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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평점 :
-20250731 디디에 에리봉.
오랫동안 반복되는 꿈이 있었다. 떠나온 옛집에 놓고 온 무언가를 찾으러 돌아가는 것이었다. 부모는 내가 일곱살 때부터 스물세살까지 전세 이천만원짜리 벽돌조 2층짜리 다가구 단독주택의 1층에 살았다. 방 두 개에 거실, 분리된 주방, 주방과 연결된 지하실, 실내에 욕실 겸 화장실이 함께 있는 집에 처음 살게 된 것이었다. 동생과 나는 우리 방을 가지게 되었다고 기뻐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집을 (도망쳐)나온 다섯째 삼촌이 우리집 방 한 칸을 차지해서 나와 동생은 부모와 같은 방에서 넷이 잤다. 실망스러웠다. 삼촌방을 뒤져서 스쿠알렌 한 알을 훔쳐먹고 구역질을 하고, 비키니와 티팬티를 입은 여자들이 한 가득인 잡지책을 찾아낸 것이 내내 충격이었다. 다이제스티브 과자를 사오라고 동전을 건네는 삼촌에게 싫다고 말하자 삼촌은 내가 밉다고 했다. 과자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못 외우겠어서 그랬는데. 몇 년 후 삼촌이 독립해 나가고 드디어 동생과 나의 방에서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방은 너무 습기가 많아 벽에 곰팡이가 마구 피어서 결국 다시 거실에서 자게 되었다.
엄마를 때리고 술주정하는 아빠를 떠나올 때는, 이미 옛집을 떠나 새로 지은 아파트에 들어간 지 일 년 남짓 지나 있었다. 그러나 꿈 속에서는 항상 그 벽돌집의 1층으로 되돌아갔다. 그 집에는 아빠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아빠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거나, 아빠가 폭력을 쓰거나, 아빠가 없는 동안 몰래 잠입해서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오거나 해야 했다. 찾는 것이 뭔지는 찾아간 나조차 잘 몰랐다.
지금 살고 있는 내가 이룬 가정은 원가정에 비할 바 없이 평온하다. 이 집에서 화를 가장 잘 내고 가장 폭력적인 언행을 하는 것은 바로 나놈이다. 심한 불안과 초조와 강박관념을 느낄 때만 가끔 그러고 이제는 조금 덜 그런다. 아이들은 내가 하는 농담에 웃고 내가 대충 해 주는 냉동식품이나 레토르트 식품을 잘 먹고 할머니가 해주는 인스턴트와 정반대인 음식도 잘 먹는다. 내가 아이들의 부친으로 고른 사람은 가부장제와는 여러모로 대척점에 있는 순한 사람이었다. 이 집에서 가장 가부장적인 인간은 나놈이다. 그래도 그 사실을 알긴 아니까 좀 덜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마지막 수능을 마치고 나는 꿈에 자주 나오던, 거의 이십 년 전의 옛집에 찾아갔다. 창문 샷시가 교체되었고 에어컨 실외기가 생겼고 대문은 그대로였다. 그 동네 순대골목에 가서 곱창이 왕창 들어 엄청 맛있는 순댓국을 먹고 돌아왔다. 이후 반 년이 넘는 동안 더 이상 옛집 꿈을 꾸지 않고 있다. 그 집에는 이제 아빠도 없고 나와 동생과 엄마도 없다는 걸, 우리가 키우던 개도 없다는 걸 한 번 더 눈으로 확인하고 오길 잘한 것 같다. 원래 있던 단독주택이던 이웃집 대부분은 다세대 연립주택, 빌라 같은 걸로 새로 지어졌다.
그렇게 이십 년 넘게 나의 살던 고향은 이제 남의 고장이 되었다. 아마도 그곳의 테마파크나 워터파크를 찾을 때나 다시 가게 되겠지. 친구도 가족도 없다. 아빠와 친족들이 살긴 하지만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그곳과 이곳의 거리가 50킬로미터 가까이 된다는 것에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나의 랭스를 떠올려보게 되었다. 아빠가 죽더라도 그 고장에 다시 갈 계획은 없다. 그 사람이 죽는 날까지 나에게 다시 접촉해오거나 정서적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는 일이 없기만 바란다. 바람은 바람일 뿐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아버지, 뭐 그런 게 인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바람직한 자식의 도리인 모양이다. 아이참, 조현병 알콜중독자 가정폭력범 아빠 타령은 나도 이제 지겹다. 듣는 사람들도 질렸겠다. 얼른 평온하게 천국으로 가셔서 제가 패륜 파티 후기를 남길 수 있게 해주세요.
썰이 길었는데, 디디에 에리봉 선생이 랭스로 돌아가는 이야기도 비스무레했다. 노동자계급을 벗어나, 지식인 사회로 스며들고 나는 게이니까 게이로 살겠어, 하고 자신이 되고 싶던 자기가 될 때까지, 랭스는 모욕과 수치와 무지의 진흙구정물이기도 했고 역설적으로 내가 나로 될 수 있게 밀어준 곳이기도 했다. 자전적 이야기에다가 여러 선생님들의 사회학적, 문학적, 철학적 통찰을 살짝 비벼가지고 이 책은 재미있고 왠지 멋있고 그런데 또 있어보이는 책이 되었다. 푸코 전기 쓰기까지의 에리봉 선생의 궤적이나 책의 전개나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명한 덕에 음 이 책 좀 짱, 하는 걸 여기저기서 들어서 흠, 나도 재미있게 읽겠군, 예감했고 다행히도 재미있었다. 다 알아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일테지만 그래도 와 너도, 하하 나도, 하는 부분도 제법 많았고 전공이 전공이라고 사회학 담론 깔고 이야기 전개하는 글들이 왠지 친숙하고 비교적 잘 읽힌다. 에리봉은 교사 시험 두 번째까지 떨어져서 아 망했다, 했다가 작가에다 교수까지 됐지만, 나는 교사 시험 두 번째에 붙어버려서 아 망했다, 대학원 가볼까?(들어는 갔는데 나오진 못함) 소설이나 써볼까?(쓰긴 썼는데 극소수의 독자만 읽음) 뭐 그런게 인생이지요 선생님. 푸코 선생은 제가 태어나던 해에 영면하셨군요. 나는 남들이 푸코푸코 거릴 때 일부러 더 난 안 볼 거야! (신도가 되기 싫은 두려움 또는 못알아 들을까 봐 더 두려움) 했는데 푸코 친구이자 푸코 전기 쓴 에리봉 선생의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80살까지 안 죽으면 다른 책들 다 읽고 나면 그땐 좀 생각해 볼게요. 에리봉 선생님은 랭스로 돌아가 교수님이 되셨는데 나는 용인으로 되돌아가다, 같은 건 안 쓸 것 같다. 죽어서도 명당 많다는 그 동네 돌아갈 생각은 없다. 수목장 하더라도 난 거꾸로 사거진천 하게 해다오… 아니다 그냥 화학장 같은 걸로 몽창 녹여서 하수구에 부어다오...
+밑줄 긋기
-“(…)진실은 내가 그를 증오했었고 그 증오를 계속 간직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나는 폐허로 변해버린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증오했던 것은 폐허가 아니다.” (…)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증오의 감정에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증오가 사라지고 나면 고통에 직면할 것임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33)
-어머니는 초등학교 여교사의 조롱이 그녀에게 남긴 상처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학교에서 부모님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자신은 아빠가 없다고 대답했다. “누구나 아빠가 있단다…”어머니는 잔인한 냉소가 실린 반박을 당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분명히 아빠가 없었다. (70, 비 오는 날, 머리칼을 매우 길게 기른 중학생 어린이가 우산 없이 앞서 가길래 우산을 씌워 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네 방 청소는 네가 해야지, 긴 머리카락 떨어지면 줍고 그래야지, 생각 없이 말했다. 아이는 한숨을 푹 쉬고는 저는 제 방이 없어요, 했다. 엄마랑 제가 같은 방을 쓰고, 오빠가 혼자 방을 써요. 나는 아차 싶어, 그렇구나 누구나 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미안하다. 말했더니 아이는 오빠도 나이 서른이 다 되어 이제 곧 독립할 거라 괜찮다고 말했다. 도착하고나서 우산 씌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자기 교실로 갔다. 나는 에리봉 선생의 엄마한테 조롱조의 말을 하는 그런 선생 같은 사람이 절대 되지 않기로 했다. 말실수를 했다면 그걸 아는 대로 늦게라도 꼭 사과하는 사람이 되겠다.)
-그녀(외할머니)는 낙태죄로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녀가 얼마나 오래 감금되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 어머니도 그것을 모른다. 남자들은 성생활을 자기들 좋을 대로 꾸릴 수 있었다.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노동자층에서는 모종의 성적 자유가, 부르주아지의 도덕 규범에 비하면 상당한 자유가 존재했다. 그래서 부르주아적 도덕의 수호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문란한 삶을 규탄하고 나섰다. 여성들의 경우, 이러한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는 데 많은 위험 부담이 뒤따랐다. (…)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동반자와 자기 아이들을 동시에 내팽개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가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감수하며 느꼈을 심정을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84, 1940년대 무렵의 프랑스 너마저, 이랬는데… 그거 아세요 2019년 이전의 대한민국도 낙태죄라는 게 합헌으로 남아 있었답니다. 그리고 헌법불합치 판결 6년째에도 개정 입법이 안 되고 있답니다...)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좌절감은 모두 이런 식의 분노의 폭발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내가 살짝 비판적인 의견을 내거나 가볍게 이견 표시만 해도 다음과 같은 대꾸가 튀어나왔다. “네가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우리 위에 있는 건 아냐”라든지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니? 우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하지만 어머니가 가장 자주 입에 올린 것은, 내가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것을 그녀는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내게 상기시켜주는 문장들이었다. (93, 내 경우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적절히 나눠 이런 짓을 했고, 그 두 사람 역시 미친 듯이 싸웠지.)
-통일성과 단순성을 해체하고 거기에 모순과 복잡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거기에 역사적 시간을 다시 도입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는 쪽은 서사이다. 노동 계급은 변화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지 않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노동 계급은 1930년대나 1950년대의 노동 계급과 더 이상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회적 장 안에서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동일한 현실, 동일한 열망을 갖는 것은 아니다. (
98-99, 2008년의 노동자인 나와 2025년 현재의 노동자 나는 더 이상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물론 두 동생 모두 우파에 투표한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최근까지도 국민전선의 충실한 유권자였다. 그러니까 내가 극우의 선거 승리에 맞서 시위를 하거나 이민자와 불법체류자 들을 지지할 때, 나는 가족에 맞서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이 문장을 그대로 뒤집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가족은 내가 지지하는 모든 것, 내가 방어하는 모든 것,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내가 표상하는 모든 것, 나의 전 존재(현실과 단절된 채 민중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에 무지한 파리 지식인)에 반대해 떨쳐 일어난 셈이라고 말이다. (131)
-“민중 계급의 아이들, 그리고 그보다는 정도가 덜하지만, 중간 계급의 아이들을 학업 과정 내내 학교에서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교육 체계의 진짜 기능은 무엇일까?”
“진짜 기능!” 확실하다. 부인할 수 없다. 어머니가 온당한 견해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직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와이드먼처럼, 나는 학교 체계가 우리 눈앞에서 작동하는 모습 속에서 진정 사악한 기계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민중 계급의 아이들을 배척하고, 계급적 우위 및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차별적인 접근 기회를 영속화하고 정당화하는 것. 그 기계는 설령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이러한 결과에 다다른다. 학교는 피지배자들에 맞선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 가운데 하나다. 교육자들은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회질서의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대항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아주 미미하다. 그 질서는 은밀한 동시에 모두가 볼 수 있게 작동하며, 모든 것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것에 맞서서 부과된다. (138-139, 흑흑.)
-마르셀 주앙도는 68년 5월에 학생들의 행렬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집으로들 돌아가세요! 20년 뒤에 당신들은 모두 공무원이 될 테니까.” 완전히 상반된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내 아버지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들은 공무원은 아닐지 몰라도, 의심의 여지없는 유력자가 되었다. 때로는 아연실색할 만큼 화려한 궤적을 거친 후 정치적, 지적, 개인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사회질서를 안락하게 여기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수호했다. 그 세계는 현재 그들의 모습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145)
-그런데 좌파의 승리는, 공산주의자들이 내각 구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에도, 곧 서민층이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나는 상황으로 귀착했다. 서민층은 신뢰를 보내고 투표했으나, 결국은 이 정치인들에게 홀대받고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애정을 거둬들이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들었다(어머니는 내게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말을 되뇌었다). “좌파나 우파나 아무 차이가 없어. 모두 똑같은 놈들이야. 늘 당하는 사람들만 당하는 거지.”(146)
-여기서 우리는 누가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누가 결정 과정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는지, 달리 말해 해결책의 정교화 과정만이 아니라, 중요하고 정당한 문제들에 대한 집합적 규정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는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좌파가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며 욕망과 에너지가 투자되는 공간 내지 용광로로서 조직되기엔 무력한 실상을 드러낼 때, 우파나 극우가 그러한 문제 제기, 욕망, 에너지를 유인하고 수용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과제가 사회운동과 비판적 지식인에게 주어진다. 사회체제 내에서, 특히 민중 계급 내에서 작동하는 부정적인 열정을 없애지는 못할지라도-이는 불가능한 과업이다-최대한 중화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지각 양식과 이론적 틀을 구축하기. 다른 관점들을 제공하고, 다시 한 번 새롭게 좌파라고 불릴 만한 미래를 스케치하기. (175, 우파로 넘어가는 노동자계급 말고도 나처럼 탈정치하는 회의주의자들도 좀 어떻게 해 봐라...니들이 미래라고 할 만한 대안을 그려 준 적이 있냐고…왜 맨날 절망만 주냐고...비겁한 내 탓이라고 하면 네 말이 맞다고 하자.)
-그는 많은 것을 고백하는 만큼이나 많은 것에 침묵한다.
예를 들면, 부르디외는 학교 환경의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못한 사회적 부적응성과 공부하고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 사이의 긴장 또는 모순을 마침내 어떻게 관리할 수 있었는지, 또 후자가 전자를 어떻게 능가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이후 그가 지적인 삶을 꾸려간 방식에는 부적응성의 흔적이 간직되어 있었다. 이는 특히 부르디외가 교수 생활을 지배하는 부르주아적 예의범절을 대놓고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한 예의범절은 실제 정치적 투쟁이 쟁점이 될 때조차 모든 이에게 ‘학문적 토론’이라는 제도화된 규범에 복종하도록-‘학자 공동체’에서 배척당하는 형벌을 받지 않으려면-강제하는 경향이 있다). 부르디외는 또 어떻게 해서 그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식인 세계에서 버틸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부르디외는 그 세계를 온몸으로 거부한 동시에, 벗어나지 않길 열망했다(그는 스스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혐오했던 이 세계에 역설적이지만 잘 적응했다”고 묘사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러한 양가성 덕분에, 부르디외는 나중에 그가 되었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그의 모든 지적 기획과 궁극적인 여정을 실현할 수 있었다. 지식이라는 수단에 의해, 그 수단 속에서 이어졌던 반항-“끈질긴 분노.” 푸코라면 그것을 “성찰적 비순종”이라고 불렀을 터이다. (181-182, 나는 지식인은 아니지만, 일반인 중 개코딱지만한 지식 덧붙인 스놉 너드지만, 에리봉이 푸코인 척 이름 붙인 그 상태 끄트머리에 꼽사리 낌 직해서 아아..고개 끄덕끄덕 이러고 부르디외의 ‘자기 분석에 대한 초고’에 대한 디디에 에리봉의 독후감을 베껴왔다. 이런 식으로 에리봉도 은근슬쩍 부르디외한테 들러붙는 거지…올려치기 무엇)
-문화가 ‘구별짓기’의 벡터, 즉 자신과 타자의 차별화, 타자에 대한 거리두기와 제도화된 격차의 벡터이기에, 문화에 대한 애착은 젊은 게이, 특히 민중 계급 출신의 젊은 게이에게 매우 중요한 주체화 양식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 양식은 그의 ‘차이’에 버팀목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게 해주고, 그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해주며, 그의 출신 환경에서 나온 것과는 다른 에토스를 주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187, 나한테 그런 차이를 불어 넣어준 건 인터넷 문화와 대학 동아리였다오…)
-사실상 내게는 두 갈래의 길이 펼쳐졌다. 하나의 길은, 딱히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집스럽게 말을 듣지 않는 태도, 부적응, 오만불손, 반감과 냉소, 완강한 거부 등으로 표현되는 자발적인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 이전의 수많은 아이들이 그랬듯, 나 역시 이 체계에서 소리 소문 없이 추방당하면서 마무리될 터였다.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힘 때문이지만, 마치 내 개인적 행동의 단순한 결과라는 모양새를 띠고서 말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학교의 요구에 맞춰 점차 나를 굽히는 것, 학교에 날 적응시키는 것, 학교의 주문을 수용하는 것, 그리하여 학교의 벽 안쪽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었다. 저항은 나를 잃는 길이었고, 복종은 나를 구하는 길이었다. (189-190, 디디에 에리봉 선생님보다 30년은 늦게 태어나 세기말과 새천년에 학교를 다녀서 그런가, 내게 펼쳐진 두 갈래 길은 아주 운이 좋게도 공존할 수 있었고, 나는 각각의 길에 한 발씩 걸친 채 평행선 위를 뒤뚱뒤뚱 계속 걸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 걸음걸이는 사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내가 학업적으로 내린 결정들에도 나의 빈곤한 사회적 출신 환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는 진로 선택과 관련해 필요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모했고, 고상하고 유망한 전문과정을 밟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전략도 숙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은 선택은 이과 쪽이었는데, 난 문과로 방향을 잡았다(그 시절에는 이과가 선택받은 학급이었는데, 사실 나는 고등학교 입학 직전인 중학교 4학년 때 이미 수학을 포기했고 ‘문학’이 내 관심을 끌었다). (199, 이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현웃 터졌고...나만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니었군)
-나는 내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 의해 선택당한 것이었다. 아니 포획당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으리라. (201)
-내 눈에는 ‘대학에 가는 것’만이 모든 학생이 마땅히 열망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교육의 위계서열 구조에 무지하고 선발 메커니즘에 숙달되어 있지 못한 학생은 가장 역효과를 내는 선택, 가장 나쁜 결과가 예정된 경로를 고르도록 이끌린다. 미리 알고 있는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피해 가는 것에 다가가는 스스로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빈곤층은 이전에는 배제되었던 것들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실상은 다르다. 그들이 어느 위치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위치가 체계의 이전 단계에서 갖고 있던 위상과 가치를 상실한 뒤다. 유배는 더 느리게 이루어지고 배제는 더 나중에 일어나겠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차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리를 옮겨가며 재생산된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조의 평행이동”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 그 변화의 외양 바깥에서, 경직된 구조는 전과 다름없이 유지, 영속되며 평행이동을 한다. (204, 그러니까 서울대를 들어가도 의대>>>>>넘사벽>>>이과는 공대-컴퓨터나 전기전자전공/문과는 법대, 경영대, 경제학부, 언론학부(이 둘은 엎치락뒤치락 논란의 여지가 있음>>>>>평행우주 이세계>>>자연 인문 사범 농업 기타 등등 이런 투명 경계선이 있다는 걸 느꼈다. 부모집이 강남이라 자취가 필요 없는 강남 출신,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부모가 주는 용돈과 생활비로 자취가 가능한 지방 출신, 아, 부모가 강남 살아도 학교 근처에서 편하게 오고가라고 스패어로 얻어준 오피스텔에 사는 애들도 있긴 있었을 것…)
-필기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서도 두번째 치른 아그레가시옹에서 또 떨어지자, 나는 크게 좌절했다. 이 시험과 중등교원이 되겠다는 생각에 많은 희망과 에너지를 쏟아왔지만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국립 학제에서는 내가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를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10년간 교원으로 일해야 하는 의무에서도 해방되었다. 내게 ‘보조 교사‘, 즉 정직이 아닌 비상근 대체교사의 자리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내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내 출신에 다시 덜미를 잡힌 셈이었다. 박사학위 논문도, 지적인 야심과 그것을 지탱시켜온 환상도 단념해야 했다. 나 자신과 관련해 그동안 부인해온 진실이 다시 떠올랐고, 그것의 법을 강제했다. 이제 진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떤 일자리를? 여기서 우리는 학위의 가치가 사회적 위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DEA가 박사학위 논문에 접근하는 길이었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려면 논문을 쓸 동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논문을 쓸 수 있다고 믿기를 고집하다가 결국 명백한 사실에 굴복하게 된다.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일자리에 붙들려 있는 한, 논문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학위는 우리가 사회관계자본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또 졸업장을 전문직으로 다시 전환하는 전략에 필요한 정보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다른 가치와 가능성을 제공한다. (220, 한국 공교육체계가 두 번째 시험에서 나를 열한명 중 하나에 꼽사리 끼워준 덕인지, 에리봉 선생 같은 고민을 할 기회는 없었지만 만약 이 시험에서도 망했더라면 나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궁금하다. 비정규직 교원으로 결국 지금과 같은 자리에-임시로나마-흘러 왔을까. 나는 논문을 쓰지 않았지만 곁의 사람이 나 때문에 강제로 부모가 되고, 그래서 함께 입학한 동기보다 최소 3년은 늦게 박사학위를 취득했던 걸 생각하면, 대학원만 10년 다녔다고 가끔 놀렸지만 사실 우리 같은 흙수저가 졸업을 완수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 같기도 하다...는 건 내가 석사 수료만 하고 학위 포기한 나부랭이이기 때문에 한 생각ㅋㅋㅋ)
-그런데 모욕어는 또 그것이 겨냥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를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들과 거기 담겨 있는 폭력이 그들이 살아가는 내내 따라붙을 것이라는 끔찍한 예감. 게이가 된다는 것은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전에, 즉 그러한 의식을 갖기도 전에,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고 오래전부터 그 모욕적인 힘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그 어휘를 통해 스스로가 이미 잠재적인 표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에 앞서, 낙인찍힌 정체성이 있다. 우리는 그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 신체를 부여하며, 그것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그것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할 테지만, 거기엔 하나같이 모욕하기의 구성적인 힘이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226-227)
-공중 앞에서 입을 다물고 감추고 부정되어야 하는 욕망이란 과연 무엇인가? 조롱당하고 낙인찍히고 정신분석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지내다가, 일단 공포의 단계를 극복하면, 그 존재의 권리가 때로는 연극적이고 과장되고 공격적이고 ‘과도하고’ ‘종교적이고’ ‘투쟁적인’ 방식으로 끊임없이 확인되고 재확인되고 선언되어야 하는 욕망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러니까 특유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품은 채로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스스로를 의식하고 경험하는 욕망, (길에서, 직장에서…)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이 욕망 말이다. 더더구나 이는 모욕 때문에, 우리가 직접적인 수신자가 아니라도 듣게 되는, 비꼬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폄훼하고 창피를 주는 온갖 말들로 인해 가중된다. (231-232, 성소수자가 아니라도 하여간에 사회통념상 소수자 내지 그런 짓을 당해도 쌀 사람 같은 게 되어 버리면 비슷한 의문과 불안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순전히 심리적인 것은 없다. 성적 규범들은 은밀하지만 효율적으로 작동하며 그 규범들이 통할하는 위계질서가 존재하는데, 이것들이 매일매일의 정신 작용과 주체성을 만드는 것이다.(234, 그러니까 내 탓 대신 사회 탓을 하자…)
-왜 나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폭력을 감수해야 하는가? 왜 영원히 위협 아래서 살아가야 하는가? (249, 동일한 질문을 하는 집단들이 왜 연대하지 못하고 심지어 혐오나 배척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폭력에 대한 분노는 엉뚱한 곳을 향한 폭력으로 전치되는 것인지.)
-나는 오랫동안 이에 대해 질문을 제기해왔다. “왜?”그리고 이런 질문도. “우리가 대체 무엇을 했기에?” 이 질문들에 대해서라면, 사회적 판결의 자의성, 그 부조리 말고는 다른 대답이 없다. 카프카의 ’소송‘에서처럼, 이러한 판결을 내린 법정을 찾으려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본부를 두고 있지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판결이 이미 내려진 세계에 도착한다. 생의 어떤 순간 우리는 공적으로 기소당한 사람들의 자리에 놓여, 비난의 손가락질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공적 기소로부터 근근이 자신을 방어하면서 ’오염된 정체성‘-어빙 고프먼의 책 ’스티그마‘의 영어 부제-을 잘 관리하려 애쓰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함께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러한 저주, 이러한 선고는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불안정성과 취약성의 감정을, 그리고 게이 주체성을 특징짓는 일종의 막연한 불안감을 심어 놓는다. (250-251)
-상처를 가하는 모욕의 힘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고프먼을 따라 말하자면, 낙인을 전복시키거나 모욕을 재전유하고 재의미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상처를 입히는 욕설의 작용과 그것의 능청스런 재전유 사이에서 항상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흑흑) 우리는 사회질서와 그 예속화하는 힘이 매 순간 모든 이에게 가하는 무게에서 어느정도까지만 해방될 수 있을 뿐이다.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이 훌륭하게 표현한 것처럼, 수치심이 ‘변형 에너지’라면, 자기 변형은 과거의 흔적들을 통합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보존한다. 이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그 세계에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고, 그 과거가 우리 안에 상당 부분 현존해 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우리의 현재다. 따라서 우리는 표명되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재표명되고 재창조된다(무한정 재착수해야 하는 과업처럼). (257, 그러니 에이아이놈아, 과거에 갇혀서 같은 말을 변주만 한다고 뭐라고 하지 마라. 나는 재표명하고 재창조하는 중이니라…)
-나는 편집자들과 점심을 먹고, 저자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그들 가운데 몇몇과는 금세 친구가 되었고,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등과는 아주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다. 박사논문을 포기하기로 막 결심한 참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사회적 필연성과 무모한 결정의 조합이 만들어낸 존재의 우연에 의해 동시대 사상계의 거물들과 교류하게 된 것이다. (264, 그러니까 우연의 벼락을 맞아 백수 예정자에서 성공한 덕후 인터뷰어로 발돋움한 이야기…)
-지적 삶도 가까이서 보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현실은 우리가 거기 끼어들기를 열망할 때 지니는 이상화된 비전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몇 차례의 위기와 설전이 있었다. 나는 그 난폭함에 경악했다. 그 후 나는 이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투쟁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일’을 밥벌이로 간주하고 여기서 번 돈을 책을 쓰는 데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이때의 힘든 경험들은 내게 특별한 충동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나를 다른 길로 접어들도록 떠밀었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해주었다. 나는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변형시키는 일에 매달렸다. (266-267, 나 이 부분에서 여기서 번 돈을 책을 ‘사’는 데 활용해야겠다고...로 잘못 읽었다. ㅋㅋㅋㅋㅋㅋ아오 시발 좁은 내 지평….일개 소비자입니다.)
-내게 끈기가 부족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소설가적 재능 부족? 아니면 단순히 내가 스스로 게임을 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래된 야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작가 시늉을 내며 자신이 작가라는 환상에 갇혀 있었다. 그런 환상을 가질 만한 까닭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점차 나는 이 문학의 유혹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진정으로 잊지는 않았다. 아직도 나는 내가 그 길을 계속 걸어갈 힘을 내지 못했던 것을, 참을성을 갖지 못했던 것을 후회할 때가 있다. (268, 감히 추측해 보건데, 아마 에리봉 선생님은 전보다 조금은 행복해졌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말에는 ‘배때기가 불렀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꿈이 있다. 그리고 현실이 있다. 이 둘을 일치시키는 일은 집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호적인 상황 역시 갖춰질 필요가 있다.(…) 내게 글쓰기는 미래의 호출이 아니었다. 조숙한 동사 활용에 놀라고 감탄하는 어른들의 아래서 이루어진 놀이와 재주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었던 미래(이런 건 이율곡 같은 사람이나), 세월이 지나 때가 되면 도래할 그런 미래가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 정반대였다! 다른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사회적 가능성의 수준에 내 욕망을 맞춰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리 주어진 권리를, 나를 위해 만들어내고 그에 맞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항해-싸워야 했다. 나는 특권층에게는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일 길들 위에서 암중모색하며 나아갔다. 때로는 기존의 길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열려 있지 않은 것으로 판명 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270, 겸손하시네요. 저는 천재는 아니랍니다, 하는 것이. 한 편으론 내가 말이야 자수성가 대기만성형 인간이다 이말이야, 하고 으스대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조금 어릴 때 하고 다니던 짓이라 미러링당하니까 쪽팔리고 꼴보기 싫네.)
-하지만 왜 우리는 상이한 지배 양태에 대항해 이루어지는 상이한 전투 가운데 어떤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존재는 복수의 집합적 결정요인, 복수의 ‘정체성’ 복수의 예속화 양태들이 교차되는 곳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필 이것 아닌 저것을 정치적 관심의 중심축으로 지정해야 하는 것일까? (…) 만약 우리를 정치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 담론과 이론이라면, 이런저런 측면들을 간과하지 않게 해주는 담론과 이론, 즉 어떠한 억압의 차원도, 어떠한 지배의 층위도, 어떠한 열등성의 할당도, 모욕적 호명과 연계된 어떠한 수치심도 지각과 행동의 장 바깥에 내버려두지 않도록 해주는 담론과 이론을 구축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정치 무대에서 들어본 적 없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목소리와 새로운 문제들을 떠안는, 모든 새로운 운동을 환대할 채비를 갖추게 해주는 이론 말이다. (276, 교차성을 환기하며 여기에서도 등장하는 유니콘, 되겠냐. 희망 고문 하지 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