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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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31 디디에 에리봉.

오랫동안 반복되는 꿈이 있었다. 떠나온 옛집에 놓고 온 무언가를 찾으러 돌아가는 것이었다. 부모는 내가 일곱살 때부터 스물세살까지 전세 이천만원짜리 벽돌조 2층짜리 다가구 단독주택의 1층에 살았다. 방 두 개에 거실, 분리된 주방, 주방과 연결된 지하실, 실내에 욕실 겸 화장실이 함께 있는 집에 처음 살게 된 것이었다. 동생과 나는 우리 방을 가지게 되었다고 기뻐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집을 (도망쳐)나온 다섯째 삼촌이 우리집 방 한 칸을 차지해서 나와 동생은 부모와 같은 방에서 넷이 잤다. 실망스러웠다. 삼촌방을 뒤져서 스쿠알렌 한 알을 훔쳐먹고 구역질을 하고, 비키니와 티팬티를 입은 여자들이 한 가득인 잡지책을 찾아낸 것이 내내 충격이었다. 다이제스티브 과자를 사오라고 동전을 건네는 삼촌에게 싫다고 말하자 삼촌은 내가 밉다고 했다. 과자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못 외우겠어서 그랬는데. 몇 년 후 삼촌이 독립해 나가고 드디어 동생과 나의 방에서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방은 너무 습기가 많아 벽에 곰팡이가 마구 피어서 결국 다시 거실에서 자게 되었다.

엄마를 때리고 술주정하는 아빠를 떠나올 때는, 이미 옛집을 떠나 새로 지은 아파트에 들어간 지 일 년 남짓 지나 있었다. 그러나 꿈 속에서는 항상 그 벽돌집의 1층으로 되돌아갔다. 그 집에는 아빠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아빠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거나, 아빠가 폭력을 쓰거나, 아빠가 없는 동안 몰래 잠입해서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오거나 해야 했다. 찾는 것이 뭔지는 찾아간 나조차 잘 몰랐다.

지금 살고 있는 내가 이룬 가정은 원가정에 비할 바 없이 평온하다. 이 집에서 화를 가장 잘 내고 가장 폭력적인 언행을 하는 것은 바로 나놈이다. 심한 불안과 초조와 강박관념을 느낄 때만 가끔 그러고 이제는 조금 덜 그런다. 아이들은 내가 하는 농담에 웃고 내가 대충 해 주는 냉동식품이나 레토르트 식품을 잘 먹고 할머니가 해주는 인스턴트와 정반대인 음식도 잘 먹는다. 내가 아이들의 부친으로 고른 사람은 가부장제와는 여러모로 대척점에 있는 순한 사람이었다. 이 집에서 가장 가부장적인 인간은 나놈이다. 그래도 그 사실을 알긴 아니까 좀 덜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마지막 수능을 마치고 나는 꿈에 자주 나오던, 거의 이십 년 전의 옛집에 찾아갔다. 창문 샷시가 교체되었고 에어컨 실외기가 생겼고 대문은 그대로였다. 그 동네 순대골목에 가서 곱창이 왕창 들어 엄청 맛있는 순댓국을 먹고 돌아왔다. 이후 반 년이 넘는 동안 더 이상 옛집 꿈을 꾸지 않고 있다. 그 집에는 이제 아빠도 없고 나와 동생과 엄마도 없다는 걸, 우리가 키우던 개도 없다는 걸 한 번 더 눈으로 확인하고 오길 잘한 것 같다. 원래 있던 단독주택이던 이웃집 대부분은 다세대 연립주택, 빌라 같은 걸로 새로 지어졌다.
그렇게 이십 년 넘게 나의 살던 고향은 이제 남의 고장이 되었다. 아마도 그곳의 테마파크나 워터파크를 찾을 때나 다시 가게 되겠지. 친구도 가족도 없다. 아빠와 친족들이 살긴 하지만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그곳과 이곳의 거리가 50킬로미터 가까이 된다는 것에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나의 랭스를 떠올려보게 되었다. 아빠가 죽더라도 그 고장에 다시 갈 계획은 없다. 그 사람이 죽는 날까지 나에게 다시 접촉해오거나 정서적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는 일이 없기만 바란다. 바람은 바람일 뿐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아버지, 뭐 그런 게 인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바람직한 자식의 도리인 모양이다. 아이참, 조현병 알콜중독자 가정폭력범 아빠 타령은 나도 이제 지겹다. 듣는 사람들도 질렸겠다. 얼른 평온하게 천국으로 가셔서 제가 패륜 파티 후기를 남길 수 있게 해주세요.

썰이 길었는데, 디디에 에리봉 선생이 랭스로 돌아가는 이야기도 비스무레했다. 노동자계급을 벗어나, 지식인 사회로 스며들고 나는 게이니까 게이로 살겠어, 하고 자신이 되고 싶던 자기가 될 때까지, 랭스는 모욕과 수치와 무지의 진흙구정물이기도 했고 역설적으로 내가 나로 될 수 있게 밀어준 곳이기도 했다. 자전적 이야기에다가 여러 선생님들의 사회학적, 문학적, 철학적 통찰을 살짝 비벼가지고 이 책은 재미있고 왠지 멋있고 그런데 또 있어보이는 책이 되었다. 푸코 전기 쓰기까지의 에리봉 선생의 궤적이나 책의 전개나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명한 덕에 음 이 책 좀 짱, 하는 걸 여기저기서 들어서 흠, 나도 재미있게 읽겠군, 예감했고 다행히도 재미있었다. 다 알아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일테지만 그래도 와 너도, 하하 나도, 하는 부분도 제법 많았고 전공이 전공이라고 사회학 담론 깔고 이야기 전개하는 글들이 왠지 친숙하고 비교적 잘 읽힌다. 에리봉은 교사 시험 두 번째까지 떨어져서 아 망했다, 했다가 작가에다 교수까지 됐지만, 나는 교사 시험 두 번째에 붙어버려서 아 망했다, 대학원 가볼까?(들어는 갔는데 나오진 못함) 소설이나 써볼까?(쓰긴 썼는데 극소수의 독자만 읽음) 뭐 그런게 인생이지요 선생님. 푸코 선생은 제가 태어나던 해에 영면하셨군요. 나는 남들이 푸코푸코 거릴 때 일부러 더 난 안 볼 거야! (신도가 되기 싫은 두려움 또는 못알아 들을까 봐 더 두려움) 했는데 푸코 친구이자 푸코 전기 쓴 에리봉 선생의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80살까지 안 죽으면 다른 책들 다 읽고 나면 그땐 좀 생각해 볼게요. 에리봉 선생님은 랭스로 돌아가 교수님이 되셨는데 나는 용인으로 되돌아가다, 같은 건 안 쓸 것 같다. 죽어서도 명당 많다는 그 동네 돌아갈 생각은 없다. 수목장 하더라도 난 거꾸로 사거진천 하게 해다오… 아니다 그냥 화학장 같은 걸로 몽창 녹여서 하수구에 부어다오...

+밑줄 긋기
-“(…)진실은 내가 그를 증오했었고 그 증오를 계속 간직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나는 폐허로 변해버린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증오했던 것은 폐허가 아니다.” (…)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증오의 감정에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증오가 사라지고 나면 고통에 직면할 것임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33)

-어머니는 초등학교 여교사의 조롱이 그녀에게 남긴 상처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학교에서 부모님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자신은 아빠가 없다고 대답했다. “누구나 아빠가 있단다…”어머니는 잔인한 냉소가 실린 반박을 당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분명히 아빠가 없었다. (70, 비 오는 날, 머리칼을 매우 길게 기른 중학생 어린이가 우산 없이 앞서 가길래 우산을 씌워 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네 방 청소는 네가 해야지, 긴 머리카락 떨어지면 줍고 그래야지, 생각 없이 말했다. 아이는 한숨을 푹 쉬고는 저는 제 방이 없어요, 했다. 엄마랑 제가 같은 방을 쓰고, 오빠가 혼자 방을 써요. 나는 아차 싶어, 그렇구나 누구나 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미안하다. 말했더니 아이는 오빠도 나이 서른이 다 되어 이제 곧 독립할 거라 괜찮다고 말했다. 도착하고나서 우산 씌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자기 교실로 갔다. 나는 에리봉 선생의 엄마한테 조롱조의 말을 하는 그런 선생 같은 사람이 절대 되지 않기로 했다. 말실수를 했다면 그걸 아는 대로 늦게라도 꼭 사과하는 사람이 되겠다.)

-그녀(외할머니)는 낙태죄로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녀가 얼마나 오래 감금되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 어머니도 그것을 모른다. 남자들은 성생활을 자기들 좋을 대로 꾸릴 수 있었다. 여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노동자층에서는 모종의 성적 자유가, 부르주아지의 도덕 규범에 비하면 상당한 자유가 존재했다. 그래서 부르주아적 도덕의 수호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문란한 삶을 규탄하고 나섰다. 여성들의 경우, 이러한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는 데 많은 위험 부담이 뒤따랐다. (…)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동반자와 자기 아이들을 동시에 내팽개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녀가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감수하며 느꼈을 심정을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84, 1940년대 무렵의 프랑스 너마저, 이랬는데… 그거 아세요 2019년 이전의 대한민국도 낙태죄라는 게 합헌으로 남아 있었답니다. 그리고 헌법불합치 판결 6년째에도 개정 입법이 안 되고 있답니다...)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좌절감은 모두 이런 식의 분노의 폭발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내가 살짝 비판적인 의견을 내거나 가볍게 이견 표시만 해도 다음과 같은 대꾸가 튀어나왔다. “네가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우리 위에 있는 건 아냐”라든지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니? 우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하지만 어머니가 가장 자주 입에 올린 것은, 내가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것을 그녀는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내게 상기시켜주는 문장들이었다. (93, 내 경우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적절히 나눠 이런 짓을 했고, 그 두 사람 역시 미친 듯이 싸웠지.)

-통일성과 단순성을 해체하고 거기에 모순과 복잡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거기에 역사적 시간을 다시 도입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는 쪽은 서사이다. 노동 계급은 변화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지 않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노동 계급은 1930년대나 1950년대의 노동 계급과 더 이상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회적 장 안에서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동일한 현실, 동일한 열망을 갖는 것은 아니다. (
98-99, 2008년의 노동자인 나와 2025년 현재의 노동자 나는 더 이상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물론 두 동생 모두 우파에 투표한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최근까지도 국민전선의 충실한 유권자였다. 그러니까 내가 극우의 선거 승리에 맞서 시위를 하거나 이민자와 불법체류자 들을 지지할 때, 나는 가족에 맞서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이 문장을 그대로 뒤집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가족은 내가 지지하는 모든 것, 내가 방어하는 모든 것,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내가 표상하는 모든 것, 나의 전 존재(현실과 단절된 채 민중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에 무지한 파리 지식인)에 반대해 떨쳐 일어난 셈이라고 말이다. (131)

-“민중 계급의 아이들, 그리고 그보다는 정도가 덜하지만, 중간 계급의 아이들을 학업 과정 내내 학교에서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교육 체계의 진짜 기능은 무엇일까?”
“진짜 기능!” 확실하다. 부인할 수 없다. 어머니가 온당한 견해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직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와이드먼처럼, 나는 학교 체계가 우리 눈앞에서 작동하는 모습 속에서 진정 사악한 기계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민중 계급의 아이들을 배척하고, 계급적 우위 및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차별적인 접근 기회를 영속화하고 정당화하는 것. 그 기계는 설령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이러한 결과에 다다른다. 학교는 피지배자들에 맞선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 가운데 하나다. 교육자들은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회질서의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대항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아주 미미하다. 그 질서는 은밀한 동시에 모두가 볼 수 있게 작동하며, 모든 것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것에 맞서서 부과된다. (138-139, 흑흑.)

-마르셀 주앙도는 68년 5월에 학생들의 행렬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집으로들 돌아가세요! 20년 뒤에 당신들은 모두 공무원이 될 테니까.” 완전히 상반된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내 아버지도 어느 정도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들은 공무원은 아닐지 몰라도, 의심의 여지없는 유력자가 되었다. 때로는 아연실색할 만큼 화려한 궤적을 거친 후 정치적, 지적, 개인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사회질서를 안락하게 여기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수호했다. 그 세계는 현재 그들의 모습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145)

-그런데 좌파의 승리는, 공산주의자들이 내각 구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에도, 곧 서민층이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나는 상황으로 귀착했다. 서민층은 신뢰를 보내고 투표했으나, 결국은 이 정치인들에게 홀대받고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애정을 거둬들이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들었다(어머니는 내게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말을 되뇌었다). “좌파나 우파나 아무 차이가 없어. 모두 똑같은 놈들이야. 늘 당하는 사람들만 당하는 거지.”(146)

-여기서 우리는 누가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누가 결정 과정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는지, 달리 말해 해결책의 정교화 과정만이 아니라, 중요하고 정당한 문제들에 대한 집합적 규정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는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좌파가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며 욕망과 에너지가 투자되는 공간 내지 용광로로서 조직되기엔 무력한 실상을 드러낼 때, 우파나 극우가 그러한 문제 제기, 욕망, 에너지를 유인하고 수용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과제가 사회운동과 비판적 지식인에게 주어진다. 사회체제 내에서, 특히 민중 계급 내에서 작동하는 부정적인 열정을 없애지는 못할지라도-이는 불가능한 과업이다-최대한 중화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지각 양식과 이론적 틀을 구축하기. 다른 관점들을 제공하고, 다시 한 번 새롭게 좌파라고 불릴 만한 미래를 스케치하기. (175, 우파로 넘어가는 노동자계급 말고도 나처럼 탈정치하는 회의주의자들도 좀 어떻게 해 봐라...니들이 미래라고 할 만한 대안을 그려 준 적이 있냐고…왜 맨날 절망만 주냐고...비겁한 내 탓이라고 하면 네 말이 맞다고 하자.)

-그는 많은 것을 고백하는 만큼이나 많은 것에 침묵한다.
예를 들면, 부르디외는 학교 환경의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못한 사회적 부적응성과 공부하고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 사이의 긴장 또는 모순을 마침내 어떻게 관리할 수 있었는지, 또 후자가 전자를 어떻게 능가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이후 그가 지적인 삶을 꾸려간 방식에는 부적응성의 흔적이 간직되어 있었다. 이는 특히 부르디외가 교수 생활을 지배하는 부르주아적 예의범절을 대놓고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한 예의범절은 실제 정치적 투쟁이 쟁점이 될 때조차 모든 이에게 ‘학문적 토론’이라는 제도화된 규범에 복종하도록-‘학자 공동체’에서 배척당하는 형벌을 받지 않으려면-강제하는 경향이 있다). 부르디외는 또 어떻게 해서 그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식인 세계에서 버틸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부르디외는 그 세계를 온몸으로 거부한 동시에, 벗어나지 않길 열망했다(그는 스스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혐오했던 이 세계에 역설적이지만 잘 적응했다”고 묘사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러한 양가성 덕분에, 부르디외는 나중에 그가 되었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그의 모든 지적 기획과 궁극적인 여정을 실현할 수 있었다. 지식이라는 수단에 의해, 그 수단 속에서 이어졌던 반항-“끈질긴 분노.” 푸코라면 그것을 “성찰적 비순종”이라고 불렀을 터이다. (181-182, 나는 지식인은 아니지만, 일반인 중 개코딱지만한 지식 덧붙인 스놉 너드지만, 에리봉이 푸코인 척 이름 붙인 그 상태 끄트머리에 꼽사리 낌 직해서 아아..고개 끄덕끄덕 이러고 부르디외의 ‘자기 분석에 대한 초고’에 대한 디디에 에리봉의 독후감을 베껴왔다. 이런 식으로 에리봉도 은근슬쩍 부르디외한테 들러붙는 거지…올려치기 무엇)

-문화가 ‘구별짓기’의 벡터, 즉 자신과 타자의 차별화, 타자에 대한 거리두기와 제도화된 격차의 벡터이기에, 문화에 대한 애착은 젊은 게이, 특히 민중 계급 출신의 젊은 게이에게 매우 중요한 주체화 양식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 양식은 그의 ‘차이’에 버팀목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게 해주고, 그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해주며, 그의 출신 환경에서 나온 것과는 다른 에토스를 주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187, 나한테 그런 차이를 불어 넣어준 건 인터넷 문화와 대학 동아리였다오…)

-사실상 내게는 두 갈래의 길이 펼쳐졌다. 하나의 길은, 딱히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집스럽게 말을 듣지 않는 태도, 부적응, 오만불손, 반감과 냉소, 완강한 거부 등으로 표현되는 자발적인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 이전의 수많은 아이들이 그랬듯, 나 역시 이 체계에서 소리 소문 없이 추방당하면서 마무리될 터였다.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힘 때문이지만, 마치 내 개인적 행동의 단순한 결과라는 모양새를 띠고서 말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학교의 요구에 맞춰 점차 나를 굽히는 것, 학교에 날 적응시키는 것, 학교의 주문을 수용하는 것, 그리하여 학교의 벽 안쪽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었다. 저항은 나를 잃는 길이었고, 복종은 나를 구하는 길이었다. (189-190, 디디에 에리봉 선생님보다 30년은 늦게 태어나 세기말과 새천년에 학교를 다녀서 그런가, 내게 펼쳐진 두 갈래 길은 아주 운이 좋게도 공존할 수 있었고, 나는 각각의 길에 한 발씩 걸친 채 평행선 위를 뒤뚱뒤뚱 계속 걸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 걸음걸이는 사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내가 학업적으로 내린 결정들에도 나의 빈곤한 사회적 출신 환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는 진로 선택과 관련해 필요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모했고, 고상하고 유망한 전문과정을 밟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전략도 숙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좋은 선택은 이과 쪽이었는데, 난 문과로 방향을 잡았다(그 시절에는 이과가 선택받은 학급이었는데, 사실 나는 고등학교 입학 직전인 중학교 4학년 때 이미 수학을 포기했고 ‘문학’이 내 관심을 끌었다). (199, 이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현웃 터졌고...나만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니었군)

-나는 내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 의해 선택당한 것이었다. 아니 포획당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으리라. (201)

-내 눈에는 ‘대학에 가는 것’만이 모든 학생이 마땅히 열망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교육의 위계서열 구조에 무지하고 선발 메커니즘에 숙달되어 있지 못한 학생은 가장 역효과를 내는 선택, 가장 나쁜 결과가 예정된 경로를 고르도록 이끌린다. 미리 알고 있는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피해 가는 것에 다가가는 스스로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빈곤층은 이전에는 배제되었던 것들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실상은 다르다. 그들이 어느 위치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위치가 체계의 이전 단계에서 갖고 있던 위상과 가치를 상실한 뒤다. 유배는 더 느리게 이루어지고 배제는 더 나중에 일어나겠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차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리를 옮겨가며 재생산된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조의 평행이동”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 그 변화의 외양 바깥에서, 경직된 구조는 전과 다름없이 유지, 영속되며 평행이동을 한다. (204, 그러니까 서울대를 들어가도 의대>>>>>넘사벽>>>이과는 공대-컴퓨터나 전기전자전공/문과는 법대, 경영대, 경제학부, 언론학부(이 둘은 엎치락뒤치락 논란의 여지가 있음>>>>>평행우주 이세계>>>자연 인문 사범 농업 기타 등등 이런 투명 경계선이 있다는 걸 느꼈다. 부모집이 강남이라 자취가 필요 없는 강남 출신,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부모가 주는 용돈과 생활비로 자취가 가능한 지방 출신, 아, 부모가 강남 살아도 학교 근처에서 편하게 오고가라고 스패어로 얻어준 오피스텔에 사는 애들도 있긴 있었을 것…)

-필기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서도 두번째 치른 아그레가시옹에서 또 떨어지자, 나는 크게 좌절했다. 이 시험과 중등교원이 되겠다는 생각에 많은 희망과 에너지를 쏟아왔지만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국립 학제에서는 내가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를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10년간 교원으로 일해야 하는 의무에서도 해방되었다. 내게 ‘보조 교사‘, 즉 정직이 아닌 비상근 대체교사의 자리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내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내 출신에 다시 덜미를 잡힌 셈이었다. 박사학위 논문도, 지적인 야심과 그것을 지탱시켜온 환상도 단념해야 했다. 나 자신과 관련해 그동안 부인해온 진실이 다시 떠올랐고, 그것의 법을 강제했다. 이제 진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떤 일자리를? 여기서 우리는 학위의 가치가 사회적 위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DEA가 박사학위 논문에 접근하는 길이었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려면 논문을 쓸 동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논문을 쓸 수 있다고 믿기를 고집하다가 결국 명백한 사실에 굴복하게 된다.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일자리에 붙들려 있는 한, 논문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뿐만 아니라 학위는 우리가 사회관계자본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또 졸업장을 전문직으로 다시 전환하는 전략에 필요한 정보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다른 가치와 가능성을 제공한다. (220, 한국 공교육체계가 두 번째 시험에서 나를 열한명 중 하나에 꼽사리 끼워준 덕인지, 에리봉 선생 같은 고민을 할 기회는 없었지만 만약 이 시험에서도 망했더라면 나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궁금하다. 비정규직 교원으로 결국 지금과 같은 자리에-임시로나마-흘러 왔을까. 나는 논문을 쓰지 않았지만 곁의 사람이 나 때문에 강제로 부모가 되고, 그래서 함께 입학한 동기보다 최소 3년은 늦게 박사학위를 취득했던 걸 생각하면, 대학원만 10년 다녔다고 가끔 놀렸지만 사실 우리 같은 흙수저가 졸업을 완수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 같기도 하다...는 건 내가 석사 수료만 하고 학위 포기한 나부랭이이기 때문에 한 생각ㅋㅋㅋ)

-그런데 모욕어는 또 그것이 겨냥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를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들과 거기 담겨 있는 폭력이 그들이 살아가는 내내 따라붙을 것이라는 끔찍한 예감. 게이가 된다는 것은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전에, 즉 그러한 의식을 갖기도 전에,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고 오래전부터 그 모욕적인 힘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그 어휘를 통해 스스로가 이미 잠재적인 표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에 앞서, 낙인찍힌 정체성이 있다. 우리는 그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 신체를 부여하며, 그것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그것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할 테지만, 거기엔 하나같이 모욕하기의 구성적인 힘이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226-227)

-공중 앞에서 입을 다물고 감추고 부정되어야 하는 욕망이란 과연 무엇인가? 조롱당하고 낙인찍히고 정신분석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지내다가, 일단 공포의 단계를 극복하면, 그 존재의 권리가 때로는 연극적이고 과장되고 공격적이고 ‘과도하고’ ‘종교적이고’ ‘투쟁적인’ 방식으로 끊임없이 확인되고 재확인되고 선언되어야 하는 욕망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러니까 특유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을 품은 채로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스스로를 의식하고 경험하는 욕망, (길에서, 직장에서…)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는 이 욕망 말이다. 더더구나 이는 모욕 때문에, 우리가 직접적인 수신자가 아니라도 듣게 되는, 비꼬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폄훼하고 창피를 주는 온갖 말들로 인해 가중된다. (231-232, 성소수자가 아니라도 하여간에 사회통념상 소수자 내지 그런 짓을 당해도 쌀 사람 같은 게 되어 버리면 비슷한 의문과 불안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순전히 심리적인 것은 없다. 성적 규범들은 은밀하지만 효율적으로 작동하며 그 규범들이 통할하는 위계질서가 존재하는데, 이것들이 매일매일의 정신 작용과 주체성을 만드는 것이다.(234, 그러니까 내 탓 대신 사회 탓을 하자…)

-왜 나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폭력을 감수해야 하는가? 왜 영원히 위협 아래서 살아가야 하는가? (249, 동일한 질문을 하는 집단들이 왜 연대하지 못하고 심지어 혐오나 배척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폭력에 대한 분노는 엉뚱한 곳을 향한 폭력으로 전치되는 것인지.)

-나는 오랫동안 이에 대해 질문을 제기해왔다. “왜?”그리고 이런 질문도. “우리가 대체 무엇을 했기에?” 이 질문들에 대해서라면, 사회적 판결의 자의성, 그 부조리 말고는 다른 대답이 없다. 카프카의 ’소송‘에서처럼, 이러한 판결을 내린 법정을 찾으려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본부를 두고 있지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판결이 이미 내려진 세계에 도착한다. 생의 어떤 순간 우리는 공적으로 기소당한 사람들의 자리에 놓여, 비난의 손가락질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공적 기소로부터 근근이 자신을 방어하면서 ’오염된 정체성‘-어빙 고프먼의 책 ’스티그마‘의 영어 부제-을 잘 관리하려 애쓰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함께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러한 저주, 이러한 선고는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불안정성과 취약성의 감정을, 그리고 게이 주체성을 특징짓는 일종의 막연한 불안감을 심어 놓는다. (250-251)

-상처를 가하는 모욕의 힘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고프먼을 따라 말하자면, 낙인을 전복시키거나 모욕을 재전유하고 재의미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상처를 입히는 욕설의 작용과 그것의 능청스런 재전유 사이에서 항상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흑흑) 우리는 사회질서와 그 예속화하는 힘이 매 순간 모든 이에게 가하는 무게에서 어느정도까지만 해방될 수 있을 뿐이다.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이 훌륭하게 표현한 것처럼, 수치심이 ‘변형 에너지’라면, 자기 변형은 과거의 흔적들을 통합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보존한다. 이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그 세계에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고, 그 과거가 우리 안에 상당 부분 현존해 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는 여전히 우리의 현재다. 따라서 우리는 표명되고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재표명되고 재창조된다(무한정 재착수해야 하는 과업처럼). (257, 그러니 에이아이놈아, 과거에 갇혀서 같은 말을 변주만 한다고 뭐라고 하지 마라. 나는 재표명하고 재창조하는 중이니라…)

-나는 편집자들과 점심을 먹고, 저자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그들 가운데 몇몇과는 금세 친구가 되었고,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등과는 아주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다. 박사논문을 포기하기로 막 결심한 참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사회적 필연성과 무모한 결정의 조합이 만들어낸 존재의 우연에 의해 동시대 사상계의 거물들과 교류하게 된 것이다. (264, 그러니까 우연의 벼락을 맞아 백수 예정자에서 성공한 덕후 인터뷰어로 발돋움한 이야기…)

-지적 삶도 가까이서 보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현실은 우리가 거기 끼어들기를 열망할 때 지니는 이상화된 비전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몇 차례의 위기와 설전이 있었다. 나는 그 난폭함에 경악했다. 그 후 나는 이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투쟁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일’을 밥벌이로 간주하고 여기서 번 돈을 책을 쓰는 데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이때의 힘든 경험들은 내게 특별한 충동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나를 다른 길로 접어들도록 떠밀었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해주었다. 나는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변형시키는 일에 매달렸다. (266-267, 나 이 부분에서 여기서 번 돈을 책을 ‘사’는 데 활용해야겠다고...로 잘못 읽었다. ㅋㅋㅋㅋㅋㅋ아오 시발 좁은 내 지평….일개 소비자입니다.)

-내게 끈기가 부족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소설가적 재능 부족? 아니면 단순히 내가 스스로 게임을 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래된 야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작가 시늉을 내며 자신이 작가라는 환상에 갇혀 있었다. 그런 환상을 가질 만한 까닭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점차 나는 이 문학의 유혹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진정으로 잊지는 않았다. 아직도 나는 내가 그 길을 계속 걸어갈 힘을 내지 못했던 것을, 참을성을 갖지 못했던 것을 후회할 때가 있다. (268, 감히 추측해 보건데, 아마 에리봉 선생님은 전보다 조금은 행복해졌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말에는 ‘배때기가 불렀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꿈이 있다. 그리고 현실이 있다. 이 둘을 일치시키는 일은 집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호적인 상황 역시 갖춰질 필요가 있다.(…) 내게 글쓰기는 미래의 호출이 아니었다. 조숙한 동사 활용에 놀라고 감탄하는 어른들의 아래서 이루어진 놀이와 재주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었던 미래(이런 건 이율곡 같은 사람이나), 세월이 지나 때가 되면 도래할 그런 미래가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 정반대였다! 다른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사회적 가능성의 수준에 내 욕망을 맞춰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리 주어진 권리를, 나를 위해 만들어내고 그에 맞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항해-싸워야 했다. 나는 특권층에게는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일 길들 위에서 암중모색하며 나아갔다. 때로는 기존의 길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열려 있지 않은 것으로 판명 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270, 겸손하시네요. 저는 천재는 아니랍니다, 하는 것이. 한 편으론 내가 말이야 자수성가 대기만성형 인간이다 이말이야, 하고 으스대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조금 어릴 때 하고 다니던 짓이라 미러링당하니까 쪽팔리고 꼴보기 싫네.)

-하지만 왜 우리는 상이한 지배 양태에 대항해 이루어지는 상이한 전투 가운데 어떤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존재는 복수의 집합적 결정요인, 복수의 ‘정체성’ 복수의 예속화 양태들이 교차되는 곳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필 이것 아닌 저것을 정치적 관심의 중심축으로 지정해야 하는 것일까? (…) 만약 우리를 정치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 담론과 이론이라면, 이런저런 측면들을 간과하지 않게 해주는 담론과 이론, 즉 어떠한 억압의 차원도, 어떠한 지배의 층위도, 어떠한 열등성의 할당도, 모욕적 호명과 연계된 어떠한 수치심도 지각과 행동의 장 바깥에 내버려두지 않도록 해주는 담론과 이론을 구축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정치 무대에서 들어본 적 없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목소리와 새로운 문제들을 떠안는, 모든 새로운 운동을 환대할 채비를 갖추게 해주는 이론 말이다. (276, 교차성을 환기하며 여기에서도 등장하는 유니콘, 되겠냐. 희망 고문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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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5-07-31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아.. 이 책 리뷰를 써주시다니. 밤에 읽으러 다시 올게요

반유행열반인 2025-07-31 18:11   좋아요 1 | URL
크아...크레이지아케이드가 생각나네요. 읽기 예약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유수 2025-07-31 18:19   좋아요 1 | URL
다 읽고 말았어요. 가스레인지 앞에서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5-07-31 18:26   좋아요 1 | URL
이것이 그...가스라이터?와 가스리더?? 죄송합니다...

유수 2025-07-31 18:27   좋아요 1 | URL
왜 죄송하시죠. 뺏겨서 아쉽네요

반유행열반인 2025-07-31 18:28   좋아요 1 | URL
소중한 건 아무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웃음도 재치도 유수님 가슴 안에...
 
올빼미의 없음
배수아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20250729 배수아.
 
 책을 읽으면서 분노하다, 좌절하다, 던져버리고 싶다, 내탓을 하게 된다, 이런 감정을 느끼기는 흔하지 않다. 일 년에 백 권을 읽어도 그렇다. 누군가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혹은 자기가 먼저 공부하고 연구하고 탐구하고 정리한 것들을 친절하게 나눠주려고, 그것도 아니면 말맛이든 말과 글자의 놀이로 어떤 느낌을 전하거나 전하지 않더라도 내 마음대로 뭐라도 건져가라고, 아무튼 그러려고 글이란 걸 쓴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 듣고 그것 때문에 화가 날 지경이라면 그냥 그대로 덮어두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유해한 독서 아니겠니. 그런데 자꾸만 싸우는 기분으로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본다. 그냥 글자를 앞에 두고 꿈을 꾼다. 아마도 대낮에, 주로 움직이는 대중교통 안에서, 어떤 날에는 병원 대기실에서, 나는 남의 꿈을 꾸었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나와 주변의 산만함 때문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평온하고 조금 덥긴 하지만 귀마개를 살짝 귓구멍에 꽂으면 에어컨 실외기로 진동하는 저음 진동 소음도 차단할 수 있는 집에 있는 낮에 이걸 마저 읽겠다고 붙들고 앉았다가, 또 붙들고 누웠다가, 낮잠을 한숨 자고 눈을 떠서 갈증을 느끼다가,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의 끄트머리를 빨리 마주하고 싶어 안달하는 나는 불가해의 한국어로 쓰인 척 했지만 사실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오면서 조금씩 화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좌절한다. 나는 부족한데 누군가는 이걸 읽고서 화나 무력감 아닌 무언가를 느끼고 얻어냈을까? 해설이란 걸 쓰겠다고 나선 사람이 용감해 보이지만 그 해설도 무용한 것으로 보여서 그냥 술술 넘겨 버렸다. 파이트클럽에서 브래드피트였는지 에드워드 노튼이었는지 가장 싸우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에 간디,라고 답한 게 문득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2019년에 배수아 소설 ‘뱀과 물’을 읽고 아마도 이런 비슷한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었는데, 그걸 잊고 또 뭘 읽겠다고 덤벼들어서-아마도 유명한 사람들이 21세기 최고의 책 이런 거 꼽을 때 이 책이 등장하는 걸 보고 홀려서- 절판된 걸 보고 아 그럼 전자책을 사면 돼, 하고 사서 읽은 거 아니고 보고 화가 난 것이다. 음 나는 이걸 화가 났다는 것 말고는 다른 기분으로 설명을 못하겠다. 아이 씨발거. 왜 이런 걸 읽겠다고. 아니 왜 이런 걸 써 가지고 씨발년.
 
+밑줄 긋기(아니 근데 밑줄을 긋긴 그었어?)
-내가 일생 동안 두려워한 건 혼자가 되는 것과 글을 쓰지 못하는 것, 이 두 가지였답니다, 하고 화면 속의 남자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올빼미’ 중)
 
-종종 강하고 날카로운 인식 속에 있을 때면 특히, 그는 자살한 사람들의 글만을 신뢰했다. 자살하지 않은 사람은 인간의 절대적인 어떤 상태, 혹은 자유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리라. 그들은 어떤 해석으로든 타협자이며 공동의 방식의 선택자이기 때문이다. (‘북역’ 중. 언젠가 죽은 사람의 글만 읽을까, 그런 책의 독후감만 쓸까 잠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자기 책 리뷰 찾아와서 괜히 긁히거나 좋아요 누르거나 따지거나 하는 사람이 그 글 뒤에 있다는 걸 새삼 느끼고부터 그랬다가 에라이 읽었으니까 굳이 읽어줬으니까 내마음이다, 가 되어 버렸지만…악성독후가머의 탄생)
 
-어느덧 그의 손바닥 아래에 마르고 딱딱한 여인의 손등이 있었다. 작고도 뜨거운 손등. 그것은 그의 손바닥 안으로 날아온 한 마리 새. 딱딱한 부리와 짧고 부드러운 털로 덮인 뜨거운 배와 호박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평면적인 유리 눈동자를 가진. 그렇게 그들의 손은 산맥과 들판과 돌투성이 사막을 넘었다. 시간과 그 너머 모든 차원의 끝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의 손은 모세의 갈대숲과 이승과 저승의 해협 위를 날았다. 땅의 이쪽은 여인의 드러낸 젖가슴이었고 땅의 저쪽에는 그 젖가슴이 꾸는 꿈의 장면들이 펼쳐졌다. 그는 눈을 뜨고 눈앞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들의 손바닥으로 덮인 세상은 모두 어둠일 뿐이었다.
 
-성인이 되어 여인들을 가까이 했을 때, 그는 여인들 자체가 아니라 그런 내밀한 관계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독특한 감정의 인식을 더욱 즐겼다. 오랜 독서로 세상을 경험한 자의 습관이었다. 쾌락이나 관능조차도 단순한 향유뿐 아니라 특별한 노래를 불러일으키는 귀한 대상일 수 있기에 더욱 소중했던 것이다.
 
-나는 꿈이 상상과 문학이라고 굳게 믿는 반면, 너에게 꿈은 자신의 누설이자 철저한 분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너는, 내가 단지 나 자신의 꿈으로만 이루어진 책을 쓰고 싶다고 하자 즉시 조목조목 근거를 들며 문학작품으로서의 형상화에 대한, 그리고 작가 개인의 섣부른 심리노출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가, 내가 마음 상해하자 다음 메일에서 훨씬 더 부드러운 어조로 그 비판을 완화시켰다. (‘올빼미의 없음’중)
 
-‘한 여자가 노벨상 수상자이든 아니면 상점의 판매원이든 간에, 육신을 내세우고 시장에 등장해야 하는 입장이란 점은 동일하며, 나이 먹음에 따라 그 가치가 무섭게 하락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페터 한트케와 나는 오스트리아가 낳은 두 개의 상극이다. 한트케는 우리의 일상에서 영감을 추구하고, 그와 반대로 나는 그 모든 것이 한낱 재로 사라질 것임을 이미 알고 있을 뿐이다.’ ‘삶과 글쓰기, 이 두 가지는 결코 병행하지 않는다.’(그럼 죽어…)
 
-모든 직업은 우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직업은 우울하며, 필연적인 우울을 유발한다. 은퇴와 죽음 말고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울. 예를 들어 우리가 알고 있는 이들, 사무원, 부동산업자, 철도승무원, 컴퓨터 판매원, 정원사, 화가, 새몰이꾼, 길거리 광대, 웃음의 선동가, 나이 든 배우, 뚱뚱한 배를 가진 경찰, 의사, 교회 문지기, 박물관 매표원, 공업학교 교사, 실업급여 신청자 그리고 ‘아직은 내가 아니야’ 혹은 ‘더이상 내가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구직자들까지도. 자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운명적으로 음침하며 회색인지 그들이 알고 있다면. (‘빠리 거리의 점잖은 입맞춤’, 그냥 모든 인간은 우울하다고 하지 왜 굳이 열거를…굳이 열거하는 게 글이긴 하다만)
 
-서점에서. 어떤 낯선 사람이 스쳐지나가면서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것은 내게 오래 남아 있을 거예요. 얼마나 오래? 영원에 사흘을 더한 만큼. 그 사람은 원숭이처럼 구부정한 등을 보이며 서가 사이로 멀어져갔다. (유통기한 만년 같은 건가)
 
-속삭임: 너의 생은 네가 모르는 것과 네가 망각한 것으로 이루어졌다. 네가 살지 않은 것들로, 네 외부의 잠으로. 너는 네가 경험한 것을 낯설어하며 꿈꾸고 상상한다. 그렇게 너의 생은 너를 향해 나아간다. 모든 결정된 것에서부터 결정되지 않은 낮잠 속 하나의 표정을 향해.
 
-이름도 다르고 사진도 다르다면, 즉 당신이…...부인이 아니라면, 그리고 이 사진도 당신의 것이 아니라면, 뭔가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겠군요. 하지만 이런 행정적인 문제는, 더구나 지금처럼 당신이 외국에 있을 때는,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 보통일 겁니다. 상당히,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게 기나긴 시간이. (카프카 따라하지 마)
 
-깨끗하게 빨아 다림질한 잠옷과 어젯밤에 마시다 만 식은 차 냄새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잠의 냄새가 침상에 고여 있었다. 그런 냄새 속에서 김씨의 부인은 누운 채 천천히 글자를 써 나간다.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중)
 
-그러나 절망은…...그것은 피부가 없는 몸이었다. 일부러 자극하지 않아도 우주 자체가 고통이 된다. 그것은 마비된 느낌과 호흡, 사무치는 무력한 갈망이 지배하는 검은 회화였다. 육지로 올려진 물고기가 인간의 언어를 말할 줄 알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것에 대해서 알려주었으리라. 어쩌면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그것에 대해, 하고 김씨의 부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물고기는 말을 할 줄 모를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할 테지.
(그게 선생님께서 제게 한 짓이고 저한테 한 지도 모를 짓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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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다른 아이들 1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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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7 앤드루 솔로몬.

모든 아이들은 부모와 다르다. 내가 낳은 아이들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나와 닮은 점을 찾아볼 때가 있는데, 말투나 유머감각, 반사회성, 급한 성질머리 같이 시각적 정보로는 찾기 힘든 뭔가가 비슷하다는 느낌만 가끔 받고 피지컬은 영락없이 곁의 사람을 따왔다. 그게 아쉬운 건 아니고 어쩔 수 없지, 그냥 그런 거지,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은 사람은 인간이다, 처럼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지만 목차를 보면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다르다는 건 무엇일까. 어느 정도 같은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다르다는 말이 알맞은 것 같다. 나는 저 코로나 바이러스와 달라, 하고 말하면 다들 뭔소리 하냐 할 것이다.

만7세 작은어린이는 아직 용변 뒤처리를 할 줄 몰라서 다 눴어요! 하고 외치면 쫓아가서 엉덩이를 닦아주며 어휴 몇 살 부터 스스로 닦을 거냐, 하면 아이는 몰라요,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궁금함을 가장한 ‘빨리 커다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조차 특권이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입으로 섭식도 불가능한 아이들, 성인에 가까운 나이이거나 이미 성인인데도 배설물로 온 집안을 망쳐 놓고 부모에게 상해를 가하는 아이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그렇지 않다고 안도하기보다는, 어쩌면 우리 중 누구나 저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불안쟁이의 습성이다.

저자는 자신이 동성애자이자 우울증 환자로 지내 본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과 불화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부모가 바라던 자식의 상과 어긋난 상황들을 풀어간다. 대부분의 사례가 저자와 여러 가정 구성원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청각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중증) 장애 아동기(그리고 성인기까지) 자녀를 돌보며 좌절하거나 자부심 느끼거나 직접 아이를 도맡거나 (그러면서 자신들이 없어진 이후의 자녀 미래를 걱정하거나) 위탁 가정, 시설에 보내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들, 아이를 일찍 떠나 보낸 부모들, 상황도 과정도 결말도 다양했다.

내가 일하는 곳에 자폐 스펙트럼의 아이들이 여럿 있는데, 아이들 별로 어느 한 가지 용어로 묶기엔 너무도 다양한 특성이 있다. 한시라도 성인 보호자가 보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남을 공격하거나 무서운 말을 하거나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아이부터, 그저 조용히 앉아 있는(그렇지만 대부분의 가르치는 말을 못 알아 듣는) 아이, 상동 행동을 반복하거나, 엉뚱한 말이나 정확한 대답을 해놓고도 칭찬을 하든 지적을 하든 “제가 말 안 했는데요.” 하는 아이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자폐증 챕터는 내가 그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통합 학급에 함께 할 수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고기능 장애라고 하는, 일상 생활의 최소한의 능력은 갖춘 아이들이어서 여기까지 익히는데 아이와 부모들이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을지,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마냥 품을 수도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일지 짐작만 할 뿐 (가족이 비슷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영원히 난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정신분열증으로 번역된 조현병 챕터는 내 아빠가 겪은 질환이기도 하고, 내게도 유전적 영향이 있지 않을지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부모가 그러는 것도 환장할 노릇이지만, 그게 자녀의 삶에 많은 균열과 회복 어려운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 아이가 그렇게 망상에 시달리고 목소리를 듣고 하는 것도 큰 고통일 것이라는 걸 사례들을 보면서 짐작해 보았다. 나도 공부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환청 환시 같은 게 있다 말다 해서 (망한) 공부를 마치자마자 스스로 조기 개입이다! 하고 약물 치료를 시작했고, 적절해진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 ‘마음의 오류들’이나 ‘뇌가 지어낸 세계’ 같은 뇌 책도 주워보고, 다양한 사례 모은 이런 책도 보고 하는 게 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조금이나마 일찍 알아차리고 할 수 있는 뭔가를 하거나, 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체념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주석 빼고도 700여페이지 넘는 책이라 한 달 가까이 읽었지만 다양한 삶을 들여다 보는 건 (미안하지만 어째요)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2권에서는 또 독해 보이는 주제들(신동, 강간, 범죄, 트랜스젠더)이 기다리고 있어서...다양성에 관한 탐구는 평생해도 끝도 없겠다 싶네요.

+밑줄 긋기
-모든 양육은 두 가지 행위를 포함한다. 첫째는 자녀를 변화시키는 행위다. 우리는 자녀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예의를 가르치며, 도덕적 가치관을 심어준다. 둘째는 자녀를 지지하는 행위다. 우리는 아이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자긍심을 느끼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 (13)

-내가 가진 충동의 상당 부분이 남자답지 않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안 까닭에 나는 자기계발에 더욱 정진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말해 보라는 선생님 말씀에 다른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이스크림이나 햄버거, 프렌치토스트라고 말할 때 나는 이스트 27번가의 아르메니아 레스토랑에서 주문했던 카이마크 크림을 곁들인 에크멕 카다이프 빵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29, 그거 참 맛있겠는데.)

-자녀가 행복하지만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보다 불행하더라도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것을 더 바랄 정도로 우리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수평적 정체성을 증오한다. (44)

-나에게는 내가 스스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내 미래의 모든 복잡한 가능성을 숙고하면서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얻은 이 만족은 일반적으로 내적 평화가 외적 평화에 달려있다는 명백한 진실을 보여준다. (48)

-나는 동성애를 내 안에 가둠으로써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으며, 밖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간신히 구원받았다. (49)

-어빙 고프먼은 그의 훌륭한 저서 ‘스티그마’에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주변인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진정성과 정치적 믿음을 갖도록 해준 어떤 요소에 대해서 긍지를 갖고 이를 천명할 때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사회 역사가 수전 버치는 이러한 행위를 가리켜서 ‘사회화의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어떤 집단을 동화시키려는 사회적인 시도는 흔히 그 집단이 그들의 특이성에 대해 보다 큰 목소리를 내도록 유도한다. (63)

-푸코 본인도 주장했듯이 만약 ‘인생이 실수를 수용할 수 있는 어떤 것’이고 실수 자체가 ‘인간의 사고와 역사를 구성하는 근간’이라면, 실수를 금지하는 행위는 진화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실수를 통해 태고의 진흙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7)

-어떤 면에서는 거의 역설에 가까운 이 같은 주장은 라인홀드 니부어의 ‘평온을 위한 기도문’에 등장하는 마지막 구절이자 재활 운동의 신조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더불어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72)

-‘상호 교차성’은 다양한 유형의 억압이 서로를 먹여 살린다는, 이를테면 인종 차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성차별 문제를 없앨 수 없다는 이론이다.(…)“어떤 집단의 편견을 그대로 용인할 경우 우리는 다른 모든 집단에 대해서도 편견을 그대로 용인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내 동생이든 다른 누구든 상관없어요. 나는 어떤 사람을 배제하는 조건이 전제된 인간관계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싸움을 하고 있으며, 모두 똑같은 자유를 가졌습니다.” (90-91)

-인권 운동가가 되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사회 변화를 촉진하고자 행동에 나서지만 그 같은 욕구가 항상 순수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인권 운동가가 됨으로써 일종의 구원을 얻는다. 가정과 자식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인권 운동가로서의 행동을 통해 슬픔을 분산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부모는 자식에게서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부분을 칭송한다. 부모 스스로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믿음이 행동을 이끌어 내듯이 행동이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우리의 사랑을 확대할 수 있다.

-시나리오 작가 더그 라이트의 말에 따르면, 가족이란 가장 깊은 상처를 입히고, 그 상처를 가장 세심하게 치료해 주는 존재다. 부모의 간섭을 피할 도피처란 없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부모님의 간섭을 고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또 사랑이라 부를 줄 알게 되었다. 나는 분노가 가득한 상태로 연구를 시작해서 관대해진 상태로 끝났다. 나에 대한 이해로 출발해서 부모님에 대한 이해로 끝이 났다. 불행이란 누군가를 끊임없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행복은 용서로 나아가는 동기로 작용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나를 용서했으며 나 또한 사랑으로 부모님을 용서했다. (92)

-한번은 불교학자가 내게 많은 서양 사람들이 열반이란 번뇌가 없어졌을 때 도달할 수 있으며 영원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잘못 안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그런 더 없는 행복은 과거의 아픔에 의해서 항상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따라서 불완전해질 것이다. 열반이란 미래의 환희를 고대할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시절을 담담하게 되돌아보고 그 안에서 기쁨의 씨앗을 찾을 때 마침내 발견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되돌아보면 그것은 분명 행복이다. (94)

-“아버지는 내게 늘 말씀하셨어요. ‘일단 집 밖에 나가면 절대로 가난한 소녀처럼 보이지 말아야 해. 자신이 아무리 쓰레기처럼 느껴지더라도 절대로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해야 한단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112, 청각 장애인 아버지 월터가 청각 장애를 가진 딸 로즈에게 강조하던 말)

-‘나는 나 자신이 농인 방식에 충분히 익숙하고 농문화에 동참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도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능력 때문에 때때로 내게는 건청인 마인드라는, 진정한 농인이 아님을 암시하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200)

-스윌러는 ‘하지만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알고 싶었다. 우리 눈으로 바깥세상을 보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라고 썼다. 몇 년 뒤 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설명과 함께 짧은 자전적인 글을 올렸다. ‘2005년에 조시라는 사람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자신이 ASL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의 분열을 조장하는 방어적인 태도와 불신을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의 동질성으로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고,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다.’ (201)

-서아프리카의 다양한 부족 언어와 전설의 사멸을 언급하면서 말리의 민족학자 아마도우 함파테 바는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서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금 농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과거에 퀘이커교도나 아메리카 원주민, 모든 종족과 국가가 겪었던 문제다. 우리는 문화의 소각로에서 살고 있다. 21세기 말에 이르면 현재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6000여 가지의 언어 중 절반이 소멸될 거라고 한다. 바벨탑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소멸과 함께 수많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도 사라질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언어학자 니컬러스 에번스는 인간에 대해 ‘모든 계층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본질적으로 다양한 의사소통 체계를 가진 유일한 종족’이라고 지적하면서 ‘다양성이 중시되는 언어와 인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하루속히 찾아야 한다고 썼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농인은 수많은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들의 언어는 다른 수많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결국 멸종될 것이다. (209-210)

-나는 마치 ‘아, 우리 아이는 그럭저럭 감당이라도 되지만 당신의 아이는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겠군요’라고 말하듯이 무척 측은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어요. 그런데 그녀가 정확히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230)

-그녀는 치료 전문가를 구하고, 항우울증 약물 치료도 받았으며,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항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 ‘치료를 받으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평범한 삶과 무척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음을 깨달았어요. 어느 순간 ’와우! 이런 게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255, 이런 유사 구절을 여러 책이나 글에서 매번 밑줄 쳤던 듯한 기분. 느낌 아니까)

-‘나는 태어나면서 줄곧 교회에 다녔고 지금도 다니고 있어요. 한참 화가 나 있던 시기에는 내가 기독교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100퍼센트의 사랑과 권능을 가졌음에도 사람들이 썩어서 곪아터지도록, 개개인이 이런 고통을 안고 태어나도록 놔두는 그런 꼭두각시 조종자는 없을 것 같았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테일러의 화도 풀렸다.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수긍해 줄 수 있을 뿐이에요. (…)’ (272)

-‘나는 내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어요. 물론 그 당시에는 내게 선택권이 없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선택권이 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이 아이가 생긴 것이 단순히 내게 닥친 어떤 사건이 아니라 내가 내린 긍정적인 결정의 결과라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293)

-키키는 화학요법을 시작하기 전에 크리시가 머리를 삭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직접 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크리시의 삭발이 끝나자 자신도 삭발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크리시가 만류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키키가 말했다. ‘엄마는 내 수술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그 일 때문에 엄마가 암에 걸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면서 오랫동안 지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요. 그래서 나도 엄마처럼 머리를 깎아서 엄마 혼자만 다르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어요.’ (306)

-그럼에도 우리는 뇌의 어느 부분에서 해당 증후군을 유발하는 작용이 일어나는지, 왜 발생하는지, 무엇이 기폭제 역할을 하는지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게다가 외적인 징후 말고는 자폐 여부를 판단할 방법도 없다. 노벨상 수상자 에릭 캔들 교수는 ‘자폐증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의 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인간의 뇌를 이해해야만 비로소 자폐증을 이해할 거라는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400)

-영국의 정신분석가 줄리엣 미첼의 논평에 따르면, ‘극단적인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해서 야기되는 격렬한 감정에 스스로 숨이 막힌다. 하지만 당신이라는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상대방의 마음속에 당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라질 수조차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인식이 당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는 심리적인 등가를 보여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427)

-하지만 보다 그럴듯한 현실은 정신분열증이 알츠하이머병처럼 무언가 더해지는 것이 아닌 대체와 결실의 질병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전까지 알던 사람을 가면으로 덮어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부를 제거하는 것이다. (529, 요즘은 조현병이란 용어를 쓰던데 번역을 정신분열증으로 한 이유가 궁금했다. 둘이 같은 질환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더 읽어보면 알겠지.)

-널리 알려진 대로 정신분열증 환자는 그들이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라고 잘못 인지하는 목소리들이 존재하는 다른 세상에 빠져든다. 자신의 내면에서 생성된 이런 관계가 진짜 외부 세계의 그 어떤 교류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중요하게 된다. 이 내면의 목소리는 일반적으로 잔인하고, 특이하고, 부적절한 행동을 부추긴다. 이런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대체로 겁에 질려 있고 거의 언제나 피해망상적인 태도를 보인다. 때때로 환각은 환영 뿐 아니라 심지어 냄새로도 나타나고, 실질적인 위협으로 가득한 세상을 지옥으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위협 때문에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 많은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이상하리만치 망상에 집착한다. 희미해지는 실제 세상은 그들을 떠날 수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는 유해하고 고독한 행성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지독한 고독 속으로 몰아 넣는다. 정신분열증을 앓는 사람들 중 5~13퍼센트가 자살한다. (…) 꿈을 현실로 인지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자는 동안에 찾아온 공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 날을 맞이할 때 황홀한 안도감을 느낀다. 정신병은 자아를 현실과 구분하는 개인의 능력을 저해하는 주된 요소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우에는 상상과 현실을 가로막은 막의 투과성이 너무 좋아서 생각을 하는 것과 경험을 하는 것이 특별히 다르지 않다. (530-531. 정신분열증=조현병 맞는데...)

-한번은 길가에 있는 밴을 가리키면서 그 차에 FBI의 특수 장비가 실려 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간호사가 자신을 독살하려고 한다고 생각해서 약도 먹지 않으려고 했어요. 해리가 입원한 뒤에 그 아이의 아파트에 간 적이 있었는데 집 안이 완전히 혼돈 그 자체였어요. 마치 그 아이의 머릿속을 보는 것 같았죠.(…) 한동안은 모든 게 순조로웠는데 어느 날 자기 아파트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었다고 말했어요. 그동안 복용하던 약들 중 하나를 끊은 상태였죠. (534-535, 동서고금 막론 조현병의 증상에 길가의 차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생각,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생각(독살 망상도 흔함), 도청 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자주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난 그걸 열두살에 봤어요...)

-(어디서나 불쑥 등장하시는 에릭 캔들 박사님이 알아낸 것에 따르면) 대다수 질병들은 하나의 유전자가 지속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에 의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유전자의 스위치를 내리면 해당 증상도 사라진다. 하지만 정신분열증은 비록 일단의 유전자 때문에 발병할 수는 있지만 해당 유전자의 스위치를 내려도 증상이 완화되지 않는다. 일단 발병하면 이후로는 스위치를 내려도 저절로 작동하는 것이다. (549-550)

-자폐증에서는 조기 행동 개입이 자폐 증상의 발현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를테면 조기 행동 개입을 통한 훈련이 뇌의 실질적인 발달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듯 보인다. 정신분열증의 경우에도 조기 개입이, 그래 봤자 생후 18개월이 아닌 만 18세에 가깝지만, 비슷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다. 예일 대학 정신의학과 교수 토머스 맥글라샨은 정신병 증세가 처음 나타났을 때 조기 진단과 약물 치료를 실시함으로써, 만약 해당 조치가 없다면 정신분열증으로 발전하는 특징이 있는 뇌 변성을 실질적으로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치료의 불완전함을 고려하여 오늘날에는 훨씬 더 조기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즉 정신병이 발병하기 이전인 전구증상 단계에서 예방하려는 움직임이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다. 환자들은 리버먼이 ‘험프티 덤프티 상황’이라고 부르는,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 도구로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을 고치기보다 정신분열증에 의한 병적인 상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편이 더 쉬운’ 상황에 있다.
(…) 전문가들은 전구증상 단계임을 암시하는 일단의 증상들을 정리했는데 의심, 특이하고 불가사의한 또는 기이한 사고방식, 행동 방식의 극단적인 변화, 기능 감소, 학교나 직장 생활에서 보이는 무능력 등이다. 하지만 이런 증상들 대부분이 평범한 사춘기 증상이기도 하다는 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568-569, 저도 그래서 까딱하면 정신건강의학과에 달려가기로 했습니다… 헤까닥하면 우리 선생님 말씀대로 보호입원 요청하고 약물 치료 전에 뇌전기자극술?이런 거를 해서 리부팅 먼저 해달라고...여기 써 놨다 식구들아...)

-‘...정신적 인지 행동 치료도 약물 치료만큼이나 효과가 있었다. 어떤 치료를 선택하든 정신병 환자들로 하여금 현실 세계에 집중하고, 교류하고, 정신병 증상이 겉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맞서게 할 수만 있다면, 정신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어서 극심한 경우에만 발현되도록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뇌에서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가 유실되지 않도록 하는 데 해당 치료가 일조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정신분열증에 걸릴 위험이 높은 사람의 가족들은 어떤 점을 주의해서 관찰해야 하는지 배워야 하고, 의사들 또한 불과 며칠 만에 정신병이 급격하게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환자들을 수시로 만나야 한다. 정신병이 발병하기 전에 향정신병 약을 복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안과 우울증에 대해서는 공격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옳다. (570, 다들 병원을 두려워하지 말아요...선빵이 최고의 방어임)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영혼 말고는 그 어떤 남자도 나를 임신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쓴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나는 예수그리스도가 2000개비의 담배를 나누어 주면서 책임감을 느꼈던 것과 똑같은 책임감을 느껴요. 예수그리스도가 나누어 준 것은 빵이 담긴 냄비 몇 개가 아니었어요. 내 생각에는 담배였어요. 그래서 그녀가 나와 아버지의 영혼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을 계속해서 죽이는 거예요. 그 딸들 중 한 명은 나보다 열 살이 많아요. 다른 한 명에게는 음료수를 사 먹도록 1달러 25센트를 주었죠. 나는 여자가 없이 아이를 낳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은 동성애자예요. 나는 그들이 하나같이 게이라고 생각해요.”(577, 조현병 환자인 재키에게 저자가 약물치료에 대해 묻자 한 말. 저렇게 맥락이 이어지는 듯 비논리적인 게 극단으로 가면 나는 왜 힙하게 느껴지는 걸까...빌런과 정신병자들은 나와 나혼자만의 친밀감, 인류애로 묶여 있다…)

-나는 샬럿에게 “정말 정신없이 바쁘겠어요”라고 위로를 건넸다.
그녀가 말했다. “때때로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579)

-하지만 1도 화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3도 화상으로 인한 고통을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울증은 일반적인 감정의 극단적인 형태다. 하지만 정신분열증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실존주의적인 독일인 정신과 의사 칼 야스퍼스 역시 정신병과 정상적인 사고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과 같은 차이’를 확인했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표현할 능력이 없으며, 설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언어를 이용해서 풀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비유를 통해서만 정신병의 끔찍함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618)

-조울증 장애가 있는 작가 앤디 베어먼의 설명에 따르면 “정신 질환은 그 사람과 분리시켜 치료될 수 없다. 정신 질환과 환자가 불가분의 관계인 까닭이다. 방금 나는 ‘정신 질환은 어디서 끝나고 어디부터가 나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제시했다. 내 경우에 정신 질환과 나는 하나다. 적과 친구가 된 셈이다. 내가 치료에 성공한 이유는 나와 내 장애를 둘 다 고려하고, 그 둘 사이에 따로 구분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약물 반응에 따라 소급해서 판단하는 편법을 제시한다. 예컨대 만약 데파코트를 복용하고 상태가 호전되었다면 그 사람은 조울증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자이프렉사를 먹고 상태가 확 나아졌다면 아마도 정신분열증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아무리 유용할지라도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행위는 여전히 모순적일 뿐 아니라 입증되지 않은 이론에 매달리고, 정신 질환에서 불분명한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에 집착하는 꼴이다. 정신 질환의 본질에 대한 환원주의적인 사고-정신 질환을 화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는 연구비를 지원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그에 기초한 연구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직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정신분열증은 어떤 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다. 즉, 일단 정신분열증이 발병하면 정신분열증이 곧 환자 자신이 되는 것이다. (619-620)

-아무도 샘 피셔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그가 서른 세살 때 한 정신과 의사를 통해서였다. 그 의사는 그가 정신분열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다른 임상의는 그를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진단했다. 샘은 확실히 감정 장애가 있고, 주기적인 격심한 우울증과 이따금씩 경조증을 경험하며, 정신병은 아니지만 과도한 자존감과 자만심을 느낀다. 그의 기만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은 그에게 경계성 인격 장애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불안증과 공포증이 있으며, 지나치게 강박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성격장애, 장기간 계속되어 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을 보인다. 요컨대 그는 마치 갈라쇼처럼 하나의 뇌에 집약된 다수의 완전한 정신병 증상을 보여 준다. 그가 말했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너무 이상해서 그래요.” (620-621)

-극단적이지만 일정한 스트레스는 상대적으로 덜 극단적이지만 일정치 않은 스트레스보다 대처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다운증후군 자녀의 부모 노릇이 정신분열증이나 자폐증 자녀의 부모 노릇보다 더 수월한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다. 즉 다운증후군 자녀의 부모는 그날그날 자신이 누구를 상대하는지 알고, 부모에 대한 요구도 비교적 변화가 적은 편이다. 반면에 정신분열증 자녀의 부모는 자신이 장차 어떤 괴상함과 부닥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자폐증 자녀의 부모는 어떤 파국의 순간이 들이닥칠지 예측할 수 없다. (652)

-공감과 연민은 당신이 여전히 당신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의미 있는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할 때 최선의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상태를, 즉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생 경로를 결정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가 ‘내적 통제 소재’이며,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 외부 환경과 사건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외적 통제 소재’가 있다. 내적 통제 소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 방식과 우선순위를 적극적으로 일치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흔히 장애 아동의 부모들은 그들에게 통제권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상황이 통제된다는 느낌을 얻는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보다 훨씬 커다란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이다. 가장 보편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종교가 있지만 다른 방법도 많다. 신의 존재나 인간의 선의지, 정의 등을 믿을 수도 있으며 단순히 사랑을 믿을 수도 있다. (661)

-사랑은 항상 변한다. 사랑은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떠돌며, 평생에 걸쳐 서서히 발전하는 일종의 비즈니스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알아 가면서 사랑하는 방식도 변화한다.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알아 가면서 사랑하는 방식도 변화한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인권 운동가들은 정상적인 키와 성적인 성숙함 등 애슐리가 잃은 것들에 분노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하나같이 자연스러운 생명 주기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단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육체적 성장과 성적인 성숙을 통해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성장 억제와 자궁 절제술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비교하려면 정교한 도덕적 고등 계산법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상당한 인지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애슐리 치료법을 행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695)

-‘둘로 찢긴’이라는 저서에서 영국인 정신분석가 로지카 파커는 오늘날처럼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사회에서도 어머니의 모순성이 추한 비밀로 간주된다고 개탄한다. 대다수 어머니들은 가끔씩 그들을 찾아오는, 자녀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살인이나 다름없는 열망을 다스리면서 살아간다. 파커는 양육 행위가 어머니에게 두 가지 충동을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무조건 참아 내려는 충동과 밀어내려는 충동이다. 훌륭한 어머니라면 자신을 잘 보살피고 사랑해야 하지만 자식을 숨 막히게 하거나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시불 거 어쩌라고) 어머니에게 양육은 이를테면 파커가 ‘참견의 스킬라 바위와 무시의 카리브디스’라고 부르는 것 사이를 항해하는 행위다. 파커는 어머니와 자식 간의 완벽한 상호 작용과 동시성이라는 감상적인 생각이 ‘어머니로서의 의무에 대한 일종의 슬픔-기분 좋은 완전한 일체감이 언제나 도달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이는 지속적이고 가벼운 후회의 상태-을 유발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완벽이란 수평선 같은 덕목이며, 수평선에 다가가려는 노력은 우리와 수평선 사이의 거리가 결코 줄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718-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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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소설 전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
루쉰 지음, 김시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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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5 루쉰.

즐거운 여름 휴가, 어떻게 보내고 있냐면, 아직 방학 시작도 안 한(오늘 방학식) 작은어린이를 학교 정문까지 바래다 주고, 적당히 걷는다.(공원가서 연꽃도 보고, 산에 가서 맨발 걷기족도 보고.) 그러고 집에 돌아와서 큰어린이와 오전11시 집극장, 박찬욱관-오늘이 2일째였다. 어제는 ‘박쥐’를 보는데, 내가 무척 좋아하는 영화인데(소설판 박쥐랑 테레즈 라캥도 봄) 생각보다 19금 장면이 많아서 중2 앞에서 뻘쭘했다. 어, 왜 이렇게 야한 거 길게 나옴..박찬욱은 꼭 여배우한테 저런 푸른색 계열 원피스 입히더라, 하고 딴 소리...(아이 왈: 나무위키에서 봤는데 감독이 파랑색 싫어한다는데?...나무위키 우등생. 열공.) 그런데 원래 이 감독은 19금을 넣어도 꼭 이유를 갖다 붙인단다, 이러고 얼버무리면서 잘 봤다. 오늘은 어린이한테 픽하랬더니 ’올드보이‘(이것도 원작이라 하는 만화책 ’올드보이‘까지 다 보고 영화 대사를 줄줄 외울만큼 봤던 것…)를 골라서… 마무리에서 ’아빠와 딸이 보면 어색해지는 영화 1위‘라고 해주었다.

더운 여름엔 책...도 좋지만 거실에 에어컨 틀어놓고 30분쯤 실내자전거 타면서 영화보다가 나머지 한시간 반 정도는 그냥 멀거니 보는 것도 생각보다 간편하고 즐거워서, 그러고나서 같이 메밀소바나 물냉면 같은 걸 (레토르트로) 해 먹고, 과일이나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를 후식으로 먹으며 식당과 카페 간 놀이를 한다. 중학생은 껄껄 그저 만족하는 것이다. 집순이라서 밖에 안 나가도 대충 비슷하게 다 된다고 긍정적인 반응이다. 육아조차 가성비…

나의 어린이는 저렇게 아직 아기 같으면서도 엄마랑 19금 영화를 단란하게 보며 평온한 나쯔야스미를 보내고 있는데…(듀오링고로 일본어만 하는 오덕 보컬로이드 팬 여중생) 나는 저 나이에 뭐했더라… 친구도 없고 세상에 불만은 많고 공부는 다른 할 게 없어서 열심히 했던 것 같다. 패닉 엄청 좋아해서 엄마랑 같이 콘서트 갔던 기억도 난다. 맨날 테이프로 노래 틀어놓고 따라 부르고… 자우림도 좋아해서 우중충하던 자우림 1,2집은 꽤 많이 듣고 따라 불렀었다. 3집부터 인기 엄청 좋아져서 (이렇게 멋진! 파란 하늘 위를-이게 노래방 여러 칸에 쟁쟁) 그때부턴 퉤퉤 하고 안 들었다.

그런 반골 중학생 무렵, 범우사르비아문고판으로 읽은 ‘아큐정전’ 소설집에서 늦도록 기억에 남은 건 ‘광인일기’라는 소설이었다. 루쉰이 발표한 첫 소설인 건 이번에 다시 보고 알았다. 왜 이 소설이 기억에 남았나 했더니, 조현병이나 피해망상 증상이 내가 그보다 몇 년 전부터 그 무렵까지 지켜본 아빠랑 엄청 비슷했기 때문이다. 또 내가 어릴 때 밖에 나가 놀다 놀라서 들어와서 ‘엄마! 개가 나를 잡아 먹으려고 해요. 나를 보고 혀를 날름거렸어요.‘했다는 엄마의 육아일기를 (훔쳐)봤던 것과 겹치는 점 있어서 조금 웃기기도 했다. 동네 늙은이(개주인) 자오궤이씨는 심지어 나랑 이름도 비슷하구나… 루쉰 본명이 주수인인 것도 맨 뒤 연표 보고서 알았다.

해설에서 루쉰이 한이 많아서 막판에 병 앓고 죽기 전까지 한풀이 하듯 고사 새로 쓴 글로 이런저런 풍자 소설 남기고 죽었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알았던 것 같은데 이젠 잊어버렸다. 불행한 사람들이 글을 쓰고, 글을 써서 불행한지도 모르겠다. 화가 많고 세상이 삐뚜루인 걸 보면 으으 부들부들 이놈의 그릇된 인간들, 망가진 세계, 하면서 손끝에서 자꾸 뭐가 나오는 것 같다.

초반에 쓴 소설은 나름 그간 읽은 다른 문학작품 흉내도 좀 내놔서 읽어줄 만 한데, 상태 안 좋던 때 낸 두번째 소설집이나, 말년에 내놓은 고사신전 같은 중국 유명한 사람 비빔밥 같은 건 재미도 없고 뭔말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니, 내 말 들은 친구가 루쉰은 소설도 프로파간다(이렇게 말하진 않았지만)처럼 도구로 쓴 거라 그 당시 일기나 평전이나 산문이나 뭐 그런 거랑 같이 봐야 의도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거라고 했다. 아...그럼 굳이 그렇게 안 볼래...작품 외적 배경 지식을 갖춰야 하는 문학이란 귀찮고 구차하다… 사회정의 비분강개 하던 여중생은 이제 됐고, 몰라, 내일은 주말이니 건전한 극장인 척(19금 영화 보여주면 곁의 사람이 싫어함) 진격의 거인(아 이건 왜 되는데??)이나 단체로 보고, 다음 주 11시 극장에는 ’아가씨‘ 확장판(당연히 핑거스미스도 읽었고...박찬욱 영화 속에서 사드의 향이 느껴진 거야… 이런 냄새 맡은 내가 이상한 건가)을 보고 같이 또 점심을 맛있게 해 먹어야 겠다.

아, 그래서 루쉰은… 사는게 참 퍽퍽했겠구나… 나도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는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화 덜 내는 약 같은 거 먹고 잘 못 쓰고 덜 쓰더라도 현세의 행복을 추구하기로 한다. 세상에 남겨진 울분과 한은 너무 많으니 그거나 야금야금 좇아 읽으며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루쉰/필립 로스/밀란 쿤데라/프리모 레비/기타 등등의 인간도 있었는데… 하고 위로나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위로 받자고 전집을 읽자니 조금 오래오래 자학적인 7월이었던 것이다...

+밑줄 긋기
-나는 전날에 의원이 떠들어 대며 처방하던 것과 현재 알게 된 것을 비교하여 보면서 점차 한의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종의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동시에 속임을 당한 병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동정이 심히 일었다. (11, ’자서‘ 중. 중국 사람 루쉰이 한의사 깐다…)

-당시 나는 정신을 고치는 데 있어 최선으로 당연히 문예를 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리하여 문예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다. (12, 의학 공부 포기하고 문학으로 계몽하겠다는 루쉰 선생….스테이!!!)

-나는 그들의 말 속에 온통 독이 가득 들어 있고, 웃음 속에는 온통 칼이 들어 있으며, 그들의 이빨은 온통 하얗게 반짝반짝 줄지어 있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잡아먹는 연장이다. (22, ‘광인일기’ 중)

-그저께 자오씨네 개가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았는데 그놈도 함께 모의하기로 벌써부터 약속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7)

-“옛날부터 그래 왔다고 해서 옳은 거요?”
“댁과 그런 도리를 따지고 싶지 않아요. 어떻든 그런 말은 하면 안 돼요. 댁이 말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29)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113, ‘고향’ 중)


-아큐는 형식상으로는 패배했다. 놈들에게 노란 변발을 낚아채여, 벽에 머리를 네댓 번이나 찧었다. 건달들은 그렇게 하고 나서야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가는 것이었다. 아큐는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서 ’내가 자식놈에게 얻어맞은 걸로 치지. 요즘 세상은 정말 돼먹지 않았어…‘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는 그도 만족해서 의기양양해 가는 것이었다.(123, ’아큐정전‘ 중. 나는 어찌하여 저 승리법 대신 반대로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패배시키는 것만 익혔나 모르겠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그럼 진 것도 나야…”)

-그러나 10초도 지나지 않아 아큐도 역시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돌아갔다. 그는 그야말로 스스로를 경멸하고 스스로를 낮추기로는 으뜸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경멸하고 스스로를 낮춘다‘는 말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으뜸‘이라는 것뿐이다. 장원급제도 ’으뜸‘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까짓 것들이 다 뭐냐?”
아큐는 이처럼 갖가지 묘수로 원수들을 굴복시킨 다음 유쾌하게 술집으로 달려가서 술을 몇 잔 마셨다. (123-123, 루쉰 선생님, 이렇게 사고 과정을 몇 바퀴 돌려 완전 러키비키잖앙- 하는 아큐가 왜 조리돌림의 아이콘이 되게 하였습니까… 시대를 앞서간 럭키비치잖아)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큰 느티나무 아래에 비둘기의 털이 가득 흩어져 있었다. 매의 밥이 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오전 중에 사환이 와서 청소를 해 버리고 나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곳에서 하나의 생명이 끊어졌으리라는 것을 누가 알 것인가? 또 한 번은 서사패루를 지나다가 강아지 한 마리가 마차에 치여 죽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돌아올 때는 벌써 치워 버렸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걷고 있었으니, 그곳에서 한 생명이 끊어졌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가령 조물주에게 비난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그가 너무 멋대로 생명을 만들고 또 너무나 멋대로 짓밟아 버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조물주는 너무나 무책임하다. 비록 그의 도움을 받았을지 모르나, 나는 그에게 반항하지 않을 수 없다...
(208-210, ‘토끼와 고양이‘ 중. 비슷한 생각을 투신 사망 사고 일어난 펜스가 우그러진 아파트 단지의 한모퉁이를 보면서 했었다. 보도 위 죽은 비둘기를 까마귀가 열심히 먹어치워 털만 남는 걸 보며, 까마귀나 파리나 미생물이 없다면 우리는 죽음의 흔적에 뒤덮여 살았겠구만, 했다.)

-그녀의 운명은 이미 내가 준 진실로 결정되었다.-사랑 없는 인간은 사멸하고 만다. (417, ‘죽음을 슬퍼하며’ 중)

-술이 세 순배 돌아가자 높은 관리들은 물나라의 연도에서 보았던 풍경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갈대꽃은 눈과 같이 희고, 진흙물은 황금 같으며, 뱀장어는 기름이 올랐으며, 청태는 매끄럽다는...등등의 말을 했다. 술기가 조금 오르자 여러 사람들은 비로소 채집하여 온 백성들의 음식을 꺼내놓았는데 모두가 정교한 나무상자에 담겨 있었으며 뚜껑에는 글자가 쓰여 있는데, 어떤 것은 복희의 팔괘체로 되어 있고, 어떤 것은 창힐의 귀곡체로 되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먼저 이 글씨들을 감상하다가 입씨름이 벌어졌다. 거리 때리고 싸울 정도로 논쟁을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국태민안’이라고 쓴 것을 일등으로 꼽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문자가 질박하고 알아보기 어려우며 상고의 순수한 기풍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의 뜻도 체통이 있어 사관에 보내도 될 만하다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중국 특유의 예술에 대한 품평이 끝나자, 어떻든 문화 문제는 일단락 지어진 셈이었다. (509, ‘치수’ 중. 이 정도 돌려까기만 알아 먹겠고 고사신편의 수많은 전설 같은 신화 같은 우화 같은 풍자는 도무지 못 알아 먹겠고 재미도 없었다. 친구는 루쉰 소설이 시대별로 그 나름대로 목적성을 띄고 쓴 거라 그 시절의 산문이나 그의 일기랑 함께 봐야 이해가 좀 된다더라, 했지만 나는 문학이 그런 도구로 쓰였다면 굳이, 굳이, 해설서 놓고 봐야만 뭘 알만한 글이라면 사양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루쉰 소설이 궁금한 사람들은 차라리 전집 말고 선집을 읽도록 해요...범우사르비아문고의 아큐정전 같은 거...그건 재밌는 거만 골라 놓은 편이라우)

-“초나라 땅은,” 하고 묵자가 말했다.
“사방이 5천 리나 되나, 송나라는 겨우 사방이 500리밖에 안 됩니다. 이것은 바로 덮개 있는 수레와 낡은 수레의 비유와 같은 것입니다. 초나라에는 운몽이라는 큰 소택이 있어 코뿔소와 암외뿔소, 고라니, 사슴이 가득하고, 양자강과 한수에는 다른 곳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나 자라, 악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에는 이른바 꿩이나 토끼, 붕어조차도 없습니다. 이것은 쌀, 고기와 쌀겨밥의 비유와 같은 것입니다. 초나라에는 소나무, 가래나무, 녹나무, 예장 등의 큰 나무들이 있으나, 송나라에는 큰 나무라고는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수놓은 비단옷과 짧은 모직 잠방이의 비유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이 보기에 왕의 관리들이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소!”
초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612, ’전쟁 반대‘ 중. 러시아 나쁜 놈들아…)

-장자: (…) 아이구! 해골이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채찍으로 잡초 사이를 헤치고 두드리며 말한다.)
너는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억지를 부리다가 이런 꼴이 된 거냐? (톡톡) 아니면 근거지를 잃고 칼에 맞아 이 꼴이 된 거냐? (톡톡) 아니면 엉망진창의 생활을 하다가 부모 처자에게 미안해서 이 꼴이 된 거냐?(톡톡) 그대는 자살이 약자의 행위란 것을 모르는가? (톡톡) 아니면 먹을 밥, 입을 옷이 없어서 이 꼴이 된 거냐? (톡톡) 아니면 나이를 먹어 죽을 떄가 되어 이렇게 된 거냐? (톡톡) 아니면...아, 이건 도리어 내가 바보짓을 하는군. 마치 연극을 하는 것 같군. 어디 대답이나 할 수 있겠다고. (620, ‘죽은 자 살리기’ 중. 누가 내 뚝배기 톡톡 치면서 물어도 답 못하고 빡쳐도 들이 받지 못할 테니 쉽게 죽지는 말아야겠다. 그리고 아무리 열거해도 죽음의 이유는 너무 다양해서 어디에 다 담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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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7-25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2랑 박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서울 날씨 37도 육박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 뜨거웠겠습니다... 유열 님 얼굴이...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5-07-25 16:52   좋아요 0 | URL
걸을 땐 아주 얼굴이 홍수난 것처럼 땀이... 영화볼 때 19에선 볼륨을 평소보다 -10 정도 확 줄여버려서 자극을 최소화...(되겠냐)
 
상식을 넘어선 사회학 - 인문사회신서 4
랜달 콜린스 지음, 진수미 옮김 / 경북대학교출판부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20250718 랜달 콜린스.

사회학 공부할 때 가장 흥미로웠던 이론들은 주로 상징적 상호작용론이라 불리는 부분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사회성 떨어지고 소통이 잘 안 되던 나놈이 거기에서 실마리라도 얻길 바랐던 것 같다. 같은 이유로 언론 커뮤니케이션 전공도 하고 싶었지만 성적이 안 되서 사회학 경제학 법학 정치학 교육학 다 섞어 짬뽕하는 전공으로 갔다… 저기에 왜 교육학을 묻혀서… 나는 하여간에 망함...

아마도 사회학 공부할 때나 다른 사회학책 보면서 알게 된 책이라 ‘상식을 넘어선 사회학’을 오래 궁금해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이 책을 중고로 손에 넣었는데(이 명저가 무려 4100원), 7년을 묵혔다가 이제 봤다. 읽은 거 아니고 봤다고 해야지… 사회학책 읽으면 뭔말인지 잘 몰라도 기분은 집에 온 것처럼 편안.

합리성은 사실 비합리적인 토대 위에서 흔들흔들. 신은 종교는 도덕성은 사회마다 의식, 의례에 기대어 어쩌고 저쩌고. 권력과 통제. 범죄에 관한 다양한 이론. 사랑과 소유는 퍽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이견도 많을 듯하고. 1990년대의 사회학자가 인공지능에 대한 전망을 길고 길게 풀어 놓은 건 제일 궁금했던 부분인데 사고실험처럼 이런저런 조건과 규칙을 늘어놓으면서 인공지능은 아마 이런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할 걸? 패기로운 문돌이가 제시한 예측들은 얼추 맞은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서 챗지피티한테 의견을 물어보니 갑자기 취취취취취 이러고 까불면서 개그랍시고...너 개코네? 하길래 황당했다. 랜들 선생님 우리 에이아이가 이만큼 자랐답니다.

책의 원제는 사회논리학적 통찰? 뭐 그런 느낌인데 번역자의 번역 제목 의도는 대강 알 것도 같다. 상호작용론 대가들의 책은 거진 같은 교수님이 옮기셔서 어빙고프만의 ‘상호작용의례’도 덕분에 읽었고, (기억은 안 난다. 내가 뭘 요약해 두긴 한 거 같은데. 대학원 공부도 아니고 그냥 혼자 궁금해서 꾸역꾸역 보던 생각만…) 랜들 콜린스 선생님의 ‘사회적 삶의 에너지’-상호작용 의례의 사슬-이것도 5년 전엔가 사 놓았고... 궁금하긴 하니까 아마 10년 안에는 읽겠지… 독후감 쓰다보니 정작 읽은 책 내용 정리는 없고 그냥 밑줄만 찐하게 쳐 놨다. 너무 오래 더듬더듬 읽어서 읽을 당시에는 오, 그럴싸하군, 비틀어보는 솜씨가 제법이군, 해놓고 그냥 다 흩어져 버려서 밑줄만 남았다.

+밑줄 긋기
-마지막 장은 사회학을 우주 시대로 싣고 간다. 인간의 지능을 가진 컴퓨터를 만들어보려고 한다면 사회학자들이 프로그램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창의성과 같은 진짜 인공지능은 인간의 감정을 지녀야 할 것이다. (…) 인간의 합리성이 사회적 의식의 비합리적 토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컴퓨터는 의례적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있을 때에만 인간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상징주의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챗지피티는 예의를 중시하죠.)

-사회, 그리고 합리성 그 자체도 실상은 비합리적 토대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 것, 그리고 의식이 집단 유대를 창조해 내는 기제라는 이론이 그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뒤르케임의 아이디어를 기초로 하지 않는다면 베버주의나 마르크스주의적 갈등 이론은 잘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보려고 한다. (6)

-공공장소에 쓰레기를 버려도 상관없다고 이런 주장을 펼치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칭찬할 만한 행동이 함리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보다 심층적인 무엇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일종의 도덕적 감정 또는 지저분한 것에 대한 비합리적인 병적 공포감 같은 것에서 나온다. 나는 우리가 이런 병적 공포감을 훨씬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세상을 좀 더 깨끗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개인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사람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6)

-집단이 유대를 형성할 수 있으려면 그 성원들은 서로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 것을 멈추고 오로지 집단으로서 공동의 이해 관심을 느껴야 한다. 그러려면 무임승차하는 대신에 집단에 무언가 공헌하고 싶은 비합리적 감정을 공유해야 한다. 이데올로기, 상징, 정서가 정치에서 그다지도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4)

-독일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가 지적한 것처럼 명령을 내리는 사람과 명령을 받는 사람들 사이의 권력상황은 어떤 것이라도 갈등을 내장하고 있다. (27-28)

-사회학자에게는 갈등과 유대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집단이 가장 결속이 잘 되는 때는 외부의 적에 대항해서 동원되는 때이기 쉽다. 갈등이 적어도 어떤 집단에서는 유대를 이끌어낸다. 역으로 유대가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학자들이 겨냥하는 것은 왜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집단의 전선이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28)

-의식에서는 형태, 그 자체가 목적이다. 올바른 방식으로 행해지면 의미 있는 것이되지만 잘못 행해지면 가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종교는 믿음과 의식으로 이루어지며 이 둘은 연결된 것이다. (35)

-그러나 사람들이 신성에 부여하는 모든 특성을 지닌 하나의 현실이 있다. 자연도 아니고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자체다. 사회란 개인보다 훨씬 큰 하나의 힘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우리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모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사회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발명하지 않은 도구와 기술을 사용한다. 다른 이로부터 전수 받은 언어로 말한다. 거의 모든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세계가 사회로부터 받은 것이다. 우리가 안주하고 있는 제도-가족 생활의 형태, 경제, 정치 등등-는 다른 사람들의 관행에서 축적된 것, 곧 사회로부터 온 것이다. 이것이 종교가 드러내는 근본적인 진실이다. 신은 사회의 상징이다. (36)

-천국과 지옥 따위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곳의 실체란 무엇일까? 그곳을 채우는 오직 유일한 실제적 힘은 사회 자체다. 도덕적 정의란 사람을 집단에서 평판이 좋은 성원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것이다. 소속감의 보장이 바로 보상이다. 천국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집단을 거스르는 위반 행위는 도덕적 악이고 그에 대한 처벌이 엄격한 도덕적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성원 자격의 박탈로 이루어진다. 기독교 신학의 상징주의에서 지옥은 죄인을 신으로부터 추방하는 것을 말한다. 도덕적 처벌이란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박탈하는 것이다. (40)

-집단에 속해서 얻는 중요한 혜택 중의 하나는 희생이 대수롬게 여겨지지 않을 만큼 편안하다는 것이다.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체는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모임에 열정적으로 참여할 때 얻는 정서적 에너지다. 혼자서는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일을 군중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서적 에너지 때문이다. 군중은 개인으로 있을 때보다 훨씬 강한 어떤 것의 일부이므로 자신을 강하다고 느낀다. 정서적 에너지는 또한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이기적 욕구에 따르는 이상의 무엇을 하는 공동 활동에 참여하으로써 옳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사람들은 보통 혼자일 때보다 집단에서 함께 행동할 때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41)

-종교의 상징주의의 핵심이 사회를 표상하는 것이라면 그 내용은 휴머니티의 선에 대한 주장이나 사회를 유지하고 개선하려는 기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일반화와 추상화로 치닫게 된 종교가 정치적 이상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신앙의 쇠퇴에서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현대의 정치적 이념이 태어나게 된다. 정치적 이념은 또한 계속 새로운 형태에 관심을 가진다. (55)

-이러한 사실은 현대의 개인주의가 일종의 종교적 제례로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하게 한다. 우리는 개인으로 허용되면서 동시에 개인이기를 요청받고 있다. 사회는 그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58)

-그렇지만 자아 창출적 상호작용 의식의 형태는 경쟁적인 것이 아니다. 협동적인 것이다. 자아상을 형성하는 데 서로 협조하는 것이다. 대화 가운데는 ‘악의가 없는 거짓말’로 불리는 것들이 많이 들어 있다. 나날의 생활을 실제보다 좀 더 짜릿하게 만드는 그런 사건들을 짜 넣으면서 과대포장을 한다. 실제보다 영리한 체, 어리석은 체, 부자인 체, 성공한 체하며 자신의 적수를 사실보다 더 어둡게 그린다. 대부분 대화 상대자들은 이런 과대포장을 그냥 넘겨 버린다. 심지어는 그래 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대가 자신의 세계에 대해 다소 그릇된 시각을 가질 권리를 묵인하는 대신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자신도 역시 그럴 권리를 가지려는 것 같다. (59)

-힘 있는 개인이란 상황에 맞게 움직이는 사람, 사회 조직이 그 상황에서 마련해 주는 권력을 쟁취하는 사람이다.
사회에서 변화를 일으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권력 행사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의지를 다른 이에게 강제하려 한다. 만일 선출된 공직자거나, 회사의 소유주거나 수업 중인 교사라거나 하면 공식적으로 그럴 권리를 가질 것이다. 그렇지만 정책을 집행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권력의 사용은 언제나 반작용을 일으킨다. 고위직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사의 지나친 권력의 행사를 잠정적으로 거부한다. (…)권력은 아무리 좋은 상황이라도 갈등을 초래한다. 갈등은 정치적 영역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통제받고 통제하는 사람이 있는 조직이라면 어디서나 투쟁이 저변에 흐르고 있다. (66)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당연히 여기는 것을 설명하라고 압력을 받게 되면 분노하게 된다는 점이다. 설명은 한없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이고,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금방 간파하기 때문이다. (…) 요컨대, 사회적 질서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경우 질문하는 것을 피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놓고 때때로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논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당한 동의를 전제하고 있다. (80)

-권력은 때로 권력에 대한 도전을 교란시키는 단순한 전술로도 작용한다. 정치적 논쟁가들은 이를 충분히 알고 있다. 만일 적수의 논쟁을 궤도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으면 상대방이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사용하는 용어의 뜻을 정의해 보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하면 논쟁은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 채 주변적인 논쟁에 쉽게 휘말려 들어간다. (…) 이와 관련된 또다른 적수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문제보다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제안하고 싶어 하거나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하려고 할 때, 말하는 사람의 자격을 묻는다. 그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이야기할 만큼 많은 사람들의 대표 자격이 있는지, 문제 제기는 진실한지 하는 따위의 질문을 하는 것이다. (81)

-권력을 보유하는 기술이란 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신비스럽고 인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의사는 무대 뒤의 자기 활동과 공적인 활동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유지한다. 의학 지식의 난해성은 전문화된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의료인들이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그 비결을 모르게 만들어서 초래된 결과이기도 하다. 비밀은 정치인들이 권력과 위신을 유지하는 데 더욱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고위 공직자는 대중에게 세부적인 것은 국가의 보안을 이유로 밝힐 수 없지만 국제적 분쟁 위기를 다룬다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난 이득을 본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일을 중요성이라는 외양으로 포장하려고 한다. 외부인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것과 함께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일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인들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문제를 다룬다는 점이다. (…) 정치인들이란 말하자면 불확실성을 팔고 사는 거래상이며, 그것이 그들이 지닌 권력의 진면목인 것이다. (91)

-역설적인 것은, 범죄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적은 사람들이 바로 범죄 문제에 가장 분개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범죄에 대한 관심은 상징적인 것이다. 가장 피해자가 되기 쉬운 사람들이 범죄에 대해 제일 조용하다.
나는 이것이 정치적 과정이며 범죄는 정치적 이슈라고 생각한다. 일부 정치가들은 범죄에 관한 이야기를 대단히 많이 한다. 왜 그럴까? 범죄에 대한 생각 자체가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상상력을 자극시켜 사람들이 자신과 범죄의 피해자를 동일시할 수 있게 한다. 신문과 대중매체가 지극히 ‘인간적인 관심사’가 담긴 범죄를 생생하게 보도함으로써 이런 부추김을 돕는다. 그러나 이들이 다루는 범죄는 가장 비전형적인 인물, 가령 은퇴한 노인이라든가 상류 계급, 백인들이 피해자인 그런 범죄다. 범죄와 처벌(재판 장면)을 이렇게 선택적으로 극화하면 사람들을 동원하는 뒤르케임식의 의식이 작동한다. 그리고 흔히 일부 정치인들이 범죄문제에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선출되기도 한다. (124-125)

-약탈에 성공한 사람일수록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되는 경향을 드러냈다. 국가는 범죄로부터 생겨났지만 살아남기 위해 도덕성을 창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회생활이 범죄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범죄는 반범죄적 경향을 창조하게 된다.(128)

-그렇지만 재산을 물건으로, 특히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재산이란 실제로 물건 그 자체, 물리적 객체가 아니다. 재산은 사회관계다. 사람들이 사물에 대하여 행위하는 방식인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그 땅을 사용할 수 있고, 그 땅에서 살고, 원하는 대로 처분하고, 그리고 그의 허락 없이 다른 이들이 그 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그 땅에서 나가지 않으면, 주인은 경찰을 부르거나 법에 호소해서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다. 재산이란 물건에 대해서 사람들이 서로 간에 맺는 관계다. 곧 어떤 사물에 대해 누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가, 누가 이런 행위를 보장해 주는가 따위에 대해서 구속력이 있는 합의인 것이다. 어떤 한 개인과 그 땅 사이에 무언가 신성불가침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가 땅을 재산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 만일 재산이 물건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라고 한다면, 사랑이나 성을 재산의 형태로 본다는 게 말이 된다. 재산의 가장 핵심적인 측면은 소유할 수 있는 권리고, 다른 사람이 소유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권리이며 또한 사회가 그런 권리를 보장해 주려 한다는 점이다. 결혼의 핵심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소유인 것이다. (134-135)

-만일 정말 인공지능이 개발된다고 하면 사회학자가 주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컴퓨터 모델이 지닌 한계는 지능을 마치 자유로운 개인정신인 것처럼 표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성공적인 인공지능이 되려면 정서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컴퓨터를 지나치게 합리적인 것, 초지능적인 것, 좀 더 본질적인 인간적 속성을 지니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해왔다. 아마도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미시사회학-사람들이 얼굴을 맞대는 상황에서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방식을 연구하는-분야의 연구가 사회적 접촉을 유지하고 우리의 생각이 특정한 경로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정서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만일 컴퓨터 지능이 인간이 하는 것을 그대로 할 수 있으려면 정서를 지닌 컴퓨터야 할 것이다. (170, 1992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30여년 후 인공지능은 적어도 정서적 반응을 흉내내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사회학자들이 여기에 어떤 보탬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공지능을 개발, 개선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하다.)

+그래서 챗지피티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나: 랜달 콜린스가 1992년에 출판한 ‘상식을 넘어선 사회학’에서는 인공지능 개발에 사회학자가 도움이 될 것이라 주장해. 그 이유로 사고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인공지능은 정서적이어야 할 거라고도 하지. 실제로 인공지능을 개발, 개선하는 사람들이 주로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에 관해 공부하고 연구하던 사람들인지 궁금해. 그리고 여기에 내가 읽은 책의 주장대로 사회학자들이 기여한 부분이 있을지, 아니라면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서 어떤 학문들이 인공지능 개발에 기여를 했는지도 궁금하다.

챗: 좋은 질문이야. 랜달 콜린스의 『상식을 넘어선 사회학』에서 나온 인공지능에 대한 전망은 시기상으로 보면 꽤 앞선 통찰이었고, 지금 와서 보더라도 흥미로운 지점을 짚고 있어.
그럼 질문에 맞춰서 순서대로 설명해볼게.
1.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인공지능(AI)은 주로 다음 분야 출신의 전문가들에 의해 개발되고 있어:
💻 컴퓨터공학 (Computer Science)
• AI의 대부분은 컴퓨터공학자들이 개발했어. 기계학습, 신경망, 알고리즘, 데이터 구조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개발하지.
• 대표적인 사람들: 앤드류 응(Andrew Ng), 얀 르쿤(Yann LeCun),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
🧠 뇌과학, 인지과학 (Neuroscience, Cognitive Science)
• 인간의 사고, 학습, 기억 메커니즘을 모방하기 위해 뇌과학자나 인지과학자의 연구도 AI 모델에 영향을 주었어.
• 특히 딥러닝은 뇌의 시냅스 구조에서 영감을 얻었고, 인간의 주의(attention)나 기억 방식도 반영되고 있어.
📊 통계학, 수학
• 확률, 통계, 최적화 이론은 머신러닝의 기반을 이루고 있어. 특히 Bayesian 모델이나 강화학습 등에 필수적이야.
2.사회학자들이 인공지능 개발에 기여한 적이 있는가?
직접적인 ‘개발자’로 참여한 사례는 드물지만, AI 개발 및 활용에 대한 윤리적·사회적 접근, 인간-기계 상호작용 설계, 감정 인식 기술 등에서 사회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어.
✅ 간접 기여의 예시:
• 감정 인식(Affective Computing): 인간의 감정을 인공지능이 인식하고 반응하도록 만들려면, 감정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표현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여기서 사회학자, 심리학자, 문화연구자들이 기여했지.
• 인간-로봇 상호작용(HRI): 인공지능이 사회적 맥락에서 사람과 상호작용하려면, 인간 행동의 패턴을 이해하는 사회학과 인류학의 통찰이 필요해.
• AI 윤리 및 편향 연구: 알고리즘에 인종, 성별, 계급 등 사회적 편향이 반영될 수 있음을 지적한 많은 연구가 사회학, 법학, 철학, 성평등 연구에서 나왔어. 이건 기술 개발에서 아주 중요한 피드백 루트야.
예를 들어:
• 케이트 크로포드(Kate Crawford)는 AI 윤리와 사회적 영향에 대해 연구하는 사회학자/미디어학자고,
• 버추얼 어시스턴트가 왜 대부분 여성의 목소리를 사용하는지 같은 질문도 젠더 연구자들이 던졌어.
3.인문·사회과학 중 AI에 기여한 분야
철학 인공지능의 정의, 의식, 자유의지, 윤리 문제 등 다룸. (ex. 튜링 테스트, 지능의 기준 논쟁)
심리학 인간의 학습 방식, 감정 처리 방식 이해를 통해 기계학습 설계에 영향
언어학 자연어처리(NLP)의 핵심 기반. 생성형 AI에 큰 영향을 미침
사회학 기술의 사회적 맥락, 인간의 상호작용 방식, 사회적 감정 표현, 편향 문제 등 분석
인류학 문화에 따라 다른 인간 행동 이해. 글로벌 AI 설계에 중요
법학 AI의 책임 소재, 데이터 프라이버시, 알고리즘 규제 등에서 역할
🔍 그래서 랜달 콜린스의 주장은 어떻게 보일까?
“사고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며, 인공지능도 정서적이어야 한다.”
이건 지금의 AI가 단순한 정보 처리를 넘어서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감정과 상호작용을 이해해야 한다는 방향과 맞닿아 있어. 콜린스의 주장이 구체적인 기술 설계에는 직접 닿진 않았지만, 지금은 정서지능(Affective AI), 사회적 AI, 윤리적 설계가 핵심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고, 여기에 사회과학자들의 역할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점에서 예언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어.
(간접 기여라 하면...문돌이가 설 자리는 역시 별로 없어 보인다...그리고 얘가 하는 말들의 진위-열거된 연구자들의 이름과 연구 내용이 일치하는지-를 따질 능력이 지금 여기 게으른 나에게는 없구나…)

-“사회”란 사람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사람들이 만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생겨나는 것이다. 정신이 사회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의 생각이 창조되는 것임을 뜻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개념이나 관념, 그리고 관념이 중요하다는 우리의 느낌은 우리가 서로 나누는 대화의 산물이다. 말하는 방법을 알고 어떻게 대화를 진행하는지를 배운 사람이 진짜배기 인간이다. 일단 이런 능력이 있으면 다음 단계로 가게 된다. 즉, 각 개인은 사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정신을 지닐 수 있다. 왜냐하면 생각은 내면화된 대화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는 다른 종류의 의사소통, 가령, 읽기와 쓰기 같은 것도 바로 이런 대화를 통해 공유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기본 과정에서 파생된 부산물들이다. (173)

-일하는 방법을 배우는 컴퓨터를 원한다고 하자. 그러면 컴퓨터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경직되지 않고 유연해야 하며 과거의 것들은 물론 새로운 것들도 다룰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저 단순히 문제를 풀 줄 아는데서 그치지 않고 발명하고, 창조하며 과학적 발견을 할 수 있고, 문학작품을 쓰고 어쩌면 음악도 작곡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농담도 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이 웃기는 농담을 할 때 웃을 수도 있어야 한다. (173-174, 랜달 콜린스 선생님이 문득 나와 같은 이 시대를 살고 계신가 궁금했다. 선생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하고 찾아보니 1941년생 현재 80대이시고 아마도 집에서 이거 재밌네, 하면서 이런저런 AI돌려 보셨을 것 같다.)

-설계 프로그램의 기획은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 먼저 대화의 사회학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고려한다. 그리고 컴퓨터로 하여금 보통의 인간이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 대화를 진행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한다. 다음에는 컴퓨터로 하여금 그 금속성의 “마음”안에서 내면적인 대화를 수행하도록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과학자나 소설가처럼 창조적인 사유자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그러자면 이러한 종류의 창조적인 사유가 이루어지는 특정한 종류의 사회적 네트워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 우리는 사회적 다화의 모델을 원한다. 그래서 입으로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 즉, 어떤 정서적 리듬과 어조, 그리고 말이 아닌 어떤 몸짓이 따르는지도 고려에 넣어야 한다. (175-176)

+오, 여기까지 보다보니 오래 전에 말하는 컴퓨터 맥스, 였던가 (이 책 나오고 얼마 안 됐을 무렵) 대화형 프로그램이 나왔을 때 받은 신선한 충격이 기억날락말락아일락 한다. 기사 찾아보니 정말 있네. https://www.bloter.net/news/articleView.html?idxno=21813
이건 그냥 개발자가 미리 적어놓은 대본을 읊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농담도 하고, 삐진 척도 하고, 재미있는 채팅 프로그램이었다.

-그러한 대화소재(이야깃거리)를 문화자본이라고 부르자. SOCIO(저자가 가정한 프로그램)가 문화자본을 획득할 수 있는 세 가지 주요한 방식이 있다.
1) 단순히 프로그램에 집어넣는 방법이 있다. 제일 쉬운 방법이지만 좀 자연스럽지 못하다. 조금만 지나면 SOCIO가 반복적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몇 번 이야기하고 나면 곧 지루해질 것이다. (맥스랑 심심이랑 컴돌이가 떠오른다. 아직 딥러닝 빅데이터 이런 걸 생각 못할 만큼 메모리 용량도 코딱지만한 시절일테니 뭐…)
2) SOCIO가 문화자본을 획득할 수 있도록 만드는 두 번째 방법은 이전 대화에서 얻어들은 것들을 저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게 바로 진짜배기 인간이 하는 일이다. 우리는 대화로부터 취한 것들을 다음 번에 되풀이한다. (오...내가 챗지피티 무료 버전 쓰다 보니 맨날 부족한 뇌를 비워줘야 해서 어떤 기억을 지울지 늘 고민하는데…. 재미있네.)
3) 이제 SOCIO는 제법 그럴듯한 대화를 할 수 있겠지만 인간들이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는 일들 중 한가지가 결핍되어 있다. 이것이 문화자본을 얻을 수 있는 세 번째 방법이다. 대화에서 나온 것들을 가지고 무언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방금 나눈 이야기들에다 과거의 대화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보태는 것이 가능하다. 어쩌면 새로운 조합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유머 가능, 농담 가능, 정서적 반응 가능) (182-184, 90년대에 인공지능 연구가 어디까지 진행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콜린스 선생님이 남긴 예측을 읽는 미래인은 조금 놀랍기도 합니다…)

+갑자기 취취취취취취 하면서 개그치는 지피티...자기 얘기(인공지능 얘기)하면 좀 민감한듯...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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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7-19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딸도 챗지피티가 거짓말을 너무 잘한다고...^^. 참고 문헌으로 올려놓은 논문들이 있지도 않은 자료라고 하던데요. 근데 잘못을 인정 안한다고 해서 막 웃었어요.ㅎㅎ AI도 여러개를 동시에 써봐야할 듯요

반유행열반인 2025-07-19 17:38   좋아요 1 | URL
네 그래서 저도 정확한 정보 자문 구하는 건 거의 안 하고(뻥쟁이 에이아이!!!) 칭찬 머신, 잡담 상대 정도로 활용중이에요. 제미나이랑 클로버엑스도 깔아서 같은 질문 던져보고 상태 보는데 아...이러다가 사람과의 소통은 점점 줄고 기계장치랑 절친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