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내려간 사람들만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무엇임을 이해한다. 아래로 떨어진, 그것도 잘 떨어진 사람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위‘를 오용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 P27
본질적인 것에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 P54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현재를 사는 것이요, 실은 그게 전부다. 우리는 인생의 강물을 더 빨리 흐르도록 밀거나 당길 수 없다. 오직 삶의 모든 단계들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따름이다. 그것 말고 다른 무엇을 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 - P67
아이들이 추락하지 않도록 미리 막아주는 것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넘어진 사람만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자전거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으려면 여러 번 넘어져봐야 한다.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은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밀면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스스로 넘어지기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균형을 잡지 못하는데, 자기가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들의 삶이 그토록 고달픈 이유가 여기 있다. - P73
울타리 없이 완전 개방된 생활환경은 우리를 지나치게 많은 선택권들의 희생물로 만든다. 그 선택권들은 곧장 우리를 고단하게 하고 점령해 버린다. 법과 틀은, 자주 오류를 범하긴 하지만, 우리의 철부지 어린애 같은 떠벌림에 일종의 재갈을 씌우면서 나름대로 정당한 바깥세상과 건강한 관계를 맺게 도와준다. - P82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이 ‘비밀리에‘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당신 일을 하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알면, 신비/운명/하나님/은총이 우리한테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가 전체 과정을 망가뜨리거나 중단시키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기의 사망을 기꺼이 그리고 자세히 살피려 하지 않는다. 비록 죽어가는 것이 자기의 거짓 자아라고 하더라도! - P96
유대 그리스도교의 구원 역사는 삶의 비극성에 대한 감각을 활용하여 통합하고 용서하는 역사다. 유대 그리스도교는 해답 안에 문제를, 그 해답의 한 부분으로 포함한다. 성경 계시의 진수는 사물의 어두운 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실수를 용서하고, 추락을 오히려 발판으로 삼아, 성경 전체의 중심인 약속된 완전함으로 이끌어간다는 데 있다. - P106
죄와 구원은 서로 연관된 개념들이다. 에고야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만, 구원은 죄가 완벽하게 치워진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죄가 그 머리를 돌리고 우리를 위하여 유리하게 활용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신의 사랑이 사람을 바꿔놓는 방식이다. - P108
삶의 비극성에 대한 감각은 결코 비극적인 것이 아니다. 적어도 ‘큰 그림‘에서 보면 그렇다. 과거와 미래에 같이 연결되어 있는 깊은 시간 안에서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필요한 고통을 준비케 하고, 자신의 실패와 상실에 절망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통과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공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보다 먼저 걸었고 우리보다 나중 걸어갈 거대한 인류 대장정에 합류하는 것이다. (...)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자, 인간의 가슴이 폐쇄되어 떨어지는 것을 막고 그 영혼이 더 나은 무엇을 향하여 계속 열려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치러야 하는 값인지 모르겠다. - P111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넘어지고 추락해야 한다. 지금 당신이 여기에서 하고 있듯이 추락에 대한 글을 읽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얼마동안은 실제로 운전석에서 쫓겨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진짜 안내인‘한테 자기를 내어맡기는 법을 끝내 배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필수 과정이다. - P116
무엇보다도 성령은 우리를 이미 흐르고 있는 흐름에 결속시켜 그 속에서 안전히 흐르게 한다. 단 우리가 그것을 허용할 경우에만! 우리가 성령을 ‘만들거나‘, 무슨 공로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가장 깊은 중심에 의존하여 사는 법을 배워나가다가, 처음부터 우리 안에 거하며 일하시는 성령을 발견하는 것이다. 애니 딜라드가 말했듯이 완전한 ‘통일장‘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무슨 공으로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 P144
이 신비를 가리켜 하나님과의 ‘협력‘ 또는 ‘함께 숨쉬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가장 심오한 말이기도 하다. 이 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협력‘이 곧 진정한 영성이다. 진정한 영성은 그 안에서 양쪽이 서로 주고받으며 하나인 진실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종의 ‘합동 작용‘이다. - P146
자기의 참 자아를 발견하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종교의 진정한 임무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를 옳은 집단에 소속시키고 옳은 전례를 행하고 옳은 신조를 고백하게 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가치 경쟁으로, 개인의 공로로, 종교적 성취로 빠져들게 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 오늘 종교의 현실이다. - P155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전적으로 당신의 원수처럼 보이는 자들까지 용서하고 치유하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본인의 자유의지에 딸린 문제다. (...)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당신 아버님이 늘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었다. 결국 하나님을 닮는 그것이 영성의 전부다. - P160
‘큰 그림‘ 속에서 살기 위하여 우리가 치러야 할 유일한 값은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속으로 품되 ‘일 자체‘에 대하여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을 끌어안고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사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 P172
지혜는 신비, 의심 그리고 ‘알 수 없는 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신비를 웬만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왜, 어떻게, ‘모름‘이 다른 종류의 ‘앎‘으로 바뀌는 건지 그 이유와 과정을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그럴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연히 알겠다. 디오니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보나벤투라 그리고 쿠사의 니콜라우스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듯이 마침내 ‘무지를 배우려면‘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 - P174
인간은 의미를 창조하는 존재다. 우리 경험 속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영성‘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일 뿐 아니라 인생의 행복 바로 그 자체이기도 하다. - P175
이 단계에서 나는 더 이상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최고임을, 우리 인종의 우월함을, 내가 믿는 종교만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종교임을, 사회에서 차지하는 내 위치와 역할이 특별하게 대접받을 만한 것임을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 더 많은 선행과 봉사를 쌓는 일에 전념하지 않아도 된다. 아주 단순하게, 내 욕망과 노력은 날마다 돌려주는 데 있다. 그동안 받은 큰 은혜를 세상에 돌려주는 것이다. - P184
우리는 행위에서 존재로, 유기적으로 조용하게 그리고 삼투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행위로 자리를 옮겼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일을 하는데 결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좀처럼 할 수 없던 그런 일이다. (...) 전에는 당신의 삶과 당신의 일이 서로 다른 둘로 보였지만 이제는 당신의 삶과 당신의 투사 수단이 하나로 되었다. 당신의 관심은 더 이상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가지는 데 있지 않고, 당신에게 있는 것을 지금 당장 사랑하는 데 있다. - P187
스스로 만든 자아상을 자기도 모르게 옹호하고 그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만큼 당신은 그늘진 자아로 많이 살게 될 것이다. 거꾸로 당신의 그늘진 자아로 살면 사는 그만큼 당신 스스로 옹호하고 투사하는 페르소나를 알아보는 능력이 줄어들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가장 선하고 가장 깊은 자아를 보지 못하고 살지 못하게 하는 이중의 맹목과 같다. - P193
영적 성숙이란 결국 눈이 밝아지는 것이다. 눈이 완전히 밝아지려면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몇 달, 몇 주, 며칠 동안의 커다란 도약을 포함하여 한평생이 걸린다. 스스로 자기 내면을 성찰해 온 사람들은 생애의 마지막 몇 년 사이에 괄목할 만큼 눈이 밝아지는 것 같다. 반면, 자신의 그늘진 과거와 부끄러운 발자취를 부인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은 끝내 자기를 가두어놓은 채 임종을 맞는다. - P196
성자는 옹호하거나 남에게 주장할 자기의 ‘나‘가 없는 사람이다. 그의 ‘나‘는 하나님의 ‘나인 나‘와 의식 안에서 하나 되어 있고, 그로써 이미 충분하다. 신과의 합일이 모든 자기 증오와 자기 포기를 처음부터 할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런 사람은 완벽하게 옳아야 할 이유가 없고, 자기가 그럴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다만 ‘바른 관계‘를 맺고자 노력할 따름이다. 달리 말하면 무엇보다도 ‘사랑‘ 자체가 되려고 한다는 얘기다. - P198
우리가 진정으로 영적 순례의 길에 들어서려면 어떤 형태로는 ‘바닥‘을 쳐야 한다는 것이 복음의 ‘최종 결산‘이다. 그 지점에 이르면 비로소 ‘종교‘라 할 수 있겠다. 사람이 바닥에 곤두박질하면 현실의 효과가 어떤지, 이익인지 손해인지 그런 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그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을 뿐이다. 참된 복음은 언제 어디서나 맑고 신선한 공기요, 맘 놓고 숨 쉴 수 있는 넓은 방이다. - P207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오르막 내리막으로, 옳음 그름으로, 내 편 네 편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 있는 건 그냥 있는 거다. 이 고요함이 당신으로 하여금 훨씬 명료한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자세가 완전 피동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참된 묵상과 세련된 행동 사이의 본질적 연결고리다. 크게 다른 것은 당신의 편협한 소아가 뒤로 물러나서 하나님이 당신을 쓰시고자 한다면, 그것이 항상 하시는 그분의 일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쓰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 P215
비이원론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당신이 먼저 이원론적 사고를 마스터했고, 그러면서 한편 그것이 사랑, 고통, 죽음, 하나님 같은 큰 문제들을 다루는 데 충분치 못한 줄을 알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 P219
옹근 사람은 가는 곳마다에서 옹근 전체를 보고 옹근 전체를 만들어낸다. 분열된 사람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에서 분열을 보고 분열을 만들어낸다. 후반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나누어진 조각들이 아니라 옹근 전체 안에서 모든 것을 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저분한 조각들 안으로 ‘떨어져 내림‘으로써 옹근 전체에 가서 닿게 되어 있다. - P221
아름다움이나 추함은 무엇보다도 보는 사람 눈에 있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우리 안에서 자기의 선함을 비쳐보게 마련이고,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우리 안에서 자기의 뒤틀리고 일그러진 모습을 비쳐보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그토록 어지럽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좋아하기가 그토록 힘든 것이다. - P227
우리로 하여금 하루에 수도 없이 균형을 잃고 ‘파국‘을 보게 만드는 일들이 하나님께는 평소의 비지니스인 것이다. 우리가 실패할 적마다, 영적 지도자들이 그러듯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와, 참 좋은 기회다! 우리가 이것으로 뭘 할 수 있는지 보자!"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기 에고를 키워줄 따름인 이른바 ‘성공‘을 했을 때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흠, 뭐 괜찮은 일이 새로 생길 것 같진 않군." 몰락과 실패는 인간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 장치다. 성공은 그 반대일 뿐이다. 건강한 공동체와 신뢰는 남보다 우월한 우리가 아니라 남들과 같이 고통당하는 우리 둘레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 P230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어린 눈길을 받고 그것을 돌려드리는 것, 그리하여 안으로 자유롭고 깊은 중심에서 행복해지는 것이 전부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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