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키스패너
프리모 레비 지음, 김운찬 옮김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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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05 저자:프리모 레비.

나의 일의 상징물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마이크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한때는 말하기보다 노래하는 도구로 쓸 때 더 정이 가는 물건이었다. 그러다 과도한 목 사용으로 생긴 성대 폴립 수술을 받고 난 후에는 생존물품 같은 게 되었다.

후두염, 성대결절, 성대 폴립을 차례로 겪으면서 개인 마이크를 구매해서 10여 년간 두 대 정도 교체하며 사용했다. 그런데 몇 주 전, 마이크가 작동하지 않았다. 큰일났다.
그 사이 학교에는 오디오 장비 공사가 있었고, 새 마이크 대여해 주는 걸 받아왔다. 천장 부착된 360도 스피커에 연결되는 마이크는 음질이 끝내준다. 한 번씩 노래 한 곡 뽑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마이크로 흘러들어가 천장에서 울리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중요한 건 매체가 아닐지도 몰라. 내가 하는 말들이 온통 낯설었다. 그렇지만 아무 말이나 해야 한다. 그게 내 일이다. 모두가 엎어져 자도 자장가처럼 혼잣말을 한다. 내 목소리는 톤이 높은 편인데도 다들 잠이 온다고 한다.
나는 내 일을 끝내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프리모 레비의 책을 여러 권 갖춰놨는데, 세 번째 책이 멍키스패너였다. 조립공 파우소네와 도료 화학자인 화자가 만났다. 러시아의 어느 일터에서, 각자 다른 일을 하러 온 이탈리아인들이었다. 파우소네는 철탑, 증류탑, 다리 같은 거대 구조물을 설치하는데, 세계 여러 곳을 떠돌며 일하다 겪은 일들을 화학자에게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화학자가 글로 쓰도록 허락한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절실함이 있었다. 자기 일이 잘 안 될 때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머리를 쓰고, 영영 망해버리면 괴로워한다. 일을 잘 마무리했을 때는 자부심을 느낀다. 삼십 대의 조립공과 오십 대의 화학자 사이쯤 되는 사십 대의 나란 노동자는 그런 걸 느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도 더디고 버겁게 만드는 중이다. 그런데 일 앞에서는 내가 조금 더 미워진다. 누군가는 지금의 내가 된 게 다 내 선택의 결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선택의 여지라는 게 있었다면 뭐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아니, 과거의 내가 선택한 걸 지금의 내가 왜 감당해야 하는 걸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정말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겪으면서 점점 무언가 쌓여가고 노련해지고 적절한 급료와 일하는 환경에 대해 견딜만해지는 사람들은 자기 일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우소네는 그런 사람에 가까웠다. 레비는 화학을 공부한 덕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고, 나중에 취업해서 먹고 살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더 사랑한 일은 글쓰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글쓰기의 많은 소재들이 자신의 일에서 나왔다. 일 속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나도 내 일 속에서 만난 일들이 글이 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별로 쓰기 싫다. 그냥 나는 일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고 싫지만 의무감으로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좋아서 하는 노동이란 드물 것이다. 물론 벌어 먹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넉넉한 성과급에 이 일을 선택하길 잘했다 하는 사람도 있겠다. 생명체로 삶을 이어가려면 일을 하는 건 숙명이다. 다만 사회가 복잡해지기 전에는 다들 엇비슷한 일을 하던 게 이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그게 또다시 AI로 수렴해서 많은 일들을 빼앗기고 있다. 그런 내용의 시사 프로를 이제 막 시험 마친 아이들이랑 보았다. 일하고 싶어도 AI에 밀려난 사람이 많았다. 먹고 살기는 참 어렵다. 밀려나는 입장이 되면 다들 놀라워하며 사용하는 인공지능이 미워질 것 같다. 갑자기 아이들이 태양도 공전을 하냐고 물었다. 뇌피셜로 생각을 말하다가 야 그냥 찾아보자, 했다. 인공지능까지는 아니고 검색 기능을 활용했다. 태양도 우리은하의 중심부를 축으로 공전하고 자전도 한다! 이렇게 아주 가끔이나마 같이 배워가는 게 내 일의 좋은 점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그러면서 사랑받는 다른 사람들을 보는 이곳에서 나는 자주 쓸쓸하다.

+밑줄 긋기
-나는 내 운명에 대해 절대 불평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불평한다면 짐승일 겁니다.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지요. (42, 여기 슬픈 짐승 한 마리 있어요.)

-그러는 동안 오렌지색 석양빛은 북반구 밤의 빛나는 보랏빛으로 바뀌었다. 서쪽 하늘을 배경으로 땅의 기다란 물결이 뚜렷이 보였고, 그 위로 희미하고 검은 구름이 나지막하게 평행으로 펼쳐져 있었다. 마치 화가가 자신의 붓질을 후회하고 조금 위에다 다시 반복해서 그린 것 같았다. 그건 이상한 구름이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토론했고, 결국 파우소네가 나를 설득시켰는데, 멀리 떨어진 동물들 무리가 바람 없는 허공으로 일으킨 흙먼지라는 것이다. (47, 해 질 녘을 쓴 글에 늘 밑줄을 친다. 후회의 붓질이라니.)

-따라서 열광적으로 한 페이지 또는 책 한 권을 통째로 썼는데, 나중에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어설프고, 어리석고, 이미 쓴 것이고, 부족하고, 지나치고,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 슬퍼지고, 바로 그날 저녁 그가 생각했던 것 같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말하자면 직업, 공기, 피부를 바꾸고, 혹시 조립공이 되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어설프고 불필요한 것을 쓰고도(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걸 깨닫지 못하거나, 아니면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이 더 많은데, 종이는 너무나 관용적인 재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종이에다 아주 어리석은 것을 쓸 수 있지만, 종이는 절대 항의하지 않는다. 광산의 보강 목재처럼 하중이 너무 많아 무너지려고 할 때 삐걱거리지 않는다. 글쓰기 직업에서 경종의 신호와 체계는 조잡하고, 삼각자나 추선처럼 믿을 만한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어떤 페이지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읽는 사람이 깨닫는데 그때는 너무 늦고, 그러면 괴로워진다. 그 페이지는 오로지 당신만의 작품이고, 변명의 여지도 없고, 완전히 당신 책임이기 때문이다. (71, 글쓰기의 무게)

-만약 거칠게 다루면, 말하자면 두드리고, 늘리고, 구부리고, 압축하면 구리는 우리처럼 된다. 즉 그 결정이 커지면서 단단해지고, 거칠어지고, 적대적으로 되는데, 파우소네는 아르베르소라고 말했을 것이다. (116, 우리는 구리처럼 된다.)

-많은 직업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슬프게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입관과 증오를 갖고 현장으로 내려가는 것은 해롭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평생 동안 직업을 증오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을 증오하게 된다. 직업의 결실이 일하는 사람의 손에 남아 있도록, 직업 자체가 형벌이 아닌 것이 되도록 싸울 수 있고 또 싸워야 한다. 하지만 직업에 대한 사랑 또는 반대로 증오는 내부적이고 선천적인 것으로,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그 직업이 이루어지는 생산 구조보다는 개인의 삶에 더 많이 의존한다. (121-122, 내부적이고 선천적인 것)

-그래요, 어느 날 그 얼룩을 따라 틈이 나 있고, 개미들의 행렬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호기심이 생겼고, 돌멩이로 두드렸더니 안이 텅 빈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더 강하게 두드렸고, 겨우 1인치 두께의 시멘트가 무너져 내렸는데, 그 안에 죽은 사람의 머리가 있었어요.
나는 마치 눈에 총을 맞은 것처럼 균형감각을 잃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정말로 거기 있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곧바로 나에게는 이상한 병이 생겼는데, 여기 허리에 딱지들이 생겼고, 나를 갉아먹었고, 딱지가 떨어지면 다른 딱지가 생겼어요. 하지만 나는 만족스러웠어요.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놔둔 채 집으로 돌아갈 구실이 생겼으니까요. 그렇게 나는 수영하는 법을 그때나 그 이후에도 배우지 못했어요. 바다든 강이든 호수든 물에 들어갈 때마다 흉측한 생각들이 떠올랐으니까요. (152, 나도 아직 수영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용어는 악명 높게 많은 의미를 갖고 있지만, 아마 가장 접근하기 쉽고, 주관적으로 가장 잘 즐기고, 인간 공동체에 가장 유용한 자유의 유형은 자신의 일에 유능하다는 것, 그러니까 자기 일을 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일치한다는 가설이다. (215, 일하지 않는 자유만 꿈꾼 내가 미처 모른 자유)

-관자노리에->관자놀이에(237, 여기에도 오탈자가)

-작위보다는 부작위로 실수하는 것이 낫다. 자신의 운명을 조종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 불확실한 마당에 다른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지 않도록 자제하는 것이 낫다. (246,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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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살아있는 수업기술 - 30가지 수업 고민과 그 해답 찾기
김현섭 지음 / 수업디자인연구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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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101 저자: 김현섭.

내 교과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사라진 이유를 돌아보았다. 나는 ‘사회’에서 떠나기 위해 국어, 수학, 과학, 영어만 선택했다. 3년 간 사회 교과 근처에도 안 갔다. 그러고나서 다시 맞닥들인 ‘사회’는 낯설고 공허해 보였다. 십여 년 간 쌓았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 새어나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막막했다. 활동과 참여를 강조하는 일은 코로나19 때부터 멈춰 있었다. 그 직전에는 또 2년을 쉬었다. 그러니까 나는 2년+2년+3년 총 7년 동안 감이 다 떨어졌다. 7년의 공백. 그 사이는 혼자 조용히 접한 잡다한 책과 글로 채워져 있다.
복직을 하면서 관리자에게 인사할 때 자조적으로 신규나 다름 없습니다, 했는데 스스로 현장을 겪어보니 기정사실이었다. 연금은 18년 넘게 납입했지만 나는 2년 차 새내기이다. 진짜 2년 차에는 배우려는 의지라도 있어서 대학원에 입학했고 평가원의 이런저런 연구 개발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AI가 등장했고, 아이들은 일상언어로 패드립과 욕설과 멸칭을 서로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게 되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휴대전화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태블릿 피씨가 한 대씩 지급되었다. 적절하게 활용하는 교육과 동시에 쓰지 말아야 할 때 쓰지 말아야 할 용도로 안 쓰게 하는 교육까지 같이 해야 한다. 안 쓰게 하는 일은 솔직히 전쟁에 가깝다. 그래서 자꾸 징집을 회피하고 모르는 척 하고 싶다. 결국 말리고 잡아내고 그런데 그게 완벽하지 않아서 몇 명만 제지받고 교묘한 다른 인간들은 못 잡아내서 공정한 지도도 쉽지 않다.

이제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완전히 끝나고,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지침이 되었으니, 사회과 교육과정을 다운받아 밑줄 치며 읽어보았다. 일부 단원의 학년 배치가 달라졌을 뿐,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강의식 말고는 다른 활동 구성이 비교적 어려운 헌법 속 국가기관, 민주주의, 법 같은 부분을 살펴보니 유의점에서도 ‘인식하게 한다’ 뭐 이런 식으로 모호하고 막연했다. 그 공백을 채우는 일,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 실제화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너무 오래 고립되었다. SNS도 거의 안 쓰고, 유튜브도 좀체 안 보고, 뉴스 기사도 웬만하면 잘 안 본다. 대체로 오래 전에 죽었거나 나와 한참 먼 사람이 남긴 책으로만 소통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주방 식탁 근처에 놓인 책장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2017년에 단체로 사 놓고 정작 나는 읽지 않았던 책이다. 2018년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당장의 과제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교육과정과 세상이 바뀌었어도 제목을 보면 뭔가 아직 유효한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 펼쳤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완전히 무능해지는 것과 아닌 것 사이에서 발버둥치고 있긴 한 것이다. 책 구성은 깔끔하고 명료했다. 실용적인 팁도 나아가야 할 방향도 지시해주었다. 그렇게 신념과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걸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는 마음이 부러웠다. 그러니까 이런 책들을 보며 비뚤어지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여 실천을 해야 일터에서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초반부를 읽는데 틀린 말은 거의 없었다. 다 맞는 말 같았다. 노력과 실천을 말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는 나는 무책임한 걸까 병이 든 걸까 계속 이 일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자기가 믿는 종교 경전의 내용을 어기지 않고 실행하는 것은 아니니까 스스로에게 너무 야박해지지 말아야겠다.

일터로 돌아와서도 인문사회과학과 교육학 서적을 읽는 대신 회피형으로 과학교양서와 온갖 잡다한 분야의 비문학과 고전문학을 읽었다. 현실과 시사적인 분야보다 보편적이고 통섭적이고 시대가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본질 같은 것만 찾아 다녔다. 대개는 이게 맞냐? 하고 자아성찰만 실컷 했다. 회의, 의심, 의구심, 불신, 비판, 반대, 내 장점을 써야 할 일이 있었는데 잘하는 게 저 비슷한 말들만 떠올라서 그냥 미리 준비함, 을 장점으로 꼽았다. 단점은 미리 걱정함, 이었다.

이 책 읽기는 미리 준비함과 동시에 지금에 대처할 마음을 기르는 데 조금 도움이 되는 느낌이었다.

+밑줄 긋기
-덕성(인간 됨됨이)이 부족하면 삶의 만족도와 행복 지수도 떨어진다. (26, 역의 경우도 맞는 건가 싶은 것. 덕성과 관련된 것으로 자기 존중, 자기효능감, 내면의 안정성, 영성 같은 걸 제시한다. 난 틀렸어 먼저 가...자기 성찰을 할수록 안정성이 깨지는 편)

-무표정하게 학생들을 대하게 되면 학생들 입장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교사가 학생들을 사무적으로 대하면 학생들도 교사를 지식을 전달하고 행동을 통제하려는 사람으로 여긴다. 교사의 내면 상태는 표정과 태도로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49, 첫 수업 시간을 망치는 방법 중)

-첫 시간에 만날 학생들이 작년에 담당했던 학생들보다 배움의 상태와 의지가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만약 작년 학생들보다 상태(?)가 좋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수업에 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마음의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학생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학생들의 배움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교사로서 그 학생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첫 수업의 문을 열어야 한다. 사랑은 이성과 감정 뿐 아니라 의지도 포함된 개념이다. (56, 무서워!)

-학생들은 엄격한 교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한 교사를 싫어하는 것이다. (92)

-학생들은 친절한 선생님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수업 질서가 무너져서 배움이 잘 일어나지 않으면 이를 싫어한다. (93)

-존재 자체에 대하여/후천적인 노력과 성장 과정에 초점을 둔/구체적인 이유를 들어서/사실에 기초하여/과정 중심으로 칭찬하기, 학생의 긍정적인 행동에 대하여 감사를 표현하기(105)

-“넌~을 잘하는 것 같아”
“너의 ~이 발전한 것 같아”
“우리는 너를 좋아하지만, 네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네가 ~함으로써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함께 시도해보자”
“자 한번 보자, 실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야. 네가 실수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가 더 중요해”
“너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네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포기하지 말고 계속 시도해보렴”
“네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게 말하렴.”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지만, 네게 이것을 잘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해”(106-107, 격려의 표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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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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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31 저자: 버트런드 러셀.



브로콜리너마저-행복
https://youtu.be/ko2P-fogyrA

두 번째 심리상담에 다녀왔다. 첫 번은 뭐라도 시작했다는 데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뭔가 과제를 떠 안고 온 느낌이고 다녀와서도 잡생각이 자꾸만 든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지금의 곤란에 놓였다고 혼나는 느낌이 들어서 자기 반성도 하다가, 너무 싫은 걸 어떡해! 하고 자꾸 질질 짜게 된다.

러셀은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세운 사람이라고 들어만 봤다. 그런 사람이 이야기하는 행복론이란 어떤 걸까 궁금했다. 행복의 정복, 제목이 라임이 맞아서 마음에 들었다. 기복의 극복, 축복의 왕복, 제복의 착복, 시리즈를 마구 만들고 싶어지는 제목이다.

이 책은 이론서도 전문 지식에 대한 책도 아니고, 누구나 보라고 쓴 책이다. 오십 대 후반의 저자가 내가 겪어보니 이렇게 살아야 행복해, 하고 꼰대질을 하는 건데 조금 고급의 꼰대질이랄까, 친구는 소학 같은 거라고 했던가. 읽는 이의 행복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당위와 주장을 담아 놨다. 읽기에 어렵지 않았고 글을 잘 써서 읽는 재미도 있었다. 읽기에 어렵지 않을 뿐, 여기서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쉽지 않은 걸요, 하는 것이다. 오늘 상담에서도 이것도 저것도 다 못해요 안 돼요 이런다고 피드백을 받았었다. 남 이야기 잘 들어보고 그대로 따라가 봐야지, 그런 마음을 먹는 게 어려운 건 사실 게으르고 노력 안 하는 게 맞는지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기쁨에 대해 다룬 챕터가 있다. 그러면서 부모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이야기한다. 아이를 소유물처럼 다루지 말고 존중하라는 것, 당연한 일인데도 잘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너무 텔레비전에만 빠져 있는 작은어린이에게 보드게임-카르카손-을 하자고 했다. 여럿이 하면 더 재미있겠지만 둘이 해도 아이는 신나했다. 그냥 텔레비전 보지 말라고 소리만 질러대기보다 다른 놀이를 함께 하고 대안을 마련해주는 게 존중에 가깝지 싶었다.

일터에 가지 않는 날은 사실 별일 없다. 그냥 다같이 엄마가 만들어 준 생연어초밥을 저녁으로 먹고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며 노는 평온한 날이다. 나는 그와중에 시간 들여 십리길 가서 줄줄 짜다가 왔지만 그건 뭐 오늘 같이 별일 없는 날 아닌 긴장되고 힘든 평일의 날들을 대비하는 일이니까, 그것도 노력이라면 노력이라고, 너무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한다고 몰아부치지 말아야겠다.

+밑줄 긋기
-이렇게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대부분은 손에 넣었고,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이다. (17, 포기하면 편해)

-현명한 사람은 고민을 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 때에만 고민하고, 고민을 해도 효과가 없을 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며, 밤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79-80, 현명해지고 싶다.)

-나의 행동은 내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며, 결국 내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또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큰 슬픔도 이겨낼 수 있다. 마치 인생의 행복을 끝장나게 할 것처럼 보이던 심각한 고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사그라져, 나중에는 그 고민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조차 거의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자아는 세상에서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81, 내가 굉장히 자기중심적이었구만 싶었다.)

-어떤 불행이 닥쳐오면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을 직시하고 나서는, 그 불행이 그렇게까지 끔찍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만한 적절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제시해보라. 그럴 만한 이유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나 자신에게 우주적 중요성을 가지는 가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얼마동안 최악의 가능성을 꾸준히 응시하면서 진정한 확신을 가지고 “좋아, 그까짓 것 별 문제 아닐 거야”라고 말해보라. 그러고 나면 걱정이 엄청나게 줄어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84-85, 시도해 볼 일)

-피로는 대체로 자극에 집착하는 데서 생긴다. 여가 시간을 잠자는 데 투자하는 사람은 피로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따분한 근무 시간을 보내고 난 사람은 자유 시간에는 즐겁게 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쉽게 접할 수 있고 겉보기에 너무나 매혹적으로 보이는 쾌락의 대부분은 신경을 혹사시킨다는 점이다. 자극에 대한 욕구가 한계를 넘는다면 그것은 왜곡된 성격이나 본능적인 불만족의 징후다. (87, 1930년에 나온 책이 뭔가 현대 미디어 중독 이야기랑 닿아 있는게 신기하고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질투는 민주주의의 기초다. (91, 참신한 주장이었다.)

-고상한 도덕관도 다른 여성에 대한 적의를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고상한 도덕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기회를 가진 여성들은 질투의 대상이 되고, 이런 죄를 처벌하는 것은 덕행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특별한 형태의 덕행은 즐거움을 안겨주므로 그 자체로 보상이 된다. (92, 부러워서 그런 거라니)

-현명한 사람은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 때문에 자신의 즐거움을 망치지 않는다.
사실 질투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일종의 나쁜 버릇이다. 질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사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려는 데서 생긴다. (97)

-개연성의 법칙에 입각한다면,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냉대는 그 양에 있어서 엇비슷하기 마련이다. 그 사람의 주장처럼, 특정한 상황에 처한 어떤 사람이 혼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해코지를 당한다면, 그 사람 자신이 그런 일을 자초할 만한 원인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자신이 실제로는 입지도 않은 피해를 입고 있다고 가상하고 있거나, 아니면 무의식중에 남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나는 행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121, 억까 부정 중인 선생님…)

-첫째, 당신의 동기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이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둘째, 당신의 장점을 과대평가하지 마라. 셋째,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당신 자신과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지 마라. 넷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을 해코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만큼 당신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고 상상하지 마라. (128, 피해망상 예방법)

-기계 생산의 궁극적인 목표는-아직 우리가 완전히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기는 하지만-재미없는 일들은 모두 기계가 대신하고 인간은 다양성, 창조성과 관련된 일들만 담당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164-165, 이제 인간은 점점 아무것도 안 하는 체제를 만드는 중인 것 같다.)

-어떤 것에 대한 취미와 욕망은 모두 전체적인 인생의 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취미와 욕망을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면, 그 취미와 욕망은 건강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 그리고 사회적 명예를 해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도 마음껏 빠져들 수 있는 열정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열정도 있다. (181)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가지 욕망만 지나치게 추구하는 사람은 대개 심리적으로 깊은 문제를 가지고 있고,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사람이다. (183)

-결국 이 여성은 엄청난 양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치이게 되고, 얼마 가지 않아 모든 매력을 잃고 지성의 4분의 3을 잃게 된다. 그렇게 살면서도 매력과 지성을 잃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퍽이나 운이 좋은 여자다.(204, 러셀 선생은 결혼과 육아에 뛰어든 여성이 겪는 문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가족들 옆에서 충실하게 의무를 수행한 대가로 가족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여성이 가족을 소홀히 여기고 쾌활하고 매력적인 생활을 유지했다면 아마 가족들은 이 여성을 사랑했을 것이다.(205)

-부모 노릇을 한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일부분일 뿐인데,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긴다면 만족을 얻기 어렵고, 또 만족하지 못하는 부모는 욕심 많은 부모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되었다고 해서 다른 여러 가지 관심과 직업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그것이 어머니에게도 이롭고 자녀에게도 이롭다.(222)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자기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자부심을 가질 수 없다. (234, 나 의자부심)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전문적 활동과 관련이 없는 책을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해도, 깨어 있는 동안 줄곧 그것만 생각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239)

-물질세계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불결한 오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기 쉬운데, 부모가 가진 이런 생각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252)

-행복한 사람의 인격은 분열되어 있지 않으며, 세상에 대항하여 맞서고 있지도 않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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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화질세트] 도로헤도로 (총23권/완결)
Q-HAYASHIDA / 시공사/DCW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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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7 저자: 하야시다 큐.

어쩐지 지쳐버려서 만화책만 줄창 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도로헤도로를 1권부터 23권까지 며칠 동안 다 보았다.
처음 이 만화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제 만화 연재는 일본에서 2000년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2016년부터 알라딘 중고매장을 순회하면서 몇 권을 모으다가 새 시리즈가 나올 때를 매번 기다리다 보니, 결국 2018년 완결까지 2년 정도 걸렸다. 전자책은 2023년에 적립금 모아서 한 권씩 깨알같이 모았다. 그래서 종이책과 전자책을 다 갖춘 책. 박스 세트로도 나왔지만 거기까지는 참기로...

정체 불명의 도마뱀 머리 카이만은 과거의 기억 없이 홀 이라는 세계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만두가게를 운영하는 친구인 니카이도와 함께 홀의 인간을 연습 용도로 괴롭히는 마법사들을 처치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낼 실마리를 찾아간다.
홀과 마법문으로 이어지는 마법사의 세계에는 버섯 마법을 쓰는 엔과 그 동료인 엘리트 마법사들이 패밀리를 이루고, 눈에 십자 문신을 새긴 하급 마법사 조직이 엔 패밀리와 적대 관계를 형성한다. 마법사는 악마의 지배를 받고, 수련을 통해 악마 시험을 볼 수도 있다.
이런 세계관으로 18년 동안 작가는 흥미로운 세계를 그려냈다. 마법이든 육탄전이든 전투씬이 많고 신체가 훼손되었다, 복구되었다, 죽었다, 살았다 해서 19금이 붙긴 했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나간 뚝심 덕분에 나는 가끔 다른 세상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

이번에는 전자책으로 정주행을 했다. 그러니까 멈추기 힘들었다. 넷플릭스에 애니메이션도 나왔는데, 작년에 여행가서 묵은 숙소에 로그인을 해 놓은 계정이 있어서 밤새 에피소드 전체를 다 보았다. 죄송합니다...

매번 진득하니 오래 뭔가를 하는 것에 대해 이 만화를 볼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18년 간 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지. 나는 일을 시작하고 햇수로는 19년이 다 되었는데 그 중 5년을 쉬어버렸고 그 사이 감이 다 떨어져서 방황하는 영혼이다. 내가 그렇게 10년 이상 뭘 제대로 해 본 게 있던가. 지금부터 무얼 그렇게 진득하니 할 수 있을까, 회한 같은 게 남는다. 만화를 그리는 일은 좋아서 하는 일이었겠지만 그리기 싫은 날들도 많았겠지. 이제 난 좋아서 하는 일이라 할 만한 것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만화는 제법 해피엔딩이다. 과거를 밝혀내고 괴물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고 살아남은 친구들은 곁에 좋은 친구들을 두고 계속 살아간다. 함께 만두를 만들어 먹는다. 그렇게 에피소드 같은 인생이 행복한 게 아닐까 싶다. 매번 일 생기고 싸우고 떠나고 그런 건 이야기만으로 충분하다. 도로헤도로는 진흙구정물을 말한다는데, 내가 있는 곳이 진창이 아닌 것,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마법은 없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와 안온한 삶은 마음만 먹으면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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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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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4 저자: 서머싯 몸.

몸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19년 전 딱 내 생일에 91살로 영면했다 한다. 그 정도면 쓰고 싶은 이야기 잔뜩 쓰다 갔지 않았나 싶다. 나의 91살이란...그런 게 있을런가 모르겠고 상상도 잘 안 된다.

소설은 재미있었다. 그리고 너무 교훈적이었다. 대오각성과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너무나 인간다운 인물들을 만들어 놓았다 싶었다.
혼기를 놓쳤다는 다급함에 사랑 없이 결혼한 키티는 홍콩에서 타운센드와 불륜에 빠지고, 남편 월터에게 딱 걸려 콜레라가 창궐한 시골로 끌려간다. 거기서 헌신적인 남편과 수녀들을 보며 눈을 뜨고, 그러면서도 뉘우칠락말락 어리석은 짓을 반복한다.
봐봐. 얼마나 교훈적인 거야… 그래도 이 소설이 다른 불륜 서사들과 다른 점은 여자를 죽여버리거나 병에 걸리게 하는 벌 받는 결말 대신 착하고 참을성 많던 남편을 죽여버린 것이다. 애초에 콜레라 감염 위험 지역에 간 것도 둘다 자포자기 내가 죽든 쟤가 죽든 한 것 같은데 키티가 살고 월터가 죽었다. 뭐 그렇다.

일터에서 소진되거나 험한 꼴 본 사람 대상으로 심리상담 지원해주는 사업을 알게 되어서 목요일엔가 신청했는데 금요일에 상담기관이 배정되었고, 토요일인 오늘 첫 상담을 받고 왔다. 갈 땐 버스로 40분, 올 땐 걸어서 50분, 뭐 그렇게 십 리 길이니 아주 멀지는 않았다. 이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살자, 했던 것과 달리 내담을 결심하고 신청한 거 보면 나는 가만히 있는 거랑 거리가 먼 인간 같다. 그래도 잘 살고 싶어 그런 거겠지. 주말이어서 그런지 상담을 시작해서 그런지 걸어 와서 그런지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아침에 읽던 소설을 마저 읽었다.

키티는 자기 비밀을 어디 털어놓지도 못하고 그 사실을 아는 게 자신과 남편과 전 연인 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새로운 지역에서 친구도 잘 사귀고 수녀들 일도 돕고 어떻게든 자기 살 궁리를 했다. 본인 입으로 자책하고 어리석다 여기고 스스로와 상대방을 경멸하고 그러던 거 치고는 그렇게까지 쓰레기 인간으로는 안 보였다. 그냥 씩씩하네 싶었다. 제목이 인생의 베일인데, 알록달록 점입가경 가지가지 까도까도 양파껍질, 그런 느낌인 건지, 일단 계속 살고 까 봐야 알아, 하는 건지 원제(The Painted Veil)에 없던 인생이 붙어 버리면서 좀 제목이 무거워졌다. 재미는 있었는데 작가의 ‘달과 6펜스’나 ‘면도날’ 같은 건 또 읽기가 망설여진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양파 껍질을 너무 열심히 까서 그런가, 인간을 고귀하게 그리는 것도, 굳이 속물성을 부각하는 것도 내게는 다 너무 무겁네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랑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이 소설에서 사랑은 키티가 달았다 뗐다 하는 장신구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세상사 인간관계 다 쉽겠지만 그럴 리가.

+밑줄 긋기
-여덟 살 때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열 살 때 아버지를 암으로 잃는다. (…)산부인과 경험을 옮긴 첫 번째 소설 ‘램버스의 라이저’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자신감을 얻고 의사를 때려치운다. (표지 저자 소개 중. 때려치우는 부분이 뭔가 쾌-하다)

-그녀는 일어나서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양팔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너무나 강렬해서 고통스럽기까지한 환희가 밀려왔다. 그녀는 그가 좋았다. (19, 훌륭한 작가는 둘이 무슨 사이인지 어쩌고저쩌고 하지 않고 간결하게 보여주기로 휙)

-하지만 머리는 어깨 위에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니니까. (23, 다른 곳에서 본 이 표현은 여기가 시작일까? 아니면 관용구 같은 것일가?)

-난 그냥 당신을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됐소. 그렇다고 나를 비난할 순 없어. (109, 이것도 흔한 대사였군)

-내가 싫어지기 시작했죠, 그렇죠? 그래요, 날 싫어하세요. 이제 난 아무래도 좋아요. (119, 저런 권유문은 노래가사에만 있는 줄 알았다.)

-세대박이:돛대를 세 개 세운 배(136)

-알겠지만, 평화는 일이나 쾌락, 이 세상이나 수녀원이 아닌 자신의 영혼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답니다. (190, 이너피쓰)

-그들은 함께 있어서 행복한 적이 없었고 헤어짐조차 끔찍하고 어려웠다. (282, 슬픈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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