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먹다
올리버 몰턴 지음, 김홍표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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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2 (저자:올리버 몰턴)


콩, 향신료, 양파, 당근, 수많은 먹을 것들을 식물이 준다.

단백질 음료도 한 잔 마셨다.
우유 단백질이지만, 젖소가 풀을 뜯어먹은 덕에 내 몸의 구성 성분이 될 수 있었다.

엽록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피부는 내가 좋아하는 초록이 될 것이다.
아침에 동쪽 뜨는 해를 향해 걸으며 출근한다.
오후에 서쪽 지는 해를 향하며 집에 온다.
아마 출근하지 않아도 나는 물과 햇빛과 광물질 조금이면 든든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산소를 배설하겠지. 아휴 깔끔한 인생.

그렇게 단순하게 광합성을 생각해 왔는데, 생각보다 단순하지가 않았다. 물과 이산화탄소가 산소와 전분이 되는 과정이 슝- 하고 일어나는게 아니라 수많은 화학물질로의 변형과 효소와 분자 수준의 변화와 광자의 일 같은 게 개입되어 있었다.

사실 그런 건 읽어도 잘 모르겠고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캘빈/벤슨 회로는 생명이나 광합성이나 햇볕 다룬 책에서 계속 나왔는데, 루비스코 단백질 효소도 이름 예쁜 게 자꾸 나오는데, 뭐하는 애들인지는 까먹고 이름만 남았다.


지구 생태계가 변해서 식물이 살 만한 세상이 되어 지금처럼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조류나 식물들이 열심히 살려고 애쓴 덕분에 대기의 산소량과 이산화탄소량과 온도가 변하고 그들이 속한 계의 성질이 달라지기도 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식물과 조류는 우리가 살기 좋을 만큼의 산소 농도와 온도를 만들어 줬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 전 죽은 식물과 미생물에 갇힌 이산화탄소와 그 친구들을 펑펑 내보내서 스스로 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꽤 낙천적이었다. 연구 개발에 투자 열심히 하면 핵폭탄 만든 것처럼 기후 재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과학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가 보였다. 그렇게 무언가 믿을 수 있는 게 있어야 낙관도 가능한 것 같다.

지구가 너무 더워지면 우리는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새로운 생명체들이 또 지구를 차지하고 살 것이다. 어떤 식물들은 사라지겠지만, 또 어떤 식물들은 뜨거운 지구가 좋아서 하늘 높이 쭉쭉 뻗어 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종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뭐든 덜 쓰고 덜 내보내고 하는 게 좋겠지. 아니면 미래 세대야 미안해, 그치만 미래는 없어, 하고 인류는 진화에서 도태되겠다.


+밑줄 긋기
-체계는 가역적이다. 아이들에게도 그는 어떤 실재의 정수를 보는 좋은 방법은 뒤집어 생각해 본다거나 위아래를 바꿔 보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95, 나도 말장난 같은 걸로 내 아이들을 이렇게 기르고 있지만…)

-그(식물영양학자 아르논)는 또한 지구적 차원에서 원소의 순환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이산화탄소, 물, 암모니아 등 원소가 식물과 동물을 지탱하는 데 필요하다. 이 성분들은 분해와 부패를 거친 화학적 과정의 최종 산물이다. 셀 수도 없는 모든 생명체들이 죽은 뒤 원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따라서 죽음, 즉 현재 세대의 완전한 분해는 새로운 생명체의 근원이다.”(101)

-말년에 아르논은 ‘유기농 식물’이라는 상품 개념을 비웃곤 했다. 유기 생명체이지만 아르논이 보기에 식물을 키우고 유지하는 성분은 비료에서 나왔든 화학 공장에서 나왔든 무기화합물이라고 강조했다. (102, 화학 공부하신 분들에게 늘 듣는 말...마케팅과 화학의 충돌)

-그(미첼)는 막에 끼어 있는 시토크롬이 기질에 있는 수소 이온을 틸라코이드 내막으로 보낸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틸라코이드 내부에 든 수소 이온의 농도가 외부보다 높아진다. 여기에서도 열역학 제2법칙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열역학 법칙에 따라 한 공간에 농축된 이온은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 막에 박힌 관문을 따라 틸라코이드 탑에 쌓인 수소 이온이 다시 기질의 열린 공간으로 빠져나갈 때 이온의 열망으로 표현되는, 일을 할 수 있는 활동 전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온이 관문을 통과해 빠져나갈 때 에너지를 내놓는다. 이 에너지를 이용해 관문은 ADP를 ATP로 전환한다. 물이 아래로 흐를 때 물레방아가 물리적인 힘을 내듯이 막에 박힌 관문 단백질은 수소 이온이 흐를 때 화학적 에너지를 내놓는다. (116-117, 이 책에서도 다른 유사한 주제를 다루는 책들처럼, 막과 양쪽의 차이가 만드는 흐름, 에너지가 나온다.)

-L, M단백질은 비슷한 꼴이었고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막의 평면을 따라 측면에서 보면 피곤한 두 자매가 서로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고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의 발목과 발은 막의 한쪽으로 삐져나와 있다. 뒷머리는 막의 반대쪽을 향한다. 한쪽 끝에서 막을 내려다보면 이들은 마치 보디빌더가 팔 근육을 보여줄 때처럼 손을 엇갈려 잡고 악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전자를 방출하는 특별한 엽록소 쌍은 마주 잡은 손아귀에 자리잡고 있다. (164, 반응센터 내 발견 단백질을 일반인에게 설명하기 위한 분투가 느껴진다.)

-이제 남세균은 먹잇감으로 삼켜진 존재가 아니라 진핵세포 내부에서 과일을 수확할 수 있는 과수원이 되었다.
진핵세포에서 이보다 더 매력적인 일은 없었다. 자신의 몸에서 음식물이 생산된다면 굳이 스낵을 사러 멀리 갈 필요도 없다.(246, 나도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숙주의/핵/안에/유전적으로 많은 것을 빼앗긴 상태를 노예화라고 흔히 간주한다. 하지만 단순한 삶을 살기로 작정한 엽록체가 극단적 긴축 정책을 벌여 고달픈 삶의 근심을 줄일 수 있었다고 의인화하기도 한다. 잃어버리긴 했지만 핵 안에 편입된 엽록체 유전자들은 필요할 때마다 단백질로 변역된후 다시 엽록체로 운반된다. 그러므로 엽록체는 유전자를 유지하는 데 걱정할 필요가 크게 줄어든다. (247, 단순해지는 게 행복일지도 몰라.)

-식물은 동물처럼 주변으로 돌진하거나 심장을 펌프질하고 날개를 퍼덕이거나 팔다리에 신경 자극을 가할 에너지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근육의 조밀함을 피하고 잎의 느슨함을 선택했다. 그들의 삶은 풍광을 가로질러 앞뒤로 움직이는 동선을 그리지 못한다. 대신 그들은 싹과 둥치와 가지에 기록을 남길 뿐이다. 동물이 행동하듯 식물은 형태를 가진다. 그들의 역사가 그 형태에 상세히 기록된다. (272, 식물 입장-이것도 의인화에 불과하겠지만-에서 생각을 못해 봤었다.)

-모든 것이 봄날의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루비스코 단백질만큼이나 어렵게 만들어진 향기가 공기 중을 배회하고 있다. (317, 효소 만들기 어렵다고 한다.)

-마틴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게 철이 가득한 몇 척의 배를 줘. 그러면 빙하기를 가져올게.”(…) (왓슨의) 이 실험에서 뉴질랜드 남쪽 바다에 몇 톤의 철을 떨어뜨리자 위성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식물성 플랑크톤이 번성했다. (339, 내게 돈이 가득한 몇 척의 배를 줘. 그러면 잘 살게.)

-산책처럼 혹은 이야기처럼 생명을 만들었던 지구는 끝을 향해 간다. 바다가 다운스를 잉태했듯 우리도 먼 미래에 찾아올 모든 것의 죽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세계에 형상을 부여했다. (356, 우리는 아무래도 세상의 죽음보다 우리의 죽음만 먼저 보고 가겠지만...)



+불편한 문장/문단과 오탈자들 (골라내다 지쳐서 일부만...)

읽다가 포기해 버린 닉 레인 아저씨의 ‘트랜스포머’ 마지막 참고할 책 소개목록에 이 책이 있었다. 마침 내가 사 두기도 했으니 잘 됐네, 하고 얼마 뒤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30여쪽 읽었는데 엉망진창 비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번 읽게 만들지만 뜻을 알아듣는데 큰 지장은 없었는데, 이게 반복되니까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참을 수 있을까? 싶었다. 좋은 번역과 편집을 만나는 건 그러니 축복일세… 그러니까 굉장히 미묘한 데서 불쾌함의 골짜기를 만나는 일을 페이지마다 당하니까 내가 독해력이 망가졌나 싶었다. 그래서 AI돌리니 적당히 문장을 끊어서 다시 써 줬다. 가독성은 훨 낫지만 책 전체를 이렇게 옮겨가며 읽을 순 없다.

그래도 100쪽쯤 되면 적응되서 (사실 더 어려운 반응, 물질들이 등장해서 문법에 신경쓸 새가 없어진다…) 읽을만 했다. 틈틈이 읽다보니 한 달도 넘게 걸렸다.


-비록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두 명의 선구자 그리고 마땅히 받아야 할 영예를 거의 부정할 뻔했던 당대 최고의 화학자 멜빈 캘빈과 함께, 이 늙은 현자는 지구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 한 가지를 발견했다. (33, 맥락상 부정당할 뻔했던 게 맞을 듯)
->비록 끝까지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두 명의 선구자와 함께 지구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 하나를 밝혀내는 데 기여했던 이 늙은 학자는, 당대 최고의 화학자 멜빈 캘빈과 더불어 마땅히 받아야 할 영예를 거의 부정당할 뻔했다.(강조점이 발견에서 영예로 옮겨져 버리긴 함)

-물리학의 파도와 파동 방정식의 포효에 화학의 바다 절벽이 끊임 없이 침식되고 있다는 말이 당시 새로운 화학의 풍광을 가장 잘 묘사했을 것이다. (34, 어색한 과거형 묘사했을 + 성가신 -것이다.)
->물리학의 거대한 물결과 파동 방정식의 거친 진동 속에서, 화학이라는 세계는 바다의 절벽처럼 조금씩 깎여 나가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장면을 새로운 화학의 풍경으로 그렇게 묘사하곤 했다.(이건 마지막 문장을 너무 새로 지어내 버린 느낌이다.)

-이런 말도 있었다. 모든 사람이 떠나 집으로 돌아가고 폴링만 남아있다고 해도 칼텍의 화학과는 여전히 미국 최고일 것이라고 말이다.(35, 이런 말도 있었다. 한 다음 -일 것이라고 말이다. 이거 호응이 맞는 걸까)
->이런 말이 돌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떠나고 폴링만 남아 있어도, 칼텍 화학과는 여전히 미국 최고일 것이라는 농담 같은 평가였다.(기계 놈이 뉘앙스를 따지는 시대에 난 살고 있어…)

-그는 모든 과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매력을 느꼈으며, 수학과 물리학의 경계에 걸친 분야였다. (37, 두번째 절 주어 어디감…)
->그는 모든 과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매력을 느꼈으며, 그 연구 분야는 수학과 물리학의 경계에 있었다.(기계 놈이 주어 찾아줌)

-물이 아래도 흐를 때->물이 아래로 흐를 때(116)

-과학자들을 결론을 내렸다.->과학자들은 결론을 내렸다.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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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22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래 부분이 AI가 새롭게 번역해 준 문장인가요? 너무 깔끔하네요.
번역가도 이제 설 자리가 없어질지 모르겠네요.

반유행열반인 2026-05-23 09:15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는 번역가 말맛 따라 찾아 있는 책도 있어서 에이아이는 아직은 보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디테일을 잘 잡더라구요.
 
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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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9(저자:정세랑)


5~6년 전 직장에서 책을 사 준대서 이걸 골랐다. 앞 몇 페이지를 읽으려고 시도했으나, 아 이런 걸 어떻게 읽어...하고 덮었던 게 또 수 년 전이다.
장르나 난이도 상관 없이 어떤 책들은 최소한의 마음가짐이 있어야 받아들여진다. 아니 적어도 읽다가 중단하는 (나한테는 굴욕적인) 일이 벌어질 확률이 줄어든다.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둘 중 하나는 써 보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책은 둘다 섞어서 한 권으로 냈다. 늘 유행과는 반대 흐름을 타는 삐딱이라서 다들 신나게 읽을 땐 흠, 하다가 거의 잊혀지면 뒤늦게 펴든다.

처음 시도했던 때와 달리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능력의 설정, 확장, 한계, 조력자, 빌런, 이야기거리를 물고 오는 조연, 약간 병풍 같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살려주는 엑스트라까지, 이야기를 짜는 사람들이 어떤 걸 어떻게 배치해서 이야기의 끝까지 치고 나가는지 비교적 뚜렷이 읽히는 책이었다. 읽히려면 클리셰는 필요하다. 물론 가장 마지막 장의 모래 바람 혼돈의 카오스와 브랜드 로고 달린 용의 등장은 이게 최선이었니, 무슨 장면을 읽고 있는 건가, 싶긴 했지만 결말은 늘 어려운 거니까. 대부분 끝에선 누군가를 죽여버리는데, 여기선 다짜고짜 해피엔딩이다.

‘가로등 아래 김강선’은 나 대놓고 울라고 쳐패는 신파 싫어하는데, 크레인이 무너져 깔려 죽어버린 김강선 이야기에서부터 눈물을 억지로 꾹꾹 참았다. 옛 친구가 안은영에게 찾아와 이승의 미련을 풀듯 이런저런 말을 하다 사라지는 이야기인데, 내가 우는 걸 참은 대신 안은영이 마지막 줄에서 울어줬다. 가만보면 슬픔의 정서를 제대로 써 본 경험이 없었다. 맨날 지나치게 덤덤하거나 냉소하는 것만 쓴 것 같다.

언제 펑펑 울어봤나, 떠올려보면 죄다 짝사랑이든 사랑이든 곁에 두고 싶은 걸 잃고 몇날 며칠 통곡했던 기억은 난다. 사랑의 부재 말고는 크게 울일이 없었으니 운이 좋은 인생 아니겠니. 우울증 때문에 운 건 잘 기억도 안 난다.

정세랑 책을 적게 읽지는 않았다. (와 찾아보니 옴니버스 빼고 단일 작가로는 이책까지 7권이다) 딱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서도 계속 나도 모르게 찾아보긴 했다. 항상 사랑 이야기가 나와서 좋았던 것 같다. 세계가 멸망하고 현실이 파괴되는 순간에도 그래도 사랑, 하는 작가가 또 흔하진 않은 것 같다. 갑자기 시공이 오그라들기 때문이다. 그런 유치해짐을 무릅쓰고 계속 쓰는 사람이 있고,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나는 좋아하게 될까? 모든 이야기의 끝은 죽음과 파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니 오히려 산뜻했다. 드라마나 천만영화 같은 걸 잘 안 보는 인간이라 뻔한 게 새롭다.

+밑줄 긋기
-죽은 것들은 의외로 잘 뭉치지 않는다. 산 것들이 문제다. 2차 성징의 발현이란 짓궂고 지겨웠다. (14)

-“딱밤에 적당한 기운을 실어 관자놀이를 때리면 기절하더라고요.” (83, 귀신 보는 눈, 플라스틱칼, 비비탄총에 이은 소소한 능력)

-만약 능력을 가진 사람이 친절해지기를 거부한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치관의 차이니까. (117, 이건 좀 인정하기에는 위험한 상황이다. 능력으로 남을 괴롭히거나 세계 정복을 시도할 수도 있잖아…)

-사람을 쏴 본 적은 없었다. 산 사람을 쐈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다. (122, 아...내가 설정한 세계관이랑 겹쳐서 벌써 빡쳤다. 늦게 쓰는 자의 슬픔…)

-아무도 교사가 매력을 활용하는 직업이라고 얘기해주지 않았으므로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애초에 매력 있는 학생이 자라 매력 있는 선생님이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 학생 때도 학교가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교사가 된 스스로가 한심했다. 시험을 준비할 때에는 분명히 간절하게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막상 되고 나니 2년 만에 그 간절함의 이유를 까먹고 말았다. 3년 전으로 돌아가 세살 어린 자신의 멱살을 잡고 왜냐고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131, 토씨 하나 안 빼고 내 마음이었어…)

-대흥이 생각하기에 20세기는 오점 없이 살기 쉬운 세기가 아니었다. (227, 너그럽다 너그러워)

-저는 이 이야기를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습니다. 한 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까지 읽으며 쾌감을 느끼지 못하셨다면 그것은 저의 실패일 것입니다. (275, 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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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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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8 (저자:프랑수와즈 사강)

책을 다 읽고 한 일은, 엄마에게 계좌로 십만원을 부쳤다. 오늘이 어버이날인 것을 오후 열시 쯤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녁은 엄마가 싸준 김밥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읽은 책은 엄마 없는 아이가 엄마가 될 뻔한 여자를 잃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들을 찾아 읽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장르를 나누고, 우열을 가리고, 호불호를 따진다. 그런데 이제와서 드는 생각은 뭐 재미있으면 됐다.

사강의 책은 ‘패배의 신호’를 먼저 읽었다. 그 책도 성공했다지만,(페라리 뽑음) ‘슬픔이여 안녕‘은(재규어 뽑음) 여기저기서 빠지지 않고 이 책을 읽었다는 사람도 많이 봤다. 그래서 엄청 미뤄뒀던 것 같다.

일단 짧아서 좋았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 감정과 관계와 인간의 욕망 같은 게 밀도 있게 압축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잘 썼다고 좋아하는 것이다. 잘 썼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시기하고 험담을 했겠지. 남의 성공에 배아픈 사람은 참 많다.

유독 프랑스 소설들 보면 휴가를 가고, 거기서 해변에 늘어져라 쉬다가, 수영하다가, 권태를 느끼다가, 갑자기 사랑하다가, 갑자기 누가 떠나거나 죽어버리고, 막판에 폼잡고 끝난다. 유한 계급의 이야기이다. 아, 나도 해변에서 빈둥대면서 몇 주 몇 달씩 휴가를 보내고 싶구나...

아버지와 딸이 등장하지만, 사실 둘다 백치 같이 덜 자란 애새끼들이고, 그런 애들도 좋다고 달려드는 주변 인물 덕에 그 인물들이 매력있게 그려진다.
인물의 주인공됨이나 아름다움도 결국 상대적이고, 주변 인물들의 개성과 다양함이 양각 판화의 배경처럼 깔려서 주인물들을 두드러지게 한다.

제목의 안녕이 봉쥬르, 인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더 나은 마지막 문장을 생각하기 어렵지만 마무리는 그냥 닭살 돋았다.

세실이 안에 대해 갖는 여러 복잡한 감정들을 한참 그려놨는데도, 안을 선망하고 좋아하고 그냥 따르고 싶고 그러면서도 밀어내는 감정이 잘 와닿지를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안의 떠남과 죽음에 절절한 감정을 보태는 게 저게 뭐야 싶었다. 와 싸이코패스인가 별 장난은 다 쳐놓고선.

누구도 필요 없는, 나는 겪어본 적 없는 친밀함과 공범 의식 같은 걸 가진 아버지와 딸의 모습은, 이게 부러운 것도 아니고, 한심해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저렇게 지들 마음대로 살아도 살아는 지는게 고깝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어느 정도 내 마음대로 살고 있으니 나라는 이야기를 읽는 누군가는 고까울지도 모르겠다.

+밑줄 긋기
-난생처음으로 나는 그런 특별한 기쁨을 경험했다. 어떤 존재를 간파하고 찾아내고 백일하에 드러낸 다음 명중시키는 즐거움. 과녁으로 삼을 누군가를 찾아헤맸고, 발견하자마자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즉각 방아쇠를 당겼다. 명중! 내가 모르던 경험이었다.(지배와 조정, 가스라이팅, 음모와 계략, 통제력과 권력욕, 사람들은 이런데서 대리만족을 느낄까.)

-그녀는 많은 여자들이 간 길을 따랐고 알다시피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죠. 젊은 시절 중산층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었고 그 상황에 안주해 거기서 벗어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 그 부인은 이것도 하지 않고 저것도 하지 않았다는 걸, 뭔가를 성취하지 않았다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요.(이런 뒤틀린 말 같은 데 밑줄 긋고 있었네 나야…)

-모래 폭포가 시간처럼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그건 한가로운 생각이라고, 한가로운 생각을 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라고 느꼈다. 여름이었다.(밈으로 쓰이는 ‘여름이었다’의 기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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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급자족한다
오한기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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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2 (저자: 오한기)


많은 걸 살 수 있다. 남들의 상상력과 이야기마저 돈과 바꿔 온다.
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고 또 읽고 몇 년이 지난 뒤 또 읽으며 이런 일이 있었군, 이런 감정이었군, 한다. 돈이 된 적 없고 내 스스로 지어내 읽고 있으니 이거야 말로 자급자족이다.

내가 오한기를 또 읽다니. 물론 이건 삼천원에 중고로 구매했는데 완전 새 책인데 이 값이라니, 수상한데...싶다가도 백년 동안의 고독도 천사백원인데 역시나 명작이었잖아. 자본주의에 속지 말자. 작품을 보자, 했다.

120페이지쯤 읽었을 때, 파이트클럽을 생각했다. 어쩌면 미아 모닝스타는 화자가 만든 환상이고, 사실 자급자족단은 화자가 두목인데 그 폭주를 막으려고 반대편을 설정해놨다 뭐 그런…내 상상력이 빈곤해서 그렇게 예측했다. 일단 마저 읽어보는 거지.


다행히 예측은 틀렸다. 명작일 가능성도, 상상 속의 전개도...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실제 전개는 여기서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이 문장과 비슷한 표현이 소설 속에 자주 등장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같은 거...)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갖다 붙이려 들면 자급자족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자급자족을 자본주의의 대척점으로 그려 놨다. 사실 내 보기에 자급자족이란 말은 틀렸다. 자연주의 마을도, 비비와 볼키도, 미아와 헤밍웨이도, 카프카와 해인도 관계의 구성원끼리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서로 끝없이 떠먹여주고 있었다. 대놓고 반자본주의 하면 너무 유치하니까 네 글자 맞추느라 택한 조어 같았다.

스파이물을 많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존 르 카레의 ‘리틀 드러머걸’,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아, 처음 읽은 건 아주 오래전 베를린 느와르 ‘4월의 제비꽃’이었나 그랬다.
그래서 이 한국적이고 특정 시대(2018년 언저리)를 배경으로 한 스파이물이 제대로 쓰인 건지 그냥 개허접인지 판단할 능력이 안 된다.

딱히 재미있지는 않은데, 괜시리 두껍고, 그런데 읽는 게 더디지는 않았다 정도였다.
CIA니 국정원이니 트럼프니(아 그런데 이 소설 나오고 7-8년 지난 지금도 왜 트럼프일까…) 재벌 총수니 평창올림픽이니, 이름 번듯한 조직이나 기관, 인물과 사건을 다 때려 넣고 B급 코미디 같은 걸 하고 싶었던 건지, 사회 풍자라고 해야 할지, 이 장르물 자체에 대한 조롱인지(이렇게 물으면 아니라고 할 것 같다) 읽는 내내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전까지 시간은 꽉 채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시간은 무엇이든 아무거나 하면서 보내는 거라고. 채우는 것이 보내는 것으로 바뀌니까 여유가 생겼다. 자기계발 중독자, 성취지상주의자가 드디어 체념한 것이다. 책이라도 빈 시간 속에 욱여 넣었는데 이젠 안 읽어도 시간은 잘 간다. 지난 달에 11권을 읽어 놓고 안 읽었다고 하면 거짓말 같지만…

대충 이거저거 쓰고 읽고 하면서 보내고 있다. 자급자족을 하면 확실히 소비는 덜 하게 된다. 돈 안 되는 글쓰기야 말로 확실한 반자본주의일지도 모르겠다.


+밑줄 긋기
-그러나 대책은 공정거래, 4차 산업혁명, 정의, 욜로처럼 공허한 단어였다. 우리는 가난한 데다가 공허하기까지 했다. 확신하는데 빈곤은 100년 뒤에도 모든 글의 소재거리가 될 것이었다. 빈곤은 현재를 넘어 과거를 돌아보게 했고, 미래를 예견하게 했다. 빈곤만큼 고전적이고 동시대적이며 SF적인 건 없었다. (19, 흙으로 만든 수저는 밥 한 술이나 뜰 수 있을까.)

-스파이는 경계해야 한다. 삶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을. (59, 모두가 경계해야 할 것 같은 욕망)

-나는 주온에게 막연한 동질감을 느꼈고, 주온이라면 해인과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걸 목격해도 질투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102, 뜬금 없이 처용하는 화자)

-마지막으로 형식. 혹자는 형식이 껍데기일 뿐이라고 하지만, 형식만큼 어필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특히 보고서에 있어서는요. 상사들은 형식에 눈이 멀기 마련이거든요. (148)

-내가 물었다. 사랑을 위해 죽음으로 뛰어든 양완규. 그 행위는 상상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생각보다 비참했고, 예상보다 처참했다. 해인이 위기에 빠졌다면 나 역시 비참하고 처참해지리라. 갑자기 한기가 몰아닥쳤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213, 나는 오한기가 오기나 한기 같은 단어를 쓸 때 심상할지 궁금했다.)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책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270, 적어도 시간을 보내는 걸 해결해주긴 한다.)

-한때 좋아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당신의 작품을 좋아했던 게 후회되네요.
잘됐네. 나도 너 같은 독자는 필요 없으니. (277, 좋아하던 작가들과 내가 나눌 법한 대화였다.)

-미아는 불법으로, 아니, 진짜 미쳐 있었지만, 주는 합법적으로 미쳐 있었다. 이 세상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우기면서 운영되는 것이었다. 이게 세상의 비밀이었다. (325, 나의 미침은 불법인지 합법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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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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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5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이야기의 신은 이야기 안에서 전능하다. 누군가를 사라지게 하거나 새로 나타나게 한다. 살고자 하는 사람도 죽이고, 죽고자 하다가 다시 살려고 하는 사람도 죽인다. 가시덤불 숲 정도 태웠다가, 에라이 하고서 한 도시 전체를 불타게 할 수 있다. 사람을 철길 위에 네 토막 내는 것도 가능하다.

읽는 사람은 이야기 안에 있는 동안은 그렇게 끌려다닌다. 읽던 도중에 덮어버리는 것도, 기어이 끝까지 읽는 것도 둘다 이야기에 대항하는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왜 이야기랑 싸우려고 하죠? 한 인물이라도 이입하기 힘든 독자는 어떻게 하죠?

이번 소설은 마침표가 제법 후한 편이었다. 대신 마침표마다 초점 화자가 바뀌었다. 그걸 따로 말 안 해줘도 읽어나가다 보면 이번엔 또 이놈이군, 할 수 있게 잘 써 놨다. 다만 교수와 똥강아지는, 머리커는 어디로 갔을까? 자기가 여기선 신이라고 탱크로리 데려다가 (아마도) 기름을 마구 뿌리고 다 폭파시키고 끝내면 되는 거야? 모든 이야기의 끝은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딱히 더 나쁠 것도 더 나을 것도 없는 인간들, 평범하고 다양한 인간들을 줄줄이 시시콜콜 보여줘 놓고 다 날려버리는 건 너무 짓궃다. 정신 없는 영화 한 편 본 기분이었다.

한 편으로는, 소설은 이렇게 내가 만들고 싶은 세계를 만들고, 다시 다 부숴버리고, 모래성이나 블록집처럼, 찰흙놀이처럼, 그렇게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인데 난 잘 가지고 놀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모래밭에 파헤치고 간 흔적, 물웅덩이, 두고간 작은 삽, 불장난 뒤의 잿더미, 땅 속에 묻힌 시체, 남이 실컷 놀고 간 뒤에 얘들은 뭐하다 간거야, 하는 기분이다.

제목은 딱히 극적인 사건도 아니었다. 하찮은 사람이 다 망하고 다 늙어서 자기 죽을 자리 찾아온 걸로 호들갑 좀 떨었다가 온 도시가 멸망한다. 뒤좀 돌아봤다고 소금기둥인지 돌인지 만든 신만큼 이 이야기의 신도 잔인하다. 소돔120일의 결말이랑 딱히 차이점을 모르겠다. 오히려 더 심한 대량 학살… 이걸 무덤덤하게 읽도록 쓴 신이 나쁜 건지, 그렇게 읽은 내가 나쁜 건지 둘다 안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밑줄 긋기
-그냥 꼼짝하지 않고 누워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서 자신에게 말하길 오, 안 돼, 절대, 머리커, 다시 꿈꾸기 시작하면 안 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절대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237, 이번 소설은 제법 마침표가 많다. 벵크하임의 옛 사랑 머리커 할머니. 한국에서는 놀림 많이 받았을 이름...)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작자들, 이 불쌍한 말들은 존중받아 마땅한 것을, 하지만 저치들은 누구도 무엇도 존중하지 않아, 내 저들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겠어, 저 돼먹지 않은 어중이떠중이 놈들, 하나씩 모가지를 비틀어주마, 내가 농담하는 줄 알지, 두고 봐. (254, 일방적으로 말수레를 동원하라는 명령에 분노하는 마구간지기. 말에 대한 존중에 자신에 대한 존중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람이 왜죽어야 하는지가 아니야,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가라고, 라고 벵크하임 벨러 남작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바깥을 보고 싶지는 않았고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이것이 그의 방식이었으며 어차피 도시를 썩 잘 볼 수는 없었던 것이, 바깥은 모든 것이 잿빛이었고 그가 있는 쪽 창문에는 뿌옇게 김이 서렸거니와, (494, 제목에 속았지만 사실 이 소설 주인공은 벵크하임이 아니라 폭주해서 총질하고 불지르고 다니는 미친 교수가 아닐까 싶다. 한쪽은 무기력에 에너지 과소, 한쪽은 에너지 과다에 생의 의욕 폭발)

-(…)질투를 거론하려거든 한국인을 생각할지며 위선을 거론하려거든 이번에도 한국인을 생각할지며 오만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든 교활한 아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든 잠재적 공격성을 거론하려거든 다시 한국인에게 돌아올지니 그대가 어떤 못된 습성을 떠올리든 한국인에게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으나 적어도 그대는 그곳에 있고, 그렇다면 적어도 한국인의 상투는 틀어쥘 수 있을 것이며 그냥 한국인은 똥구멍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기는 한데, 그렇더라도-누구에게 이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그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는 것이, 그에게 이 말은 술집에서 주먹을 부르는 한낱 모욕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그가 벽에 붙어 게걸음으로 나가 어둠 속에 숨어 앙갚음할 기회를 엿볼 것이거니와 그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는 것은 그 무엇도 그에게 진짜로 상처를 입힐 수 없으며 그러는 동안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자기연민에 빠질 수 있는바 그의 실체를 굳이 그에게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가망 없는 짓이기 때문이어서, 그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결코 파악하지 못할 것이고 결코 깨우치지 못할 것임은 이것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깨우치려면 한국인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나 그대는 한국인이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영 한국인, 용납할 수 없는 한국인일 것이요, 온갖 예외를 내게 들먹이지 말 것은 예외들이 내게 구역질을 일으키기 때문이요, 실은 예외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어서, 한국인은 누구든 나의 일가요, 한국인은 누구나 한 뿌리에서 나왔은즉 그는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는 무식하고 위험한 어릿광대이지만 그는 왕이 아니어서, 끊임없이 투덜대다가도 누가 자기에게 고함지를라치면 슬그머니 내빼니 내 진심으로 말하건대…(648-649, 자기 출신 민족을 셀프 디스 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간접 체험이라도 해 보려고 ‘헝가리인’하는 부분을 ‘한국인’하고 바꿔 적어봤는데 어느 나라가 들어가도 상관 없겠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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