사랑에 빠진 황홀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에 빠진 감정을 벗어나야 비로소 시작된다. 사로잡힌 상태에서 하는 친절하고 너그러운 일들을 우리는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정상적인 행동 방식을 벗어나는 본능의 힘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그러나 일단 선택을 해야 하는 실제 삶으로 돌아왔다면, 친절함과 너그러움을 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 P41

상대방의 이야기를 가로막지 않는다. 사람들은 평균 17초 정도만 듣고 끼어들어 자기 생각을 말한다는 연구가 있다. 내가 당신의 말에 전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킨다면 나 자신을 방어하거나 당신을 비방하거나 아주 독설적으로 내 입장을 고수하지 않을 것이다. 내 목적은 당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알아내는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나 상대방을 고치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당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 P80

삶의 매순간마다 우리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바람을 갖게 되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자기 표현이란 그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당신이 만일 진정한 대화라는 사랑의 언어를 배우려면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 - P84

첫째, 결혼하기 위해 하던 일을 결혼한 후에도 한다는 보장은 없다. 결혼 전에는 사랑에 빠진 힘으로 무엇이든지 한다. 결혼 후에는 사랑에 빠지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부모나, 자신의 성격이나, 사랑에 대한 이해나, 감정이나, 욕구나, 욕망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하는 행동과 일반 상태에서 하는 행동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 P124

둘째, 사랑은 선택이지 강요가 아니라는 것이다. (...) 사랑하고 싶은 의지는 불러일으킬 수 없다. 우리는 매일 배우자를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면 배우자가 요청하는 것을 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사랑을 전달할 수 있다. - P124

셋째, 배우자가 내 행동을 비판할 때, 거기서 우리는 배우자의 제1의 사랑의 언어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성숙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감정의 욕구가 있는 부분에 대해 배우자에게 가장 큰 소리로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비효과적이긴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사랑을 간청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일단 그것을 이해한다면 그 비판을 좀더 생산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 P125

우리 대부분은 매일 매일 내키지 않는 일도 많이 한다. 아침에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도 일어난다. 왜 그러는가? 그렇게 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아침에 일어났던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행동이 감정보다 중요한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배우자의 사랑의 언어를 알아내고 그것이 내게 자연스럽든지 부자연스럽든지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편하고 신나는 기분을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오직 배우자의 유익을 위해 하기로 한 것이다. 배우자의 감정적 욕구가 충족되기 원하기에 그의 사랑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그의 사랑 탱크가 가득 차서 그도 나의 사랑의 언어를 구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 탱크가 채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은 선택이다. 그리고 둘 중 한 사람이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다. - P172

사랑을 경험할 때 그것은 이 모든 욕구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드디어 내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된다. 자긍심을 확실하게 갖게 됨으로 내 욕구에 치중하기보다 외부로 관심을 더 많이 돌리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늘 해방을 준다. (...) 사랑이 모든 것의 답은 아니지만 안정감 가운데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 사랑이 주는 안정감 속에서는 부부가 서로 비난하지 않고 차이점을 의논할 수 있다.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서로의 최선을 도출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 가져다 주는 것들이다. - P175

우리는 서로 다른 성격과 과거 경험을 가진 채 결혼한다. 결혼할 때 감정의 짐도 가지고 온다. 기대하는 것도 다르고, 일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르고, 인생에서 중요한 것에 대한 견해도 다르다. 건강한 결혼 생활이 되려면 이 다양한 관점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 모든 것에 일치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반드시 서로의 차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 때문에 틈이 벌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사랑 탱크가 비면 부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거리가 벌어진다. 어떤 부부는 다투다가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 탱크가 가득 차면 이해하려는 우호적인 분위기가 이루어져 차이를 인정하고 타협하려고 한다. 내가 확신하는 바로는 사랑에 대한 감정적 욕구를 채워 주는 것만큼 결혼 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없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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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나리스 - 그리스도교를 밝게 비춘 스무 개의 등불, 바울부터 로메로까지
로완 윌리엄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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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넒고, 바로 여러분 자신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의 존재들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은 스스로를 규정했던 이야기에 갇힐 수 없는 존재입니다. - P14

이런 따뜻함, 다른 이들을 위한 아낌없는 의분은 바울의 성격이 갖는 가장 강력한 특성 중 하나입니다. (...) 이렇듯 심오하고 본능적인 너그러움이 바울의 열정과 분노와 이따금 남을 조종하거나 사나워지는 순간들 아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 P18

신자로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충성을 바칠 대상은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지금도 형성 중에 있는 몸, 곧 오늘과 내일 그 다음 날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반응하는, 누구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리입니다. 우리는 오늘, 내일, 그 후에도 우리가 함께하고 지지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이들에게 자신을 열기로 결심하고, 기도로 뒷받침된 이 환대를 중심으로 삶을 구축해야 합니다. - P27

이것은 편안한 그림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사이좋은 노부부 같은 관계로 하나님과 편안히 있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 뿌듯해 할 수 있는 선행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한계를 친구 삼아야 한다고, 제자의 삶에는 언제나 부재와 상실의 아픔이 남아 있을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 기억의 중심에서 활동하시고 상상도 못할 미래로 나를 이끄시지만, 그분은 결코 내가 여기서 소유하는 대상으로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나의 창조주이신 그분은 가닿을 수 없을 만큼 내 안 깊은 곳에 계십니다. - P32

그리고 그분은 내가 바라볼 수 있도록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강력한 이미지 중 하나를 빌리자면, 그분은 내 앞에서 자꾸만 모퉁이를 돌아가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좇아 계속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깊이 자각함에 따라 내 안에 다른 이들과 경쟁하면서 채워야 할 절대적이고 개인적인 욕구들이 있다는 환상에서 점차 탈피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신비를 인식하게 되면 타인의 신비도 눈에 들어오고, 자기 숭배에서 해방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닮은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닌 그들의 참된 모습 그대로, 곧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창조물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 P33

따라서 죄는 진실성의 치명적 결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건강함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대로 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개의치 마라"고 말씀하신다 해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손상된 존엄에 연연하시는 것이 아닌 지독한 흠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제대로 반사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참되고 객관적 가치가 있는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 그저 합당하거나 걸맞거나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가 아닌 귀중한 행위(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행위)에 달려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성부께 자기를 내어 주셨고 이것은 자기를 내어 주신 성부를 향한 완전한 신적 응답이었습니다. 이는 무한히 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에 대한 무한히 귀중하고 아름다운 반응이며,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내어 주심이 말씀[이신 성자]을 낳음으로써 발견되는 완벽한 메아리입니다. - P47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생명이 부차적이거나 피상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밖으로 드러난 이런 겉모습 이면에는 완전히 가려진 배후지와 같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아시는 신적 생명의 내용을 결코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와 창조주와 구속주의 생명 안에서 이 모든 신적 생명의 바다를 ‘활성화‘하실 때 하나님을 만나고, 그렇게 활성화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모종의 그림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부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실재 안에서 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내적 관조와 기쁨의 물결에 그저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차마 우리가 어떻게 한쪽으로 물러서서 그분을 사고의 대상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 P57

마지막 순간에 언어가 기대를 저버린 것을 발견한 신학자는 크랜머만이 아닙니다. 아퀴나스는 뇌졸중을 겪은 후 자신이 쓴 모든 글이 지푸라기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칼 바르트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교회교의학>을 꾸밈없고 장난스럽게 요약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그러나 바르트도 아퀴나스도 하나님에 대해 말하려고 몸부림치는 경험 가운데 인간의 언어가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발견하는 것 외에는 이런 단순함, 말문이 막히는 상태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여 있지 않습니다." 말의 한계점에서 우리는 겨우 온전한 복음의 시작점에 서 있게 될 뿐입니다. - P64

그러면 우리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이것의 당연한 귀결은 우리의 관대함과 선함이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다는 것과, 그것이 모두에게 영구적이고 즐거운 빚을 졌다는 태도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필요가 있는 곳에는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 P72

우리가 성장하면 관상과 활동이 나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하나의 일을 말합니다. 곧 우리의 모든 경험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감추어진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주시는 ‘사명‘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뻗어 나갑니다. 관상은 그 중심으로 향하는 법을 꾸준히 배우는 일이요,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향해 돌아서는 일입니다. - P82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자체는 성육신의 패턴과 같습니다. 현재의 순간이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드러나도록 현 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온전한 상태를 향해 자라 가는 동안에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예수의 품에 안전히" 거하고 싶은 격렬한 고뇌의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거하는 곳 외의 다른 장소를 더 이상 원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맡길 때 거대한 돌파구는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께 맞추어지고 관상은 제2의 천성이 되며 우리 삶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달하게 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사이의 간격은 더 이상 없습니다. - P83

시인 밀턴은 자신만만한 연설에서 증인의 부서짐과 모질도록 간결한 언어로 넘어오라는 부름을 결국 회피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밀턴은 영웅주의에서 잠잠한 충실함으로 넘어오라는 부름을 회피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시인이자 제자였던 밀턴은 여느 위인이나 영웅들만큼 마지못해 이 사실을 직시합니다. 매끄럽지 않게, 마지못해, 그러나 진실하게 직시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 P92

공공 도덕이 사회 속 개인들의 도덕적 건강 및 행복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고 도덕적 행위의 주체인 개인들은 공적, 집단적 부도덕에 연루됨으로써 더럽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사실상 국가의 실행 기관들 또한 도덕적인 근거를 묻는 적법성의 문제 제기로부터 면제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전제되는 도덕적, 종교적 체계가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도전은 일반 대중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공공 당국을 압박하는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일반 대중이 하나의 비전을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소위 도덕적 전통의 공동체가 공동의 도덕적 사안이 걸린 문제들에서 ‘자기 인식‘과 ‘자기 확신‘을 계속 발전시켜야 합니다. - P99

"하나님이 우리 죄와 실수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롭게 살다 죽을 수 있게 하실 거라고 우리는 자신 있게 바랄 수 있단다." 디킨스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어른들을 위한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소망이라는 이미지는, 문을 고집스럽게 열어 놓고 베푼 호의를 거둬들이지 않는 그 외로운 인물 안에서 가장 생생하고 충격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이나 정의를 시행할 힘은 없지만, 인간의 지나치고 과도한 본성에 적절한 종류의 사랑, 곧 파괴할 수 없는 방식의 사랑을 지나칠 정도로 건네고 있습니다. 더없이 불합리한 이 연민은 그 불합리성 때문에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P106

우리는 불을 붙여 자기 세대를 비춘 성자들에 대해 자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것은 ‘등불을 든 여인‘이라는 나이팅게일 신화의 핵심입니다. 돌봄의 소명을 따르려 하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등불을 든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밝게 비추고, 상황을 또렷이 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기억하지도, 보살펴 주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여 어둠 속에 깊이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집중하고 구체적인 관심을 줌으로써 빛을 비추라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 P110

불가코프는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다른 두 가지가 마르고 시든다고 주장합니다. 정치에서 그치는 정치는 결국 관리적 독재나 그보다 못한 것이 될 뿐입니다. 그는 이것을 알았고 당대의 정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어떤 것도 실제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교양 넘치는 예술 애호가만을 잔뜩 배출합니다. 정치와 예술이 없는 예전은 세상 한복판에 중요하게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사람들의 실제 관심사에서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한데 모으면 교회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공동체인 교회는 정치적인 것, 창의적인 것과 경건한 것, 영적인 것이 절대적으로 융합되어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는 새 현실입니다. - P116

이 세상의 학문들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충분히 멀리까지 파고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반대쪽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P121

십자가는 자기를 보호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사랑의 궁극적 표시입니다. 사랑은 자신이 완전히 거부당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그 궁극적 자유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능력이나 안전의 이점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세상의 조건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총체적 내어 줌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인간적 사건이 하나님의 성품을 전달하는 매개가 되고, 그 사건 안에서 인간성은 신적 생명의 거울임이, 그리고 거울이 될 수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문화에 참여할 때는 자신들이 흔쾌히 받아들여지고 교회와 사회가 어떤 가치관의 충돌도 없이 매끄러운 통일체로 함께 흘러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세상에 참여하고 귀 기울이고 협력하는 것은 오로지 사심 없는 사랑으로 베푸는 섬김 안에서만 하나님의 행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 P127

교회가 내놓는 것을 세상이 거부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조건 없는 사랑은 언제나 가능성이자 선물로서 여겨져야만 합니다. 세상의 종이 된다는 것은 노예처럼 세상을 따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세상의 규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서 자신의 안전이나 성공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자유롭게 건넨다는 뜻입니다. 때로 세상과 교회가 뜻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 진정한 공생관계가 나타나는가 하면 과격한 충돌도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의 수고는 이어집니다. 섬김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이 원하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교회의 섬김으로부터 얻었다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 P128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에서 충분히 분리되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는 데 필요한 특성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고, 하나님의 자유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자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들고 그들에게 실재 안의 기쁨과 하나님의 생명인 진리를 전합니다. - P132

그렇게 하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는 주어진 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바를 행사할 자유가 아닌, 신약성서가 말하는 대로 현실에 충실하고 진실한 ‘진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어떤 자유가 소유할 만한 최종적 가치를 지닐까요? 이 자유 때문에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가신 여정의 역사가 분명히 드러내듯, 이 이야기의 결말은 적절한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성취이자 귀향입니다. 이 자유는 진정한 우리가 되게 하는 자유입니다. - P134

하나님은 세상이 시야에 들어오게 하시고자 시야에서 물러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너무나 철저하게 내어 주셔서 자신을 사실상 지워 버리시는 이 선물을 베유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이상적 관계는 하나님이 시야에서 물러나심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자신을 ‘지우고‘ 그분에게 우리를 단순히 맞출 때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녀의 표현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탈창조"합니다. - P139

이 말은 고통을 정복하거나 피하려 들 것이 아니라 활용하거나 변화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리‘는 주어졌습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더 나은 곳을 바라는 갈망의 자극제나 도덕적 개선을 위한 교육의 기회가 아닌 인간됨의 일부로 녹여 내야 할 자료입니다.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자아는 특정한 실재들이 집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성장한다는 것이지요. 이 실재들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 부분 자아의 내적인 일이지만, 의지로 추구하거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인생사를 통해 심겨진 것입니다. - P145

로메로는 교회 내에서 발언하고 교회를 대변할 자유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누구를 대변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의 말과 증언에 내재하는 주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질문은 "여러분은 정말 누구와 함께 느낍니까?"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몸의 실제 삶 안으로 들어가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느껴지는 정서가 힘 있는 자들과 똑같게 보이지는 않습니까? 성숙한 로메로가 새로이 배운 "교회와 함께 느끼기"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을 대신하여 말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 P149

교회는 고통과 불의를 고통과 불의라고 부르는 곳이 됨으로써 참으로 성령의 거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피상적으로 평온함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나 세상에서 치유가 일어나려면 인간 고통의 진실이 정직한 목소리를 얻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끔찍한 고통, 무력함과 말 못함, 죄책, 좌절, 자기 의심을 기탄없이 포용하시고 그곳에 그분의 신적 연민을 불어넣으실 때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깊은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로메로는 어느 성탄절 설교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이 역사 속에 자신을 집어넣으셨다."고 말했습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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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으로 떨어지다 - 인생의 후반전, 어떻게 살 것인가?
리처드 로어 지음, 이현주 옮김 / 국민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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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내려간 사람들만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무엇임을 이해한다. 아래로 떨어진, 그것도 잘 떨어진 사람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위‘를 오용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 P27

본질적인 것에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 P54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현재를 사는 것이요, 실은 그게 전부다. 우리는 인생의 강물을 더 빨리 흐르도록 밀거나 당길 수 없다. 오직 삶의 모든 단계들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따름이다. 그것 말고 다른 무엇을 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 - P67

아이들이 추락하지 않도록 미리 막아주는 것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넘어진 사람만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자전거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으려면 여러 번 넘어져봐야 한다.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은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밀면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스스로 넘어지기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균형을 잡지 못하는데, 자기가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들의 삶이 그토록 고달픈 이유가 여기 있다. - P73

울타리 없이 완전 개방된 생활환경은 우리를 지나치게 많은 선택권들의 희생물로 만든다. 그 선택권들은 곧장 우리를 고단하게 하고 점령해 버린다. 법과 틀은, 자주 오류를 범하긴 하지만, 우리의 철부지 어린애 같은 떠벌림에 일종의 재갈을 씌우면서 나름대로 정당한 바깥세상과 건강한 관계를 맺게 도와준다. - P82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이 ‘비밀리에‘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당신 일을 하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알면, 신비/운명/하나님/은총이 우리한테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가 전체 과정을 망가뜨리거나 중단시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기의 사망을 기꺼이 그리고 자세히 살피려 하지 않는다. 비록 죽어가는 것이 자기의 거짓 자아라고 하더라도! - P96

유대 그리스도교의 구원 역사는 삶의 비극성에 대한 감각을 활용하여 통합하고 용서하는 역사다. 유대 그리스도교는 해답 안에 문제를, 그 해답의 한 부분으로 포함한다. 성경 계시의 진수는 사물의 어두운 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실수를 용서하고, 추락을 오히려 발판으로 삼아, 성경 전체의 중심인 약속된 완전함으로 이끌어간다는 데 있다. - P106

죄와 구원은 서로 연관된 개념들이다. 에고야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만, 구원은 죄가 완벽하게 치워진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죄가 그 머리를 돌리고 우리를 위하여 유리하게 활용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신의 사랑이 사람을 바꿔놓는 방식이다. - P108

삶의 비극성에 대한 감각은 결코 비극적인 것이 아니다. 적어도 ‘큰 그림‘에서 보면 그렇다. 과거와 미래에 같이 연결되어 있는 깊은 시간 안에서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필요한 고통을 준비케 하고, 자신의 실패와 상실에 절망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통과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공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보다 먼저 걸었고 우리보다 나중 걸어갈 거대한 인류 대장정에 합류하는 것이다. (...)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자, 인간의 가슴이 폐쇄되어 떨어지는 것을 막고 그 영혼이 더 나은 무엇을 향하여 계속 열려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치러야 하는 값인지 모르겠다. - P111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넘어지고 추락해야 한다. 지금 당신이 여기에서 하고 있듯이 추락에 대한 글을 읽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얼마동안은 실제로 운전석에서 쫓겨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진짜 안내인‘한테 자기를 내어맡기는 법을 끝내 배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필수 과정이다. - P116

무엇보다도 성령은 우리를 이미 흐르고 있는 흐름에 결속시켜 그 속에서 안전히 흐르게 한다. 단 우리가 그것을 허용할 경우에만! 우리가 성령을 ‘만들거나‘, 무슨 공로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가장 깊은 중심에 의존하여 사는 법을 배워나가다가, 처음부터 우리 안에 거하며 일하시는 성령을 발견하는 것이다. 애니 딜라드가 말했듯이 완전한 ‘통일장‘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무슨 공으로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 P144

이 신비를 가리켜 하나님과의 ‘협력‘ 또는 ‘함께 숨쉬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가장 심오한 말이기도 하다. 이 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협력‘이 곧 진정한 영성이다. 진정한 영성은 그 안에서 양쪽이 서로 주고받으며 하나인 진실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종의 ‘합동 작용‘이다. - P146

자기의 참 자아를 발견하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종교의 진정한 임무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를 옳은 집단에 소속시키고 옳은 전례를 행하고 옳은 신조를 고백하게 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가치 경쟁으로, 개인의 공로로, 종교적 성취로 빠져들게 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 오늘 종교의 현실이다. - P155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전적으로 당신의 원수처럼 보이는 자들까지 용서하고 치유하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본인의 자유의지에 딸린 문제다. (...)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당신 아버님이 늘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었다. 결국 하나님을 닮는 그것이 영성의 전부다. - P160

‘큰 그림‘ 속에서 살기 위하여 우리가 치러야 할 유일한 값은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속으로 품되 ‘일 자체‘에 대하여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을 끌어안고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사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 P172

지혜는 신비, 의심 그리고 ‘알 수 없는 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신비를 웬만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왜, 어떻게, ‘모름‘이 다른 종류의 ‘앎‘으로 바뀌는 건지 그 이유와 과정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그럴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연히 알겠다. 디오니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보나벤투라 그리고 쿠사의 니콜라우스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듯이 마침내 ‘무지를 배우려면‘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 - P174

인간은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다. 우리 경험 속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영성‘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일 뿐 아니라 인생의 행복 바로 그 자체이기도 하다. - P175

이 단계에서 나는 더 이상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최고임을, 우리 인종의 우월함을, 내가 믿는 종교만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종교임을, 사회에서 차지하는 내 위치와 역할이 특별하게 대접받을 만한 것임을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 더 많은 선행과 봉사를 쌓는 일에 전념하지 않아도 된다. 아주 단순하게, 내 욕망과 노력은 날마다 돌려주는 데 있다. 그동안 받은 큰 은혜를 세상에 돌려주는 것이다. - P184

우리는 행위에서 존재로, 유기적으로 조용하게 그리고 삼투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행위로 자리를 옮겼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일을 하는데 결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좀처럼 할 수 없던 그런 일이다. (...) 전에는 당신의 삶과 당신의 일이 서로 다른 둘로 보였지만 이제는 당신의 삶과 당신의 투사 수단이 하나로 되었다. 당신의 관심은 더 이상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가지는 데 있지 않고, 당신에게 있는 것을 지금 당장 사랑하는 데 있다. - P187

스스로 만든 자아상을 자기도 모르게 옹호하고 그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만큼 당신은 그늘진 자아로 많이 살게 될 것이다. 거꾸로 당신의 그늘진 자아로 살면 사는 그만큼 당신 스스로 옹호하고 투사하는 페르소나를 알아보는 능력이 줄어들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가장 선하고 가장 깊은 자아를 보지 못하고 살지 못하게 하는 이중의 맹목과 같다. - P193

영적 성숙이란 결국 눈이 밝아지는 것이다. 눈이 완전히 밝아지려면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몇 달, 몇 주, 며칠 동안의 커다란 도약을 포함하여 한평생이 걸린다. 스스로 자기 내면을 성찰해 온 사람들은 생애의 마지막 몇 년 사이에 괄목할 만큼 눈이 밝아지는 것 같다. 반면, 자신의 그늘진 과거와 부끄러운 발자취를 부인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은 끝내 자기를 가두어놓은 채 임종을 맞는다. - P196

성자는 옹호하거나 남에게 주장할 자기의 ‘나‘가 없는 사람이다. 그의 ‘나‘는 하나님의 ‘나인 나‘와 의식 안에서 하나 되어 있고, 그로써 이미 충분하다. 신과의 합일이 모든 자기 증오와 자기 포기를 처음부터 할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런 사람은 완벽하게 옳아야 할 이유가 없고, 자기가 그럴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다만 ‘바른 관계‘를 맺고자 노력할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무엇보다도 ‘사랑‘ 자체가 되려고 한다는 얘기다. - P198

우리가 진정으로 영적 순례의 길에 들어서려면 어떤 형태로는 ‘바닥‘을 쳐야 한다는 것이 복음의 ‘최종 결산‘이다. 그 지점에 이르면 비로소 ‘종교‘라 할 수 있겠다. 사람이 바닥에 곤두박질하면 현실의 효과가 어떤지, 이익인지 손해인지 그런 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그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을 뿐이다. 참된 복음은 언제 어디서나 맑고 신선한 공기요, 맘 놓고 숨 쉴 수 있는 넓은 방이다. - P207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오르막 내리막으로, 옳음 그름으로, 내 편 네 편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 있는 건 그냥 있는 거다. 이 고요함이 당신으로 하여금 훨씬 명료한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자세가 완전 피동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참된 묵상과 세련된 행동 사이의 본질적 연결고리다. 크게 다른 것은 당신의 편협한 소아가 뒤로 물러나서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고자 한다면, 그것이 항상 하시는 그분의 일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쓰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 P215

비이원론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당신이 먼저 이원론적 사고를 마스터했고, 그러면서 한편 그것이 사랑, 고통, 죽음, 하나님 같은 큰 문제들을 다루는 데 충분치 못한 줄을 알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 P219

옹근 사람은 가는 곳마다에서 옹근 전체를 보고 옹근 전체를 만들어낸다. 분열된 사람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에서 분열을 보고 분열을 만들어낸다. 후반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나누어진 조각들이 아니라 옹근 전체 안에서 모든 것을 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저분한 조각들 안으로 ‘떨어져 내림‘으로써 옹근 전체에 가서 닿게 되어 있다. - P221

아름다움이나 추함은 무엇보다도 보는 사람 눈에 있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우리 안에서 자기의 선함을 비쳐보게 마련이고,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우리 안에서 자기의 뒤틀리고 일그러진 모습을 비쳐보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그토록 어지럽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좋아하기가 그토록 힘든 것이다. - P227

우리로 하여금 하루에 수도 없이 균형을 잃고 ‘파국‘을 보게 만드는 일들이 하나님께는 평소의 비지니스인 것이다. 우리가 실패할 적마다, 영적 지도자들이 그러듯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와, 참 좋은 기회다! 우리가 이것으로 뭘 할 수 있는지 보자!"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기 에고를 키워줄 따름인 이른바 ‘성공‘을 했을 때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흠, 뭐 괜찮은 일이 새로 생길 것 같진 않군." 몰락과 실패는 인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 장치다. 성공은 그 반대일 뿐이다. 건강한 공동체와 신뢰는 남보다 우월한 우리가 아니라 남들과 같이 고통당하는 우리 둘레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 P230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어린 눈길을 받고 그것을 돌려드리는 것, 그리하여 안으로 자유롭고 깊은 중심에서 행복해지는 것이 전부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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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솔직히
존 로빈슨 지음, 현영학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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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인 글이나 말은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의 깊이에 대한 분석-또는 ‘사랑으로 해석한‘ 모든 경험의 깊이에 대한 분석-을 말하는 것이다. 틸리히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관한 학문이다. 어떤 글이나 말이 ‘신학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신이라는 특정 존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실존의 의미에 관한 궁극적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신적 깊이나 그 가장 깊은 신비의 밑바닥에서 볼 때 우리 삶의 실재성과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인격의 범주 안에 포함된 이러한 실재성과 의미를 긍정하는 세계관은 그 자체가 이미 인격적인 관계의 궁극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의 밑바닥 깊이‘에 있는 최종적 진리와 실재가 되는 신이 곧 사랑이라고 보는 것이다. - P92

예수에게서, 아니, 오직 예수에게서만 자아가 아니라 순전히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인 신의 사랑이 나타나 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깨끗이 비웠기 때문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되고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이름과 이 영광은 곧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비운다는 개념을 기초로 하는 기독론의 ‘kenotic‘(‘텅 비어있다‘는 의미의 헬라어 kenos에서 온 말이다-옮긴이) 이론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만족스럽게 조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P140

인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육체‘라고 하는 현상의 세계 안에서, 우리 존재 전체의 깊이와 기반이 ‘사랑‘으로 노출되며 나타나는 것이다. 신의 삶,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뭉치는 궁극적 ‘사랑의 말씀‘은 완전하고, 무조건적으로 또 철저하게, 인간-남을 위한 인간, 따라서 신을 위한 인간-의 삶에서 구체화되어 있다. 물과 기름의 혼합물이나 자연과 초자연의 혼합물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 사랑의 초월성, ‘우리 한가운데서의 저 너머‘를 구현한 존재로서 그는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인 것이다. - P146

이 은혜에 비추어서 우리는 남이나 자기 자신과 관계를 가질 때에 거기에 나타나는 은혜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눈 속을 솔직히 들여다볼 수 있는 은혜, 생명과 생명의 기적적 재결합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서로서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단지 말의 문자적 의미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비록 그것이 가혹한 노여움의 말일지라도 그 배후에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일지라도 분리의 장벽을 뚫으려는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생명이 비록 우리를 향하여 적의를 가지고 해를 끼치려고 할지라도 그것을 용납할 수 있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의 현실을 믿는 이상 우리는 그의 생명도, 내 생명이 그렇듯이, 동일한 근원에 속해 있고 그것에 의해서 용납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와 같이 은혜는, 때로는 이러한 모든 분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원래 소속해 있던 것과 다시 결합하게 하기 위하여 나타납니다. - P154

기독교에 따르면 ‘세속적인‘ 것(신이 없는)이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참된 깊이로부터 분리되고 이탈된 세계-그리스도가 위해서 죽은 신(神)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은 통속적인 것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다. 예배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도피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며, 세속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영역으로 은퇴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통속적인 것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통속적인 것의 피상성을 꿰뚫고 그것을 그 이탈 상태에서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자기 자신을 열어놓자는 것이다. - P164

예배의 기능은 이와 같은 깊이에 대해서 우리를 민감하게 하는 것, 즉 이 세상와 다른 여러 사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가장 가까운[近値的, proximate] 관심사(좋아하는 것이라든지, 자기 이익이라든지, 한정된 결단 따위)로부터 궁극적 관심사로 초점을 맞추게 하고, 이것을 날카롭게 하고 깊이 있게 해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추어 우리의 사랑을 순결하게 하고 바로잡아 주며, 이미 화해했고 현재도 화해하고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은총과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나 다 기독교의 예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종교적‘일지라도 기독교의 예배가 아닌 것이다. - P165

전통적인 영적 생활은 소위 ‘내적 생활‘에 중점을 두고 이 내적 생활을 인간 정신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본회퍼는 지적하기를, 성서는 조금도 거기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한다. "성서적 의미에서의 ‘마음‘heart은 내면적인 생활이 아니라 신 앞에 있는 인간 전체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분명히 밝히기를, 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안으로부터 밖을 향하는 것만큼 밖으로부터 안을 향해서 산다."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 아니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이것은 정말 사실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들에게서 "참된 삶은 만남"인 것이다. - P182

기도와 윤리는 단순히 같은 것의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기독교의 견지에서 볼 때 이 둘은 다 조건적인 것 안에서 무조건적 인격 관계를 통해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신에 관한 교리나 초월적인 것에 관한 교리도 도덕에 관한 견해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그것을 재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주장은 결국에는 ‘사랑‘에 관한 주장-인격적인 관계의 궁극적인 기반과 의미에 관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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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친다는 것의 의미
Max van Manen 지음, 정광순 외 옮김 / 학지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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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어떤 상황을 교육적 상황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고, 학생들이 처한 상황에서 교육할 수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학생이 무언가를 배울 수 있게 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육적 민감성이란 상황을 감각적으로 아는 것으로서 상황에 맞추는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예시와 일화를 통해 교육적 민감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출간 10주년 증보판
파커 J. 파머 지음, 이종인.이은정 옮김 / 한문화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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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에 대한 저자의 통찰과 다양한 실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생생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가르침의 희망과 용기,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교사의 내면적 생활을 탐구하는 동시에, 교사의 고독한 영혼을 넘어서는 사회적인 질문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과 집단의 생존 및 삶의 질에 중요한 문제인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다양하고 깊은 통찰을 담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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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왕위에 앉게 된 선조 임금을 위해, 당대의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그의 교육을 위해 작성한 10개의 그림과 해설이다. 성리학에 기반하는 우리의 전통교육이 어떠한 지향점과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이러한 전통교육이 현대교육에 주는 시사점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격몽요결
이이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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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시대 대학자 율곡 이이 선생이 후학 교육을 위해 마련한 정신수양서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배우고 깨우쳐야 할 10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수세기를 뛰어넘은 오늘날에도 소중한 생활 교육 지침서로서, 가정을 바로세우고 정의로운 사회 실현을 꿈꾸는 모든 현대인들의 가슴에 깊이 새길 만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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