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190120 김영하
0. 길고 잡스러운 과거회상 주의...
1. 퀴즈쇼
장학퀴즈에 나가봤다. 고2 여름이었다. 내가 뭐 수재도 아니었고 장학퀴즈, 하면 떠오르는 전형의 출전은 아니었다. 그 때 프로그램 포맷이 좀 특이하게 바뀌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 세 학교 각 20명 총 60명이 성가대마냥 우르르 나와서 학교 응원도 펼치고, 그 중 문제를 먼저 맞춘 서 너명이 선발되어 2차전을 치르고, 최종 승자가 지난 주 우승자와 3차전을 겨뤄 이긴 사람이 다음 주에 또다시 출연하는 식이었다.
학교 대표 20명에 (기준은 모르겠고 아마 담임이 추천해서) 선발되었고, 방송국에서 미리 준 키워드들을 나누어 받았다. 20명은 키워드를 적당히 나눠서 각자 인터넷이나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 복사해서 공유했다.
우리학교, 춘천여고, 용산고 대표 학생들이 스튜디오에 모였다. 어설픈 학교 응원도 펼치고, 퀴즈가 시작되었다.
실전은 얼마나 많이 알고 답을 잘 떠올리고 그런게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들 자기 버튼이 고장난 것 같다고 했다. 60명이 동시에 버튼을 두들겨대니 그 중에 벨이 먼저 울리고 답을 할 기회를 얻는 것조차 엄청난 운이 따라야 했다. 초반부터 2차전 진출권 대부분을 용산고 남학생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두 학교는 뻘쭘하게 들러리를 서다 돌아갈 처지였다. 문제를 끝까지 듣고 남들이 모르는 문제를 침착하게 풀려는 전략은 통하지 않았다. 초반에 적당히 듣고 눈치껏 도박을 해야 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강하게, 어, 그냥 눌러봤는데 내 자리에 불이 들어왔다, 엉겁결에 말한게 맞았댄다. 2차전에 진출했다. 응원을 제일 열심히 한 춘천여고는 2차전 진출에 실패해 녹화 끝까지 심드렁하게 앉아들 있었다.
자리를 옮기기 전 파운데이션 수준이나마 메이크업도 받고, 사회자 아저씨가 특기를 묻고 노래를 시켜서 또 시키는대로 불렀다.(그게 또 편집을 안 해서 방송에 나와 밤새 이불킥 했다. What’s going on? And I say hey, hey, hey eh eh-)
촬영 과정은 우리가 보는 편집본과는 사뭇 달랐다. 사회자는 원종배와 류시현이었는데 원종배 아저씨가 거의 리드하다시피 진행했고 피디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진행이 꼬이면 같은 문제를 다시 가기도 하고 애매한 경우 사회자가 누구에게 기회를 줄지 즉흥적으로 밀고 가기도 했다.
나도 문제를 하나 맞췄다. 답이 비비안 리였다. 영어 듣기 같은 것이었는데 사회자가 어떻게 맞췄냐고 물어서 허리 사이즈에 대한 부분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자 사회자는 대뜸 “00학생도 허리가 그 못 지 않은데요?” 뻘 소리를 해댔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했다.
‘지금 공개적으로 성희롱 하신거에요?’하고 그 땐 말하지 못 했다. 아마 어색하고 당황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제작진은 그나마 제정신이었는지 그 부분은 편집되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런 질문을 받았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옛날 분이라도 그 때 참 큰일날 질문을 하셨었네요...건강하시죠? 원씨 아저씨?
다른 학생이 틀린 직후 버튼을 눌러 또 한 번 기회가 왔다 싶었다. ‘답은 불가사리! 불가사리!’ 두근대는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렸는데 원씨 아저씨가 그림이 안 좋다 싶었는지 문제를 다시 읽으려 했다. 류시현씨가 ‘00학생 답할 차례인데-‘했지만 가뿐히 씹혔다. 문제가 다시 나가고 두 번째 기회는 내게 오지 않아 다음 단계 진출은 실패했다. 방청석으로 내려오면서도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았고 아쉬운 마음도 컸다.
민수가 퀴즈쇼에 나가고 퀴즈 ‘회사’에서 결투를 벌이는 동안 그런 일들이 있었지, 하고 떠올랐다. 책의 퀴즈쇼 부분은 방송국의 분위기, 긴장감, 통제되고 연출된 환경, 순간의 실수나 행운, 그런 것들을 나름 잘 살린 것 같았다.

2. 씨버 러버(?)
장학퀴즈 출연 소식은 내가 그 즈음 죽치고 놀던 피씨통신 에듀넷 락동호회에 알려졌다. 화면에 비친 촌년 같은 검은 피부와 커다란 이빨에 나는 괜히 동호회에 알렸지 하고 후회했다. 새천년에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접한 피씨통신은 이미 끝물이었고 내가 접했던 그 공간도 고3이 되면서 서비스가 종료 되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도 민수와 벽 속의 요정 마냥 글자로 반하고 글자로 차이고 글자로 된 꿈을 꾸고 모니터나 휴대전화 흑백 액정 속 문자를 보며 눈물 짓는 연애사를 경험했다. 그 당시 쓴 일기는 온통 그 날 대화를 나눈 아이디들이 이름 대신 적혀 있었다.
피씨 통신으로 시작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인간관계는 싸이월드로, MSN이나 네이트온 메신저로, 다시 카카오톡으로 이어지거나 사라졌다.
내 사이버 러브(?)는 대부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하고 짝사랑으로 마감되었지만 십 수 년 간 한 번도 만난 적 없거나 단 한 번 만난 그 시절 인연들 중 아직도 연락을 하고 도움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있다. 대항해시대에서 배를 만들어주던 친구는 변호사가 되어 법률 자문을 해주고, 미노루 카페에서 만난 친구는 사진사가 되어 웨딩촬영을 해주고, 락동호회에서 만난 문창과 지망생은 소설가가 되어 자기 소설을 보내주고, 뭐 그런 식이다.
민수가 폐인 같은 나날을 보내던 퀴즈방 사이트는 사실 피씨통신 시절의 모습에 더 가깝다. 피씨통신은 약간의 폐쇄성과 고정성 지속성이 있었지만 인터넷 채팅 사이트들은 왠걸, 전부 순간 스치듯 사람을 대하고 목적도 천편일률 뻔해서 그다지 깊은 인연들을 맺은 적이 없다.

3.김영하
68년생 작가가 80년생의 시점으로 이 책을 썼다. 앞 부분은 시공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거쳐온, 내 세대의 이야기를 썼는데도 그랬다. 단편만 보면 얄밉게 잘 쓴다...했었는데 이 책 작가 이름 가리고 보라고 했으면 과연 끝까지 참고 볼 수 있었을까 의문이었다.
나름 폼 안 잡고 거품 걷어내고 쓰려 애쓴 것 같지만, 이렇게 시대와 세대 꼭 집어서 이야기 할 때 작위적이지 않고 공감하도록 쓰는 건 참 어려운 일이구나 싶었다.
작가는 책이 나올 당시의 (2007) 이십대들에게 나름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고충을 대신 말해주고 싶었나 본데...기꺼이 ‘무리수가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하고 싶다.
민수의 심리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건 호감이나 공감이 가기 전에 ‘난 저 정도는 아니야!’하고 부인하고 싶을 만큼 과장된 부분이 많았다. 뭐랄까 삼십대가 이십대를 바라보며 인식하는 프로토 타입? 오리엔탈리즘? 하여간 인물 자체도 좀 청소년 소설 주인공마냥 작위적이었다.
전체 구성이나 소재도 갸우뚱했다. 전반부는 민수의 고난과 퀴즈방에서 만난 벽 속의 요정과의 연애소설에 가깝다. 본격적인 퀴즈 인생은 300페이지쯤 참고 보면 나오는데 그 부분은 뭔가 SF도 아니고 미스테리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뭔가 싶었다. 뭐 이종격투기 도박도 있는데 퀴즈로 싸우는 콜로세움과 도박장도 없을건 뭐야! 하고 야심차게 그렸겠지만, 글쎄, 글쎄였다.
다 읽고 나니 연애소설 한권과 퀴즈쇼 미스터리 한권을 억지로 합쳐 놓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440쪽의 (재앙같은) 분량..참고 읽은 내가 대견했다.
물론 도시의 밤이 찾아오는 묘사나 벽속 요정과 만나기 전과 후의 감정 차이, 휴대전화를 보며 연락을 기다리느라 안절부절하는 부분, 민수와 요정의 좋은 밤 묘사, 마티니 팀내 갈등 표현은 애썼네, 싶기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좋은 표현조차 유치해ㅠㅠ작위적이야ㅠㅠ으 오글오글ㅠㅠ이런 마음에 압도되어버렸다.

이렇게 투덜댈걸 뭘 이리 길게 썼나 모르겠다. 소설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찾은 음악들을 들으며, 묻어두고 싶지만 잠재의식 아래 가라앉아 있다 물 위로 불쑥 튀어오른 흑과거ㅠㅠ들을 음미하며 그 땐 그나마 그거라도 있어 버티고 살았구나, 그런 과거의 어둠이라도 나의 일부겠지 하며 책을 덮고…이런 봉인을 해제하고 몹쓸 것들을 소환한 김영하를..아니 이 책을 산 나를..욕하고 자야겠다.

Muse - Unintended
https://youtu.be/i9LOFXwPwC4
The Doors - Light my fire
https://youtu.be/deB_u-to-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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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21 1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열반인님은 까는 리뷰(?)에 능하실 거라는 생각과, 그래도 좋아하시는 김영하니까 이 정도 하고 봐 주신 것 같다는 생각과, ‘추억담 리뷰‘의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다는 생각과.....

반유행열반인 2019-01-21 11:18   좋아요 2 | URL
추억담 리뷰의 최강자는 역시 syo 님이시죠...사실 까는 리뷰의 정석은 아주 짧고 성의 없게 별 하나와 함께 쓰는건데...왠지 참고 읽은 게 아까워서 보상심리로 긴 글이 나온 것 같아요. 이러면 길고 재미 없는 소설을 길고 재미 없는 리뷰로 상쇄해서 세상의 균형을 맞추고 덜 억울한 듯한...(뉴스피드로 안 본 눈 사고 싶은 분들께는 또 죄송하지만...복수는 이래서 끝이 없는거야...)

syo 2019-01-21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똑같은 포스트가 두 개 올라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반유행열반인 2019-01-21 11:13   좋아요 1 | URL
오 분노의 더블 터치?를 했나보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는 지웠어요.

cyrus 2019-01-21 1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회자의 생각없는 발언이 퀴즈 도전자들의 심리를 흔들리게 하는 돌발 변수가 될 수 있겠군요. 저도 그런 상황이었으면 마음이 흥분해서 다음에 나올 퀴즈가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1-21 19:50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제가 떨어진 건 심리적 위축보다 그냥 준비도 실력도 부족해서 였던 것 같습니다ㅎㅎ

scott 2019-01-21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퀴즈쇼 연재 당시 읽고 영화로도 받는데 반유행열반인 글을 읽으니 새롭네요
많이 투덜거려주세요 더 잘근 잘근 씹어도 됩니다. ^.~

반유행열반인 2019-01-21 19:48   좋아요 2 | URL
왠지 그럴수록 엄한 작가들한테 열폭하거나 안티 같아서 부끄럽긴 한데 어차피 작가님들이 안 볼거...더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ㅎㅎ

syo 2019-01-2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후후. 열반인님이 인싸로의 걸음을 뚜벅뚜벅 걷고 계시는군요.
올해 12월에는 상전벽해가 일어나겠죠.

이 댓글은 성지가 됩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1-22 14:26   좋아요 0 | URL
자꾸 그렇게 놀리시면 저 책도 끊고 서평도 끊고 어디로 사라질지도 몰라요...태생적 아싸에 방 구석 여포라 손가락으로만 떠드는 중인데 (될 리도 없지만)제 게시물이나 그 댓글이 성지 흉내라도 내게 되면 공황장애 같은게 생길지도 몰라요ㅋㅋㅋ

syo 2019-01-22 16:49   좋아요 2 | URL
주머니 속의 송곳이 언젠가 튀어나오는 건 다 송곳 탓입니다ㅎㅎㅎㅎㅎ 전 그냥 언제 터지나 주머니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
 

주기율표 담요를 샀더니 비싼 과학책을 두 권이나 주셨다. 친절한 알라딘씨...
너무 좋아서 아무 것도 안 읽고 담요만 끌어 안고 읽고 있다.
안녕 가돌리늄 안녕 란타넘족 악티늄족 친구들 니들이 방사선 뿜뿜 유독하대도 어디에 쓰이는 뭐하는 놈들인지 잘 몰라도 일생동안 내 주변에서 만날 일이 없대도 만나면 죽거나 병이 난대도 이름만은 참 예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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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1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1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2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2 0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해는 정말 책 최소한으로 사고 집에 쌓인 중고책 더미부터 어떻게 해야지! 전자 도서관에서 빌려 봐야지! 했는데
아 주기율표 담요가 너무 갖고 싶었다...
https://www.aladin.co.kr/Ucl_Editor/events/book/181228_periodic_pop.html

‘왜 맛있을까?’에서 리비도 넘치는 번역으로 당황을 선사한 역자가 공저자로 참여한 ‘인류의 기원’과
‘본격한중일세계사4’를 장바구니에 담자... 2만9천원! 천 원이 모자라!!!

세계사 만화책을 빼고 눈알을 굴리다 ‘김상욱의 양자공부’를 담는다,..3만원 겨우 넘겼다...
문돌이 팔자에도 없는 양자공부 하게 생겼다... 문돌이가 주기율표 담요에 꽂힌게 잘못이지...
메아 쿨파 메아 쿨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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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 -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 진짜 미국이야기 만화로 보는 교양 시리즈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20190109 하워드 진, 마이크 코노패키, 폴 불

원제 A People’s Histroy of American Empire
미국 민중사의 만화 각색판이다. 
겨우 200여 년 남짓인데도 미국 역사에 대해 너무 몰랐던 것 같아서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권 짜리를 전자책으로 샀다. 아직 1권 절반 정도도 못 보고 독립 혁명으로 건국한 곳까지는 가지도 못 했다. 청교도 등등 초기 이주민들이 식민지에서 겪는 곤란까지 읽다가 너무 더디 읽혀서 마침 이 책을 보게 되었다. 
한국 제목만 보고 압축해 놓은 통사 정도로 생각했는데 방향성 목적성 뚜렷한 책이었다. 정확한 정보를 주려면 ‘미 제국주의의 침략사’ 정도 제목이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나처럼 낚여서 보는 사람이 절반에 절반으로 줄어들테니ㅋ

저자의 관점은 십 여 년 전 마이클 무어의 ‘볼링포컬럼바인’이나 ‘화씨911’ 같은 영화를 마르고 닳게 본 터라 엄청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감독 특유의 블랙 유머와 함께 이미 충격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군사 국가로서,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나라로서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국가와 민족과 사람들, 자국 내 소수자들을 어떻게 파괴하고 조종해 왔는지를 살펴 보는 것도 의의가 있겠다 싶었다. (일반적인 통사야 뭐 다른 책 보면 되지…)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노동자 탄압 및 학살, 스페인과의 전쟁 와중 희생된 쿠바, 흑인 군대, 필리핀 침공, 반공주의의 희생자들, 1, 2차 세계대전, 핵폭탄 투하, 흑인과 하위 문화 탄압, 베트남 전쟁, 니콰라과와 엘살바도르의 내전 종용, 이란의 왕조 지원 및 민주 정부 분쇄, 걸프전, 무자헤딘 지원 그리고 911 과 이라크 침공까지.
나열만 해도 미국의 정부 차원에서 외교, 정치, 자국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죄악은 그 목록이 길고 죄의 무게도 무겁다. 그로 인해 죽어 간 무고한 목숨들 파괴된 생활과 영혼들은 더더욱 무겁다. 

이런 과거를 돌아본 뒤에도 저자는 희망을 이야기 한다. 그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바꾸기 위해 애썼고 옳은 것을 이야기했고 비리를 폭로했고 그 결과 전쟁이 끝나고 흑인의 권익이 신장되었고 독립국이 생겼고 변화가 이루어졌다. 급격한 변화에 대해 우리는 놀라고 또 그만큼 금방 잊어버린다. 잊지 않고 돌아보고 다시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절망하지 않는 것.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것조차 자주 잊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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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싶다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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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5 제임스 설터
제임스 설터의 책은 딱 한 권 봤다. 단편집 ‘어젯 밤’
문장은 눈부시고 시적이었다. 짧은 소설들이지만 장면들이 눈에 선하고 분위기가 와 닿았다. 이야기는 강렬했다. 아, 나의 꾸진 문장으로는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여튼 좋았다.
그런 글을 쓴 사람이 이런 제목으로 책을 냈다면 궁금하다 싶었다. 책 정보도 안 보고 일단 샀다. 

결론은 낚였다. 

다 읽고 난 전체적인 소감은 책으로 만들어진 ‘제임스 설터 카달로그 또는 광고지’를 읽은 기분이다. 

책 날개에서 설터가 2015년 90세에 사망한 것을 처음 알았다. 이 책은 2016년 나왔고 우리나라에선 작년 말에 출판되었다. 
영어 원제는 Art of Fiction인데 밀란 쿤데라 L’art du roman도 생각나고 뭐 이것 저것 갖다 붙인 모양은 비스무레 해 보이지만 밀도도 분량도 한참 멀었다. 
일단 제목에 Fiction을 넣었는데 설터는 픽션이라는 말이 부적절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분명 본문(파리리뷰 인터뷰 부분)에도 나온다. 설터 생전에 낸 책이면 이런 제목 붙이는 걸 좋아했을라나 모르겠다. 그건 그렇다 치고.

2016년에 나온 Art of Fiction은 목차의 ‘소설을 쓰고 싶다면, 장편소설 쓰기, 기교의 문제가 아니에요’까지 실려 있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하면 딱 90여페이지. 
책 등에 ‘제임스 설터 산문’이라고 써 있었는데...그렇지 운문이 아니니 틀린 말은 아닌데, 에세이 같은 것 생각하면 오산이다. 읽고 나서 알았다. 한 챕터가 한 시간 정도 분량의 강연록? 강의록? 여튼 어디에선가 말을 하기 위한 원고임에 틀림 없다. (정작 어디서 어떻게 쓰인 원고인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물론 설터의 이야기는 빛이 나고, 소개해주는 작가들, 소설들, 자신의 쓰는 방식, 자신의 이야기, 다 재미있고 들을만 했다. 뭔가 그렇구나 싶은 부분도 있었다. 전적인 허구가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져다 쓰는 것에 대해 듣자 그렇구만 하고 뭔가 용기가 생겼고, 작가의 일은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고 하는 거구나 쓰는 건 일도 아니구나 하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작가의 ‘가벼운 나날’과 ‘스포츠와 여가’는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처음 부터 끝까지 줄창 듣다 보면 아, 이거 왠지 진짜로 내 취향일 것 같은데, 오, 에로티즘의 혁신? 외설적이라고 뉴요커가 안 실어줘? 뽐뿌가 팍팍오는 느낌이었다. (그런면에서 두 책을 출간한 한국 출판사는 이 책을 낸 의도-설터 책을...재고를...마구 팔아 치우고 싶습니다…-를 어느 정도 달성했구만 싶었다. 흥!)
가벼운 나날은 원제 Light Years인데. Light Days도 아니고 나날이라 번역하는게 맞나 그냥 혼자 생각...가벼운 시절들? 빛나는 시절? 아마도 last night이 마지막 밤 어젯 밤 중의적인 것 마냥 이것도 그랬겠지… 는 영알못의 역시 혼자 생각...

아, 그런데 언제적 강연용 원고인지 몰라도 예시 드는게 줄창 옛 소설들이다. 어젯 밤(2005년 작인가)은 이 책 통틀어 한 번도 안 나온다! 아 그것도 그렇다 치고...

딱 거기까지면 되는데 굳이 1993년 파리 리뷰의 인터뷰를 덧붙였다. 이건 더더 옛날(저 때 태어난 애들이 이제 스물 여덟 이오.) 글이다. 게다가 작가의 강연 내용하고 자꾸 중복되고 겹친다. 물론 아주 약간 안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나보코프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엄청 까다롭고 엄청 위대한 양반이랑 녹음기도 메모도 없이 인터뷰 하고 술 더 마시자는  것도 뿌리치고 기차역에서 기차 놓쳐가며 기억 나는 내용을 죽어라 적어대는 설터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작가 목소리가 생생하니 역시 여기까지면 되는데 뒤에 40페이지 쯤 존 케이시라는 사람이 ‘나가며’하는 에필로그?같은 걸 붙여 놨는데 이건 뭐 평론도 해설도 아니고 앞에서 본 이야기를 전혀 새로울 것 없이 또 반복한다! 어조나 이런게 뭔 설터 죽고 나서 장례식에서 한 마디 하는 듯 한...내 친구를 기리며 어쩌고 저쩌고 하는 듯한...잘 읽히지도 않는다. 거기다 옮긴이 말까지 하면... 반복도 적당히 해야지. 설터의 깔끔한 소설과 너무 매치 안 되는 책 구성이다. 

굳이 이런 식으로 군더더기들을 주렁주렁 달아 200페이지 넘게 만든 이유는...뭐 책 값을 그만큼 받아야 하니까. 90페이지 내고 책값 딱 반 잘라서 냈으면 충분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돈을 못 버니 그랬겠지...

​그래서 이 책을 거대한 카달로그 내지 광고지라고 한 거다. 마지막으로 뒷 표지 날개에 칼라풀한 설터의 책 표지까지 오밀조밀하게 달아 놨으니. 완벽하다. 

아, ‘가벼운 나날’과 ‘스포츠와 여가’는 꼭 볼 거다. 꼭 중고로 사 볼 거다. 어차피 내가 제 값 주고 사 봐도 그 돈 설터한테 못 간다. 남아 있는 엄한 놈들에게 간다. 설터는 죽었다. 소심한 복수다. 미안해요. 죽은 줄도 모르고 뒤늦게 읽어서. 죽기 전에 만나기엔 아저씨 나이가 너무 많았잖아요. 제가 영미 소설은 너무 몰라서 그랬어요. 

출판사랑 마음에 안 드는 책의 기획 흉은 충분히 봤으니 이제는 제임스 설터가 남긴 좋은 말들(문장들)을 옮겨 봐야겠다. 

닥치고 고쳐 임마+문체, 작가의 목소리.
“그들은 끊임없이 고쳐 씁니다. 바벨, 플로베르, 톨스토이, 버지니아 울프 같은 작가들 말입니다. 그들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은 고쳐 써야 하는 형벌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쓰려고 했던 것은 그게 아니니까 말이에요. 혹은 쓰려고 했던게 잘못 생각한 것이었으니까요. 또는 고치면 더 좋아질 수 있을 테니까요. 너무 길거나 단조롭거나 요점을 벗어났거나 좀 엉성한 것 같아 보이니까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 작품은 언제나 그들이 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것이 그들의 문체입니다. 그들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니 인생 갈아서 써 임마.
“여러분은 자기 인생의 영웅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 만의 것이고 흔히 첫 번째 소설의 기초가 됩니다. 그 어떤 이야기도 자신의 이야기만큼 잘 쓸 수 있는 것은 없지요.” 사례-필립 로스’굿바이, 콜럼버스’, 볼테르’캉디드’, 시어도어 드라이저’시스터 캐리’

‘가벼운 나날’에 대한 작가의 말
“부부 생활의 닳아 빠진 돌 같은 것...평범한 모든 것, 놀라운 모든 것, 삶을 충만하게 만들거나 쓰라리게 만드는 모든 것...기차에서 보이는 것들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동물들은 죽고 집은 팔리고 아이들은 자라고 심지어 부부도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 시가 남아 있습니다.”
처음 제목은 ‘네드라와 비리’

“우리가 글로 쓴 것들은 우리와 함께 늙어가지 않습니다.”

‘올댓이즈’의 처음 제목은 ‘토다’, 그 책의 제사
“모든 건 꿈일 뿐, 글로 기록된 것만이 진짜일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Q.등반과 관련하여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A.”그곳까지 와서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거에요.’난 할 수 없어. 난 이걸 할 수 없다는 걸 알아. 난 틀림없이 이걸 할 수 없어. 그렇지만 해야 해. 난 해야만 한다는 걸 알아.’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죠. 그러나 그런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에요.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어쨌든 그 경험은 당신을 어떤 식으로인가 성장시키지요.”
등반에 대해 물었지만 등반에 대해서만 답한 게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 안다. 

Q.글을 쓰고자 하는 궁극적인 충동은?
A.”이 모든게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에요. 남아 있는 거라곤 산문과 시, 책, 그리고 글로 기록된 것들뿐이겠죠. 인간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책을 만들어냈어요. 책이 없다면 과거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에요. 우린 이세상에 벌거벗은 채로 있겠죠.” 

쓰지 않은 모든 순간은 사라진다고 한 것도 본 것 같은데 못 찾겠다. 꾀꼬리. 안 써 놨더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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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06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장바구니에서 슬쩍 뺐어요!!

반유행열반인 2019-01-06 01:10   좋아요 1 | URL
어 출판사에서 보낸 자객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요...ㅋㅋㅋ버닝더데이즈였나 자서전도 출간 예정이라던데 그거랑도 많이 겹치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