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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이문구 지음 / 아로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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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이문구.

작년에 아프고 나서 올해 수능은 다 봤다 하고 책이나 보기 시작해서 뚝딱 반 년동안 백 권 보고 연말에 다시 공부 시작했다. 20년 전 쯤 읽은 ‘관촌수필’도 다시 보았다. 올해 수능특강 문학편 마지막에 ‘장곡리 고욤나무’가 실렸길래 야, 올 수능 전에 나 이거 실린 소설집 읽고 간다 했다. 그러다가 다른 문제집에 ‘우리동네 리씨’ 실린 걸 읽었는게 리낙천씨 캐릭터가 맘에 들어서 이 소설이 더 궁금했다. 그래도 일단 연계 교재 실린 작품이 우선이지? 하며 나무 시리즈를 먼저 보기로 했다.
엄마가 2007년 8월 13일 신림동 광장서적에서 산 책이라고 한다. 맨 뒷표지를 들추면 볼펜으로 그렇게 써 놨다. 광장서적은 이제 없어졌고 나는 신림동을 떠나 떠나 봤자 그짝이 그짝이라 옆동네 봉천동 붙박이가 되어서 벌써 십 년 가까이 살았다. 이문구 아저씨는 마지막 소설에서 까그매(까마귀) 어디 갔냐고 자꾸 묻는데, 거기서도 들리신다면 말해주고 싶다. 까마귀요 관악산 언저리랑 그 근방 언덕배기들 국사봉 장군봉 상도근린공원...하여간에 관악구 근처로 다 와서 잘 살고 있어요. 저 맨날 봐요. 맨날 들어요. 까옥까옥.

전봇대에서 한참 뭔가를 노려보던 그 까마귀, 마침내 해장국집 앞 벌어져 있던 종량제 봉투에 발을 뻗어 잽싸게 뭘 하나 나꿔채서 다시 전봇대로 올라갔다. 겨우 가져간게 사리면 빈봉다리, 꽝이었다. 라면 봉지 허무하게 떨구던 그 장면을 직접 보며 나는 또다른 국어 기출 문제에서 읽은 오세영의 시 속 까마귀를 생각했다. 그리고 코웃음쳤지. 그렇게 멋있는 새일리 없잖아.


전신이 검은 까마귀,
까마귀는 까치와 다르다.
마른 가지 끝에 높이 앉아
먼 설원을 굽어보는 저
형형한 눈,
고독한 이마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
얼어붙은 지상에는
그 어디에도 낱알 한 톨 보이지 않지만
그대 차라리 눈발을 뒤지다 굶어 죽을지언정
결코 까치처럼
인가의 안마당을 넘보진 않는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 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겨울 되자 온 세상 수북이 눈을 내려
저마다 하얗게 하얗게 분장하지만
나는
빈 가지 끝에 홀로 앉아
말없이
먼 지평선을 응시하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가 되리라.
-오세영, ‘자화상2’ 전문

넘보지 않기는요 ㅋㅋㅋ요즘 까마귀는 쓰레기 봉투도 뒤져요…
까치 떼랑 까마귀가 싸우는 걸 봤다. 독고다이 까마귀가 머릿수로 떼까치들한테 밀려서 결국 다른 곳으로 날아갔고, 이때다 싶은 까치새끼들은 득달같이 도망간 걸 쫓아가서 더 멀리 쫓고, 쫓았다. 그걸 보면 까치나 까마귀나지 뭐. 뭐가 달라.

까마귀처럼 미움 받다 못해 무심해지고 어느새 누구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로 갔을까, 내내 궁금해하며 이문구 아저씨는 밤잠을 설치다가 나름대로 이렇게 저렇게 적어 놓았다. 우리 동네 시리즈도 그런 것 같고, 김명인 시에서 책 제목을 빌린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도 그랬다. 나는 차가운 도시 여자가 다 되었는데, 이제 대부분 죽고 있거나 죽어 없어졌을 농사 짓던 아저씨들 서사가 이렇게 흥미로워도 되는 거냐 싶었다.
1980-90년대 언저리의 몰락하다 못해 다 망한 갯가 농촌 이야기를 보면서 아저씨나 할배들 너무 미워하면 안 되겠네 사실 그렇게 미워한 적도 무서워 한 적도 없지, 그냥 놀려먹고 젊은애들 미래 당겨다 다 말아먹은 탓하고 그러기만 했지, 그런데 역시 자세히 봐도 예쁘진 않지만 가엾긴 하지, 그러고 재미나게 읽었다.

-장평리 찔레나무
시작부터 아저씨는 아니었다. 전화해서 자꾸만 니네 딸 수능 몇 점이나 받았냐고 부아 돋우는 시동생 새끼 때문에 골머리 앓는 부녀회장님이 첫번째 주인공이었다. 스스로 반갑잖은 이 왔슈, 하면서 기껏 키운 실한 고추밭 다 털어가고, 까치 고기나 좀 잡아다 얼려 놓으라고 지랄 떠는 시동생놈 꼬라지 보면서 속터지는 두 내외 보는데 와 진짜 왜 저도 같이 열받게 이렇게 잘 써 두셨나요… 세상에 가시 찌르듯 성가시고 얄미운 인간은 왜 이리 많을까요. 어디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인간일까요.

-장석리 화살나무
관촌수필의 민구 아버지는 좌익에 연루되었다 젊어서 돌아가시고 집안도 고초를 겪고 기운다. 이념 때문에 인간 취급 못 받고 목숨마저 위태롭던 이가 해안선을 질러 섬으로 가서 살아남도록 돕는 이들이 나오고, 마지막은 그렇게 살아 늙은 홍옹이 단테가 한 말은 아니라지만 하여간에 중립 타령한 애들 제일 조심하라고 제일 먼저 가까이서 뒤통수 칠 놈들이라고 이야기 전해듣는/전해 주는 이에게 말해주는 액자식 구성이 좋았다. 약간 원스어폰어타임인 헐리우드 처럼 만약에,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많은 도움으로 살아 남아 여기 할아버지처럼 늙었더라면...하고 쓴 기분이어서 그런 만약에, 를 읽을 때는 늘 짠하다.

-장천리 소태나무
농촌 야외 가서 카섹스 좀 하지 맙시다...한 마디 하고 싶은 걸 가지고 소설 한 편 잘 써 놨다. 소태나무 본 적도 먹은 적도 없지만 도로 뚫리고 도시에서 교외로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은 농촌 사람들에게 안 본 눈 사고 싶은 일도 많고 많게 씁쓸하게 만들었다는 걸 이렇게 박제해 놨다.
신규 발령 받은 학교에 매일 새벽부터 몸빼바지 입고 집게랑 봉투 들고 쓰레기 줍고 다니던 독특한 선생님이 계셨다. 그 분이 교감 선생님한테 막 속상한 듯 말하던 게 생각났다. 교감 선생님! 내가 학교 주차장에서 뭘 주웠는지 아세요? 콘돔! 한강변이라 그런가 외부차들 막 들어와서 별짓을 다 하고 가… 덕분에 젊어서 알았다. 사람들은 참 때와 장소 가리지 않는구만… 학교라고 하면 더 신날 수도 있겠네… 교회나 절, 고궁이랑 비슷한 배덕감… 여기까지...

-장이리 개암나무
예전에 ‘나무의 모험’이란 책 읽었을 때 야무진 이웃에게 넌 개암나무! 난 산사나무! 막 이랬었는데 개암나무 나오는 이 이야기가 참 좋았다. 날이 가무니까 비라도 오라고 기우제를 지내겠다는 마을 사람들, 그런데 이 지역 연고 없는 서울 사람이 묘를 여기다 써서 그렇다며 무덤을 파버리겠다고 작당을 한다. 거기다 대고 혼자서 끝까지 그게 말이 되냐고, 에미넴 싸대기 치게 8마일 찍어가며 충청도 사투리로 랩배틀 뜨는 인물이 나오는게 재미났다. 송곳 같은 사람이 그래도 동네마다 하나는 있구나, 그래서 우리 존재 다 망하진 않고 이럭저럭 버티고 있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우제 비과학 빼액 하던 아저씨도 자기네 꾸찌뽕 나무에다 까치가 집 짓는 거 보고 옛 고전에서 본 선비님들 집 앞 나무에 까치집 짓고 나서 다 과거 급제 했대...우리 고3 아이도 제발… 내년엔 지금 고2인 참한 조카 아이도 제발… 이러는 거 더 재미있었다. 인간은 참 모순의 존재라 재미있지. 잘 여문 개암 한 움큼, 열 세톨 주워다가 여섯 톨은 아이들 먹이고 일곱 톨은 묻어서 단 하나 난 나무를 키우는 아저씨,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무덤이라도 그거 파버리는 마을 사람들 말리는 거랑 아주 일관되게 올곧고 다정해서 이 책에서 제일 마음 가는 캐릭터였다.

-장동리 싸리나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아저씨가 밤새 잠 못들고 달빛 훤하게 비친 곳에 풍란 그림자 보고 수묵화로 착각하고, 잡앞 저수지에 머물다 가는 새들을 떠올리고. 분위기나 묘사가 꽤나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마지막에 고깃배 착각한 이야기는 뭔 금오신화 따라하듯 기이한 분위기도 있고… 이문구는 매월당 김시습 가지고 소설 써 놓은 게 있기도 하니까 이 소설 전개에 그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안 읽고 거의 십 년 전에 사 쌓고 그런 소설이 (집에) 있다는 걸 알기만 하고...여태 안 읽은 이문구 소설이 아직 남아서 행복…

-장척리 으름나무
나는 시골 (그래도 읍내) 살았어서 으름 먹어봤다. 삼촌들이 야생 바나나야, 하고 줬는데 씨꺼먼 씨만 겁나게 많고 미끄덩거리고 영 거슬리던 생각만… 자기 장인더러 으름덩굴 같다고, 우직하게 농촌 지키는 종구에게는 미련하다고 퉁박 주는 농촌운동 한다는 은산이 새끼 너무 얄밉더라…

-장곡리 고욤나무
나는 역시나 시골 출신이라 고욤열매도 먹어봤다. 할머니가 고염이라고 알려줬는데. 할머니네는 감나무는 없고 접붙일 때 놓쳐 작고 시꺼먼 열매 다닥다닥 열리는 고염나무만 집 앞에 하나 있었다. 할머니가 그걸 가지째 말려 곶감이다 하고 줬는데 먹잘 것도 없고 씨만 크고 살은 적고 조금 달긴 한데 덜 마른건 뜹뜨래 하고 먹기 싫었던 것 같다. 고욤 하면 그렇게 말라 비틀어져 일만 하다 할아버지한테 맞아 죽은 할머니만 생각난다. 이 이야기에서도 기출이 아저씨가 농지법 바뀌고 망했네 시발 하고 거의 우울증처럼 땅도 못팔고 땅팔아 돈달라고 지랄거리는 새끼들 때문에 속터지다 고욤나무에 송아지 목줄 매달고 죽은 일을 사촌 봉출이 아저씨가 명탐정 코난처럼 회상하고 관찰하면서 세상 재미없다더니 죽었네, 하는 주변 사람들한테 아닌데 이눔들아...속 생각 하는 구성으로 그려놨다. 과연 나놈이 이 책을 읽게 만든 기출이 아저씨 이야기는...수능 기출로 남을 것인가 미출제될 것인가 ㅋㅋㅋㅋ

-더더대를 찾아서
까마귀에서, 언년이에서, 더더대로 이어지는, 이문구의 문학관이 압축된 듯 읽히는 이야기였다. 나무타령하다 마지막은 갑자기 까마귀 타령으로 마무리해서 밀란쿤데라 전집 나온 뒤 갑자기 ‘무의미의 축제’ 하나 내서 전집에도 안 싣고 매롱하던 할배 생각도 좀 났지만, 잊었던 것들, 사라진 것들을 내내 궁금해하는 화자는 그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이겠지 싶었다.

이 소설집은 2000년에 동인문학상을 받았는데, 마지막 수상 소감도 재미있었다. 조선일보라 뭐라해도 이 상은 있을 만하고, 나도 주니까 잘 받고, 김동인 친일이라고 그 상을 받냐고 뭐라하는 놈한테는 우리 조상도 창씨개명도 했던 집안인데 내가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뭐 어쩌라고 이러고 눙치는 거도 패기쩔고 뻔뻔한게 어디서 쳐 맞고 다니진 않았겠네...싶었다. 근데 술이랑 담배는 좀 줄이시지 벌써 이십 년 전에 돌아가시다니 좀 빨리 가셨네요 이문구 아저씨...그래도 쓸만큼 쓰고 가서 저는 남겨주신 거 재밌게 읽습니다 다음엔 우리동네 읽겠습니다… 6모 국어 1등급 맞고, 매번 4-5등급 언저리던 수학도(현실적으로 낮춰 잡은) 목표치였던 3등급 찍맞 컷으로 겨우 달성해놓고 그래도 신난다고 상이라고 오랜만에 읽다만 소설책도 다 읽고 독후감도 써갈기고 내일부턴 또다시 지하감옥 스터디카페로..읽던 책 한 권 다 해치워 속 시원한 주말 밤입니다… 저는 까마귀/사마귀도 제 친구 같아 좋지만 요즘엔 물까치가 더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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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저냥 저랬던겨. 달빛에 번들거리는 저 물빛마냥 살아온겨. 못나게. 지지리도 못나게. (177)

-까마귀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다만 여느 새처럼 예쁘지가 않다고 하여 미운 털이 박힌 새로 사람들에게 돌림을 받아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검은 깃털이 왜 미운 털이란 말인가. 또 짖는 소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사람들의 눈 밖에 난 셈이라지만, 까마귀 소리가 왜 저승에 가자는 소리나 곡을 하는 소리와 비슷하단 말인가. 까마귀를 훌닦는 험구는 덧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마을에 살면서도 서로가 뜨악하여 탐탁지 않게 보다 보니 조석으로 마주쳐도 으레 낯이 설 수 밖에 없었고, 낯이 설다 보니 오해만 되풀이되게 마련이었을 거였다. 그리하여 까치는 사람들에게 국조로 추대되어 한창 대접을 받아가며 사는 동안 까마귀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나은 새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새로 소외되어 외로움과 서러움을 도맡아서 살다가, 언젠가부터는 원래 없었던 새처럼 숫제 구경도 하기가 어렵도록 죄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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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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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8 프리모 레비.



 시작은 예쁜 담요였을지도 모른다. 올리버 색스가 자기 나이와 같은 원자 번호의 원소로 이루어진 기념품을 모으는 장면을 읽고 흥미를 느꼈을지도. 이젠 정확한 내 나이를 모르겠다. 이트륨, 지르코늄, 니오븀 셋 중 하나인데, 셋다 내구도가 좋다고 한다. 다른 금속에 섞어 강화시켜주거나, 산화물을 치과 치료에 쓴다. 확실히 살아온 중에 몸도 마음도 제일 튼튼한 시절이긴 하다. 


 

 막연하게 물리나 화학 공부를 더 해 보고 싶었다. 그럼 수학도 왠지 같이 해야 할 것 같고. 과학이든 수학이든 고교 수준부터 보자, 그럼 아예 수능을 볼까? 하다가 그해부터 약대가 다시 수능으로 입학생을 뽑는 걸 알게 되었다. 화학, 화학이다! 하고 EBS 화학 강의를 몇 개 보다 보름만에 접었다. 진리의 생지(생명과학+지구과학)! 입시에 성공하면 나는 주로 화학을 공부하게 될텐데, 화학을 배우려면 생명과학과 지구과학으로 대학 문을 뚫어야 하는 묘한 상황… 작년에 조금 쉬는 김에 물리 해 볼까...하면서 내신 강의를 석달 정도 2/3쯤 듣다가 다시 생명과학으로 돌아왔다. ㅋㅋㅋ반도체까지 배우긴 했는데 역시…물리야 만나서 반가웠고 시험으론 만나지 말자…



 책 쟁이는 비중이 문학과 교양과학책이 거의 반반 비등비등한, 뼈문과지만 이과로 개조되길 열망하는 나새끼는, 그래서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라는 책이 오래도록 궁금했다. 무슨 책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내가 읽으면 좋아할 것 같았다. 막상 중고로 책을 마련하고 나니 어, 과학책인 줄 알았는데 소설이야? 작가가 과학자 아니야? 소설가야? 아 둘다야? 읽지도 않고 그냥 어리둥절하면서 꽂아놨다. 그러고나서도 프리모 레비 책만 보이면 막 주워모아서 다섯 권이나 꽂아 놨다. 읽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오래 읽지 않았다. 읽게 된다면 주기율표가 제일 먼저겠지. 



 해가 바뀌고서 책을 펼쳤고, 거의 석 달에 걸쳐 읽었다. 책은 깜짝 놀랄 정도로 흥미로웠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할 것 같았는데 실제로 좋았다. 그런데도 책을 매일 읽지는 못하는 딱한 날이 이어졌다. 강제수용소 생활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하여간에 하고 싶은 걸 못하는 나날이다. 공부를 많이 못한 날은 공부도 안 하는 게 책은 무슨! 공부 많이 한 날은 상으로 읽자, 하지만 이미 피곤해져서 그냥 쓰러져 잤다. 졸음을 참고 열한시 열두시 언저리에 원소 한 꼭지씩 읽는 날은 운이 좋았다. 그리고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컵받침에 쏟은 설탕 알갱이 한 알 한 알 집어먹어서 즐거운 건지 설탕은 원래 맛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그랬다. 



 철의 이미지와 잘 맞는 산 타는 강인한 산드로(산에 올라가서 산드로? 미안…)의 이야기가 강렬했다. 읽어나갈수록 강렬함과 인상 깊은 에피소드는 자꾸 갱신되었다. 폐기물에서 니켈 추출하려고 광산에서 일하던 시절 레비가 쓴 환상동화들도 좀 어이없지만 재미있었다. 야, 거대한 납 맥 찾았으니 이제 자손을 퍼뜨리자! 수은 판 돈으로 내 부인한테 껄떡대는 놈한테 소개시켜줄 여자를 데려왔는데 그냥 이 여자, 나랑 살자! 이런 원시적인 빻은 이야기가 왜 재미있어…

 인으로 당뇨 치료하려는 무의미한 실험하는 와중에 유일하게 의미있었던, 좋아하는 직장 동료 겸 동창생 여자친구 붙잡지 못하는 이야기, 포로로 잡힌 중에 곧 다시 풀려나 흐르는 강에서 사금 캘 것을 자랑하는 다른 죄수를 보고 부러워하는 이야기, 왠 고객이 고객 상담하자고 갔더니 지루하게 생존담 썰 풀면서 패전 독일 병사들이 준 우라늄이라고 보내준 걸 분석한 이야기, 감광지의 완두콩 얼룩의 비밀, 결함있는 니스 원료와 바나듐 때문에 재회하게 된 수용소의 독일군 학자, 마지막은 탄소 순환을 온갖 비유 버무려 아름답고 비장하게 마무리해서 오 사기다… 화학자가 글도 잘 써… 생존도 잘 해… 남의 이야기도 잘 듣고 잘 주워다 잘 모아놨다 했다. 

 본문도 좋은데 말미에는 필립 로스가 토리노의 레비 집 찾아가서 대담한 내용을 정리해 놨다. 나도 질 수 없지! 문돌이 파워! 하고 인터뷰 도입부부터 겁나 힘준 게 느껴져서 이거 읽는 재미도 좋았다. 필립 로스는 질문 던지는 거 보니까 참 좋은 독자였다… 레비는 로스랑 이야기 나누면서 내 책을 이렇게 열심히 제대로 읽은 사람이랑 말하니까 좋다 히히 했을 것 같다. 그치만 지금은 두 할배 다 이 세상에 없구나…


 나와 주변을 이루는 수많은 물질들 대부분에 앞선 사람들이 열심히 이름을 붙여 두었다. 분자 구조식이랑 특성이랑 다 잘 분석해서 요렇게 조렇게 활용할 방법도 찾아 두었다. 새로운 걸 발견하거나 만들기는 커녕, 남들이 이미 그렇게 정리해둔 물질 중 아주 일부를 시험 기간 앞두고 이름과 화학식과 특성을 나타내는 숫자들과 구조 등등을 달달 잠시 외우다 잊어버리고 말겠지. 나한테 그걸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면 말이다. 하고자 하는 것, 하게 될 것은 명확하고 그걸 하겠다고 해야 할 수단도 분명하니까, 해야지. 그때 되면 모아둔 남은 레비의 책도 내킬 때마다 술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뭐 화학 공부 안 하게 되어도 책은 읽을 수 있겠네… 


 알라딘 사은품으로 모셔둔 주기율표 북램프는 왜 이렇게 불빛이 흐릿하고 약하고 표면도 희끄무레하냐...거의 4-5년 만에 그 이유를 알았다. 양면을 덮은 보호 필름을 하나도 떼지 않아서 그랬다. 필름을 벗겨내자 빛도 음각된 주기율표도 아주 또렷하게 방안을 비추었다. 인간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나트륨 넣을 자리에 칼륨 넣고 펑 터지고 난리 나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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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29 0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리 화학 수학을 더 공부하고 싶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인간은 다양합니다! ㅋㅋㅋㅋ 레비의 이 책은 아직 안 읽어봤는데 궁금해지네요.

반유행열반인 2024-03-29 20:56   좋아요 2 | URL
그게 딱 2년 반 전 나새끼의 바람이었고…지금은 아닙니다…안 하고 싶어요…공부 1도 안 한 영어 역사만 1등급, 시간 조금 들인 국어도 1등급인데 대부분의 시간 쏟아 붓는 수학 과학은 내내 3,4등급 ㅋㅋㅋㅋ 저는 역시나 뼈문과였던 것입니다… 레비 다른 책은 읽으셨군요. 저한테는 아주 좋았습니다.

새파랑 2024-03-30 1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과학탐구 물리 했었는데 ㅋㅋ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번도 물리 화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들던데,
대단하십니다 ㅋㅋ

근데 주기율표 북램프 사은품은 갖고 싶네요~!!

반유행열반인 2024-03-30 11:01   좋아요 2 | URL
4-5년 전 사은품이었는데 램프 사진보고 은근히 물욕 올리시는 분이 있네요 ㅋㅋㅋ알라딘은 주기율표 굿즈 시리즈 재출시를 고려해주십시오 ㅋㅋㅋ안경수건처럼 헐랭하게 만들지 말고 이쁘게 ㅋㅋㅋ

2024-04-05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5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나이스 닌 : 거짓의 바다에서
레오니 비쇼프 지음, 윤예니 옮김 / 바람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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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4 레오니 비쇼프.

몇 달 전 청소년회관에서 한 주 한 번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엄마는 연필 소묘 단계를 마친 모양이다. 이제 색연필 그림에 들어간다고 선생님이 권해준 제품을 구해달라고 하셨다. 72색 전문가용 유성색연필은 거의 10만원이나 하는 제품이었지만, 그 정도 비용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림 수업이 있는 날 엄마는 유독 설레고 들떠 보인다. 스케치북과 연필이 담긴 에코백을 메고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두 시간 그림을 그린 뒤엔 같은 시설에서 필라테스 수업을 듣고 돌아오신다. 주말에는 또 같은 시설의 피아노 레슨에 다녀오신다. 방에서는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소설을 고치시는 것 같다. 그래, 저게 삶이지. 노년에라도 하고 싶은 것 실컷 하시며 꽃길만 걸으세요.

쿠팡에 낮에 주문한 색연필은 그날 밤중에 도착했다. 빠르고 신기한 세상이 되었다. 어제 주문한 책이 늦어도 다음 날이면 오고, 낮에 주문한 책이 밤에 오는 날도 있다. 그렇게나 빨리 받은 책 중에 색연필로 그린 만화라서 더 관심이 갔다.

만화책을 읽기 전, 이전에 읽은 ‘미친 사랑의 서’를 다시 뒤적여 만난 아나이스 닌의 이야기는, 만화를 다 읽고 보니 만화에서 다룬 시기 이후의 또다른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닌은 미국 대륙의 동편과 서편에 남편 하나씩을 두고 대륙을 횡단하며 중혼생활을 한다. 원래 남편한테는 죽을 때까지 숨기고, 두번째 남편한테는 처음에는 나이랑 이전 혼인 사실까지 숨기고 온통 거짓말을 하며 대륙 양편을 오가다 지쳤는지, 야 나 사실 결혼했어, 한다. 그런데 두번째 남편놈도 특이해서 오히려 좋아~ 상관 없잖아~하고 그녀가 암으로 죽을 때까지 간호도 해주고 혼인 관계를 유지한다. 와… 그 부지런함과 에너지는 참 놀랄만 하군요… ‘아내가 결혼했다’의 주인아 씨(주인공 이름임) 인물을 구상했을 때 왠지 아나이스 닌의 생애를 참고했을 것도 같다. 그렇게나 특이해 보이는 삶도 이전의 역사와 창작물을 뒤적뒤적해보면 그저 복제품이거나 약간의 변주를 더 한 정도일 때가 많다. 나도 부지런한 사람입니다만… 하여간에 부지런들 하시네...

그러니까 만화랑 책이랑 둘이 내용이 많이 겹치지 않아서 좋았다. 소설을 쓰고 싶지만 일기를 더 많이 쓴 사람이 사랑하고, 더 많이 더 더 많이 사랑하려고 애쓰는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다정하고 은행가 일 하면서 돈도 잘 벌어오지만 아나이스 닌의 예술에 관한 열망을 채워주지는 못하는 휴고, 재미있고 글 잘 쓰고 말도 몸도 잘 통하지만 돈 없고 현실 감각 없는(머리숱도 없는) 헨리, 거기에다 정신분석상담사, 친아버지(…), 또다른 상담사(...이새끼들 직업 윤리 어디다 버림), 결말에는 또다른 사랑들이 줄줄이 기다리는 듯한 암시로 내가 미리 알게된 중혼까지는 안 나오지만, 하여간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서 행복했니, 아나이스?

일기작가라 할 만큼, 시시콜콜 자기 이야기와 속내를 일기장에 잔뜩 남겨놔서 후대 사람들은 그거 보고 만화책도 만들고 산문집의 가십거리로도 만들고 우리는 그걸 보고 재미있어 하거나 욕하거나 별일이네, 한다. 나도 어느 시절까지는 일기를 열심히 쓰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가끔 내 일기를 펼쳐보면 세상 재밌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일기를 좀처럼 쓰지 않게 되었다.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아. 그런 생각도 하고… 블로그에 올리는 독후감이나 리뷰 같은 게 사실상 일기처럼 되었지만 남이 볼 수 있는 글은 내가 제법 날것으로 쓰는 편이긴 해도 자기검열이 늘 조금은 기본값이 되는 것 같다. 그것 말고 혼자 쓰는 글이 없어진 건… 조금은 살만해진 걸까? 나는 그냥 많이 남기지 않기로 했다. 예전에 일기든 소설이든 열심히 쓸 때는 뭔가를 체험하면 그 순간 나중에 쓸 궁리를 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냥 그 순간을 산다. 이미 죽은 많은 이들이 남긴 자기들 이야기 읽으면서 나는 재미있긴 한데 나는 그렇게 파헤쳐지고 분석되고 평가되고 싶진 않구나 이젠.

+만화 속 헨리 밀러. 그림만 봐도 개못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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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2-24 11: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못생김 정도 만화 헨리>>>>>>>>> 실제 헨리>>>>>>>>> 말 대가리

반유행열반인 2024-02-24 12:06   좋아요 3 | URL
만화 진짜 무자비하더라구요 ㅋㅋㅋ딱 봐도 저 정도면 아나이스닌이 얼굴 안 본대도 지장있는 정도 아닐까 싶은 ㅋㅋㅋㅋ

잠자냥 2024-02-24 11: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만화 헨리 가슴팍 털 묘사 뭔가요… 왜 세밀화이고 난리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4-02-24 12:07   좋아요 3 | URL
색연필이라 칼라 가슴털….

잠자냥 2024-02-24 16:07   좋아요 3 | URL
이분, 가슴털 보신 적 있네 있어….

반유행열반인 2024-02-24 16:08   좋아요 3 | URL
아뇨…진짜 없는 거 같네요…저는 파악이 쉽지 않은 종족이랍니다…(넘겨짚으시면 왠만하면 다 아니요 할 걸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2-24 16:09   좋아요 2 | URL
아 근데 이분, 이 작가님이었던 거 같아서 갑자기 숙연 ㅋㅋㅋㅋ

얄라알라 2024-02-29 23:02   좋아요 3 | URL
ㅎㅎ잠자냥님은..^^:; 가슴팍을 보셨어 ㅎㅎ 열반인님은 색연필로 그린 걸 보시면 아시는 군요^^

그림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 후 안 그려보니 저는 색칠 뭘로 한지 모르겠네요 ^^;
닌의 콧대를 붉은 기운으로 칠한 게 예뻐요^^

등대지기 2024-02-24 12: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좋아라니 두번째 남편 귀하네요🥹🥹 하긴 여자도 두집살림 참는 사람 많았는데 남자도 그런 사람이 있긴 했겠구나 싶네요 ㅎㅎㅎ 덕분에 미친 사랑의 서 질렀습니다 두근두근

반유행열반인 2024-02-24 12:46   좋아요 3 | URL
악 ㅋㅋㅋㅋ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번역 제목 너무 세게 지른 거 아냐? 했는데 읽다보면 또 적절하다 싶어요… 첫째 남편도 착해빠져가지고 닌이 뭐 한다면 그래그래 오구오구 해가지고 애가 버릇이 나빠져…는 아닌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가 ㅋㅋㅋ

잠자냥 2024-03-06 12: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털 그림 이달의 당선작 축하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3-06 19:17   좋아요 1 | URL
와우 리뷰 열 개씩 쓴 달에도 내내 못 받다가 만화책 딸롱 하나 읽고 써서 이걸 받네요...털자냥님 덕분입니다...

잠자냥 2024-03-06 20:14   좋아요 2 | URL
털에 조예가 깊으셨기 때문입니다~!!

2024-03-06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06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 - 낭만과 상실, 관계의 본질을 향한 신경과학자의 여정
스테파니 카치오포 지음, 김희정 외 옮김 / 생각의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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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2 스테파니 카치오포.
 
 뷰렛-Love Forever.
 


 읽는 중간중간 기대나 예측을 벗어나며 흥미를 불러오는 사랑에 관한 책이었다계속 읽어오던 뇌과학책들이랑 비슷한 교양서인가 했는데읽다 보면 이거 뭐냐 연애 에세이냐로맨스 소설이냐하다가 마지막엔 그렇게 간단하지 않군했다. 뒤로 갈수록 좋았다. 누가 무슨 책이에요? 하고 짧게 답해 달라고 하면  사랑의 일대기하겠다.
 
 저자 스테파니는 유럽에서 나고 자라 심리학과 뇌과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었다스테파니의 엄마 아빠는 사이 좋고 다정한 부부였다맨날 우울하고 싸움박질에 폭력을 일삼는 부모 아래 자라다 보니 다정한 부모 아래 자라는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스테파니는 부모가 너무 다정하니까 나는 저런 사랑은 얻지 못할 것이다, 하고 일찌감치 기대를 내려 놓았다고 했다. 그게 의외인 듯했지만 좋은 배우자를 만난 자신의 부모처럼 자기도  좋은 사람을 만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오히려 나쁜 사람을 만날 가능성을 대비 못할 수도 있으니까 자식 대까지 혼인 생활이 성공적이지는 않을 수도, 반대로 부모가 망한 혼인 생활했어도 그거 보고 자식은 반면교사 삼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스테파니는 누굴 좋아해  적도연애한 적도 없이 37살  되도록 모태솔로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사랑과 관계 맺음의 중요성그런 스테파니에게 운명의 사랑이 나타난다상하이 학회에 참석했다가유명 심리사회과학자인  카치오포를 만난다사회신경과학 창시자이기도 하고, 정교화 가능성 이론하면   ? 해서 ...나도  들어봤을지도했다대학원 시절 다정한 법교육 전공 선배들이랑 사회심리학 스터디를 했었는데 이거 저거 배우면서 엄청 즐거웠던 기억이 났다.(차분하고 끈질기고 친절한 스터디원  최소 셋이 일찌감치 박사하고 교수평가원 연구원이 되었고성질 급하고 불친절한 나는 법교육 전공을 포기했다ㅋㅋㅋㅋㅋ스터디   보던 사회심리학 교재 카치오포  나오겠다하면서 나중에    읽고 색인 뒤져보니  카치오포 인용 페이지가 다섯 개나 나오는...그런 거물이었다둘은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학회 기간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홀다닥 반했다스테파니가 메일로 존에게 연락을 하면서  마음을 확인하고는미국의 존과 스위스의 스테파니는 대륙을 넘나들며 연애한다파리의 노화 관련 행사에 존이 연사로 초대되어 스테파니가 함께 참석했는데거기서 만난 학자 하나가 너네 결혼할  내가 주례 해 줄게 혼인 절차 진행하는  수료했음했다그말에 꽂혔는가 존은 스테파니에게 청혼하고스테파니는 부모에게 전화로 알리고 허락도 받고 그냥 당장 하자, 하고서 행사 참석 학자들(대부분 그날 처음 초대해서 당장 적당한 장소 섭외를 못해서 근처 공원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파리 경찰이 쫓아와서 허락없이 잔디밭 망쳤다고 혼내서 잔디밭에서는 나와야 했지만
 
 내가 사회심리학책 뒤적이기도 전에 스테파니는 자기 반려자가 얼마나 짱짱맨인지 장황하게 자랑하고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잘 통하는지나는 사랑에 관해, 존은 외로움에 관해 연구해서 뇌과학의 그쪽 분야로는 전문가인데 우리가 만나면서 겪는 모든 과정이 우리가 이론적으로 배운 그대로였어우리는 이론만 바삭하고 실제 삶은 그와 동떨어지게 나는 모솔존은 이혼만  번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우리가 만나서 얼마나 찹쌀떡-이었는지 한참 풀어댔다.와….
BIGBANG-BAE BAE (듣고 있자니 존나 배배 꼬임 ㅋㅋㅋㅋㅋ)
 


 
 내가 어린 시절 사람들이 한동안 쓰다 지금은   쓰는 말이 있다오랜만에  말이 생각났다. ‘염장질하다.’
 염장은 염통심장을 일컫는 말일 수도 있겠다그렇다면 심장을 쥐어지르는 염장은 소금에 절이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그러면 소금 뿌리고 싶은 재수 없는 . 주로 쓰이는 상황은 연인 둘이서 남들 보이는 데서 애정을 과시하며 소외감을 느끼게  때였다 가지  맞을 수도, 외로운 누군가의 심장을 쥐어지르고그래서 보고 있으면 소금 뿌리고 싶을 만큼 꼴보기 싫은 모습
 
  남들의 사랑은 때로 부러움을 넘어 부정적인 감정을 자아낼까장기하는 부럽지가 않어-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갖지 못한 뭔가를 남들이 풍요롭게 누리면 부럽다 못해 분한 모양이다
 
 대작가가  뒤라스도, 아니 에르노도, 우리 완전 찰떡이에요 햄복해요 호호호 하는 글을 써서 사랑받지는 않았다대부분 망한 사랑사랑 때문에 고통 받고 남들이 자기 사랑 가지고 뭐라고 하고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은 지나간 이야기를 좔좔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공감하지 않더라도 특별한 느낌을 가지고 읽었다  점도 궁금했다 다들 남의  되는 사랑 이야기는 심드렁한데 망한 사랑 이야기는 좋아할까...샤덴 프로이데처럼 꼬소하다이건 아닌  같고 그냥 같이  아파하고...망한 거는 공감하는데  지내는 거는  공감  못하는  같기도...나만 그런가!!!
 
 처음에는 스테파니가 굳이 저렇게 우리 사랑 짱짱맨 하는   이해가  됐다그런데 그렇게 둘만 마냥 좋다고    아닌  슬슬 밝혔다둘이 혼인   나이 스테파니 37 60스테파니가 존의 나이가 되었을   존은 살아 있지 않을 확률이 아주 높다.(- 책에도  놨다.) 스테파니가 스위스에서 근무처를 옮겨 시카고대학 존의 사무실에 옮겨 함께 근무하고(그러니까 교수실을 부부 교수님이 같이 쓰는 거지…), 성도 존의 성인 카치오포로 바꾸자(둘다 이탈리아계 혈통이 섞여 있어 스테파니는 자신과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는 사랑하는 사람 성으로 바꿔서 너무 좋다고 했다), 주변에서 잔소리도 했다여성 연구자들한테 네가 하는 일들이 악영향을 미칠거라고그니까 다들 곱게   거다. 나이도 엄청 어린 애가 노인인 학계 권위자의 아우라에 올라타서 커리어  찐하게 올려서 득보는 걸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멋진  차를  뽑고좋은 집을 구해 이사하고여행을 다니고공부도 일도 함께 하고, 매일매일을 신혼여행처럼 살았다실제로 혼인 무렵엔 둘다 너무 바빠서 신혼여행을 못한 대신 일상의  순간을 특별하게 보냈다.
 
 ...그런데 혼인한 챕터 다음 다음에 위기가  들어왔다둘이 혼인한 지 4 만에 존의  부위에 침샘암이 4기까지 진행된 것이 발견되었다진단 받고 1  생존율이 매우 낮은 병이었다 2 정도 수술항암치료방사선 치료, 온갖 합병증 치료하면서 존은 고통을 겪었다그와중에 식사  못해서 근육 째고 음식 공급하는  넣는 시술 했는데 그게 너무 아파서 총상인  알고 “오바마를 보호해야”한다는 잠꼬대 같은  해서 존의 비밀요원 판타지를 두고 나중에 둘이 웃은 이야기는 진짜 웃펐다악화와 회복을 반복하는 와중에 호전이 있어 존은 다시 강의와 연구에도 복귀하고  사이도  탄탄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어느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존이 집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응급대원이 왔지만 심폐소생술을 해도 존은 일어나지 못했다스테파니가 마지막으로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이미 존은 떠났고스테파니는 들것에 실린 존과 마지막으로 30 아파트에서 1층까지 내려왔다혼인 7 만이었다
 
 이후 오래도록 스테파니는 난파된 것처럼 ‘복합 비애’라는 심한 슬픔의 상태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이웃과 친구들이 스테파니를 위로하려고 애를 썼지만 스테파니는 홀로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냥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그러다가 우연히 아주 오래  알았던 은퇴한 프로 테니스 선수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혼인 사실과 사별 사실도 모르던 유럽 멀리 있던  친구가 메일과 전화로 밖에 나가서 겁나게 달리라고 시켰다. 1  매일 9킬로씩 시키는 대로 달리면서 쇠약해진 몸과 마음을 회복한 스테파니는 친구의 또다른 처방대로 다시 테니스를 시작하고 계속 살아남을  있었다.
 
  책의 마지막인 에필로그 부분이 내겐 가장 좋았다책의 시작도 솔로였던 스테파니가결국 책의 말미에도 혼자  사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누구나 시작도 끝도 혼자인데도 왠지 직접  과정을 라가 보니  서글프기도 했다. 2018 존을 잃고, 2020-2021년 스테파니는 홀로 팬더믹의 시대를 지났다그런데 그렇게 모두가 외롭게 고립된 순간에 수많은 사람이 스테파니를 찾았다외로움 박사는 존이었는데 존이 죽었으니  공동 연구자인 (심지어 성이 같아서 그녀를 존으로 착각한 기자들도 있었다스테파니에게 조언을 구했고스테파니는 존의 부재를 느끼게 하는  상황이 슬프기도 했지만이런 관심을 좋아하고 성의있게 답변했을 존을 떠올리며 응대를 했다고립된 우주인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비대면이지만 그들과 소통한 , 머리 위를 지나는 우주정거장이 남일 같지 않게  것처럼존의 육체는 스테파니의 곁에 없지만존은 많은 기억과 흔적과 의미를 그녀에게 남기고 영원한 존재로 함께 하게  것이다. (‘당신의 부재는 여전히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지만 당신은  심장 가까이에서 언제나 함께 합니다.’ (283))
 
 내가  책들 중에 특히 마지막 감사의 말이 길었다. 내가 별로 읽지 않아 그렇지많은 과학자들의 사랑 이야기가 있을 텐데, ( 책에도 제법 인용이 되어 있다아직 살아 있는그리고 사랑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책으로 읽는  편지를 받은 것처럼 깊은 느낌이 있었다스테파니는 아직 제법 젊으니 존을 마음에 간직한  그대로 살아갈 수도, 존은 마음에 계속 남고 또다른 사랑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올초에 제때 발견해 치료에 들어가지 않으면 사망률이 제법 높은 폐색전증에 걸렸었는데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이야기를 읽으니 내가 남은 이들에게 저런 고통을 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약간 아찔했다사랑을 잃어 본 경험이 있다상대방이 죽은  아니었지만 영영 이별은  사람이 죽어 다시  돌아오는 거나 다름없다부재의 시간은  고통이 내내 반복되었다다행히도 내가 없는  상대방도 힘이 들었는지 여름에 죽은 사랑은 여름이 다 가기  살아서 돌아왔고이런저런 굴곡은 있었지만 사랑도 나도   지낸다생살을 잘라내는 고통이야 이제 왠만해서는 오지 않겠지만모든 관계는 이별의 순간이 온다토마시와 테레자처럼 한날 한시  사고로 죽지 않는 이상 이르고 더딘 차이가 있을  혼자 남는 때를 누구나 겪는다그래도없는 것에 힘들겠지만 내게 누군가 있었다는 것이 계속 살아갈 힘이  것이다. 혼자 남을 누군가에게 내가  힘이 되도록 내가 언젠가 힘을   있도록 계속 사랑하는  말고 지금  일이 또 뭐가 있겠어
 
 
+밑줄긋기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니며없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사랑은 생물학적 필수 요건이다. (17)
 
-우리는 통계의 의미와 긍정적 자극에 대한 반응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대화 내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나는 속으로 이런  신경과학자들이 서로를 유혹하는 방식일까 하고 생각했다. (106)
 
-그는 나를 너무도  이해했다  “저도요!” “동감이에요“를 너무 자주 연발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이렇게 조화로운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나란히 앉히고 뇌파 검사 장치EEG 연결해 보면  사람의 뇌파가 일치하는 현상을 관찰할  있다신경과학자들이   교란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113)
 
-“사랑은 우연히 찾아오지 않았다우리가 사랑에 빠지겠다고 선택한 것이었다.”(228, 케이트런의 에세이 인용)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해서는   말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겁니다시간이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행동과 인지, 타인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249,  카치오포)
 
-(파인만의편지는 잊을  없는 아름답고도 놀라운  문장으로 끝이 난다. “ 아내를 사랑한다 아내는 죽었다.” 그리고는 서명을   다음과 같은 추신을 달았다. “ 편지를 부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당신의 새로운 주소를 모르잖아.” (266)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스스로 결정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언제나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다 해도 말이다
 존을  삶에 계속 존재하게 하려면 존을 기억할 때의 고통을유령을 끌어안으려  때의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269)


+적절한 짤 발견. 웨딩피치 악마였네…닥, 닥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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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11-12 10: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책에 대한 오해를 줄이려면 이 책은 뇌과학 일반에서 분류를 사랑/연애 에세이로 바꾸어야 한다. 나도 과학책인 줄 알고 읽다 뭐지 뭐야...했거든. 근데 기대와 다른 이게 의외로 좋았고 반대로 사생활 듣기도 싫은 거 썰 푼다고 싫어하는 독자도 있어서 아 나도 처음엔 우웩 했는데 사별한 후에 불쌍해서 다 용서됨...ㅋㅋㅋㅋ호불호가 있네요.

2023-11-12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12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12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12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lstaff 2023-11-12 17: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소위 당선하시려면 쇤네야 읽기엔 좋지만, 그걸, 문장으로 만들지 마셔요.
그냥 예를 들자면 ˝듣고 있자니 존나 배배 꼬임 ㅋㅋㅋㅋㅋ˝ 이런 거요.
결판내는 담당자도 담당자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겁니다. 안 그렇겠어요?
아오, 이 아줌마는 다 좋은데 몇 마디가 존나 배배 꼬여서 명단에 못 올리겠어, 그럴 수 있을 겁니다. ^^
당선하시면 천 원 주세요. 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11-12 17:28   좋아요 2 | URL
아오 꿀팁 감사합니다만 ㅋㅋㅋ팔백작님 읽기 좋은게 중하지 비속어 필터링하고 착하게 쓴다고 뭐 개전의 정 봐주겠습니까 ㅋㅋ안 뉘우치고 안 받고 안 산다 새끼들아 ㅋㅋㅋ뽑지 마라 뽑지 마! 팔백작님 천원 안 줄라고 발악이요 ㅋㅋㅋㅋ쟤들은 우리 나이 차에도 쏘 스윗한데 팔백작님이랑은 서로 골탕먹이고 농담이나 따먹고 있네요 ㅋㅋㅋㅋ

yamoo 2023-11-13 14: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닥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11-13 16:37   좋아요 1 | URL
저랑 웃음포인트가 비슷하시군요 yamoo님!

2023-12-07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07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소의 이름 - 신비한 주기율표 사전, 118개 원소에는 모두 이야기가 있다
피터 워더스 지음, 이충호 옮김 / 윌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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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0 피터 워더스.


 나트륨은 Na, 칼륨은 K, 이과돌이 아니었어도 중학 과학 쯤 배운 사람들은 저 원소기호들을 한 번씩 봤을 것이다. 이름과 원소기호가 직관적으로 이어져 기억하기 쉽고, 두 원소를 포함한 화합물은 우리 일상에서도 너무 많이 쓰이니까. 그런데, 혹시 나처럼 가공식품이나 세제, 샴푸의 전성분 구경하는 게 취미인 분들, 특히 샤워할 때 샴푸랑 바디워시 성분 요즘 나온 제품은 아무리 뚫어지게 찾아도 나트륨과 칼륨이란 말 없을 거에요…2016년 대한화학회에서 나트륨은 소듐, 칼륨은 포타슘, 이렇게 바꿔버렸거든요. 라틴어식 명명에서 영어 발음으로 바꾸었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티타늄이 타이타늄, 망간은 망가니즈, 뭐 그런 식으로 기존 독일어, 라틴어 이런 걸 죄 영어 발음 비슷하게 옮겼는데, 이번에 읽은 이 책 번역가님은 꿋꿋하게 나트륨과 칼륨을 고수하셨다. 사실 영어로도 맹거니즈, 태이터니움, 뭐 그렇게 써야 맞으니 로마자 표기법 적당히 섞어버린 표기법 개정을 보며 언어 많이 다루는 화학전공자 번역가 입장에서는 일관성 없고 근본 없는 발음 표기에 유감이 있을 법 하다. 이전에 읽은 ‘사라진 스푼’ 역자 후기에서도 그 울분 표출 좀 하셨고 나도 공감한 바 ㅋㅋㅋ 덕분에 소듐 포타슘 이랬으면 더 혼란스러웠을 좀 어려웠던 독서인데 꿋꿋이 나트륨, 칼륨, 해 주신 게 다행이구나 싶다. 


 인간이 세상을 알아가며 자기가 안 걸 남들과 나누기 위해 한 일 중 가장 큰 일은 명명, 이름 붙이기 였을 것이다. 형체가 있는 것에도, 없는 것에도, 물질 아닌 현상이나 상태나 감정이나 사변의 결과물에도, 우리보다 먼저 산 사람들은 신이 나서 견출지 붙이고 이름을 휘갈겨 놓았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만 해도 그렇다. 나는 이렇게 불리우길 원한 적 없어.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외국에 나가 사막 대수로 공사인지 다른 건설공사인지 뭐인지 하고 있던 노가다 십장 친할아버지는 편지로 00이라고 해라, 그렇게 척 이름을 적어 보냈고 그게 내 이름이 되었다. 훔쳐 본 엄마의 육아일기에서, 엄마는 나에게 별샘아, 하고 있었다. 별샘이랑 지금 내 이름이랑 간극이 크다… 그런데 또 별샘이가 내 이름이 되었다면 나는 더욱더 별난 아이가 되었거나, 생리대의 샘방지 테이프, 이런 거 보면서 굉장히 짜증을 냈을 것도 같다. 나는 지어진 본명 그대로 내내 불리웠는데, 내 동생 이름은 나보다 조금 더 흔하고 평범한대도 그렇게 싫었는지, 엄마는 동생 어릴 때 새별아, 하고 불렀고, 삼촌들도 동생을 새별이 새별이 하면서 귀여워했다. 나한테는 울보, 못난이, 하고 사람 안 따른다고 안 예뻐했다. 엄마도 삼촌들도 별을 좋아했나 보다. 하여간에 내 이름자 초성이 주기율표랑 앞에 세 개 겹쳐서 나는 주기율표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김기덕이었으면 구구단을 좋아했겠지… 죄송합니다...


 지구과학 공부 1년 하다보니, 별의 일생을 배웠다. 우리 태양 같은 별은 작고 가벼워서 늙으면 그냥 좀 뻘개지다가 하얗게 식는다고 했다. 핵융합반응도 탄소랑 산소 정도 만들다가 멈춘다고… 그런데 우리보다 더 큰 별들은 덩치가 크고 온도도 더 높이 올라가가지고 중심부 핵융합반응 최종 산출물로 무거운 철까지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럼 그보다 더 무거운 원소들은? 수축에너지가 좁은 곳으로 뭉치고 뭉치다가 빵! 터지면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이 되고, 그때 엄청난 에너지와 함께 금도 은도 이런 저런 무거운 뭐시기도 생긴다고… 그러니 우리 모두는 별에서 왔어. 우리는 별가루가 재료야. 그러면 과학공부도 은근 낭만적이지 않나? 그렇지만 수능 문제는 야만적이지… 못 푼 놈들에게 멍충이, 라고 새 이름 붙게 해주지. ㅋㅋㅋㅋ


 같은 번역가가 옮긴 ‘사라진 스푼’ 또한 원소와 주기율표에 관한 이야기였고, 조금 더 서사가 있고 에피소드도 많고 재미있었다. 화학 전공한 번역자의 이점은 감수 역할도 번역자가 다 하시고 저자 오류도 인용된 원전 검토 꼼꼼히 해서 바로잡아 주고 주석도 잘 달아주고 뭐 그렇다. 그런데 이 책은 부제가 ‘신기한 주기율표 사전’이거든… 예전에 읽은 ‘만화로 읽는 주기율표’가 딱, 주기율표 속 원소들 이름 어떻게 붙여졌는지 짤막하게 휙휙 던져줬는데, 그 책의 주석책 쯤 될 만하게 상세하게 어원학적 기원, 화학자들의 연구들, 화학 발전의 역사, 그러모아 적어 놓은 책이었다. 그러니까 어학 사전 느낌… 애기 때는 전화번호부 펼치고 특이한 이름 읽는 것도 좋아했고 백과사전 펼치고 필요한 것만 찾는 게 아니라 책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거도 재밌어 했지만...그땐 놀 거리도 읽을 만한 것도 그렇게 없었잖아? 이름표랑 사전이랑 족보 읽는 게 누구에게나 재미있기는 어렵겠다. (그러니까 책 뒤에 곽재식이 당연히 재미있을 수 밖에 없다-한 추천사는 뻥이다. 뻥 치지 마ㅋㅋㅋ) 혹시라도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과학 교육 좀 시키겠다고 이 책 읽히실 부모님과 선생님은 재고하셨으면… 충분히 가치있고 섬세하고 꼼꼼한 책이지만, 아이들이 읽기에는 너무 과하고 오히려 과학에 대한, 과학 도서 읽기에 대한 흥미 반감시킬 수도 있는 읽기 다소 어려운 책이다. 뭐 지가 읽겠다고 나서면 말릴 건 없지만 막 권장 도서 이러고 디밀기는 무리라구요…

 그럼 이 책 누가 재미있을까? 화학 전공자들은 읽으면 아, 그래서 이 이름이군, 그렇지 이런 성질이 있지, 이게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발견되고 명명되었군, 하고 즐길래나? 아님 그분들도 토하려나… 나는 화학을 배우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ㅋㅋㅋ하여간에 청소년 수준인 민간인 내가 읽기에는 많이 힘들고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다오...그렇다오… 애들 읽히려면 차라리 ‘사라진 스푼’ 쪽이 더 흥미롭다오...

 화학자들이 잘못 생각했던 것들, 오늘 날 다르게 밝혀진 사실들도 많이 열거되어 있고, 지금 보면 황당한 연금술의 기록 같은 것도 인용되어 있어서 아...당장 저 물질이 지금 어디 활용되는지는 안 알려주면서 (그거 궁금한 사람은 엘지에서 운영하는 화학 정보 블로그가 있답니다!!! 짜잔 <원소로 보는 화학사> https://blog.lgchem.com/2017/05/원소로-보는-화학사/ ) 이름 붙인다고 갈팡질팡하던 오래 전 이야기를 왜 듣나...싶은데, 사실 과학이라는 게 그렇다. 틀린 것들을 틀리다고 밝혀내고 고치고 또 다른 증거와 실험과 관찰 결과가 등장하면 기존에 맞던 것도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하는 게 과학… 문돌이들 자기가 옳다고 디질 때까지 빽뺵, 사실 누가 옳고 그른지 파악하기도 어려운 거로 싸우다 뒤질 때 이과돌이들은 차분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같은 실험, 같은 문제 풀이 벅벅 무수히 많이 반복하면서 그러고 나서 얻는 결론이 시발 틀렸네… 처음부터 다시.. 이런 거니까… 사실 도 닦기는 철학 종교 이런 거 아니고 수학 과학이 더 적합한 종목이 아닐지… 


 지금 우리가 쉽게 이름 부르고 이런 저런 제품 제조, 산업 활동에 활용하는 물질들이 그렇게 접근이 수월해지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씹고 뜯고 맛보고 죽고 다치고 하면서 파악한 덕분이라는 걸 이름 붙이기 역사를 통해 집요하게 정리한 저자가 놀랍긴 하다. 작은 꼭지 넘어갈 때 마무리마다 다음 단락의 단서가 될 다음 물질 예고도 꼬박꼬박 하면서 유기적인 글쓰기를 했고, 뭔 이런 책을 누가 봐 싶을 4-500년 전 (왠지 먼지다듬이 잔뜩 붙고 거의 먼지가 되었을 것 같은) 고서들 뒤져가며 인용도 많이 했다. 역시 과학 연구든 과학 연구에 대한 연구든 다 도닦이, 극한의 덕질 같다...인류 사회 기여하는 점 생각하면 리스펙트...


 나는 이과돌이가 되면 화학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대입에서 목표로 한 과도 화학 공부가 주가 되는 곳이었고...그래서 수능 처음 준비할 때도 화학을 해보려고 했으나… 이과였던 친구의 간곡한 권유로 결국 화학 접고 생명과학으로 넘어갔다. (거기도 헬인 것은 마찬가지) 

시작은 아무래도 주기율표였을 것이다. 주기율표 관련 애들 보는 교양서 몇 개 봤는데 흥미로웠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작은 입자들 이름을 표 하나에 다 담다니!!! 게다가 사은품으로 알라딘이 준 주기율표 담요가 너무 예뻤다. 주기율표 램프도 예뻤다. 애들 보라고 사 준 주기율표 플랩북도 너무 귀엽고… 그치만 막연한 교양서 따위로 화학 공부 따위 해결되지 않아… 심지어 이번에 본 이 책은 진짜 더 어렵고 뭐야...이런 거도 알아야 해… 나 화학 잘 못할 듯...맨날 씨 맞을 듯… 물질은 결국 특성에 따라 이름 붙은 무언가 일텐데. 결국 암기해야 하지. 이름들, 숫자들. 전기적 특성들. 질량 밀도 원자번호 양성자수?? 뭐 그런 거… 분자식 분자구조 등등… 하 나 갑자기 급 식음… 주기율표 나빴네… 한 장으로 될 리가 없잖아… 

내 사랑 주기율표 담요, 주기율표 북램프 


 책 읽는 동안 주기율표 확인하고 싶은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기율표 담요는 여름내 선풍기나 에어컨 틀어놓으면 배앓이가 심해서 내내 배에 휘감고 있었다. 원소 확인하자고 매번 담요 펼치긴 좀 그래… 그래서 요렇게 아이패드로 옆에 엄청 예쁜 주기율표 (아래 첨부, 출처: https://s-ink.org/periodic-table-of-elements ) 띄워 놓으면 개간지이긴 한데 그래도 화면 내내 켜놓긴 싫고... 

이 주기율표 너무 예쁨…


 주기율표 램프는 원소기호만 있고 원소 풀네임은 없어...뭐 주기율표 데스크매트나 괜찮은 굿즈 없나???하고 뒤적거리다 예스24 과학 도서 사면 주는 엄청 영롱한 주기율표 데스크매트 발견했지만! 이미 품절된 모양이었다...흑흑

예스24의 사라진 주기율표 사은품 이거도 너무 예쁨... 이런 예쁜 주기율표 굿즈를 내놔라 알라딘!!


 아쉬운대로 알라딘을 뒤지니 오오- 4800원짜리 대형 안경닦는 수건? 뭐 그런 걸 팔고 있었다. 노트북 덮개라고 하지만 노트북 사이즈엔 택도 없게 작다 하고, 그려, 이거 사서 키보드 덮개 해야지, 하고 주문했다. 

 정작 배송이 느려서 책 거의 다 읽은 무렵 도착했다고 한다. ㅋㅋㅋㅋㅋㅋ 디자인은 주기율표 덕후에겐 흐뭇…하나 작은 글씨인 원소이름 인쇄 상태는 좀 많이 흐린데다 원자량도 미표기라 퀄리티 실망...그래도 이런 거 하나 있으면 이과 갬성 돋고 좋잖아...하는 건 문돌이를 못 벗어난 갬성이과 허풍이과...ㅋㅋㅋㅋ


 

+밑줄 긋기

-히브리어 neter가 ‘거품을 일으키다’라는 뜻의 ‘나타르natar'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반응이 언급된 구절은 ’잠언‘25장 20절에 나온다. “마음이 상한 사람 앞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과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붓는 것과 같다.” 소다 위에 식초(아세트산)를 부으면, 거품이 부글부글 끓듯이 일어난다.

나이터는 ’예레미야서‘2장 22절에도 등장하는데, 몸을 씻는 용도가 언급돼 있다. “네가 잿물로 몸을 씻고, 비누로 아무리 몸을 닦아도, 너의 더러운 죄악은 여전히 내 앞에 남아 있다. 나 주 하느님의 말이다.” (232-233, 성경 속 화학. 왜 이런 데 꽂히냐 ㅋㅋㅋ )


-화학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 족의 다른 원소들이 발견되자, 결국에는 데이비가 제안한 이름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데이비의 주요 경쟁자였던 베르셀리우스의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 안나가 유리 제품을 씻다가 ‘산화무리아트산’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자, 베르셀리우스가 “안나, 이제 산화무리아트산이란 단어는 더 이상 쓰면 안 돼, 이제 chlorine(염소)이라고 불러야 해.”라고 말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347, ㅋㅋㅋ학계의 합의를 중시하는 우아하고 위대한 화학자 베르셀리우스...이 분이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나트륨과 칼륨이란 이름을 소듐과 포타슘으로 후려친 대한화학회는 좀… 열에 아홉 잡고 나트륨 하면 아, 하고 소듐 하면 소돔? 고모라? 할 걸...포타슘하면 게슈타포?...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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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7-20 18: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학창시절 이를 외우던 때가 생각나게 하네요.

반유행열반인 2023-07-20 18:45   좋아요 1 | URL
저는 외웠던 기억이 없더라구요...문돌이긴 했는데 과학 공부 안 했냐...

dollC 2023-07-20 1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밀라아제가 입에 붙어서 다른 건 입력이 안돼요ㅎㅎ 예전에 조카한테 설명하다가 혼란만 더했던 때가 생각나네요😆

반유행열반인 2023-07-20 19:1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선생님 제 입에도 그 물질이 줄줄 붙어 있사옵니다... 정작 그 효소가 무슨 원소들로는 이루어져 있는지도 몰랐네요...요즘은 아밀레이스 라고 한다고 합니다...

청아 2023-07-20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주기율표 진정 사랑하시는군요ㅎㅎ
검정바탕이 저는 마음에 들어요.

반유행열반인 2023-07-20 21:17   좋아요 2 | URL
저 이미지 파일이 투명이라 하얀 바탕엔 하양 검정 바탕엔 검정 어디든 멋지더라구요!!! 서체도 독특하구 가독성도 좋구 ㅋㅋㅋ그래서 저걸로 찾아보다 알라딘 수건 받구 에잉 떼잉 쯔쯔 맘에 안 들어 했습니다 ㅋㅋㅋㅋㅋ

2023-07-21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1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gene 2023-07-21 1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관데도 주기율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화학전공하신분이 주기율표만 봐도 상상의 나래에 빠져드신다는데 저는 별로;;;;

반유행열반인 2023-07-21 20:42   좋아요 2 | URL
공부를 제대로 하면 안 좋아하는 게 정상일 것도 같아요 막 외국말 뜻도 모르고 이쁘다고 티셔츠 입고 다니는 거랑 비슷할지도 ㅋㅋㅋ패션이과 ㅋㅋㅋㅋ상상의 나래 그 분은 난 분이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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