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인 글이나 말은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의 깊이에 대한 분석-또는 ‘사랑으로 해석한‘ 모든 경험의 깊이에 대한 분석-을 말하는 것이다. 틸리히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관한 학문이다. 어떤 글이나 말이 ‘신학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신이라는 특정 존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실존의 의미에 관한 궁극적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신적 깊이나 그 가장 깊은 신비의 밑바닥에서 볼 때 우리 삶의 실재성과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인격의 범주 안에 포함된 이러한 실재성과 의미를 긍정하는 세계관은 그 자체가 이미 인격적인 관계의 궁극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의 밑바닥 깊이‘에 있는 최종적 진리와 실재가 되는 신이 곧 사랑이라고 보는 것이다. - P92
예수에게서, 아니, 오직 예수에게서만 자아가 아니라 순전히 궁극적이고 무조건적인 신의 사랑이 나타나 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깨끗이 비웠기 때문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게 되고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이름과 이 영광은 곧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비운다는 개념을 기초로 하는 기독론의 ‘kenotic‘(‘텅 비어있다‘는 의미의 헬라어 kenos에서 온 말이다-옮긴이) 이론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만족스럽게 조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P140
인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육체‘라고 하는 현상의 세계 안에서, 우리 존재 전체의 깊이와 기반이 ‘사랑‘으로 노출되며 나타나는 것이다. 신의 삶,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뭉치는 궁극적 ‘사랑의 말씀‘은 완전하고, 무조건적으로 또 철저하게, 인간-남을 위한 인간, 따라서 신을 위한 인간-의 삶에서 구체화되어 있다. 물과 기름의 혼합물이나 자연과 초자연의 혼합물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 사랑의 초월성, ‘우리 한가운데서의 저 너머‘를 구현한 존재로서 그는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인 것이다. - P146
이 은혜에 비추어서 우리는 남이나 자기 자신과 관계를 가질 때에 거기에 나타나는 은혜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눈 속을 솔직히 들여다볼 수 있는 은혜, 생명과 생명의 기적적 재결합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서로서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단지 말의 문자적 의미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비록 그것이 가혹한 노여움의 말일지라도 그 배후에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일지라도 분리의 장벽을 뚫으려는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생명이 비록 우리를 향하여 적의를 가지고 해를 끼치려고 할지라도 그것을 용납할 수 있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의 현실을 믿는 이상 우리는 그의 생명도, 내 생명이 그렇듯이, 동일한 근원에 속해 있고 그것에 의해서 용납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와 같이 은혜는, 때로는 이러한 모든 분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원래 소속해 있던 것과 다시 결합하게 하기 위하여 나타납니다. - P154
기독교에 따르면 ‘세속적인‘ 것(신이 없는)이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참된 깊이로부터 분리되고 이탈된 세계-그리스도가 위해서 죽은 신(神)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은 통속적인 것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다. 예배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도피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며, 세속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영역으로 은퇴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통속적인 것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통속적인 것의 피상성을 꿰뚫고 그것을 그 이탈 상태에서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자기 자신을 열어놓자는 것이다. - P164
예배의 기능은 이와 같은 깊이에 대해서 우리를 민감하게 하는 것, 즉 이 세상와 다른 여러 사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가장 가까운[近値的, proximate] 관심사(좋아하는 것이라든지, 자기 이익이라든지, 한정된 결단 따위)로부터 궁극적 관심사로 초점을 맞추게 하고, 이것을 날카롭게 하고 깊이 있게 해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추어 우리의 사랑을 순결하게 하고 바로잡아 주며, 이미 화해했고 현재도 화해하고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은총과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나 다 기독교의 예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종교적‘일지라도 기독교의 예배가 아닌 것이다. - P165
전통적인 영적 생활은 소위 ‘내적 생활‘에 중점을 두고 이 내적 생활을 인간 정신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본회퍼는 지적하기를, 성서는 조금도 거기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한다. "성서적 의미에서의 ‘마음‘heart은 내면적인 생활이 아니라 신 앞에 있는 인간 전체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분명히 밝히기를, 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안으로부터 밖을 향하는 것만큼 밖으로부터 안을 향해서 산다."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 아니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이것은 정말 사실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들에게서 "참된 삶은 만남"인 것이다. - P182
기도와 윤리는 단순히 같은 것의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기독교의 견지에서 볼 때 이 둘은 다 조건적인 것 안에서 무조건적 인격 관계를 통해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신에 관한 교리나 초월적인 것에 관한 교리도 도덕에 관한 견해를 포함시키지 않으면 그것을 재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에 관한 주장은 결국에는 ‘사랑‘에 관한 주장-인격적인 관계의 궁극적인 기반과 의미에 관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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