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190120 김영하
0. 길고 잡스러운 과거회상 주의...
1. 퀴즈쇼
장학퀴즈에 나가봤다. 고2 여름이었다. 내가 뭐 수재도 아니었고 장학퀴즈, 하면 떠오르는 전형의 출전은 아니었다. 그 때 프로그램 포맷이 좀 특이하게 바뀌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 세 학교 각 20명 총 60명이 성가대마냥 우르르 나와서 학교 응원도 펼치고, 그 중 문제를 먼저 맞춘 서 너명이 선발되어 2차전을 치르고, 최종 승자가 지난 주 우승자와 3차전을 겨뤄 이긴 사람이 다음 주에 또다시 출연하는 식이었다.
학교 대표 20명에 (기준은 모르겠고 아마 담임이 추천해서) 선발되었고, 방송국에서 미리 준 키워드들을 나누어 받았다. 20명은 키워드를 적당히 나눠서 각자 인터넷이나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 복사해서 공유했다.
우리학교, 춘천여고, 용산고 대표 학생들이 스튜디오에 모였다. 어설픈 학교 응원도 펼치고, 퀴즈가 시작되었다.
실전은 얼마나 많이 알고 답을 잘 떠올리고 그런게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들 자기 버튼이 고장난 것 같다고 했다. 60명이 동시에 버튼을 두들겨대니 그 중에 벨이 먼저 울리고 답을 할 기회를 얻는 것조차 엄청난 운이 따라야 했다. 초반부터 2차전 진출권 대부분을 용산고 남학생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두 학교는 뻘쭘하게 들러리를 서다 돌아갈 처지였다. 문제를 끝까지 듣고 남들이 모르는 문제를 침착하게 풀려는 전략은 통하지 않았다. 초반에 적당히 듣고 눈치껏 도박을 해야 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강하게, 어, 그냥 눌러봤는데 내 자리에 불이 들어왔다, 엉겁결에 말한게 맞았댄다. 2차전에 진출했다. 응원을 제일 열심히 한 춘천여고는 2차전 진출에 실패해 녹화 끝까지 심드렁하게 앉아들 있었다.
자리를 옮기기 전 파운데이션 수준이나마 메이크업도 받고, 사회자 아저씨가 특기를 묻고 노래를 시켜서 또 시키는대로 불렀다.(그게 또 편집을 안 해서 방송에 나와 밤새 이불킥 했다. What’s going on? And I say hey, hey, hey eh eh-)
촬영 과정은 우리가 보는 편집본과는 사뭇 달랐다. 사회자는 원종배와 류시현이었는데 원종배 아저씨가 거의 리드하다시피 진행했고 피디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진행이 꼬이면 같은 문제를 다시 가기도 하고 애매한 경우 사회자가 누구에게 기회를 줄지 즉흥적으로 밀고 가기도 했다.
나도 문제를 하나 맞췄다. 답이 비비안 리였다. 영어 듣기 같은 것이었는데 사회자가 어떻게 맞췄냐고 물어서 허리 사이즈에 대한 부분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자 사회자는 대뜸 “00학생도 허리가 그 못 지 않은데요?” 뻘 소리를 해댔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했다.
‘지금 공개적으로 성희롱 하신거에요?’하고 그 땐 말하지 못 했다. 아마 어색하고 당황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제작진은 그나마 제정신이었는지 그 부분은 편집되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런 질문을 받았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옛날 분이라도 그 때 참 큰일날 질문을 하셨었네요...건강하시죠? 원씨 아저씨?
다른 학생이 틀린 직후 버튼을 눌러 또 한 번 기회가 왔다 싶었다. ‘답은 불가사리! 불가사리!’ 두근대는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렸는데 원씨 아저씨가 그림이 안 좋다 싶었는지 문제를 다시 읽으려 했다. 류시현씨가 ‘00학생 답할 차례인데-‘했지만 가뿐히 씹혔다. 문제가 다시 나가고 두 번째 기회는 내게 오지 않아 다음 단계 진출은 실패했다. 방청석으로 내려오면서도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았고 아쉬운 마음도 컸다.
민수가 퀴즈쇼에 나가고 퀴즈 ‘회사’에서 결투를 벌이는 동안 그런 일들이 있었지, 하고 떠올랐다. 책의 퀴즈쇼 부분은 방송국의 분위기, 긴장감, 통제되고 연출된 환경, 순간의 실수나 행운, 그런 것들을 나름 잘 살린 것 같았다.

2. 씨버 러버(?)
장학퀴즈 출연 소식은 내가 그 즈음 죽치고 놀던 피씨통신 에듀넷 락동호회에 알려졌다. 화면에 비친 촌년 같은 검은 피부와 커다란 이빨에 나는 괜히 동호회에 알렸지 하고 후회했다. 새천년에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접한 피씨통신은 이미 끝물이었고 내가 접했던 그 공간도 고3이 되면서 서비스가 종료 되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도 민수와 벽 속의 요정 마냥 글자로 반하고 글자로 차이고 글자로 된 꿈을 꾸고 모니터나 휴대전화 흑백 액정 속 문자를 보며 눈물 짓는 연애사를 경험했다. 그 당시 쓴 일기는 온통 그 날 대화를 나눈 아이디들이 이름 대신 적혀 있었다.
피씨 통신으로 시작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인간관계는 싸이월드로, MSN이나 네이트온 메신저로, 다시 카카오톡으로 이어지거나 사라졌다.
내 사이버 러브(?)는 대부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하고 짝사랑으로 마감되었지만 십 수 년 간 한 번도 만난 적 없거나 단 한 번 만난 그 시절 인연들 중 아직도 연락을 하고 도움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있다. 대항해시대에서 배를 만들어주던 친구는 변호사가 되어 법률 자문을 해주고, 미노루 카페에서 만난 친구는 사진사가 되어 웨딩촬영을 해주고, 락동호회에서 만난 문창과 지망생은 소설가가 되어 자기 소설을 보내주고, 뭐 그런 식이다.
민수가 폐인 같은 나날을 보내던 퀴즈방 사이트는 사실 피씨통신 시절의 모습에 더 가깝다. 피씨통신은 약간의 폐쇄성과 고정성 지속성이 있었지만 인터넷 채팅 사이트들은 왠걸, 전부 순간 스치듯 사람을 대하고 목적도 천편일률 뻔해서 그다지 깊은 인연들을 맺은 적이 없다.

3.김영하
68년생 작가가 80년생의 시점으로 이 책을 썼다. 앞 부분은 시공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거쳐온, 내 세대의 이야기를 썼는데도 그랬다. 단편만 보면 얄밉게 잘 쓴다...했었는데 이 책 작가 이름 가리고 보라고 했으면 과연 끝까지 참고 볼 수 있었을까 의문이었다.
나름 폼 안 잡고 거품 걷어내고 쓰려 애쓴 것 같지만, 이렇게 시대와 세대 꼭 집어서 이야기 할 때 작위적이지 않고 공감하도록 쓰는 건 참 어려운 일이구나 싶었다.
작가는 책이 나올 당시의 (2007) 이십대들에게 나름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고충을 대신 말해주고 싶었나 본데...기꺼이 ‘무리수가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하고 싶다.
민수의 심리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건 호감이나 공감이 가기 전에 ‘난 저 정도는 아니야!’하고 부인하고 싶을 만큼 과장된 부분이 많았다. 뭐랄까 삼십대가 이십대를 바라보며 인식하는 프로토 타입? 오리엔탈리즘? 하여간 인물 자체도 좀 청소년 소설 주인공마냥 작위적이었다.
전체 구성이나 소재도 갸우뚱했다. 전반부는 민수의 고난과 퀴즈방에서 만난 벽 속의 요정과의 연애소설에 가깝다. 본격적인 퀴즈 인생은 300페이지쯤 참고 보면 나오는데 그 부분은 뭔가 SF도 아니고 미스테리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뭔가 싶었다. 뭐 이종격투기 도박도 있는데 퀴즈로 싸우는 콜로세움과 도박장도 없을건 뭐야! 하고 야심차게 그렸겠지만, 글쎄, 글쎄였다.
다 읽고 나니 연애소설 한권과 퀴즈쇼 미스터리 한권을 억지로 합쳐 놓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440쪽의 (재앙같은) 분량..참고 읽은 내가 대견했다.
물론 도시의 밤이 찾아오는 묘사나 벽속 요정과 만나기 전과 후의 감정 차이, 휴대전화를 보며 연락을 기다리느라 안절부절하는 부분, 민수와 요정의 좋은 밤 묘사, 마티니 팀내 갈등 표현은 애썼네, 싶기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좋은 표현조차 유치해ㅠㅠ작위적이야ㅠㅠ으 오글오글ㅠㅠ이런 마음에 압도되어버렸다.

이렇게 투덜댈걸 뭘 이리 길게 썼나 모르겠다. 소설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찾은 음악들을 들으며, 묻어두고 싶지만 잠재의식 아래 가라앉아 있다 물 위로 불쑥 튀어오른 흑과거ㅠㅠ들을 음미하며 그 땐 그나마 그거라도 있어 버티고 살았구나, 그런 과거의 어둠이라도 나의 일부겠지 하며 책을 덮고…이런 봉인을 해제하고 몹쓸 것들을 소환한 김영하를..아니 이 책을 산 나를..욕하고 자야겠다.

Muse - Unintended
https://youtu.be/i9LOFXwPwC4
The Doors - Light my fire
https://youtu.be/deB_u-to-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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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21 1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열반인님은 까는 리뷰(?)에 능하실 거라는 생각과, 그래도 좋아하시는 김영하니까 이 정도 하고 봐 주신 것 같다는 생각과, ‘추억담 리뷰‘의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다는 생각과.....

반유행열반인 2019-01-21 11:18   좋아요 2 | URL
추억담 리뷰의 최강자는 역시 syo 님이시죠...사실 까는 리뷰의 정석은 아주 짧고 성의 없게 별 하나와 함께 쓰는건데...왠지 참고 읽은 게 아까워서 보상심리로 긴 글이 나온 것 같아요. 이러면 길고 재미 없는 소설을 길고 재미 없는 리뷰로 상쇄해서 세상의 균형을 맞추고 덜 억울한 듯한...(뉴스피드로 안 본 눈 사고 싶은 분들께는 또 죄송하지만...복수는 이래서 끝이 없는거야...)

syo 2019-01-21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똑같은 포스트가 두 개 올라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반유행열반인 2019-01-21 11:13   좋아요 1 | URL
오 분노의 더블 터치?를 했나보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는 지웠어요.

cyrus 2019-01-21 1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회자의 생각없는 발언이 퀴즈 도전자들의 심리를 흔들리게 하는 돌발 변수가 될 수 있겠군요. 저도 그런 상황이었으면 마음이 흥분해서 다음에 나올 퀴즈가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1-21 19:50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제가 떨어진 건 심리적 위축보다 그냥 준비도 실력도 부족해서 였던 것 같습니다ㅎㅎ

scott 2019-01-21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퀴즈쇼 연재 당시 읽고 영화로도 받는데 반유행열반인 글을 읽으니 새롭네요
많이 투덜거려주세요 더 잘근 잘근 씹어도 됩니다. ^.~

반유행열반인 2019-01-21 19:48   좋아요 2 | URL
왠지 그럴수록 엄한 작가들한테 열폭하거나 안티 같아서 부끄럽긴 한데 어차피 작가님들이 안 볼거...더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ㅎㅎ

syo 2019-01-2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후후. 열반인님이 인싸로의 걸음을 뚜벅뚜벅 걷고 계시는군요.
올해 12월에는 상전벽해가 일어나겠죠.

이 댓글은 성지가 됩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1-22 14:26   좋아요 0 | URL
자꾸 그렇게 놀리시면 저 책도 끊고 서평도 끊고 어디로 사라질지도 몰라요...태생적 아싸에 방 구석 여포라 손가락으로만 떠드는 중인데 (될 리도 없지만)제 게시물이나 그 댓글이 성지 흉내라도 내게 되면 공황장애 같은게 생길지도 몰라요ㅋㅋㅋ

syo 2019-01-22 16:49   좋아요 2 | URL
주머니 속의 송곳이 언젠가 튀어나오는 건 다 송곳 탓입니다ㅎㅎㅎㅎㅎ 전 그냥 언제 터지나 주머니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