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넒고, 바로 여러분 자신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의 존재들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은 스스로를 규정했던 이야기에 갇힐 수 없는 존재입니다. - P14
이런 따뜻함, 다른 이들을 위한 아낌없는 의분은 바울의 성격이 갖는 가장 강력한 특성 중 하나입니다. (...) 이렇듯 심오하고 본능적인 너그러움이 바울의 열정과 분노와 이따금 남을 조종하거나 사나워지는 순간들 아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 P18
신자로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충성을 바칠 대상은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지금도 형성 중에 있는 몸, 곧 오늘과 내일 그 다음 날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반응하는, 누구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리입니다. 우리는 오늘, 내일, 그 후에도 우리가 함께하고 지지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이들에게 자신을 열기로 결심하고, 기도로 뒷받침된 이 환대를 중심으로 삶을 구축해야 합니다. - P27
이것은 편안한 그림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사이좋은 노부부 같은 관계로 하나님과 편안히 있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 뿌듯해 할 수 있는 선행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한계를 친구 삼아야 한다고, 제자의 삶에는 언제나 부재와 상실의 아픔이 남아 있을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 기억의 중심에서 활동하시고 상상도 못할 미래로 나를 이끄시지만, 그분은 결코 내가 여기서 소유하는 대상으로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나의 창조주이신 그분은 가닿을 수 없을 만큼 내 안 깊은 곳에 계십니다. - P32
그리고 그분은 내가 바라볼 수 있도록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강력한 이미지 중 하나를 빌리자면, 그분은 내 앞에서 자꾸만 모퉁이를 돌아가시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좇아 계속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깊이 자각함에 따라 내 안에 다른 이들과 경쟁하면서 채워야 할 절대적이고 개인적인 욕구들이 있다는 환상에서 점차 탈피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신비를 인식하게 되면 타인의 신비도 눈에 들어오고, 자기 숭배에서 해방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닮은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닌 그들의 참된 모습 그대로, 곧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창조물로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 P33
따라서 죄는 진실성의 치명적 결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건강함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대로 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개의치 마라"고 말씀하신다 해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손상된 존엄에 연연하시는 것이 아닌 지독한 흠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제대로 반사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참되고 객관적 가치가 있는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 그저 합당하거나 걸맞거나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가 아닌 귀중한 행위(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행위)에 달려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성부께 자기를 내어 주셨고 이것은 자기를 내어 주신 성부를 향한 완전한 신적 응답이었습니다. 이는 무한히 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에 대한 무한히 귀중하고 아름다운 반응이며,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내어 주심이 말씀[이신 성자]을 낳음으로써 발견되는 완벽한 메아리입니다. - P47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생명이 부차적이거나 피상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밖으로 드러난 이런 겉모습 이면에는 완전히 가려진 배후지와 같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아시는 신적 생명의 내용을 결코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와 창조주와 구속주의 생명 안에서 이 모든 신적 생명의 바다를 ‘활성화‘하실 때 하나님을 만나고, 그렇게 활성화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모종의 그림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부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실재 안에서 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내적 관조와 기쁨의 물결에 그저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차마 우리가 어떻게 한쪽으로 물러서서 그분을 사고의 대상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 P57
마지막 순간에 언어가 기대를 저버린 것을 발견한 신학자는 크랜머만이 아닙니다. 아퀴나스는 뇌졸중을 겪은 후 자신이 쓴 모든 글이 지푸라기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칼 바르트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교회교의학>을 꾸밈없고 장난스럽게 요약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그러나 바르트도 아퀴나스도 하나님에 대해 말하려고 몸부림치는 경험 가운데 인간의 언어가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발견하는 것 외에는 이런 단순함, 말문이 막히는 상태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여 있지 않습니다." 말의 한계점에서 우리는 겨우 온전한 복음의 시작점에 서 있게 될 뿐입니다. - P64
그러면 우리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이것의 당연한 귀결은 우리의 관대함과 선함이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다는 것과, 그것이 모두에게 영구적이고 즐거운 빚을 졌다는 태도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필요가 있는 곳에는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 P72
우리가 성장하면 관상과 활동이 나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하나의 일을 말합니다. 곧 우리의 모든 경험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감추어진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주시는 ‘사명‘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뻗어 나갑니다. 관상은 그 중심으로 향하는 법을 꾸준히 배우는 일이요,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을 향해 돌아서는 일입니다. - P82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자체는 성육신의 패턴과 같습니다. 현재의 순간이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드러나도록 현 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온전한 상태를 향해 자라 가는 동안에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예수의 품에 안전히" 거하고 싶은 격렬한 고뇌의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거하는 곳 외의 다른 장소를 더 이상 원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맡길 때 거대한 돌파구는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께 맞추어지고 관상은 제2의 천성이 되며 우리 삶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달하게 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사이의 간격은 더 이상 없습니다. - P83
시인 밀턴은 자신만만한 연설에서 증인의 부서짐과 모질도록 간결한 언어로 넘어오라는 부름을 결국 회피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밀턴은 영웅주의에서 잠잠한 충실함으로 넘어오라는 부름을 회피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시인이자 제자였던 밀턴은 여느 위인이나 영웅들만큼 마지못해 이 사실을 직시합니다. 매끄럽지 않게, 마지못해, 그러나 진실하게 직시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 P92
공공 도덕이 사회 속 개인들의 도덕적 건강 및 행복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고 도덕적 행위의 주체인 개인들은 공적, 집단적 부도덕에 연루됨으로써 더럽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사실상 국가의 실행 기관들 또한 도덕적인 근거를 묻는 적법성의 문제 제기로부터 면제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전제되는 도덕적, 종교적 체계가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도전은 일반 대중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공공 당국을 압박하는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일반 대중이 하나의 비전을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소위 도덕적 전통의 공동체가 공동의 도덕적 사안이 걸린 문제들에서 ‘자기 인식‘과 ‘자기 확신‘을 계속 발전시켜야 합니다. - P99
"하나님이 우리 죄와 실수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롭게 살다 죽을 수 있게 하실 거라고 우리는 자신 있게 바랄 수 있단다." 디킨스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어른들을 위한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소망이라는 이미지는, 문을 고집스럽게 열어 놓고 베푼 호의를 거둬들이지 않는 그 외로운 인물 안에서 가장 생생하고 충격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이나 정의를 시행할 힘은 없지만, 인간의 지나치고 과도한 본성에 적절한 종류의 사랑, 곧 파괴할 수 없는 방식의 사랑을 지나칠 정도로 건네고 있습니다. 더없이 불합리한 이 연민은 그 불합리성 때문에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P106
우리는 불을 붙여 자기 세대를 비춘 성자들에 대해 자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것은 ‘등불을 든 여인‘이라는 나이팅게일 신화의 핵심입니다. 돌봄의 소명을 따르려 하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등불을 든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밝게 비추고, 상황을 또렷이 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기억하지도, 보살펴 주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여 어둠 속에 깊이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집중하고 구체적인 관심을 줌으로써 빛을 비추라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 P110
불가코프는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다른 두 가지가 마르고 시든다고 주장합니다. 정치에서 그치는 정치는 결국 관리적 독재나 그보다 못한 것이 될 뿐입니다. 그는 이것을 알았고 당대의 정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어떤 것도 실제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교양 넘치는 예술 애호가만을 잔뜩 배출합니다. 정치와 예술이 없는 예전은 세상 한복판에 중요하게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사람들의 실제 관심사에서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한데 모으면 교회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공동체인 교회는 정치적인 것, 창의적인 것과 경건한 것, 영적인 것이 절대적으로 융합되어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는 새 현실입니다. - P116
이 세상의 학문들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충분히 멀리까지 파고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반대쪽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P121
십자가는 자기를 보호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사랑의 궁극적 표시입니다. 사랑은 자신이 완전히 거부당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그 궁극적 자유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능력이나 안전의 이점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세상의 조건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총체적 내어 줌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인간적 사건이 하나님의 성품을 전달하는 매개가 되고, 그 사건 안에서 인간성은 신적 생명의 거울임이, 그리고 거울이 될 수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문화에 참여할 때는 자신들이 흔쾌히 받아들여지고 교회와 사회가 어떤 가치관의 충돌도 없이 매끄러운 통일체로 함께 흘러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세상에 참여하고 귀 기울이고 협력하는 것은 오로지 사심 없는 사랑으로 베푸는 섬김 안에서만 하나님의 행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 P127
교회가 내놓는 것을 세상이 거부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조건 없는 사랑은 언제나 가능성이자 선물로서 여겨져야만 합니다. 세상의 종이 된다는 것은 노예처럼 세상을 따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세상의 규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서 자신의 안전이나 성공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자유롭게 건넨다는 뜻입니다. 때로 세상과 교회가 뜻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 진정한 공생관계가 나타나는가 하면 과격한 충돌도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의 수고는 이어집니다. 섬김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이 원하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교회의 섬김으로부터 얻었다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 P128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에서 충분히 분리되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는 데 필요한 특성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고, 하나님의 자유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자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들고 그들에게 실재 안의 기쁨과 하나님의 생명인 진리를 전합니다. - P132
그렇게 하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는 주어진 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바를 행사할 자유가 아닌, 신약성서가 말하는 대로 현실에 충실하고 진실한 ‘진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어떤 자유가 소유할 만한 최종적 가치를 지닐까요? 이 자유 때문에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가신 여정의 역사가 분명히 드러내듯, 이 이야기의 결말은 적절한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성취이자 귀향입니다. 이 자유는 진정한 우리가 되게 하는 자유입니다. - P134
하나님은 세상이 시야에 들어오게 하시고자 시야에서 물러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너무나 철저하게 내어 주셔서 자신을 사실상 지워 버리시는 이 선물을 베유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이상적 관계는 하나님이 시야에서 물러나심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자신을 ‘지우고‘ 그분에게 우리를 단순히 맞출 때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녀의 표현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탈창조"합니다. - P139
이 말은 고통을 정복하거나 피하려 들 것이 아니라 활용하거나 변화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리‘는 주어졌습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더 나은 곳을 바라는 갈망의 자극제나 도덕적 개선을 위한 교육의 기회가 아닌 인간됨의 일부로 녹여 내야 할 자료입니다.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자아는 특정한 실재들이 집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성장한다는 것이지요. 이 실재들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 부분 자아의 내적인 일이지만, 의지로 추구하거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인생사를 통해 심겨진 것입니다. - P145
로메로는 교회 내에서 발언하고 교회를 대변할 자유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누구를 대변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의 말과 증언에 내재하는 주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질문은 "여러분은 정말 누구와 함께 느낍니까?"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몸의 실제 삶 안으로 들어가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느껴지는 정서가 힘 있는 자들과 똑같게 보이지는 않습니까? 성숙한 로메로가 새로이 배운 "교회와 함께 느끼기"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을 대신하여 말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 P149
교회는 고통과 불의를 고통과 불의라고 부르는 곳이 됨으로써 참으로 성령의 거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피상적으로 평온함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나 세상에서 치유가 일어나려면 인간 고통의 진실이 정직한 목소리를 얻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끔찍한 고통, 무력함과 말 못함, 죄책, 좌절, 자기 의심을 기탄없이 포용하시고 그곳에 그분의 신적 연민을 불어넣으실 때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깊은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로메로는 어느 성탄절 설교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이 역사 속에 자신을 집어넣으셨다."고 말했습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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