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이 떠난 거리 - 코로나 시대의 뉴욕 풍경
빌 헤이스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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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1 저자: 빌 헤이스.


스스럼없이 모여 하고 싶거나 해야 하는 걸 한다. 치킨과 함께 술을 마시든, 음악을 틀어놓고 땀에 푹 절어 운동을 하든, 원탁에 둘러앉아 회의를 하든.
아픈 사람의 동선이 낱낱이 밝혀지는 일은 없다. 집에서 나왔다고 경찰에 잡혀가지 않는다. 감히 코인노래방이나 헬스장에 갔다고, 정말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미어터지는 지하철,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다들 휴대전화를 들고 각자의 세상에 빠져 있다. 아직도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대부분의 얼굴을 구경할 수 있다.
마스크를 사려고 줄을 설 필요가 없다. 이미 평생 쓰고도 남을 양이 집안 곳곳에 처박혀 있다. 초기에 나온 줄서서 사던 마스크들은 이걸 결국 쓰게 될까 싶게 모양도 안 예쁘고 숨도 더 답답하고 너무 커서 효과가 있을까 싶은데도 못 버리고 가지고 있다.
다들 손을 덜 씻는 것 같다. 손세정제를 일부러 쓰는 사람도 잘 없다. 문고리나 난간을 매일 소독제 묻은 직물로 문지르는 사람도 아마도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을 받은 아이들은 하루 이틀 정도 쉬고 열이 떨어지면 다음 날 조금 안 좋은 컨디션으로 등교를 한다. 마스크를 쓰는 아이도 있고 안 쓰고서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이도 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축구와 농구를 하고, 서로 들러붙어 장난을 친다.

대부분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없었던 날들을 잊은 것 같다.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일상을 누리고 살아간다. 불안과 공포는 모두 휘발되었다. 어떤 것들은 잊어야 살아진다. 바이러스는 도처에 가지가지가 있다. 무뎌지고 무던해진다. 코로나19 감염으로 가까운 사람을 잃었거나 일자리를 잃었거나 건강을 해친 사람들은 남들보다는 더 그때를 떠올릴 수는 있겠다.

그때의 나는. 불안과 무력감, 때론 공포. 그렇지만 인구밀도가 순식간에 낮아진 도시를 거니는 편안함이 공존했다. 가족 중 한 명이 확진이라는 연락을 받는 순간, 부랴부랴 짐을 싸서 독서실을 나오던 생각이 난다. 나중에 걸린 독감이 더 아팠던 것 같긴 하지만, 코로나19도 지독하게 아팠다. 왜인지 골반과 엉치뼈가 제일 아팠다. 냄새를 덜 맡게 된 건 예민한 나에게는 오히려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걸렸구나, 마침내. 이미 대유행 3년차에 접어들던 때라 백신도 마스크도 큰 소용 없이 한 번쯤은 걸리고야 마는 병이려니 했다.

십수년 전 이야기 떠올리듯 꺼낸 기억들이지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읽는 빌 헤이스의 책은 6년 전 코로나19 시대의 뉴욕을 기록한 책이다. 빌은 사람과 차로 붐비던 뉴욕의 거리가 몇 달 만에 텅 빈 모습을 전후 사진으로 대조하듯 찍어 놓았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걸 글로 쓰던 빌은 처음에는 답답했을 것 같다. 그러나 텅 빈 도시를 돌며 아직 있던 자리에 남아 나름대로 고안한 방식으로 책과 음식을 파는 사람들, 운동하는 군인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과 멀찍이나마 만나고, 문 닫은 곳곳을 사진과 글로 남겨 놓았다.

비슷한 일이 생기면 다들 조금은 더 침착할 수 있을까. 같은 방식으로 대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도 혐오와 탓하기는 남아 있겠다. 걸린 그들과 걸리지 않은 우리, 말 안 듣는 그들과 규칙을 준수하는 우리로 사람 사이를 긋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모두에게 같은 펜데믹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폭락했던 주식을 주워 담아 늘어난 유동성과 함께 부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굴뚝의 연기로 사라졌다. 빌은 최대한 다정한 도시 사람들을 추려 담아 놓았지만, 나는 겁에 질려 아무나 미워하던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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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쓰는 거야-지적으로, 창조적으로, 비판적으로, 생각을 불러일으키도록-지금 이 시대에 사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서. (31, 빌에게 올리버가 건넨 말.)

-우울증에 대해서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사항은 우울증을 ‘하나의 우울함’으로, 마치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인 것으로 다루지 말라는 것이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어쩌면 평생-에 걸쳐 형성된 많은 부분들-비탄, 트라우마, 학대, 고립, 거부, 억울함, 돈 걱정, 경력 후퇴 등등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두드러지는 단 한 부분에라도 초점을 맞출 수 있고 그걸 분리해낼 수 있다면-그래서 그 안에 들어 있던 진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그동안 지고 있던 짐은 현저히 가벼워진다. (54, 이 년 반 째 한 주에 한 번 상담을 받다가 코로나로 인해 줌 상담을 받게 된 빌의 말.)

-그리고 이 강요된 고독과 고요 속에서, 너는 때때로 네 생애의 어떤 순간들을 돌이켜보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말해진 것들과 말하지 않은 것들, 행해진 것들과 행하지 않은 것들, 표현된 사랑과 표현되지 않은 사랑, 네가 받은 그 모든 감사한 일들, 네가 느낀 그 모든 감사함. (88, 외로움과 고요가 공존하던 시절. 불안과 두려움도.)

-“안녕.”
“안녕.”
“당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인 것 같아.”
“아냐, 안 잃어버렸어. 난 여기 있어.” 내가 말한다. (118)

-이 도시는 너무나 밀도가 높고, 너무나 긴장되어 있고, 너무나 촘촘하고, 너무나 스트레스가 심하고, 너무나 더럽고, 너무나 다양하고, 외부와의 접촉면이 너무나 거칠고, 다들 자신의 감정을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내서, 이따금씩 낯선 사람의 도움을 얻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154, 내가 사는 곳이 뉴욕인 줄 몰랐다.)

-“해봐. 내 나이가 되면 내가 한 일 때문에 후회하진 않아. 안 한 것들 때문에 하게 되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범죄자야.”
나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 말 기억할게요. 늙은 범죄자.” (200-201, 나이 차 많은 게이 커플의 다정한 대화.)

-이 망할 놈의 산 너머에는 과연 뭐가 있는지 보고 싶다. (204, 이 독후감의 전반부를 참조하세요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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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3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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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6 저자:박완서.


박완서 단편소설집 3권은 1979년부터 1983년까지의 발표작을 모아 놓았다.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의 작가가 그린 소묘에는 그보다 젊은 30대 언저리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그런가 읽기에 퍽 재미있었다. 경제 성장기의 부유층들의 속물성이 자주 나오고, 일하는 여성은 자립에 대한 자부심을, 대부분 가정에 종속된 여성들은 공허와 지겨움과 알 수 없는 불안과 바깥 세상에 대한 끌림을 보여준다. 중년의 글이다 보니 늙음도 화두가 되었는지, 불쌍하거나 지독스러운 할머니들도 많이 나온다. 남자 화자가 나오는 소설도 제법 있었는데, 과거에 스쳐간 인물의 죽음 근처를 지켜보는 이야기가 여럿이었다.

에스엔에스에는 그 사람의 가장 즐거운 순간, 이색적인 먹거리, 차려입고 한껏 꾸민 모습이 양지에 드러난다. 반대로 온갖 시궁창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음지 방송이라고 망가진 자신의 삶과 밑바닥까지 떨어진 존엄성을 보여주며 관심과 돈을 받는다. 지금 삶들을 바라볼 구멍은 그렇게 극단적인 것들이 많다. 이 소설집의 소설들처럼 그 중간 어딘가에서 행복을 의심하고 번민하는 이야기는 역시 문학뿐일까, 그런데 최근 한국 문학을 잘 안 보게 되어서 나는 이 시대도 잘 못 알아보겠다. 그냥 어딜가도 들리고 보이는 건 에이아이요. 이야이야오.

에이아이 역량 강화 연수라는 걸 필수 참여라고 해서 참석했다. 젊고 부지런한 강사 선생님은 게으르고, 새로운게 벌써부터 두렵고, 귀찮은 나같은 인간한테 세상에는 당신이 모르는 이런 도구들로 성능 좋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고 알려주었다. 신기한 것도 있고, 벌써 써먹고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만 잘 모르던 게 대부분이었다. 도구는 알았으니 써 먹기는 내 몫일텐데, 누구 말대로 나이 들면 머리가 굳고 유연성이 떨어지고 그야말로 꼰대가 되어서 새로운 게 어렵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이제 더는 어리지가 않다.

뜬금없는 여러 어린 아이들이 사탕, 볼펜, 키링과 위로 편지 겸 반성문 같은 걸 줄줄이 들고 와서 당황했다. 아이들은 고맙고 착한 말을 꾹꾹 눌러 담아 주었지만, 선생님이 최근에 당한 일을 알아요, 하고 언뜻 비치는 편지글을 읽고는 섬뜩했다. 소문이야 날 수 있는 거지만 상황과 순서가 다르게, 또 사안을 다룬 이들 외에는 자세히 알 수 없을 일들을 아이들이 꺼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수업을 들어간 반 아이들이 뭔가 나를 측은하게 보고 원래는 까불던 애들도 행동을 삼가고 시험이 막 끝났는데도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누구냐. 누가 동네 사람들-하고 다니냐...
당혹감과 불편함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바깥의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 짐작만 할 뿐, 그들의 프레임도 음모도 나는 알 수 없다. 그냥 어쩌다보니 일이 일어나고 그래도 그 공간에서 적당히 버티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소설은 아니지만 적당히 나 사는 꼴을 독후감에도 묻혀 놓고, 책 안 본 날은 잡잡글도 쓰고, 그렇게 남기는 것 말고는 더 할 바를 모르겠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그게 그런게 아니었다, 할 수도 있고, 그런 일이 있었지 할 수도 있겠다. 저런 걸 썼구나, 하고 흐뭇할 때도 있는데 저게 뭐야 왜 저랬대 이러고 으으으 하면서 덮어버리는 글도 있다. 나의 나중 독자인 나에게 오늘은 이 정도만 남긴다. 기분이 좋은 하루는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시간은 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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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기운만 있어 봬도, 노인네가 옷을 얇게 입으시니까 그렇죠. 화장실만 자주 들락거려도, 노인네가 과식을 하시니까 그렇죠. 질긴 거나 단단한 걸 먹으려 해도, 노인네가 그걸 어떻게 잡수시려고 그래요. 이런 식으로 그 여자는 모든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나하나 간섭받으면서 늙은 여자로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젊은 여자는 아이를 낳았다. 늙은 여자에게 손자가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젊은 여자는 늙은 여자를 할머니라고 불렀다. (32, ‘황혼’ 중. 아 이거 불효새끼 나인데, 거울 치료인가…)

-먹는 것이라면 쓴맛이라도 맛이 있어야 하고 썩는 내라도 냄새가 나야 한다. 그러니까 무미무취한 것은 먹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맛은 먹는 게 아닌 걸 먹는 맛이다. (40)

-고려장 이야기는 곧 그 시대의 늙은이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 같은 거였다. (49)

-그러나 늙은 여자는 지금 정말 불쌍한 건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임을 깨닫는다.(51)

-혼자 살 수 있는데도 같이 살고 싶은 남자를 만남으로써 결혼은 비로소 아름다운 선택이 되는 것이지 혼자 살 수가 없어 먹여살려줄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결혼이란 여자에게 있어서 막다른 골목밖에 더 되겠느냐는 게 후남이의 생각이었다. (96,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3’ 중. 3대에 걸친 연작소설의 마지막이었다.)

-후남이는 거듭한 고배로 의식은 더욱 명료해져 눈 아래 거대한 도시, 그 갈피갈피에 여자 길들이기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가 공룡처럼 징그럽게 도사리고 있음까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99, 직장 내 커플의 혼인 후 여성의 퇴사를 종용하며 부부를 진주, 속초로 찢어 발령낸 나쁜 회사가 있었다. 저렇게 지켜내려는 일자리를 나는 왜 온마음으로 밀어내고 있나…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는 예측할 수 없는 변덕으로 개인을 씹었다 삼켰다 뱉었다 하는 집단의 폭력과 개인의 무력에 대해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 어떤 좋은 한때가 전 생애를 덮을 만큼 부풀어오르고, 재차 그것들끼리 결합해서 더 큰 간판이 되고 싶어하는 그 끈덕진 힘은 무엇일까. 배우성씨는 사람들마다의 좋은 한때에 대한 더러운 집착과 집단이란 것의 터무니없는 허구에 대해 이를 갈아붙이고 싶은 건 시늉뿐 어쩔 수 없다는 엄살쪽으로 편안히 기울고 있었다.
(157-158, ‘천변풍경’ 중. 왕년에 잘나갔다는 노인들이 모인 백수회란 단체에 뜬금 없이 가입된 배교수의 생각이다. 나이듦은 못마땅하던 것들에 하나씩 체념하는 건가 싶다.)

-남을 감쪽같이 속이려다가 탄로가 나면 무안하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려다가 탄로가 났을 때처럼 구원의 여지가 전혀 없이 무안하진 않을 것 같았다. (178, ‘천변풍경’ 중. ‘천’의 한자가 내(개울)가 아닌 샘(약수터)이었다는 걸 다 읽고서 알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이 새로운 발견에 철저하게 무관심하려 들었다. 관심이 미구에 사랑이나 미움, 동정, 실망, 분노 등 불필요한 정서를 유발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387, ‘무서운 아이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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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웃음소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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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4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서사는 뻔하다. 한 부유한 남자가 어린 여자에 미쳐 부인과 딸을 버려두고 떠났다가 시각을 잃고 목숨까지 잃는다. 한 문장으로 스포일러 끝.

주요 인물
여자에 미친 남자: 알비누스
어린 여자: 마르고트
어린 여자의 전/현 애인 겸 알비누스 친구인 화가: 렉스
여자에 미친 남자의 가족들: 부인 엘리자베스, 가엾은 딸 이르마, 처남 파울

그렇지만 나보코프 선생에게 중요한 건 디테일이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문장을 차곡차곡 쌓고, 나중에 쓸 복선 거리도 던져 놓고, 잠시 등장하는 인물이라도 캐릭터를 갖춰 준다. 끝은 대부분 비극이지만, 그 순간조차 읽는 사람을 웃게 만들려고(해학이든 조소든 냉소든) 밑밥을 열심히 깔아놓는다.

나보코프의 소설 속 인물은 대부분 어리석어서 죽거나 망한다. 그리고 렉스나 마르고트처럼 더 사악한 인간들은 유유히 장면을 빠져나간다. 그래도 이 소설에서 모두 나쁜 인간만 나오는 건 아니다. 눈먼 매형을 구렁텅이에서 끄집어 내는 파울과 패가망신에 눈까지 잃은 전남편을 집에 들여주는 엘리자베스가 있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수도 있었던 알비누스는 너무도 어리석었다. 눈이 안 보이는데도 마르고트를 처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알비누스는 자기 죽을 곳으로, 원래 집으로 제 발로 찾아간다.

어떻게 줄여도 이야기가 후져진다. 나보코프 소설들은 소재만 들으면 그게 뭐야, 하지만 읽어봐야 작가가 열심히 가꾼 구조물을, 길을, 미로를 겪을 수 있다. 최초 발표 당시 제목은 카메라 옵스쿠라, 바늘구멍 사진기였다. 조그만 구멍을 뚫어주고 어둠 상자를 거쳐 거꾸로 된 장면을 보여준다. 뜻을 알고 보면(안 찾아보면 몰라서 탈이지) 이전 제목이 어둠 속의 웃음소리 보다는 나은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네 사람 분의 이불을 빨고 말렸다. 먼지망에 걸린 이부자리 먼지는 평소(회색)와 달리 하얬다. 이불 위로 침구 노즐로 청소기를 돌리면 다른 떄보다 훨씬 곱고 입자가 미세한 먼지가 먼지통에 쌓인다. 아마도 사람과 이불의 구성 물질이던 애들이 서로 비비대다 떨어져 나왔을 것이다. 나는 그걸 그냥 쓰레기봉투에 쏟아 버린다. 어디엔가 그런 먼지들을 모아서 소조를 빚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소설쓰기도 비슷한 것 같다. 먼지야, 하고 망각으로 떨어버리든가, 미친놈처럼 조물딱대다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와 사람 모양을 갖춰놓든가. 오늘의 나는 쓰레기봉투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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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결혼 직전에 베를린에서 못생긴 얼굴에 여위고 따분한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토요일 밤이면 찾아와 자신의 과거를 자세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늘 염병할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 뒤 그의 품에서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자신이 아는 유일한 프랑스어 구절, “그게 인생이죠C‘est la vie˝로 마무리를 하곤 했다. (15, 여기서 긁혀서 알비누스-안 좋은 연애운 열거 중- 개새끼네 하면 내가 진 거야?)

-그녀는 손이 빠른 편이라 두 달이 지나자 열두 개의 방에서 그의 과거의 삶은 완전히 죽었다. (115, 화장실3개라 치고, 주방, 식사실, 거실, 응접실, 이렇게 쳐도 방이 다섯 개는 되는 구나...알비누스 엄청 부자였군.)

-어쩌면 그에게서 유일하게 진짜인 것은 예술, 과학, 정서의 영역에서 창조된 모든 것은 대체로 영리한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타고난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74, 그 영역만일까요. 나는 사회 자체가 속임수 같다.)

-그녀를 죽일 수는 있지만, 그녀와 헤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21, 아이고…알비누스야 넌 엘리자베스한테 총 맞아도 할 말 없다.)

-어둠 속에는 빛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꾸불꾸불한 길은 기어다니는 더러운 생물이 사람 피부에 남기는 자취처럼 그의 안에 타올랐다.(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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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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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9 저자: 배수아.


쿠팡 구독 한 달 하고 해지해서 오늘이 쿠팡 플레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특별휴가(그런 걸 받았다)가 끝나가는 오후, 시즌5의 후반부와 시즌6을 아직 다 보지 못했다. 2배속으로 시즌6 초반부까지 달려왔을 때, 어후 갑자기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가 지겨워졌다.

조금 읽다 만 책을 펼쳤다. 내가 비교적 최근에 나온 배수아 작가의 책에서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면, 조금 더 옛날로 가 보면 알아들을 말이 조금 있을까 했다. 이 소설은 2000년도에 나왔다. 26년이란 시간은 어마무시하다. 영원히 삼십 대에 머물러 있지는 못하므로, 요즘의 연애 없고 혼인 안 한 젊은이들의 삶은 짐작도 못하겠다.

이 책과 보던 드라마의 시기가 크게 차이나지 않아서 그런지, 뉴욕의 네 친구들과 한국 대도시의 다섯 친구들의 모임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다만 뉴욕 친구들은 연애도, 섹스도, 직업에서의 성공도, 밤에 나가서 신나게 노는 것도 갈망한다. 한국 친구들은 함께 모이기는 하지만 다른 친구가 없을 때는 험담도 하고, 스스로 혼인하지 않음을 선택했는데 막상 먼저 결혼 발표를 한 친구 앞에서는 네가 손해 보는 거다, 말하면서 은근한 질투를 느낀다.

1인칭 화자인 유경은 자신의 원가족을 혐오한다. 그나마 사촌인 금성과 마음을 트고 지낸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 다닐 때까지 사귄 교진(오빠의 과외 선생이었음)을 우연히 마주치고는 또다시 보고 싶어 한다. 직장상사인 유부남 아저씨 길이란 인물과 술김에 자긴 했지만, 그에게 관심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막상 길이 유경에게 자신의 파트너가 되라고 강요할 때는 거절한다. 욕 박고 차단, 직장이라 그런 게 안 되나? 요즘 같으면 거절 이후에도 계속 들이대는 것은 직장내 성폭력, 괴롭힘, 스토킹 이런 게 되지 않나. 한 두 번 얽었다고 마치 자기 소유물인양 집착하고 거절당하자 얼굴에 물을 뿌려대고 화를 내는 길 아저씨 새끼가 정말 징그러웠다. 그런데 유경은 자신은 탈연애주의니까, 같이 자는데 지장 없고 연애 감정 느낄 필요도 없는 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론을 내린다.
내가 뭘 본 걸까. 주체성의 결론이 왜 그렇게 가는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작가는 그저 속물성을 가진 인간상들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사랑이란 현상도 관념도 믿지 않고, 사람에게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애초에 기대를 걸지 않고, 딜도를 선물하는 사촌에게 섹스하자는 말도 하고, 그래도 잘 남자는 필요하니까 연애 없이 끌리는 남자랑 하긴 할래, 그러는 화자의 모습이 뭐랄까...안타까웠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결정에 대해서는 그 이유든 뭐든 그럴 수 있지, 했는데 연애로 규정짓는 행위도 안 하겠어, 하는 건 뭐 본인의 선택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삶과 사람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래도 수의사가 되겠다고 공부 열심히 하는 건 대단하긴 했다. 2000년도에는 회사 다니면서 야간 대학 편입해서 수의사 되는 게 가능했던 시대였던가… 암튼 모두가 좋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유경아, 사랑을 믿어봐, 라고 할 자신은 없었다.

책이 나오던 시기에는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언니 오빠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은 없다. 소설에 그런 흔적이 남아 있을까, 싶었지만 사람 사는 거 특별히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제목이 궁금하게 해서 읽게 되었는데, 그 제목이 소설 속 문장으로 놓인 부분은 감흥이 없었다. 심지어 지겹다면서 “그와 관계를 갖기로 마음을 정리했어.”하고 다짐까지 하는 걸 보면서 그냥 어질어질했다. 배수아 책은 이거 말고도 더 사 둔 게 있는 것 같은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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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이란 잘 체계화된 폭력이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서 결혼을 하지 않으면 섹스를 할 수 없고 아이를 낳을 수 없고 가족수당을 타지 못하며 주변에 돌봐줄 사람이 하나도 없을 말년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채 느끼지 못하는 극심한 폭력이다.
사람들은 남자/여자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먹이와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서 일한다. (71,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의 결혼관은 이렇다고 한다. 이 중 첫문장만 마음에 든다.)

-그 아이는 원래 노동이란 걸 혐오했다. 노동이란 파출부나 가난한 집 딸이나 그리고 가끔은 엄마 같은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노동은 손에 굳은살이 배기게 하고 마사지를 받으러 다닐 시간이 없게 만들고 스트레스 때문에 히스테리가 되기 쉽다.(…) 미경은 내가 알기로 한 번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 (119, 노동 혐오는 너무 나갔지만, 노동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내 자신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지 않다. 유경, 이겨내라, 이겨내! 세상 사람들의 온갖 달콤한 혓바닥에 속아서 자신을 내주지 마라. 기억하라. 너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너뿐이다. 모든 관계는 허울이다. 기댈 생각은 하지 마라.(129,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나도 저렇게 마음 먹었을 것이다. 주체성에 대한 집착.)

-기억 아득한 젊은 날 나는 그를 사모했다. 지금껏 내가 경험한 또 다른 가장 고독한 것이었다. (131, 어제 읽은 책도 사랑하면 고독하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정형화된 역사에 익숙해져서 다른 형태의 진술을 해석하지 못한다. 아니 다른 형태의 진술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 역시 교진과 나에 대해서 지금 말하게 되었을 때 그 우화의 정형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말이란 도처에 함정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길은 단지 침묵뿐이다. (135, 나도 틀에 박힌 독후감 말고 다른 걸 써 봐야 하는 걸까.)

-지금 잘생기고 돈 많은 미혼 남자를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별 볼일 없고 지지부진한 노예 상태로 사는 것이 결혼이지만, 그래도 자연도 하는데 내가 한 번의 경험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172)

-나는 앞으로의 인생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행운이나 성공도 없지만 치명적인 파국이나 불이익을 겪지 않고 진행될 것으로 믿는다. 그 대신 한 발 한 발 앞으로 가는 거다. (188, 이정도면 엄청 낙관주의 같은데)

-지금 당장 나에게도 꿈이 있다. 탈한국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프라이드도 아니다. 바로 웨이터가 서 있는 저 문으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다. 근사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는 척하는 계급의 그런 사람이. 상대편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드름과 자신이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존재라는 오만한 관용으로 뭉친 사람이.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헤게모니의 승자가 된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에게 아주 쿨하게 말해 주는 것이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하고. (207-208, 빌드업이 길었는데 한 마디 해주는 게 너무 약했다… 자본주의의 발기 부전 돼지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나.)

-(…)생각이 앞으로 나가지 않을 때는 무한급수와 확률 분포 같은 문제를 풀었다. 수학 문제를 풀고 있으면 인생의 추상적인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218-219, 작가의 말 중, 오우 진심이신가요? 저에게는 적어도 수학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논리적 해석이 안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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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의 연인들 - 소설로 읽는 거의 모든 사랑의 마음
박수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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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8 읽다 중단. 저자:박수현

ㅎ은 댓글을 주고 받다 우연히 이어진 어느 시절의 친구였다. 내 독후감에 형광펜을 긋듯 마음에 닿는 구절을 짚어주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이런 허접한 글에서 무언가를 건져가는 게 고맙고, 부끄럽고, 신기했다.
그 무렵 내가 쓴 단편소설을 봐 주는 친구가 둘 있었다. ㅎ는 세 번째 독자가 되어 주었다. 조금 더 다듬으면 좋게 될 거라고 주로 칭찬을 많이 해줬다. 댓글로 말장난을 하며 서로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나눠 가졌다.
아직 나는 ㅎ의 동생 이름이 기억난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ㅎ을 실제로 본 날도.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만나서 멕시칸 음식을 먹었다. 커피도 마셨다. 살던 집앞에 같이 가보기도 했다. ㅎ이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면서 어떤 예술인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열정을 보였을 때 나는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ㅎ를 보았다.
ㅎ은 내 풀어진 신발끈을 묶어주려고 했다. 나는 정색을 하며 아직 신발끈 묶어준 남자 한 명 없는데, 여자한테 맡기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ㅎ과 나는 개천변을 따라 걸었다. 지하철 역까지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들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ㅎ의 얼굴도 하루 만에 장기 기억에 남기기란 쉽지 않았다. 그냥 그날의 분위기, 방문했던 장소들,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댓글들 정도가 ㅎ의 흔적이다. 나는 공부를 한답시고 독서와 독후감에 소홀했고, ㅎ도 어느 순간 방문이 뜸해지다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가의 연인들’은 ㅎ이 언젠가 읽는 중이라고 언급해서 마련해 둔 책이었다. 소설들을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론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었다. 첫 꼭지가 ‘백년의 고독’이라, 내가 여러 번 읽는 책은 흔치 않은데, 내 인생책 중 하나를 저자는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했다.
일단 프롤로그에서부터 막혔다. 문장의 장식이 내가 소화할 수준이 아니었다. 격하고 감정적이랄까. 그리고 ‘백년의 고독’ 속 사랑에 대한 관점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그런데 난 반댈세, 근친상간의 맥락을 쏙 빼놓고 두 사람의 사랑을 전투와 공격성으로 눙칠 수 있는가?
그리고 소설을 읽은 나는 등장인물들과 가계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그나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 이 책을 펼친다면 인물이나 서사에 대한 소개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대체 누구네 무슨 얘기냐 하고 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은 부분 중에 내가 읽은 소설을 다룬 글들만 골라 보기로 했다. 역시나 다회독한 인생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한강의 ’채식주의자‘ 두 가지만 남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었던(지금은 소설을 사랑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변주곡 같은 구성이 일품인 이 소설을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랑과 질투만 쏙 빼와서 줄거리를 소개하는 게 그야말로 이 서사를 뻔하게 전달하는 듯해서 탐탁치 않았다. 사비나를 ‘토마시의 분신’이라 일컫는 것도 놀랄 만한 해석이었다. 둘은 모노아모리가 아니라는 것 말고는 향하는 방향도, 사랑하는 방식도 정말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를 다룬 부분은 그 징글징글한 형부의 관점에서 욕망도 사랑에 포함시키며, 영혜와 인혜보다는 형부 이야기가 대부분을 이룬다. 이렇게 읽는 게 참신한 시각일 수도 있지만, 시각에다가 작품을 끼워 맞춘 듯보였다. 일단 그 형부의 역겨운 욕망에 이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라캉까지 들이미는 게 별로다 못해 충격이었다.

부제에 소설로 읽는 거의 모든 사랑의 마음, 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 책이 다루는 사랑의 범위는 독점적 이성애로 아주 좁았다. 그 사랑에 관한 틀마저 매우 주관적으로 여겨졌다. 모든 관계를 그런 틀에다가 맞추어 설명하고 해석하다 보니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굳이 꾸역꾸역 읽지 않고 놓아주기로 했다.

목차에 읽은 책이 겨우 세 권. 세상에 책은 너무도 많고 내가 본 건 티끌 수준도 안 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렇게나 저자와 독해의 방식이 어긋나 본 적은 처음이었다. 사실 책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모두의 독서는 저마다의 오독이고, 책은 그럴 수 밖에 없도록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ㅎ이 나와 내 글을 아껴준 만큼 나는 되돌려주지 못했었다. 심지어 ㅎ이 인상깊게 읽었던 책마저 몇 년 만에 읽고는 까 까 까 안 봐를 시전하고 있다. ㅎ와 나는 서로를 오독해서 어느 시절 이야기를 나눴고, 그때는 옛날이 되었다. 나는 또다른 친구들과 또다른 오독을 나누며 살아간다. 지금의 내가 만약 ㅎ이 내 앞에 신발끈이 풀린 채 있다면, ‘도와줄까요?’ 묻고 고개를 끄덕이면 신발을 묶어줄 것 같다. 내가 받은 관심과 칭찬도 어떤 사랑이었을텐데. 그걸 받기만 하고 우리는 멀어졌다. 그렇지만 가끔 나는 ㅎ를 생각한다.

+밑줄 긋기
-결핍을 발견하면서, 그는 이전에 몰랐던 제 고독을 깨닫는다. 나는 이토록 헛헛한 못난이, 빈 곳 투성이었구나. 사랑에 빠지기 전에 그럭저럭 온전해 보였던 그는 갈망과 결핍을 겪은 이후 치명적으로 부족해진다. 구멍이 뚫린다. 불구가 된다. (28, 어떤 사랑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서 선뜻 공감이 안 간다...는 나는 이 방향으로 흐른 건 ‘망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지금 이 순간 닥치는 행복은 ‘원래 없어야 하는 것’인 데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이므로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다.(34, 대체 얼마나 불행한 삶만 이어왔길래…)

-오죽하면 롤랑 바르트는 “여자는 칩거자, 남자는 사냥꾼, 나그네이다. 여자는 충실하며(그녀는 기다린다), 남자는 나돌아 다닌다(항해를 하거나 바람을 피운다).”라고 말했겠는가. (192-193, 뒤에서 상투적 정황이라고 가리키긴 하지만, 여자 남자를 저렇게 단정해 둘로 나눈 말을 인용한 게 맞나 싶었다. 심지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끼워 맞추기에도, 사비나나 프란츠 같은 주요 등장인물을 보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반대로 여성은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어도 단 한 명의 아이만 낳는다.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202, 진화심리학을 빌려와서 이와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다수와의 성관계를 통해 가장 강한 유전자를 얻으려는 전략-내용을 읽은 적이 없어서 이 단정적인 말에 빼애액 하고 말았다.)

-알몸이란 타인에 관한 지식의 마지막 보루다. 사람들은 알몸을 보면 그를 다 알았다고 생각한다.(206, 사람들은, 에서 나는 빼 줄래? 아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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