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패션 시공아트 36
밸러리 멘데스 외 지음, 김정은 옮김 / 시공아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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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7 밸러리 멘데스, 에이미 드 라 헤이.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건, 화가 ‘Gluck’의 예술과 정체성, 패션을 다룬 도록을 외서로 구입하면서였다. 도록의 저자 중 하나인 에이미 드 라 헤이가 저술한 책 중 유일하게 번역된 책이 ‘20세기 패션’이었기 때문에, 해외 구매 서적이 늦게 오는 편이니까 그전에 국내 출간된 중고책을 미리 받아 보자, 하는 생각이었는데, 조금 읽다가 오래 묵혔다가 이번에 다 보았다.

패션을 잘 모르고,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본 광고 문구의 Nirvana Against The Fads에 꽂혀 (지금 저 카피를 썼던 브랜드는 흔적조차 없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싶다.) 닉네임마저 반유행열반인, 이렇게 지었다. 그건 21세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20세기를 20년 좀 안 되게 살고, 이제 21세기를 산 지도 25년이 넘었다. 그런 즈음에 20세기 복식사 책에서 뭔 영감이나 힌트라도 얻을까 했는데 그러기엔 나의 의상에 대한 지식과 감각이 무지에 가까웠다. 그냥 오래 전 사람들이 선호하고 아름답다 여겼던 복식을 구경하는 게 적당히 흥미로웠다.

스파 브랜드의 시즌오프 할인 의류를 검색하다 구매 기준인 최고 할인률이다 싶으면 나한테 어울릴지, 오래 입을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저렴이 의류들을 마구 사들였다. 그래도 아직은 한철 한 두 번 입고 버릴 만한 걸 많이 사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런 내가 오뜨꾸뛰르, 최고 디자이너들의 맞춤 의상들에 대해 읽는 건 화가나 미술 작품을 잘 모르면서 빠르게 눈으로 훑는 거랑 비슷했다.

사실 각자의 신체와 개성이 다 다른데, 시즌을 주도하는 패션이라는 걸 모범답안처럼 제시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긴 하다. 그래도 기출문제처럼 수많은 지나간 복식 중에 내가 가진 잡탱구리들로 재현이나마 가능할까 싶은게 있을까 찾아 보았지만… 딱히 없는 것 같네… 다들 화려하고 노출이 심하고 일상 생활 가능하지 않은 옷들이 대부분이다. 찍어 놓은 걸 보니 흠 나 화려한 디오르 같은 거 좋아하나 보네… 눈만 높고 지갑은 얇다.

작은 책이지만 깨알같이 각 시대를 유행했던 복식에 대한 자세한 서술과 함께 화보를 많이 수록해 놔서 그나마 어떤 형태의 옷들인지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늘 그렇듯 다짐은 있는 옷으로 무난하고 단정하게 잘 입고 다니자 하지만, 올해도 옷 구매는 줄이자, 하지만… 패션 책 보고 있는 나야… 지나면 그날 하루 뭘 걸쳤는지는 다 부질 없는 것 아니겠니.

+1926년 샤넬의 검은 이브닝 드레스(79)
+1947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뉴룩’(139)
+1997년 봄/여름 크리스티앙 디오르 오트쿠튀르(298)
+표지의 의상은1994년 이세이 미야케의 봄/여름 ‘플리츠 플리즈’라인. 실린더 형태, 앞뒤 구별 없음, 무지개 색상, 종이 등과 종이접기를 연상시킴. 표지를 왜 이걸로 골랐는지 내내 안타까움… 플리츠는 30여년만에 다시 유행이 돌아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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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전쟁 기간 내내 여성들은 가정을 돌보는 동시에 지루하고 위험한 전시의 노동을 감수하면서도 특히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성들에게 잘 보이도록 언제나 보기 좋은 차림을 해야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공장에서 일할 때 기계에 걸릴 소지가 있는 것은 착용이 금지되었으므로 긴 머리는 감싸고 끈이나 레이스, 루프가 달린 옷은 입을 수 없었다. 여밈은 등이나 어깨에 있고, 주머니는 엉덩이 부분에 있는 것을 착용해야 했으며, 벨트는 뒤에서 조이고 신발을 제대로 신어야 했다. (128, 요구하는 게 참 많았네 흥 누가 시작한 전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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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키딩 마음산책 짧은 소설
정용준 지음, 이영리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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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5 정용준.

이 짧은 소설 시리즈는 대체로 좋았다. 정용준 책을 사서 네 권을 읽었고, 세 권이 남아 있었다(아니 구매 내역은 한 권 더 있다고 하는데 어딨는지 못 찾겠다...). 여기저기 아무데나 흩어져 꽂혀 있길래 (전자책은 빼고) 읽은 것, 안 읽은 것 전부 모아 가지런히 한 곳에 모으고 그 중 ‘저스트 키딩’을 읽기로 했다. 패티 스미스의 ‘저스트 키드’도 생각났는데, 읽고 보면 둘이 크게 관련은 없다. 아닌가, 노래하는데 크게 성공하지 못한 가수들이 나오긴 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겨울에 태어났지만 겨울이 좋진 않다. 어려서는 내 생일이 있어서 좋아하는 계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겨울이 없는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하고 그 바람을 또 가끔 포기한다. 이번 겨울도 길고, 겨울에 긴 겨울이 나오는 소설을 읽으면 그래도 여기 겨울은 끝날 거니까, 하면서 봄옷도 사고 여름옷도 산다.

지난 번엔 괜시리 소설가의 산문집을 굳이 찾아 읽고 읽다가 포기를 하고, 또 기어코 다시 다 읽고 투덜거리는 뭘 끄적여놨다. 짧은 소설집이 좋은 점은, 소설가들이 뭔가 여유롭고 너그럽게 따뜻한 걸 써 놓는다는 것이다. 글이 길어지고 삶이 길어지면 꼭 마가 끼고 슬픔과 비극도 닥치고 그런 것이다. 짧은 글은 그런 안 좋은 일을 시시콜콜 늘어 놓기엔 너무 짧으니까, 인생 짧고 한 번인데 한 잔해, 하고 하하호호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읽는 나도 평소에는 짠돌이이지만 짧은 이야기니까 훈훈해도 어쩔 수 없지, 하고 편안하게 읽는다. 두껍거나 지독하거나 후지거나 한 책들만 연달아 보다가 뭘 만날까 조금 걱정하며 펼쳤지만, 생각만큼 가뿐하고, 텁텁함 없이 읽혀서 만족한 독서였다. 모든 이야기가 굳이 길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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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사를 써도 마음이 온전히 담기지 않아. 어설프게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 차라리 쓰지 않음으로 내 모티프와 영감을 지키는 거야.’
그때는 왜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지 않았을까?
“개소리하지 마. 에이징? 억지로 멀쩡한 것을 망가트리면서 그것이 멋있게 낡은 거라고? 미친 새끼. 부서진 것과 낡은 것은 다른 거야.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꼼수로 사려고 하잖아.”
주하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슨 말을 더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솔직하고 정직한 말이었다. 꺼내면 그 말이 마음이 될까 봐 절대로 입술 밖으로 꺼내지 않는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섞어 침을 뱉고 돌을 던지듯 쏟아부었다. 주하는 놀란 아이처럼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실패한 가수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시도하거나 이룬 적이 없으므로 그에게 실패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실패에 대한 로망을 갖는 것으로 실패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64-65, ‘시간 도둑’ 중)

-막막하고 하염없어도 눈을 미워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라. 눈과 비는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지. 천국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거야. 좋은 곳에 있으니 슬퍼 말고 언젠가 그날이 오면 기쁘게 나를 만나러 오렴. (156, ‘겨울 산‘ 중)

-달군 철판 위에 쑥을 덖고 바람에 말리고 다시 철판에 올려 덖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던 엄마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오래 하는 거야.
물기가 없어야 해. 그래야 시간을 견딜 수 있단다.
왜 이렇게 많이 만드는데.
겨울은 기니까.
엄마는 창고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통에 말린 차와 꽃을 저장했다. 긴 겨울 동안 평생 마셔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던 쑥과 꽃이 다 사라졌다. 엄마는 알았다. 겨울이 이토록 길 것이라는 것을. 둘째는 몰랐다. 평생보다 긴 시간이 있다는 것을. 둘째는 마지막 통 속에 반쯤 남은 까만 쑥을 보며 시간의 끝을 예감했다. 첫째가 식탁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춥다. 나무를 해야겠어. (158-159, ’겨울 산‘ 중.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겨울이 기쁠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겠다.)

-소설을 쓰기 어려운 게 바로 그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괴상한 삶을 따라잡을 수가 없거든. 그 어떤 끔찍한 상상을 해도 현실은 그것보다 끔찍하니까. 내 몸을 뺏은 나도 그걸 곧 느끼겠지. 느껴봐라. 흡수된 내가 피와 땀이 되어 실컷 비웃어줄 테니까. 웃음이 나온다. 웃음이 나와. 얼마 만의 해피엔딩인가. (203, ‘해피 엔딩’ 중. 내가 무서운 영화나 무서운 소설을 잘 읽는 이유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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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못하는 여자 - 린다 B를 위한 진혼곡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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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3 이스마일 카다레.

‘부서진 사월’을 오래전 인상 깊게 읽고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들을 몇 개 모아놨다. ‘H서류’,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광기의 풍토’, 그리고 이 책 ‘떠나지 못하는 여자-린다B를 위한 진혼곡’ 이렇게 오래 꽂혀만 있었다. 그 중 얇아 보이는 걸 뽑아 들었는데, 깜짝 놀랄만큼 재미가 없었다.
주인공은 루디안이라는 극작가인데, 작품 심의가 통과되지 않아 극을 상영하지 못하는 중이다. 오스트리아로 여자친구가 연수받으러 간 사이, 미제나라는 자기 작품의 팬으로 여겨지는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미제나는 그를 만나 책에 저자 사인을 받으면서 린다B에게, 하고 남겨 달라고 했고, 당의 위원회에서 어느날 그를 찾아와 린다B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사인본 책을 들먹이며 그에게 캐묻고 그녀의 자살을 알린다. 루디안은 유배중이어서 수도에 올 수 없었던 린다B와, 자신 앞에서 늘 수상한 모습이었던 미제나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미제나가 당이 보낸 스파이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고, 그녀를 다시 보고 싶어하기도 한다. 다시 찾아온 미제나의 입으로 린다의 죽음의 원인이 될 만한 사건들을 전해 듣는다. 유배지를 떠날 수 없고, 자신이 사랑하는 작가를 만나러 수도로 갈 수도 없는 사실을 비관한 데다 레즈비언으로 오인까지 받으며 졸업파티에서 모멸을 겪은 린다는 음독 자살을 했다. 루디안은 꿈인지 유령인지 모를 린다와의 만남을 겪고, 독재자는 생각보다 빨리 망하고, 린다와 린다의 가족은 유배지에서 풀려나 수도 티라나로 향한다.

자유가 없는 세상에서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로 죽거나 창작에 방해를 받거나 이동이 제한되거나 사랑이 엇갈리거나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구나, 뭘 하고 싶었는지는 대충 알겠다. 그런데 작가 주인공을 세워서 그 작가의 사생팬들이 작가를 너무 사랑하지만 유배 때문에 그에게 닿을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팬을 대신해 그녀의 친구가 작가에게 접근했다가 사랑에 빠져 그가 만졌던 가슴을 팬인 친구에게 만지게 하고, 서로 어루만지고, 그게 소문이 나서 난리가 나고, 뭐 이런 전개가 너무 막장으로 보였다. 얼마나 위대한 창작자이길래, 창작은 창작이고 사랑은 사랑일건데 그냥 호색한 양아치가 물정 모르는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한/할 어린 아이들이 엉겨오는대로 허허 거리다가 정체가 뭐냐고 밀치다가 아 또 만나고 싶다, 이러고 있고… 애착이나 친밀감은 느껴지지 않는데 그냥 그 육체를 다시 접하고 싶은 마음, 눈물 젖고 사연 있어 뵈는 미제나에게 연민을 갖기는 커녕 의심하는 주제에 거기에 사랑타령을 하고 있나, 이 작가 이 나이를 처먹고도 사랑이 뭔지는 아는 걸까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훌륭한 글을 쓰고 유명한 사람이라고 홀딱 반해서 앞뒤 안 가리고 그가 있는 곳으로 갈 거야, 하는 여자 아이들 설정도 괴기스러웠다. 감시하고 억압하고 통제하는 정치 권력 까겠다고 이런 식으로 대상화된 소녀들을 실컷 괴롭히다가 죽게 하고 유령 타령하고 그러는 게 읽고 나니 아 나 이거 왜 봄… 이미 사 둔 소설들 어쩌지… 싶은 것이다. 전개도 문장도 정신 없고 영 비호감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 조금 알려졌다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감으로 책을 사 모으고 미리 호감을 가지고 읽다보면 망한 독서도 생긴다. ‘부서진 사월’은 피의 값이라는, 집안끼리 이어지는 끝없는 복수라는 알바니아의 독특한 폐습을 서늘하게 그려서 그래도 새롭고 흥미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 이 책은 알바니아가 공산권 하에서 독재 국가로 국민들을 오래도록 힘들게 했구나, 영화 ‘세르비안 필름’보고서 아 세르비아 좆망 국가구나, 그거 보여주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겠니, 싶었던 거랑 비슷하게 내가 잘 모르던 나라들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긴 한데 찜찜하구나, 싶었다. 뭐 정작 쿤데라 영감도 카다레 영감도 프랑스로 망명해서 체제 비판 신나게 하고 쓰고 싶은 거 다 쓰고 뭐 고통은 다른 민중들이 겪는 거고 그걸 전달해주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뭐 간접경험인 거고 고국을 떠나는 것도 고통이라면 고통일 것이지만 뭐 직접 핍박 받는 사람들 비하면 엄살 같기도 하고 방구석 키보드 워리어로 지랄지랄해도 아직 아무도 안 잡아가고 관심도 안 가지고 그러니까 아무래도 감시 받는다고 벌벌 떨지 않아도 되는 내 처지에 이렇게 까는 게 부당하다 싶기도 하고 그렇다. 주절주절 말이 많지만 짧게 말해 재미가 더럽게 없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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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당신들이 사랑을 좋아하지 않은 건 사랑이 당신들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걸 내 탓으로 돌린 거고. 많은 세월이 흘렀고 전쟁도 끝났지만 넌 여전히 어떤 여자의 애정도 받지 못했어.
살인자: 입 닥쳐! 망할 자식!(103, 유령아 살살 때려라…유령이 살해된 사유는 빈정거려서 라고 한다...)

-프롤레타리아독재가 강력할수록 자유는 크리라. 사방에 새겨진 말이었다. 공연장 벽에, 발코니에, 국가의 상징 아래. 이 글이 펄럭이는 붉은 깃발 아래 모두가 조금도 놀라지 않고 행진했다. 이 글귀에 누구도 놀라지 않는데, 거의 쌍둥이처럼 똑같은 문구를 읽고 어찌 아연실색하겠는가? 암이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주리라는 문구 말이다. (160)

-그 시절 린다는 열여덟 살이었다. 다음 ‘서류’는 그녀가 스물세 살이 되면 올 터였다. 그다음은 스물여덟. 그리고 두 번 ‘서류’를 더 받으면 서른여덟, 그리고 마흔셋. 아냐. 그후에는 더 살고 싶지 않을 거야. 고마워, 프롤레타리아독재, 난 네가 얼마나 선하고 올바르고 완벽한지 알아. 학교에서 우리 머리에 그렇게 주입했으니까. 그렇지만 난 너무 지쳤어...이런 삶을 더는 못 살겠어. (183)

-말하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한 그 비밀이란, 신임받는 간부들에게만 제공되는 기밀 회보에서 읽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비밀 중 하나로, 어느 날 왠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딸에게 얘기해준 것이었다. 그 회보에는 국가의 적들이 한 말이 실려 있었는데, 알바니아는 감옥과 유배지에만 자유가 없는 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고, 티라나에도 자유는 전혀 없으며 다른 곳도...그 어디에도 자유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적들이 하는 말이었다, 물론.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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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제도 - 월리스의 항해경로 지도 + 월리스 연보 + 월리스 논문 수록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지음, 노승영 옮김 / 지오북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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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2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월리스에 대해 알게 된 때는 2019년에 ‘깃털도둑’이라는 책을 읽으면서였다. 처음에는 픽션인 줄 알고 흥미롭군, 하고 읽었다. 월리스란 탐험가가 기껏 수집한 영국 박물관의 새 박제를 어떤 놈이 깃털 뽑아서 낚시용 미끼(플라이) 만드느라 야금야금 훔치는데 제대로 관리, 감시가 안 되어서 범행을 되게 늦게 알게 되고 표본들은 잔뜩 훼손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거기에서 월리스란 사람이 ‘말레이 제도’란 책을 썼고, 다윈보다 비슷한 시기, 어쩌면 조금 이르게 자연선택설을 발견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월리스가 탐험한 말레이 제도 중에서는 보르네오 섬의 코타키나발루에만 가 봤다. 거기에서 배 타고 조금 더 들어가는 가야 섬이란 곳에서 묵었는데 좋은 경험이었다. 섬에는 고양이 만한 도마뱀, 강아지만한 멧돼지, 커다란 뱀, 흰개미, 그런 게 있었다. 난 열대 체질 같아… 물론 에어컨 잘 되는 숙소에 묵고 수영장에서 노닥노닥했으니 좋기만 했겠지만, 고수도 좋고 두리안 같은 열대과일도 좋다. 로션 안 발라도 건조해지지 않는 피부 상태가 거기서는 내내 유지되어서 더 좋았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 강물 따라 배타고 가며 봤던 반딧불 무리도 인상깊었다.
이 지역을 언제 또 가 볼지 모르지만, 거의 200년 전 월리스가 배 타고 이 섬 저 섬 다니며 보고 관찰한 것들을 간접 체험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책 두께가 만만치 않아서 사 놓고 펼칠 결심하는 데까지도 오래 걸렸고, 실제로 읽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지만, 뭔가 같이 갖춰둔 종의 기원보다 먼저 이 책을 읽는게 월리스를 예우해주는 기분을 혼자 느끼고 있었다.

오랑우탄 사냥 이야기는 조금 슬펐다. 표본 채집한다고 총으로 엄청 쏴 대고 얼마난 어떤 개체를 어디서 어떻게 잡았나 어떻게 가공했나 그걸 다 자세히 적어 두었다. 네 덕분에 멸종 위기종 아니냐… 두리안 농장 원주민들은 두리안 훔쳐 먹는 오랑우탄 잡아준다고 좋아했다고 주장하지만, 월리스 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유럽인들이 총질해서 수많은 종을 절멸 시켰을지… 자연사 연구에 많은 표본을 제공하고 거기에서 자연선택이란 통찰을 이끌어낸 것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 과정까지는 오구오구 못하겠다. 오랑우탄 살려내…

라자라는 통치자가 세금으로 벼가 제대로 수확 안 되자 여러 꾀를 써서 주민 수만큼 바늘을 내게 하고, 그걸로 크리스란 칼을 만들어 신성시하면서 동시에 인구 조사한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몰라도 매우 인상깊었다. 월리스가 아니었으면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했겠지. 지혜의 상징이 되는 칼이 원주민들의 사치재 내지 난동 흉기가 되는 것을 보면 섬뜩하기도 했다. 칼이 나쁜 게 아니라 칼을 쓰는 손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난 늘 칼이 무서워서 설거지 마친 주방의 칼들을 꽁꽁 숨기는 버릇이 있다(식칼 들고 가스레인지 상판 내리꽂아 엑스칼리버 만드는 부친 하에 양육되면 생기는 트라우마).

가끔은 유럽 중심주의적인 생각과 자기 사상을 풀어놓기고, 영국이나 포르투갈의 통치나 개척 방법의 불합리성에 불만을 표하며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 방법을 찬양해서 불편하기도 하지만, 시대적이고(19세기) 사회적인(대영제국인) 한계도 있겠지 싶었다. 그렇지만 오지의 험한 바다와 진창길과 거친 숲을 헤쳐가며 새롭거나 드문 생명체들을 찾아 나서는 열정을 보면, 이건 아무리 돈벌이가 되더라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짓 아니면 못하겠네, (실제로 채집이나 뱃일 거들면 돈 준다고 해도 힘들어서 안 한다고 도망가거나 거절하는 원주민들이 많았다) 싶었다. 나보다 약간 젊은 시절의 월리스 아저씨는 참 열정적으로 살았네, 본국과 엄청나게 떨어진, 유럽인 관점에선 거의 지구 끝이나 다름 없는 동네를 겁없이 헤집고 다녔네, 내가 딛고 다니는 범위는 참 좁고 좁구나, 새삼 느꼈다.

극락조를 향한 집념과 이 새의 표본들을 구하기까지 고생했던 과정들을 읽으면, 이건 정말 과학적 탐구심 때문일까? 돈 때문일까? 아름다움을 향한 집착일까? 남들이 못 본 걸 먼저 발견하고 이름 붙이는 영광을 위한 걸까? 아마도 복합적인 이유겠다 싶었다. 오랑우탄과 마찬가지로 극락조도 무역 거래 품목으로 값지게 거래되고, 워낙 희소한데다 유럽인들까지 극락조 채집에 가세해서 이 아름다운 생물이 개체 수도 많이 줄었겠다. ‘월리스흰깃발극락조’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극락조’(421)를 발견한 덕에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확실히 이뤘겠다. 월리스 씨는 여러 조류와 곤충류 등등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자연 선택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다윈과 나란히 논문도 올렸고(비록 덜 유명해졌지만) 이 두꺼운 책 ‘말레이 제도’와 그밖의 서적들도 남겼다. 덕분에 내가 19세기 말의 유럽인이 동남아시아 지역과 오세아니아 지역 일부를 뒤지고 다닌 흔적을 따라갈 수 있었다. 독서대 책잡이가 제대로 버티지 못할 만큼 두껍고 버거운 분량이었지만, 빙긋 웃게 하는 부분도 제법 있었다. 월리스라는 탐험가 자체가 나쁜 유럽놈 같지 않고 실제는 어땠나 모르겠지만(자기 책이니까 최대한 원주민한테 부당하게 굴지 않은 척 했을 수도 있지만) 벌레랑 새 덕후이면서도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새와 벌레와 식물을 한참 들여다보고 저기 좀 봐, 하는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되는 게 어렵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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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펄프 과육이 먹는 부위이고 그 농도와 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버터 같은 진한 커스터드에 아몬드 향을 진하게 첨가했다고 하면 대충 이해가 되겠지만 여기에다 크림치즈, 양파 소스, 브라운 셰리, 그 밖의 독특한 맛이 어우러진다. 과육에는 어떤 과일에도 없는 진하고 차진 부드러움이 있는데 이것이 풍미를 더한다. 시지도 달지도 즙이 많지도 않지만 전혀 아쉽지 않다.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이다. 메스껍거나 그 밖의 안 좋은 풍미는 전혀 없으며 먹을수록 더 먹고 싶어진다. 사실 두리안을 먹는 것은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 맛을 보려고 동양을 여행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112-113, 그렇다, 두리안 이야기였다. 이 부분을 읽기 직전에 이미 냉동 두리안 과육을 주문했을 만큼...월리스 씨 취향이 저랑 겹치시네요.)

-이것은 술라웨시 섬 원주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보편적인, 따라서 명예로운 방법이며 난국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애용된다. 로마인은 자신의 칼에 엎어졌고, 일본인은 스스로 배를 가르며, 영국인은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박살낸다. 부기족의 방식은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많은 이점이 있다. 사회에서 부당한 처우를 당했다고 생각하거나, 빚을 졌는데 갚을 길이 막막하거나, 자신이 노예가 되었거나 아내가 자식이 노름빚에 노예가 되었거나, 잃은 것을 되찾을 방법이 없을 때 사람은 자포자기한다. 이런 사람은 이런 가혹한 처사를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복수하고 영웅처럼 죽는다. 크리스(이 동네 장식적인 칼) 손잡이를 움켜쥐고는 다음 순간에 크리스를 꺼내 어떤 이의 심장을 마구 찌른다. 그러면 거리에 “아묵! 아묵!”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창, 크리스, 칼, 총이 그에게 겨누어진다. 그는 미친 듯 내달리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모두 죽이다가 전투의 흥분 상태에서 중과부적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 흥분이 무엇인지는 겪어본 사람이 가장 잘 알겠지만, 격렬한 열정에 빠져봤거나 폭력적이고 흥분된 행위를 해 본 사람이라면 어떤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것은 정신착란으로 인한 도취 상태이며 모든 생각과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일시적 광증이다. (234-235, 묻지마 학살을 하다가 잡혀 죽는 게 명예로운 자살 방법인 독특한 이야기...amok의 어원)

-야생동물의 삶은 생존 투쟁이다. 자신과 새끼의 목숨을 부지하려면 모든 능력과 에너지를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가장 곤궁한 계절에 먹이를 구하고 가장 위험한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가가 개체와 종 전체의 생존을 좌우한다. 종의 마릿수도 이에 따라 정해진다. 모든 상황을 곰곰이 따져보면, 언뜻 보기에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상, 즉 왜 어떤 종은 매우 흔한데 이들의 근연종은 매우 귀한가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792, 월리스의 논문 ‘변종이 원형에서 끝없이 멀어지는 경향에 대하여’ 중. 1858년 2월 트르나테에서 씀. 바로 발표하지 않고 다윈에게 논평 청함. 다윈의 논문은 월리스 논문과 함께 1858년 7월 린네학회에 제출되었고, 다윈의 ‘종의 기원’은 1859년 11월 출간됨. 누가 먼저일까요? 다윈이 대스타 된 거에 비하면 월리스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그렇지만 그럭저럭 자연사학자로 대접받으며 잘 살다 간 것 같다. 이 책 번역판도 한국에는 2017년에야 뒤늦게 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가축은 모든 변종의 생존 가능성이 같으며, 야생동물에서라면 경쟁력이 없고 생존할 수 없는 변이도 전혀 단점이 되지 않는다. 금방 살찌는 돼지, 다리가 짧은 양, 모이주머니가 부푼 비둘기, 털이 곱슬곱슬한 개는 자연 상태에서는 결코 존속할 수 없다. 이런 열등한 형태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멸종했을 테니 말이다. 야생의 근연종과 경쟁하여 존속할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798-799, 월리스의 논문 ‘변종이 원형에서 끝없이 멀어지는 경향에 대하여’ 중)

-마을에서 말레이어를 몇 단어 이상 구사하는 사람은(술라웨시 섬-마카사르 지역) 한 명도 없었으며, 전에 유럽인을 본 적이 있는 사람도 전혀 없는 듯했다. 이로 인한 가장 불쾌한 결과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를 보면 기겁했다는 것이다. (…) 물소가 나를 발견하면 아이나 가옥에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물을 긷거나 아이들이 멱을 감는 우물에 내가 갑자기 나타나면 순식간에 달아날 것이 뻔했다. 나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괴물 취급 받는 것에 익숙한 적이 없었기에 매일같이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무척 불쾌했다. (291-292, 대부분 환대만 받다가 괴물 보듯하는 사람들을 겪으며 힘든 나날.)

-열대지방에 서식한다는 화려한 꽃들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은 쉽게 대답할 수 있다. 근사한 열대 꽃식물은 우리의 온실에서 재배되었으며 매우 다양한 지역에서 선별되었으므로 한 지역의 풍부성에 대해서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308, K-pop 아이돌만 모아 보면 한국 사람 다 예쁘고 잘 생긴 것으로 착각하는 것…)

-이곳에서는 경외와 조소가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한편으로는 가장 끔찍하고 파괴적인 자연 현상이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바위, 산, 땅이 흔들리고 떨렸으며 우리는 어느 때든 우리를 집어삼킬지도 모를 위험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불필요한 경고에도-진동은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할 만큼 강해지는가 싶다가도 이내 사그라들었다-수많은 남녀노소가 집에서 뛰쳐나왔다 들어가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지진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웃을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나를 따라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323, 유럽인이 동남아시아에서 겪은 지진. 더운 나라에 살고 싶다면서 늘 잊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지진 다발지역이란 사실이다.)

-북유럽 대다수 지역의 주민들은 땅을 안정과 휴식의 상징으로 여긴다. 평생 동안의 경험, 동년배와 동세대 전체의 경험을 통해 땅이 굳고 단단하며 거대한 바위에 물이 풍부하게 들어 있으되 불은 전혀 들어 있지 않음을 안다. 땅의 이러한 기본적 속성은 자기 나라의 모든 산에서 드러나는 바이다. 화산은 이 모든 집적된 경험과 정반대의 사실이다. 너무도 무시무시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이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었다면 땅은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너무나 이상하고 불가해 하기에,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으로 처음 우리에게 소개된다면 누가 말해도 곧이들리지 않을 것이다. (369, 지진-화산대에 살아 본 사람과 아닌 사람의 땅에 대한 인식 차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전무후무한 사치를 즐겼다. 바로 진짜 빵나무였다. (…) 빵나무는 말레이 제도의 여러 지역에서 자라지만 이곳만큼 풍부한 곳은 없는 데다 수확까지의 기간도 짧다. 열매는 뜨거운 잉걸불에 바짝 구워 속을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내가 요크셔 푸딩과 비슷하다고 했더니 찰스 앨런은 우유를 넣은 매시트포테이토 같다고 말했다. 열매 크기는 대체로 멜론만 하며, 한가운데로 갈수록 약간 질기지만 나머지 부위는 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농도는 효모 덤플링과 배터 푸딩의 중간이었다. 이따금 빵나무 열매로 카레나 스튜를 만들거나 얇게 저며서 튀기기도 했지만, 그냥 굽는 게 가장 맛있었다. 열매는 달콤하게 해서 먹을 수도 있고 짭짤하게 해서 먹을 수도 있다. 고기와 그레이비소스를 곁들이면 온대지방과 열대지방을 통틀어 내가 아는 채소 중에 으뜸이다. 설탕이나 우유, 버터, 당밀을 넣으면 맛있는 푸딩이 되는데 매우 은은하고 미묘하면서도 독특한 향미가 난다. 훌륭한 빵과 감자 같아서 결코 질리지 않는다. 빵나무가 비교적 드문 이유는 씨앗을 심으면 늘 실패하고 접붙이기로만 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390, 암본 섬의 빵나무 영업. 나도 먹고 싶어졌다.)

-산 그림자를 빠져나오자 산등성이 한쪽에 깔린 밝은 빛이 보였다. 이내 산꼭대기에서 눈에 띄게 하얀 불 같은 것이 보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저것 좀 보라고 했다. 그들도 그냥 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변을 떠난 지 몇 분이 지났을 때 빛은 산등성이 위로 솟아 있었다. 희뿌연 구름이 걷히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당시에 온 유럽을 놀라게 한 아름다운 (도나티) 혜성이었다. 혜성의 핵은 맨눈으로 보면 밝은 흰 빛의 뚜렷한 원반처럼 보였으며, 거기에서 꼬리가 수평선과 약 30-35도의 각도로 솟았다가 약간 아래로 휘더니 희미한 빛을 솔처럼 넓게 뿌렸다. 꼬리의 곡선은 점차 밋밋해지더니 마지막에는 거의 직선이 되었다. 혜성 꼬리의 밑동은 은하수에서 가장 밝은 부분보다 서너 배 밝아 보였으며, 위쪽 가장자리가 핵에서 꼬리 끝까지 뚜렷하고 날카롭게 구분되는 반면에 아래쪽 가장자리는 차츰 희미해지다 사라지는 것이 이채로웠다. (410-411, 채집 항해 나섰다가 혜성 만나는 운빨. 좋은 기억력과 묘사력)

-이 나비(크로에수스비단제비나비)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마침내 녀석을 잡았을 때 내가 느낀 희열은 자연사학자가 아닌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녀석을 그물에서 꺼내어 멋진 날개를 펼치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피가 머리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임박한 죽음을 예감할 때보다 훨씬 어질어질했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그날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흥분한 이유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430, 바찬 섬에서 신종 나비 잡고 신나서 머리까지 아픈 나비 덕후)

-마상이(517): 거룻배처럼 노를 젓는 작은 배. 통나무를 파서 만든 작은 배.

-하지만 내 눈에 가장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나무고사리였다. 열대에서 7년을 보내면서 이렇게 완벽한 것은 처음 봤다. 지금껏 본 것은 모두 호리호리하고 높이가 3.6미터를 넘지 않았으며 전혀 아름답지 않았지만, 이 숲 여기저기에 풍부하게 흩어져 자라는 나무고사리는 근사한 양치 잎 머리를 공중으로 9미터 넘게 쳐들어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열대식물 중에서 이토록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은 결코 없다. (547, 단언컨대 가장 아름답다는, 9미터 넘는 아루 제도의 워캄 섬 거대 고사리의 삽화는 아쉽게도 없다. 우리에겐 월리스의 자랑-난 봤는데 엄청 예쁨, 니들은 못 봐서 안 됐네-만 남았다.)

-이 잡다하고 무식하고 잔인하고 손버릇 나쁜 사람들이 정부의 그늘에서 벗어나 경찰도, 법원도, 법률가도 없이 이곳에 모여살지만, 예상과 달리 서로의 멱을 따거나 밤낮으로 서로 약탈하거나 무정부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 어찌나 이례적인지! 이들을 보면 유럽에 사는 사람들이 받고 있는 과중한 통치가 이상하게 느껴지고 우리가 과잉 통치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잉글랜드인이 서로의 멱을 따거나 자신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이웃에게 저지르지 않도록 수많은 법률이 해마다 제정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라. 또한 수많은 법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수천 명의 법률가와 변호사를 생각해 보라. 도보에 법률이 너무 적다면 잉글랜드에는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551)

-이렇게 생각해 보면 모든 생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많은 생물은 인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들의 생명 순환은 인간과 별개로 흘러왔으며 인간의 지적 발달이 진행될 때마다 교란되거나 파괴된다. 이들의 행복과 기쁨, 사랑과 미움, 생존 투쟁, 격렬한 삶과 이른 죽음은 자신의 안녕과 영속과만 직접적 관계를 맺으며,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수많은 생물의 동등한 안녕과 영속에 의해서만 제약될 것이다. (558-559)

-건강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면 보관하고 축적할 수 있는 녹말질을 생산하기 위해 노동해야 한다. 그래야 영양가 있는 음식을 규칙적으로 먹을 수 있다. 이 바탕에서 채소, 과일, 고기 등을 식단에 추가하면 더 좋다. (563, 월리스 선생님의 건강 상식, 제대로 못 먹고 사는 부족은 병이 많고 피부도 안 좋다고...)

-처음에는 이 많은 방문객이 우연인 줄 알았지만 이제 이유를 알았다. 몇 해 전에 런던에서 줄루족과 아즈텍족을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판이 뒤집혀 내가 새롭고 낯선 별종이 되어 이들의 눈요깃감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나 자신이 살아 있는 채로 흥미진진한 전시물이 되다니, 그것도 공짜로. (571, 아루 제도 내륙 마을에서 이번엔 피하기는 커녕 매일 모든 마을 사람들이 보러 찾아온다.)

-노드리듯(670): 노끈을 드리운 듯 빗발이 굵고 곧게 뻗치며 죽죽 내리쏟아지는 모양.

-첫 승무원들은 달아났고, 두 사람은 무인도에 한 달간 갇혀 있었으며, 우리는 산호초에 열 번이나 좌초했고, 닻을 네 개 잃었으며, 돛은 쥐가 갉아 먹었고, 소형 보트는 떠내려갔으며, 열이틀이면 충분한 항해가 서른여드레 걸렸고, 식량과 물이 여러 번 부족했으며, 출항할 때 와이게오 섬에 기름이 한 방울도 없어서 나침반 램프를 켜지 못했고, 무엇보다 고롱 제도에서 스람 섬을 거쳐 와이게오 섬에 갔다가 와이게오 섬에서 트르나테 섬에 오는 전 항해 일정 78일, 즉 단 열이틀 모자라는 석달 동안 순풍을 받은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순풍이 불었어야 하는 계절이었는데도). 우리는 늘 바람을 안고 달렸으며 늘 바람, 조수, 풍압과 싸웠다. 게다가 우리 배는 바람의 각도가 90도 이하이면 거의 범주할 수 없었다. 뱃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내 배를 타고 나선 첫 항해가 매우 불운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679, 파푸아 군의 후반부는 지난한 월리스 씨의 항해 이야기가 한참 나온다. 대항해시대 게임할 때 역풍 불어서 외롭고 고독하게 너무 오래 바다 위에서 제발 육지에 닿길 바라던 생각이 난다. 괴혈병, 크라켄, 세이렌 이런 것도…)

-(파푸아 민족의) 머리카락은 매우 독특하여 거칠고 건조하고 꼬불꼬불하며 작은 다발이나 곱슬머리를 이루어 자란다. 어릴 적에는 매우 짧고 촘촘하지만 나중에는 꽤 길게 자라 촘촘하고 꼬불꼬불한 더벅머리가 되는데 파푸아인들은 이 머리를 자랑이자 영광으로 여긴다. (731, 아무래도 내 조상은 아프리칸 쪽이 아니라 파푸아 인들이었던 것 같다. 나도 내 곱슬머리를 자랑이자 영광으로 여겨야 겠군…)

-반면에 파푸아인이 자녀를 더 가혹하게 훈육하는 것은 활력과 정력이 더 큰 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약자는 늘 머지 않아 강자에게 반항한다. 인민이 통치자에게, 노예가 주인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맞서 일어선다. (734, 반항아 파푸아인...점점 내 조상으로 확신하는 중…)

-대지주가 자신의 토지를 전부 숲이나 사냥터로 바꾸어 지금껏 그곳에서 생계를 유지한 모든 사람을 쫓아내더라도 이는 합법적이다. 잉글랜드처럼 인구가 밀집하여 단위면적마다 소유자와 점유자가 있는 나라에서 이는 합법적 살인 권한이다. 아무리 사소한 정도라도 이러한 권한이 존재하고 개인이 이를 행사할 수 있다면, 진정한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야만 상태에 있다. (745, 자연사학자의 결론은 영국 사회를 말레이 제도의 각 사회와 민족에 자신들을 비추어보고 ‘우리는 고귀한 야만인 계층에 비해 결코 실질적이거나 중대한 우위를 유지할 수 없을 것’(744)이라는 데 도달한다. 단순히 미개인들 완전 미개함, 이게 아니라 우리 영국도 더 나을 것 없어, 하는 반성 내지 통찰로 끌고 가는 게 여행의 영향인가 흥미롭기도 하고, 꼭 교훈적일 필요는 없는데 그러고 싶었나 보다 정의로운 월리스 씨, 그런데 다윈에게는 관대하고 겸손했네 싶다.)

+어깨걸이극락조
+파푸아인의 곱슬은 나랑 비슷
+극락조 사냥
+뱀 잡이
+월리스 씨가 분류한 말레이 제도 지역군
+멋있고 잔혹한 크리스 칼
+겨우겨우 뿌순 벽돌 두 권. 소돔120일과 말레이 제도 병행 독서는 좀 과했다. 나 같은 놈 어디 또 있어도 흔하지는 않아서 이번 생에 마주하긴 힘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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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전집 2 :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 사드 전집 2
D. A. F. 드 사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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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09 D.A.F.드 사드. 재독.

사드의 소설에 붙은 해설이나 해설서들은 자꾸 내게 묻는다. 왜 사드를 읽냐고.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 처음에는 궁금했기 때문일텐데, 정작 다들 고약하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읽었단 사람은 못 들어봐서 그럼 제가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고 굳이 자기 희생은 개뿔.
이번에 느낀 건 이 책을 읽으면 역설적으로 평온해진다는 것이다. 이 있을 법하지 않은, 역겨운 상상력이 만들어낸 수많은 고통과 희생이 오히려 현실의 괴로움과 불안과 걱정을 마비시켰다. 그런 부수적인 효과가 있다.

반대로 사드는 왜 이걸 썼을까, 혼자 상상했다. 나와 변기통과 흰두루마리. 세 친구만 덩그러니(아 엉덩이용 도구도 포함해야 하나…) 바스티유 독방에 갇혀 언제 나갈지도 모르고, 바람벽만 바라보며 뭘 어떻게 할지 몰라 미쳐갔을 똑똑하고 지독한 이놈은 하루종일 혹은 며칠을 비워지지 않는 변기통 속 똥과 함께 오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한가운데에는 유독 분변애호의 변태 행위가 많다. 치워지지 않는 것이라면 무감해지거나 사랑해야지 별 수 있었겠어. 그리고 부자유의 분노는 어디로든 향해서, 날 이렇게 만든 놈들, 다 고문하고 강간하고 죽이고 싶다, 그런 상상만 거듭했겠지.

어쩌면 리베르탱으로 대표되는 공작, 주교, 판사, 징세관리인은 구체제의 모순을 떠받치는 원흉들이자, 사드를 가둬놓은 권력자들의 표상일지도 모르겠다. 사드놈도 후작이긴 하지만, 죄수는 죄수인 거고 자유도 뭐도 없고. 날 가둔 이놈들 똥이나 처먹어라, 싶었을 것이고, 자신이 겪는 고통이 이놈들이 가하는 고통이나 비슷하고 부당하다 싶었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쓸데 없이 빌런의 마음이 되어 보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이건 위로가 될 때도 있지만(왜?) 대개는 그 과정에서 기분이랑 마음이랑 뇌가 상한다…

2월 되고도 완독한 책이 오래도록 없던 건, 이렇게 ‘소돔120일’과 ‘말레이제도’ 각 500여쪽, 700여쪽 되는 두 권을 자기학대, 자기치유 번갈아가며 냉탕 온탕 열탕 쑥탕 했기 때문이다. 2013년 다른 번역판으로 이미 본 책인데, 이 세월쯤 되면 별로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새 번역을 보면 이전 번역판이 제대로 된 건지 엉터리인지 알까 싶다는 건 핑계고, 이야기의 설정과 구성, 마지막에 대부분 끔찍하게 희생자들을 처형하고 악당들과 생존자들은 무사히 돌아온다는 결말만 기억에 남았기 때문에 후반부 볼 때는 아 나 왜 이걸 보고 있냐...내 뇌… 안 본 뇌 살려내...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드 읽기는 전혀 성적이지 않고, 쾌락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이 또라이 인물상들의 자연관, 세계관, 인간관 같은 것에 수긍하지 않으려고 싸워야 하고, 미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만큼 자유롭지 못한 사드 놈을 동정하다가도 미친년 왜 이딴 추악한 걸 상상하고 써질러낸 놈에 공감해, 해야 하고, 쉬지도 않고 이어지는 타락과 학살의 장면에 뇌가 썩는 걸 느끼며 야...이 정도면 현세에 만족해야 하지 않겠냐, 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일단 사드 감옥을 탈출했다… 살았다….

+밑줄 긋기
-알린의 아비이자 삼촌인 주교는 그녀를 친구들에게 양도함으로써 나머지 세 여자들의 남편이 되었지만, 질녀에 대한 기존 권한은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31, 복잡한 인척관계에서 대표적 막장인 한 줄만 끌어오기로…)

-하여, 독실한 신앙을 가진 모든 이에게 권하니, 누구든 죄를 범하고 싶지 않거든 이쯤에서 책을 덮으시라. 그다지 정숙하지 못한 줄거리임을 충분히 눈치챘을 터, 미리 단언컨대 그 세세한 내용으로 들어가면 정도는 훨씬 더 심해질 것이다. (60, 친절한 경고. 그치만 여기서 덮은 사람은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만약 강력한 힘을 가진 신이 존재한다면 과연 너희가 그토록 목매는 신을 향한 미덕이,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악덕과 방탕주의에 희생되는 일을 허락하겠느냐? 자기와 비교하면 코끼리 앞의 진드기에 불과할 나 같은 미물이 하루 종일 마음 내키는 대로 모욕하고, 조롱하고, 도발하고, 무시하고, 공격해대는 것을 과연 전능한 신으로서 용인하겠느냔 말이다! (94)

-빌어먹을, 내가 얼마나 저 태양을 공격하고 싶어 했는지, 우주로부터 저 태양을 빼앗거나 아예 태양으로 세상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싶어 했는지 알기나 할까? 그 정도는 되어야 죄악이라고 할 수 있지. 1년 만에 고작 사람 열두 어 명 흙으로 돌려보내느라 제멋대로 저지르는 소소한 일탈 행위를 죄악이라고 할 순 없어. (215, 범죄 스케일이 태양계급)

-“맙소사,” 퀴르발이 말했다. “그것 참 까다로운 친구로군! 똥 좀 입에 넣었다고 화를 내? 그걸 아예 작정하고 먹는 사람들 얘기를 좀 해보라고!”(226, 뱉는 말마다 명작인 퀴르발, 앞의 태양 뒤져, 하는 것도 퀴르발)

-“(…)‘내가 당신에게 복종하는 것은 오히려 당신을 깎아내리고, 나를 당신 위에 올려 놓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뒤르세가 대꾸했다. “바로 그런 생각들이 봉사 행위의 폐단을 입증하는 것이라네. 선행을 베푸는 행위가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말이지. 어쩜 이렇게 보 수도 있을 거야. 다 자기만족을 위한 짓이라고. 하긴 나약한 정신으로 그런 소소한 즐거움에 빠져드는 자들에게는 그것도 맞는 말이겠지.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경멸할 뿐인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웬만큼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걸로 쾌감을 느끼진 않을 거야.” (283, 내신 산출에서 봉사점수가 빠져나가는 중인 이유...아닌가)

-“그러자 공작이 말했다. ”그러니 미치는 것도 각자 나름이라니까. 그 누구의 광증 앞에서도 우린 놀라거나 비난해선 안 되는 거야.(…)“ (312, 공작 급 관용 발사ㅋㅋㅋ미친놈들끼리 위아더월드)

https://m.blog.naver.com/natf/221297784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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