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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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1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5년 전에 읽었다. 그러고는 단편전집을 갖추게 되어 언젠간 읽어야지, 하다가 이번에 읽은 전집 1권은 1971년에서 1975년 사이 발표된 소설들이었다. 소설들이 죄다 재미나서 전집이 7권인데 아직도 많이 남은 게 신나고 장편들도 집에 엄마가 갖춘게 있으니 읽을 게 많다. 이렇게 잘 쓴 것들이 많으니 내가 더 후지게 보탤 것도 없고, 그냥 이렇게 읽기만 하고 살면 되겠다.

소설 속에는 수많은 남편들과 부인들이 등장한다. 중산층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까지, 졸부도 나오는 구나, 하여간에 다양한 계층에서 도시의 속물성, 인간 살이의 치사스러움, 그런게 재미있게 그려져 있었다. 40대가 다 되어 등단을 했다는데, 어린 아이들을 업고 글을 썼다는데, 소설가들이 헌정 소설집도 낼 만큼 문학계의 큰 산이었다든데 그런 건 너무 오래 전에 지나가듯 주워들은 이야기이고, 수능 국어 대비 지문으로 토막글을 감질나게 읽던 걸 이젠 마음만 먹으면 원껏 읽을 수 있으니 좋았다.

슬프고 부끄럽고 답답스럽고 시원하고 그런 글들도 있었는데 그런 느낌을 받는 읽기라니, 50년이 더 된 글들인데도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라니 이걸 여태 안 읽었다니 나는 운이 좋구만. 앞으로도 한동안 더 재미있을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중산층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저마다 삶의 면모가 있을텐데, 그런 걸 어디선가 부지런히 글로 남기고 있겠지. 글이 아니라 브이로그 영상과 에스엔에스의 사진들로 이미지만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거기는 다들 윤색되고 좋은 모습, 풍요로운 모습만 한가득인데, 역시 구질구질한 것을 남기려면 글인가, 누군가는 남기고 있겠지, 아니면 쓰지 않아서 없어지고 50년 후의 누군가들은 와 저때는 정말 좋았던 때지, 오해할지도 모르겠어서 불안하기도 하다. 내가 왜?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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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어떤 연속극은, 거피한 다디단 흰 팥이 노르께하게 구워진 겉꺼풀에 살짝 싸인 구리만주 같은가 자못 우물우물 맛있어하는가 하면, 어떤 연속극은 찐득하니 꿀 같은 팥을 얇은 찹쌀꺼풀로 싼 찹쌀떡 맛인가 짜닥짜닥 맛있어하고, 어떤 연속극은 백항아리에 담긴 눅진한 수수조청을 여자처럼 토실한 집게손가락에 듬뿍 감아올려 빨아먹는 맛인가 쪽쪽 맛있어하고, 이 정도의 차이를 바보와 벙어리 사이에, 벙어리와 폭군 사이에 보였을 뿐 결코 어떤 감동은커녕 안타까움이라든가 동정 흥분을 나타내는일이 없었다.
그는 그냥 맛있어하고, 맛있음을 그냥 즐겼다. (122, ‘지렁이 울음소리’중. 우리 시대의 사회관계망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버블티처럼, 크로플처럼, 탕후루처럼, 두바이쫀득쿠키처럼, 달디단 것들도 금세 질려 빠르게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겠지.)

-나는 왜 사람들이 어른이 됨과 동시에 하나같이 행주처럼 무기력해지고, 자벌레처럼 비열해지고, 잘 삶은 야채처럼 보들보들, 나글나글해지는지를 몰랐었다. 왜 어떤 악덕에도 순종만 했지 정직하게 싸움을 걸 줄을 모르는가가 궁금했었다. 나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의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한 가시를 인두겁과 함께 타고 태어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요즈음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 어디다 써먹으려고 가시를 감추고 숙맥 노릇을 하나 그걸 몰랐었다. 그런데 난 지금 그걸 알아낼 꼬투리를 잡은 듯했다. 마치 어떤 흉악한 음모의 단서라도 잡은 듯이.
그래, 거긴 분명히 음모의 냄새가 있어. 우리를 고분고분 길들이고, 우리의 가시를 마멸시키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꾸며진 음모의 냄새가. (213, ’연인들‘ 중.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깨달음이 부족한 나는 아직 덜 혼난 모양이지.)

-이렇게 나나 철이 엄마나 딴 방 여자들이나 남보다 잘살기 위해, 그러나 결과적으론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렸다. 내 남편이 십팔 평짜리 아파트를 위해 칠 년의 세월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상실했듯이. (284, ‘닮은 방들’ 중.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

-맙소사. 이제부터 부자들 사회에선 가난장난이 유행할 거란다. 기름진 영감님들이 모여 앉아, 자네 자식 거기 아직 안 보냈나? 웬걸, 지금 여권 수속중이네. 누가 그까짓 미국 말인가, 빈민굴 말일세 하고. (404, ‘도둑맞은 가난’ 중. 가난 사파리의 원조에다 더 매운맛으로 상훈과 나의 짧은 동거가 너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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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의 전설 외 - 한국소설문학대계 29
장용학 지음 / 동아출판사(두산)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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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5 장용학.

‘원형의 전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이 책을 알려주신 분이 이 이야기의 고갱이 부분도 같이 알려주셔서, 스포일러 된 채로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보는 동안 영화 ‘올드보이’도 생각나고(감금, 남매, 부녀, 간수의 응징) ‘칠조어론’이나 ‘죽음의 한 연구’(동굴, 벼락, 여러 사변)도 생각났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게 1962년이니 아무래도 내가 먼저 접한 그 창작물들이 이 책을 닮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두 박 선생님들께서 이 작품을 안 보셨다면 우연의 일치란 참 기괴하고, 또 생각보다 같은 소재들이 끝없이 변주되고 있구나 싶다. 장 꼭또 선생이 앙팡떼리블을 1929년에 발표했으니 기어올라가자면 끝도 없다.

소설의 초반부는 한국전쟁, 전후 소설 느낌이었다. 주인공 이장은 키워준 부모가 친부모가 아닌 걸 아는 동시에 양부모를 공산군 손에 잃었다. 공산군 의용군(총알받이)으로 끌려갔다가, 죽은 국군 옷을 위장으로 입었다가 다시 국군 무리에 섞이고, 그러다가 북한에 포로로 잡히고, 포로로 잡혔지만 의용군으로도 국군으로도 인정 받지 못해 모든 무리에서 배척 당했다. 이념 갈등 사이에 희생되는 개인의 고통을 극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뿌리를 찾던 이장은 자기 딸 윤희를 임신시킨 털보영감이 자신을 뱃속 아이의 아버지로 위장하려고 시도하는 패륜적 상황에서 윤희가 자살하여 또다른 상처를 얻는다.
자신이 태어난 마을 방골을 찾아가 어머니 오기미가 홀로 자신을 낳다가 집에 벼락이 치는 바람에 죽고만 사실을 알고는, 그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추적하다가 오기미의 오빠 오택부가 자신의 친부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북한에서 다시 교육을 받고, 남파 간첩이 되어 교수로 위장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분단 국가에서 그의 교차성은 국가와 조직에 이용당하고, 그런 현실에서 개인의 삶이 안온할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이후로는 친모 오기미를 강간하여 자신이 잉태된 사실을 오택부로부터 자백 받고자 하다가 오히려 동굴에 갇혀 한 해를 보내게 된 이장이 동굴을 탈출하여 복수극을 벌이는 전개이다. 우연히 흑나비다방에서 만나 마음에 두게 된 마담버터플라이 양지야가 오택부의 혼외 자녀인 것을 알고는 그녀를 사랑하는 동시에 오택부를 응징하는 데 그녀를 이용하기도 한다. 인간과 인간성, 인간적인 것에 대해 계속 추상적인 고뇌를 펼치는 것은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탄생과 잉태의 장면으로 회귀하는 듯한 결말(벼락, 양지야와의 결합)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300쪽이 되는 소설 하나 만으로도 장편 한 권을 엮었을 법한데, 내가 구한 동아출판사의 ‘한국소설문학대계’는 현대소설사 백년을 집대성한다는 원대한 목표로 장용학 선생님의 중단편도 네 편 더 실어주었다. 백권을 목표로 한 시리즈는 권수를 미처 다 못 채우고 중단된 걸로 보이지만… 초판대로 한자 표기해서 가격도 비싸게 모 출판사에 출간되어 있지만, 이 정도 훌륭한 작품을 남긴 작가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책을 접하기도 쉬운 상황이 아닌 것이 마냥 안타까웠다. 수능 국어 지문으로도 나올 만하지 않나, 싶다가도 주요 소재가 근친상간이어서 그것도 안 되겠구나… 좋은 작품을 구전으로 알려주신 이웃님께 감사를 드리며… 중단편을 마저 읽기로 했다.

‘요한 시집’은 포로 수용소를 나온 동호가, 수용소에서 자살하고 그 시체가 다른 수용범들의 증오로 훼손된 누혜의 어머니의 집을 찾는 이야기이다. 최인훈의 ‘광장’이나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거제도 수용소에서 이념 차이로 인한 또다른 내전이 있었다는 것을 얼핏 알게 되었다. 같은 소재의 소설들이 검색해보니 제법 되는 것 같다. 기회가 되면 두루 읽어보고 싶다.

‘비인 탄생’은 학교에서 잘리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지호(삼수)가 어머니와 산 속 굴에 살다가 어머니도, 연인도 잃고 비인으로서의 인간을 외치며 뭔가 다른 존재가 된다. 지호가 문득문득 사라지는 장면이나, 종희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던 장면의 회상이나, 종희의 남편이 될 뻔한 녹두 노인이 등장하는 것이나, 어머니의 시체를 휘발유와 장작으로 태우는 장면이 환상 같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하지만 앞의 글들보다 더 인간에 대해, 세계에 대해 추상적으로 주절주절 대는게 읽기에 쉽지도 재미있지도 않았다. 힘들게 읽고 난 다음 소설 ‘역성서설’이 비인 탄생 2부란 걸 확인하고는 한숨이 나왔다. 부제와 마무리만 2부이지, 전혀 다른 이야기 같기도,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쓴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기계인간과 거인과 괴물의 격투 같은 게 나오고, 여기서도 결말부는 불로 활활 태우고… 중편 두 편은 7년 간격으로 퍽 떨어져 나온 것인데 나중에 나온게 더 괴이하고 재미없는 건 매일반이었다…

‘현대의 야’는 현우가 시체 치우는 부역에 나갔다 산 채로 시체 더미에 묻히고, 거기서 살아 나온 이후 시체 더미나 다름 없는 법과 위증과 폭력으로 다시 감옥에 갇혔다가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이야기였다. 작가가 젊을 때 쓴 소설들이 덜 추상적이고 더 흥미롭고 막장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끝없이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성이 무엇인가가 소설마다 변주되고 있는데, 그런 걸 읽을 수록 더욱더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이라고 이렇게 곱씹어야 하는 것일지 아리송해졌다.

전쟁 문학, 전후 문학을 30년 전 쯤엔 문학상수상작품집이나 근현대소설집 같은 걸로 많이 읽었었는데 한참을 잊고 있다가 오랜만에 전쟁 이야기를 읽었다. 박완서 선생님 소설도 전쟁 이야기이긴 하네… 단편전집을 갖추고 있으니 그것도 언젠간 읽어봐야 겠다. 이렇게 널려 있는 걸 내가 잊어버리고는 왜 한국 전쟁 소설 별로 없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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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에 끌려 올 때까지 이장은 수없는 시체를 보았습니다. 혹은 피에 젖고 혹은 불에 타고 혹은 썩어서 거짓말처럼 뒹굴어져 있었고, 그 거짓말 위에는 파리들이 감실감실 서로 붐비면서 살아 있는 희열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죽으면 저런 거짓말이 되어서 감실감실한 희열에 덮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살아 있다는 것부터가 거짓말인 것 같았습니다. (31-32, ‘원형의 전설’ 중. 거짓말과 삶과 죽음을 시각적으로 감실감실한 파리 떼로 그려주네. *감실감실: 사람이나 물체, 빛 따위가 먼 곳에서 자꾸 아렴풋이 움직이는 모양.)

-“왜 남자는 벼락두 안 맞구 목두 안 매나요?”
“세계란 원래 일방적이니까 할 수 없겠지.” (168)

-가다가 넓어진 데도 있었지만 벌레처럼 뱃가죽으로 기면서 비비고 나가야 했습니다. 살은 터지고 흰 토끼는 빨갛게 피투성이였습니다. 그 모양을 멀리서 보면 마치 숨통을 꾸룩꾸룩 기어 오르는 객혈 같았을 것입니다. (305, ‘요한 시집’ 중. 출생의 장면 같기도 하다.)

-어느 날 아침 조회 때, 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가슴에 달려 있는 단추가 모두 다섯 개씩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현기증을 느꼈다. 무서운 사실이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주위는 모두 그런 무서운 사실투성이였다. 어느 집에나 다 창문이 있고, 모든 연필은 다 기름한 모양을 했다. 모든 눈은 다 눈썹 아래에 있었다. (332)

-손금이 손이 아닌 것처럼 인간성이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성이란 인간의 일면. 그 일면을 가지고 인간을 덮을 때 인간은 병들고 왜소해지고, 기만과 나태. 반인간이 된 것이다!
반인간으로 봤을 대 비인이 인간이다! 인간은 인간이 되기 위해 비인이 되어야 한다! 인간성을 파기하고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467, ‘역성서설‘ 중. ’비인 탄생‘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느라고 잔소리도 듣고, 돌도 쪼고 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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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2-27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읽었더랬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근데 하나두 생각이 안나요. 줄거리가. 근데 실존주의적인 묵직한 느낌은 지금도 갖고 있어요. 오상원의 <유예>와 더불어 <요한시집>은 지금도 소장하고 있습니다..ㅎㅎ

반유행열반인 2026-02-27 12:07   좋아요 0 | URL
먼저 읽으셨군요 ㅎㅎㅎ저도 오래 지나면 다 잊을런지 그래도 근래 읽은 것 중 강렬한 작품이어서 비교적 오래 남긴 할 것 같아요.
 
완역 이옥전집 1 :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완역 이옥 전집 1
이옥 지음,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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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9 이옥.

수능 국어에서 건진 것 중 생각나는 건 블로그 이름(내 택호)으로 ‘통곡헌’을 붙인 것이고, 또한 이옥이라는 쓸쓸하게 살다 간 개성있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이다.

이옥의 글을 발췌, 재구성해 번역한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와 ’일곱 가지 밤‘을 제법 재미있게 읽었다. 모의고사의 지문으로 나올 때도 그랬다. 그런데 전집 1권은 부, 서(편지), 서(서문), 발, 기, 논, 설, 해, 변, 책 온갖 짧은 글들을 다 모아놨다보니 초반부에는 읽는 재미가 덜했다. 한문 글 역시 번역이 꽤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후반부 절반은 글의 형식 덕인지, 글맛이 살아서인지 그럭저럭 흥미롭게 금세 읽었다. 전집 2, 3권은 목차를 보니 조금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네…

전집의 제목을 따온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는 막상 이유라고 들어보니 양의 기운이 쇠하는 때니 섬세한 남자 선비가 이를 알고 슬퍼할 수 밖에, 선비 아닌 남자는 사느라 바빠서 못 느낌, 여자도 양기랑 크게 상관 없으니 오히려 봄에 반대로 더 슬퍼함, 뭐 그런 헛소리였다. 불교랑 오행은 까던 사람이 음양론에는 또 심취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는 게 조금 깨는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글들은 제법 만연체에 가까운, 그러나 대부분 적확한 수사들이 붙은 문장들이 많아서 재미있는 글도 많았다. 정치의 길로 못 나아가고 쫓겨나서 한가한 덕에 이러저러하게 많이 써놨으니, 작가 그대의 불행은 후대의 읽는 이에게 즐거움이라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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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먹은 누룩이 아니고, 책에는 술그릇이 담겨 있지 않는데 글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겠는가? 장차 단지를 덮게 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런데 글을 읽고 또다시 읽어, 읽기를 삼 일 동안 오래했더니, 꽃이 눈에서 생겨나고 향기가 입에서 풍겨 나와, 위장 속에 있는 비릿한 피를 맑게 하고 마음속의 쌓인 때를 씻어내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즐겁고 몸이 편안하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무하유지향에 들어가게 한다. (267-268, ‘묵취향‘의 서문 중. 제본한 논문 냄비받침, 하듯 단지 뚜껑, 하는 것도 재미있는 표현이고, 나도 저런 책 읽고 싶다. 어딨냐...)

-석공으로 하여금 지금에 처하게 했다면 남산 아래 두어칸 초가집에 한 이랑 시든 꽃을 심고, 날마다 용자유의 무리들과 더불어 제멋에 겨워 스스로 읊조리는 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웃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시를 보고 지목하여 배척하게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가 어찌 문단에 올라 사맹을 주도하며 깃발을 날리고 북을 울려 천하가 휩쓸리듯 그를 다르게 할 수 있겠는가? (283, 원중랑 시집을 읽고 쓴 악성 독후감. 그 정도는 아니지, 하고 평범한 문인에 불과하다고 깠다.)

-아침 꽃은 어리석어 보이고, 한낮의 꽃은 고뇌하는 듯하고, 저녁 꽃은 화창하게 보인다. 비에 젖은 곷은 파리해 보이고, 바람을 맞이한 꽃은 고개를 숙인 듯하고, 안개에 젖은 꽃은 꿈꾸는 듯하고, 이내 낀 꽃은 원망하는 듯하고, 이슬을 머금은 꽃은 뻐기는 듯하다. 달빛을 받은 꽃은 요염하고, 돌 위의 꽃은 고고하고, 물가의 꽃은 하가롭고, 길가의 꽃은 어여쁘고,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꽃은 손쉽게 접근할 수 있고, 수풀 속에 숨은 꽃은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
(…) 붉고 흰 온갖 꽃들의 품위 있는 빛깔과 고운 향기를 어느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오직 내가 이를 가장 좋아하지만 봄날 비바람과 함께 떠나감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처음부터 지니지 않는 것이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천박한 사랑이요, 나의 사랑은 절실한 사랑이라네.
(428-429, ‘꽃에 대하여’ 중. 북한산 등반기에서도 아름답다는 말을 거듭하여 열거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다양한 꽃에 대한 감상을 나열하고 애정을 표출하는 걸 보면 이옥 아저씨는 꽤나 탐미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문장 멋부리다가 정조한테 혼남…)

-하루의 저녁도 오히려 슬퍼할 만한데, 일 년의 저녁을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일찍이 사람이 노쇠함을 슬퍼하는 것을 보니, 사십 오십에 머리털이 비로소 희어지고 기혈이 점차 말라간다면 그것을 슬퍼함이 반드시 칠십 팔십이 되어 이미 노쇠한 자의 갑절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미 노인이 된 자는 어찌할 수 없다고 여겨서 다시 슬퍼하지 않을 것인데, 사십 오십에 비로소 쇠약해짐을 느낀 자는 유독 슬픔을 느끼는 것이리라! 사람이 밤은 슬퍼하지 않으면서 저녁은 슬퍼하고 겨울은 슬퍼하지 않으면서 유독 가을을 슬퍼하는 것은, 어쩌면 또한 사십 오십 된 자들이 노쇠해감을 슬퍼하는 것과 같으리라!
아! 천지는 사람과 한 몸이요, 십이회는 일 년이다. 내가 천지의 회를 알지 못하니, 이미 가을인가, 아닌가? 어쩌면 지나 버렸는가? 내가 가만히 그것을 슬퍼하노라.(444-445,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중. 이옥 아저씨는 이 글 쓸 때 중년 무렵의 선비였나보다. 난 늦여름이라 우기며 초가을 문 앞에서 덜 슬퍼할 거야. 선비도 아니니까 안 슬퍼할 거야 흥)

-문장의 공교로움과 졸렬함은 진실로 작성하는 속도에 있지 않으니, 문장을 취하는 길이 진실로 일찍 냄으로써 뛰어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시험관이 오색에 끝내 눈이 멀고, 문벌을 중시하는 습속에 젖어 시험관이 일찍 거두는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일찍 거두기 때문에 새로 배우는 선비나 재능이 다소 모자라는 선비는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권세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을 시키고, 재물 있는 자는 돈 주고 사고, 글에 능한 자는 이들과 교환하여 온 세상이 도도히 모두 그러하다. (454, ‘과책’ 중. 과거 개혁론. 타임어택의 슬픔은 조선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내가 금생의 나도 모르는데, 전생의 나를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모른다면 남들도 모를 것이고, 전생을 오히려 모른다면 내생도 모를 것은 금생과 같을 것이다. 전생과 후생이 이미 서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타인이다. 타인이 비록 귀혀져서 천선이 된다 해도 내게 무슨 영광이 되겠으며, 천해져서 짐승이 된다 해도 내게 무슨 욕이 될 것이겠는가.
굼벵이가 변하여 매미가 되고, 풀벌레가 변하여 호랑나비가 되고, 꿩이 변하여 이무기가 되는데, 윤회가 진실로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와 같은 것이다. 버들에서 우는 괴로움과 꽃에서 춤추는 즐거움은 이미 기어 다니는 벌레들과 관계가 없는 것이고, 이무기는 매를 보고도 엎드리지 않을 것이니, 후생의 영욕이 진실로 금생에 무슨 관계가 있어서 권면하고 징계할 수 있겠는가? 이러니 부처의 설법은 공교로운 듯하지만 실로 졸렬한 것이다. (…) 나는 꼭 ’윤회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게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움직이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해둔다.
(462, ’축씨‘ 중. 윤회 탈탈 터는 소리. 예전에 친구에게 나도 이옥이랑 비슷한 윤회관을 이야기했더니 다시 태어나는 걸 자각해야 환생이라고 했다… 이옥은 이외에도 불가에 대해 비판을 많이 한다. 다음에 실린 ’오행‘이라는 글에서는 오행의 상생 상극에 대해서도 비판하면서, ’오행에 무엇이 서로 상생하지 않는 것이 있‘(465)느냐고 한다. 그렇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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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6-02-19 15: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오, 이름자에 보배 옥鈺자 쓰는 남자는 김승옥에 이어 딱 두 번째 봅니다. ㅋㅋㅋ (왜 만날 헛소리만...)

반유행열반인 2026-02-19 16:40   좋아요 2 | URL
저는 쇠금 안 달린 옥 자를 쓰는데 그래서 김승옥한테 내적 친밀감 느꼈었는데 한자가 다르군요!!!
 
20세기 패션 시공아트 36
밸러리 멘데스 외 지음, 김정은 옮김 / 시공아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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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7 밸러리 멘데스, 에이미 드 라 헤이.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건, 화가 ‘Gluck’의 예술과 정체성, 패션을 다룬 도록을 외서로 구입하면서였다. 도록의 저자 중 하나인 에이미 드 라 헤이가 저술한 책 중 유일하게 번역된 책이 ‘20세기 패션’이었기 때문에, 해외 구매 서적이 늦게 오는 편이니까 그전에 국내 출간된 중고책을 미리 받아 보자, 하는 생각이었는데, 조금 읽다가 오래 묵혔다가 이번에 다 보았다.

패션을 잘 모르고,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본 광고 문구의 Nirvana Against The Fads에 꽂혀 (지금 저 카피를 썼던 브랜드는 흔적조차 없다. 내가 꿈을 꾼 건가 싶다.) 닉네임마저 반유행열반인, 이렇게 지었다. 그건 21세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20세기를 20년 좀 안 되게 살고, 이제 21세기를 산 지도 25년이 넘었다. 그런 즈음에 20세기 복식사 책에서 뭔 영감이나 힌트라도 얻을까 했는데 그러기엔 나의 의상에 대한 지식과 감각이 무지에 가까웠다. 그냥 오래 전 사람들이 선호하고 아름답다 여겼던 복식을 구경하는 게 적당히 흥미로웠다.

스파 브랜드의 시즌오프 할인 의류를 검색하다 구매 기준인 최고 할인률이다 싶으면 나한테 어울릴지, 오래 입을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저렴이 의류들을 마구 사들였다. 그래도 아직은 한철 한 두 번 입고 버릴 만한 걸 많이 사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런 내가 오뜨꾸뛰르, 최고 디자이너들의 맞춤 의상들에 대해 읽는 건 화가나 미술 작품을 잘 모르면서 빠르게 눈으로 훑는 거랑 비슷했다.

사실 각자의 신체와 개성이 다 다른데, 시즌을 주도하는 패션이라는 걸 모범답안처럼 제시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긴 하다. 그래도 기출문제처럼 수많은 지나간 복식 중에 내가 가진 잡탱구리들로 재현이나마 가능할까 싶은게 있을까 찾아 보았지만… 딱히 없는 것 같네… 다들 화려하고 노출이 심하고 일상 생활 가능하지 않은 옷들이 대부분이다. 찍어 놓은 걸 보니 흠 나 화려한 디오르 같은 거 좋아하나 보네… 눈만 높고 지갑은 얇다.

작은 책이지만 깨알같이 각 시대를 유행했던 복식에 대한 자세한 서술과 함께 화보를 많이 수록해 놔서 그나마 어떤 형태의 옷들인지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늘 그렇듯 다짐은 있는 옷으로 무난하고 단정하게 잘 입고 다니자 하지만, 올해도 옷 구매는 줄이자, 하지만… 패션 책 보고 있는 나야… 지나면 그날 하루 뭘 걸쳤는지는 다 부질 없는 것 아니겠니.

+1926년 샤넬의 검은 이브닝 드레스(79)
+1947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뉴룩’(139)
+1997년 봄/여름 크리스티앙 디오르 오트쿠튀르(298)
+표지의 의상은1994년 이세이 미야케의 봄/여름 ‘플리츠 플리즈’라인. 실린더 형태, 앞뒤 구별 없음, 무지개 색상, 종이 등과 종이접기를 연상시킴. 표지를 왜 이걸로 골랐는지 내내 안타까움… 플리츠는 30여년만에 다시 유행이 돌아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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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전쟁 기간 내내 여성들은 가정을 돌보는 동시에 지루하고 위험한 전시의 노동을 감수하면서도 특히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성들에게 잘 보이도록 언제나 보기 좋은 차림을 해야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공장에서 일할 때 기계에 걸릴 소지가 있는 것은 착용이 금지되었으므로 긴 머리는 감싸고 끈이나 레이스, 루프가 달린 옷은 입을 수 없었다. 여밈은 등이나 어깨에 있고, 주머니는 엉덩이 부분에 있는 것을 착용해야 했으며, 벨트는 뒤에서 조이고 신발을 제대로 신어야 했다. (128, 요구하는 게 참 많았네 흥 누가 시작한 전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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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키딩 마음산책 짧은 소설
정용준 지음, 이영리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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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5 정용준.

이 짧은 소설 시리즈는 대체로 좋았다. 정용준 책을 사서 네 권을 읽었고, 세 권이 남아 있었다(아니 구매 내역은 한 권 더 있다고 하는데 어딨는지 못 찾겠다...). 여기저기 아무데나 흩어져 꽂혀 있길래 (전자책은 빼고) 읽은 것, 안 읽은 것 전부 모아 가지런히 한 곳에 모으고 그 중 ‘저스트 키딩’을 읽기로 했다. 패티 스미스의 ‘저스트 키드’도 생각났는데, 읽고 보면 둘이 크게 관련은 없다. 아닌가, 노래하는데 크게 성공하지 못한 가수들이 나오긴 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겨울에 태어났지만 겨울이 좋진 않다. 어려서는 내 생일이 있어서 좋아하는 계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겨울이 없는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하고 그 바람을 또 가끔 포기한다. 이번 겨울도 길고, 겨울에 긴 겨울이 나오는 소설을 읽으면 그래도 여기 겨울은 끝날 거니까, 하면서 봄옷도 사고 여름옷도 산다.

지난 번엔 괜시리 소설가의 산문집을 굳이 찾아 읽고 읽다가 포기를 하고, 또 기어코 다시 다 읽고 투덜거리는 뭘 끄적여놨다. 짧은 소설집이 좋은 점은, 소설가들이 뭔가 여유롭고 너그럽게 따뜻한 걸 써 놓는다는 것이다. 글이 길어지고 삶이 길어지면 꼭 마가 끼고 슬픔과 비극도 닥치고 그런 것이다. 짧은 글은 그런 안 좋은 일을 시시콜콜 늘어 놓기엔 너무 짧으니까, 인생 짧고 한 번인데 한 잔해, 하고 하하호호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읽는 나도 평소에는 짠돌이이지만 짧은 이야기니까 훈훈해도 어쩔 수 없지, 하고 편안하게 읽는다. 두껍거나 지독하거나 후지거나 한 책들만 연달아 보다가 뭘 만날까 조금 걱정하며 펼쳤지만, 생각만큼 가뿐하고, 텁텁함 없이 읽혀서 만족한 독서였다. 모든 이야기가 굳이 길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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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사를 써도 마음이 온전히 담기지 않아. 어설프게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 차라리 쓰지 않음으로 내 모티프와 영감을 지키는 거야.’
그때는 왜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하지 않았을까?
“개소리하지 마. 에이징? 억지로 멀쩡한 것을 망가트리면서 그것이 멋있게 낡은 거라고? 미친 새끼. 부서진 것과 낡은 것은 다른 거야.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꼼수로 사려고 하잖아.”
주하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슨 말을 더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솔직하고 정직한 말이었다. 꺼내면 그 말이 마음이 될까 봐 절대로 입술 밖으로 꺼내지 않는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섞어 침을 뱉고 돌을 던지듯 쏟아부었다. 주하는 놀란 아이처럼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실패한 가수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시도하거나 이룬 적이 없으므로 그에게 실패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실패에 대한 로망을 갖는 것으로 실패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64-65, ‘시간 도둑’ 중)

-막막하고 하염없어도 눈을 미워하는 사람은 되지 말아라. 눈과 비는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지. 천국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거야. 좋은 곳에 있으니 슬퍼 말고 언젠가 그날이 오면 기쁘게 나를 만나러 오렴. (156, ‘겨울 산‘ 중)

-달군 철판 위에 쑥을 덖고 바람에 말리고 다시 철판에 올려 덖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던 엄마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오래 하는 거야.
물기가 없어야 해. 그래야 시간을 견딜 수 있단다.
왜 이렇게 많이 만드는데.
겨울은 기니까.
엄마는 창고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통에 말린 차와 꽃을 저장했다. 긴 겨울 동안 평생 마셔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던 쑥과 꽃이 다 사라졌다. 엄마는 알았다. 겨울이 이토록 길 것이라는 것을. 둘째는 몰랐다. 평생보다 긴 시간이 있다는 것을. 둘째는 마지막 통 속에 반쯤 남은 까만 쑥을 보며 시간의 끝을 예감했다. 첫째가 식탁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춥다. 나무를 해야겠어. (158-159, ’겨울 산‘ 중.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겨울이 기쁠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겠다.)

-소설을 쓰기 어려운 게 바로 그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괴상한 삶을 따라잡을 수가 없거든. 그 어떤 끔찍한 상상을 해도 현실은 그것보다 끔찍하니까. 내 몸을 뺏은 나도 그걸 곧 느끼겠지. 느껴봐라. 흡수된 내가 피와 땀이 되어 실컷 비웃어줄 테니까. 웃음이 나온다. 웃음이 나와. 얼마 만의 해피엔딩인가. (203, ‘해피 엔딩’ 중. 내가 무서운 영화나 무서운 소설을 잘 읽는 이유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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