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

 

문든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도 있다

그러므로 그러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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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하게 텅빈 정신이 알 수없는 감정에 젖어들다가 문득 떠오르는 말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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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신서 48
김태웅 지음 / 평민사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 한바탕 꿈! 그 꿈이 왜 이리 아프기만 한 것이냐?”

인생을 꿈에 비유하는 일은 이제는 너무나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꿈과 인생을 연결하는 많은 이야기들과 어휘들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여전히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고, 이러한 의미를 담고있는 어휘들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그 표현은 진부할지언정 '인생은 꿈과 같다'는 의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희곡작가 김태웅은 인생을 꿈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신춘문예 등단작인 [달빛유희]를 개작한 [쑥부쟁이]와 연극판에 그의 이름을 휘날리게 한 [이(爾)]에서 그러한 특징이 뚜렷하게 보여진다. 그저 하룻밤의 꿈에서 깨어나듯 삶을 버리고 죽음을 향해 담담하게 걸어가는 주인공들의 인생이 무대 위에서 꿈처럼 사라져갈 뿐이다.

[쑥부쟁이]는 두 명의 사내가 무덤 속에 감추어진, 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을 도굴하려는 하룻밤동안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1999년 신춘문예에 당선될 당시의 제목은 [달빛유희]였다. 두 사내가 달빛 아래에서 자신들의 소망을 꿈꾸며 한밤중 무덤가의 으시시함을 이겨내는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또한 그러한 인간의 행동이 결국 하룻밤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도 담고있다. 이러한 제목을 [쑥부쟁이]로 고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극의 세부 내용도 수정되었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작가의 의식과 의도에는 변함이 없다. [쑥부쟁이]는 들국화처럼 생긴 들꽃의 이름이다. 도굴될 무덤에 바쳐지는 이 꽃은 결국 자신의 무덤에 바치는 꽃이 된다. [달빛유희]라는 제목이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를 상징하는 제목이라면 [쑥부쟁이]는 우리의 산하에 흔하게 피어나는 들꽃같은 불쌍한 인생과 그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상징하는 제목일 것이다.

[이(爾)]는 “문제적 인간, 연산”(이윤택 희곡의 제목을 인용함)이 지배하던 폭정의 시대를 살다간 광대들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밝혀놓았듯이 이 작품은 철저한 허구이며, 조선시대 연희에 대한 연구 실적의 도움을 받아서 창작된 작품이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작품이라는 뜻이며, 또한 조선시대의 전통 연희가 다시 현대의 한국 연극에서 그 특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뜻도 된다. 광란한 세상을 만든 연산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광대 공길과, 연산을 없애려는 광대 장생은 서로 절친한 친구이다. 그러나 두 광대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다르다. 공길은 훌륭한 공연으로 연산을 즐겁게 하기위해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광대들을 궁궐로 불러모아 그들을 가르친다. 장생은 공길의 행동을 못마땅해하며 연산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 궁궐을 떠난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이 뚜렷하게 선과 악으로 나누어져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공길은 연산의 총애를 받지만 연산의 폭정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극복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연산의 총애가 공길을 편하게 하는 것만도 아니다. 공길이 불러모은 광대들과 함께 벌이는 공연의 의도는 정확하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공길의 그러한 행동은 그가 처한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예술로의 도피로 보이기도 한다. 광란의 주범 연산은 결국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있다. 그 때가 다가오자 연산은 공길에게 반란군들로부터 살아 날 기회를 제공한다. 즉 자신의 목숨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길은 연산의 뜻을 거스르고  먼저 죽은 장생의 뒤를 따른다. 광대가 극의 중심에 서있는 이 작품은 폭정으로 인해 피폐되고 타락한 광란의 시대에 예술이란 과연 무엇이며, 예술가의 올바른 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다.

김태웅의 첫 번째 희곡집에는 총 6개의 작품이 담겨있다. 그러나 내가 위의 두 작품만을 이야기한 것은 나머지 작품이 못나서가 아니라, 위에 소개한 두 작품이 다른 작품에 비해서 나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꿈처럼 무대 위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면서 나를 몽롱하게 만든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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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세상을 개혁함으로써 보다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부정의 문학은 이 믿음 위에서 출발하여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세계를 세울 때까지 현실을 개조하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아을 부정함으로써 보다 크고 참다운 나에 이르려는 노력 역시 문학에 팔요하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나의 변모는 곧 세계의 변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세계는 나를 내포하고 나는 세계를 내포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관점에서 나는 자아와 현실을 부정하면서 詩의 길을 가고자 한다. 이 길이 나에게는 이상적인 中道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뒷표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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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은 별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역시 시인에게있어서 시를 쓰는 일은 세상을 사는 일과 같은 의미이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 많은 욕심일지는 모르나 아름답고 건강한 사람들이 아름답고 건강한 시를 썼으면 좋겠다.

나의 개혁이 세상을 개혁하고, 나의 타락이 세상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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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4-06-0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승호 시인을 여전히 좋아합니다. 그 시집의 뒤표지에 실린 앞부분은 윗글에선 생략되었군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아주 쉽게 풀어 쓴 글이라서 인상이 깊었죠. 플라톤의 말을 인유해 온 것은 아마도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겠죠. 이상향을 위해서 시인을 추방하라... 그것은 곧 윗글의 자기 부정으로써의 보다 크고 참다운 나에 이르는 노력이 필요한 문학이겠지요. 역시... 최승호는 멋있는 인간입니다...

메시지 2004-06-0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승호의 시를 좋아합니다. 시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구요.
자몽상자님께서 쓰신 글을 보고 찾아보니 뒷표지가 아니라 뒤표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빠진 윗글이 동굴의 비유를 풀었다는 것도 몰랐었구요.
저는 앞에 생략된 부분을 보면서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의 토끼이야기가 연상되었습니다. 토끼가 대리석의 스펙트럼이 일궈내는 동굴 안의 일곱색깔을 버리고 동굴 밖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동굴 밖에 나오는 순간 강한 빛에 눈이 멀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입구를 잊을까봐 그곳에 머물렀던 토끼는 결국 그곳에서 죽고 그 자리에 버섯이 피어나는데 그 버섯을 자유버섯이라고 부른답니다. 많은 동물들이 그 자유버섯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고 합니다. 동굴 밖의 진짜 빛을 찾으려는 토끼를 시인으로, 그 자리에 남은 자유버섯을 시인이 쓴 시로 대응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비로그인 2004-06-10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승호님, 잘 쓰시더라고요. 작품들이 마치 샤갈이나 클레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전작은 아니고 오래전에 사 둔 초반에 발행했던 시집, '대설주의보' 요것만 집에 있어요. 나머지 시들은 간간 계간지에 실린 거 몇 번 보고 그랬었는데. 암턴,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향은 존재할 수 없을 거에요. 그것은 정말 다가서려 하면 멀어지는 무지개와 같은 것인지도 몰라요. 우리가 세계를 개혁하는 것은 부조리하게 어긋난 모든 것을 맞추려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예방하는 차원...아, 이거 사무실인데 집에 가기 싫어 여그서 또 잘랍니다.
 

지리산 찔레꽃

                                                        최두석

 

보인다

눈 감아도 보인다 아스라이

찔레 꽃덤불 위로 피어오르는

지리산 아지랑이

 

아지랑이 사이로 어른대는

갈색 놀란 토끼눈

총소릴 들리고

더벅머리 쑥대머리 빨치산 사내들

삭정이로 불을 지피고

 

깜박이는 불빛 따라 접근한

국방군 부대

또 총소리 들리고

쓰러진 조선이나 한국의 사내

그들의 입에 눈에 흙이 들어가

꿈도 집념도 온갖 욕망도

바람에 날려보내고

 

지리산 등성이 여기저기 누운

산사람 혹은 국방군

그들이 뒤영켜 함께 피우는

찔레꽃

지리산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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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렇게 미움과 증오로 죽고 죽이며 사라져가도 자연은 묵묵히 그들 모두를 넉넉하게 품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보았던 지리산 피아골에 있는 충혼탑이 기억납니다. 빨지산과 토벌대 모두의 영혼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어제는 현충일이었습니다.  양편 모두의 아픈 상처인 한국전쟁을 잊기보다는 잘 기억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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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08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에꽃>, 최두석, 문학과지성사, 뒷표지 글.

  얼마 전에 다섯 살 난 아들을 재우기위해 가슴을 토닥거리는데 아이의 입에서 불쑥 "아빠, 지나간 건 모두 꿈이야"라는 말이 튀어나와 그 말을 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잠들면 무슨 꿈을 꾸게 될지 궁금한 이 아이에게 꿈이란 단어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일은 꿈처럼 쉽게는 아니지만 세월을 두고 잊혀져간다. 다섯 살 이전의 일들은 대부분 되새길 수 없는 것으로 꿈처럼 잊혀질 것이다. 자신의 직접 체험이거나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되새기며 사는가. 또한 자신의 직접 체험까지도 일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이 잊게 되는가. 그리고 결국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감겼다 풀렸다 하던 온갖 이야기의 실꾸리를 땅에 묻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홀로 되새기거나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 일종의 문학행위를 함으로써 이야기가 꿈처럼 잊혀지는 것을 막는다. 이야기의 생성 변형 및 교류는 인간에게 원천적이고도 보편적인  문학 행위이고 사람이 다른 동물들로부터 구분되는 고유한 특성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듯하다. ----- '이야기 시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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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석의 시집 "성에꽃"을 읽게 만든 이유는 시집 뒷표지에 적힌 위의 글때문이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판된 시집을 고를때, 뒷표지의 글은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모든 시집을 다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만은 그것은 나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때문에 실현불가능한 일이다.

며칠째 꿈을 꾸며 잠을 잔다. 흐릿한게 남아있는 꿈에 대한 기억이 때로는 나의 하루 전체를 붙잡기도 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꿈은 나의 머릿속을 뛰어다니며 실제의 나의 삶에 관여하고 있다. 꿈을 해몽해준다는 사이트라도 들어가볼까. 프로이트의 말대로 내가 해결하지 못한 욕망이 끝내 정리되지 못하고 나를 괴롭히는 것인가.

아이의 말대로 지나간 것은 모두 꿈이다. 또한 꿈은 지나간 것이다. 꿈이 허상이면서도 나의 삶에 간섭하듯 지나간 것들은 모두 꿈이되어서 여전히 나의 삶을 간섭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삶을 살아가는 일은 꿈을 남기는 일인가. 아, 꿈엔 나의 과거가 담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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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6-0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책내용은 꽤 심오한 이야긴데 제가 흥밋거리의 꿈이야기를 꺼내는 거 같아 뻘줌하네요. 사실 꿈이라는 게 굉장히 재밌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기라곤 이성뿐이었던 인간들이 세상의 공포와 싸우면서 축적된 경험들의 어떤 에너지, 뭐 그런 기류가 꿈, 이라는 잠재의식으로 드러나는 거 같어요. 0.5 초전에 저희 가족들의 예지몽 얘길 썼다 무서워서 후딱 지웠어요. 사실 무서운 얘긴 아닌데 오밤중에 이 외딴 사무실안에 있으려니. 토..토..토요 미스테리, 뭐 그랑거 생각나고요..어, 근데 등 뒤의 달력이 팔락거리고...쭈빗! 앗싸! 차려억..옴마야~

비로그인 2004-06-02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겨레 신문 보니까 문화란에 연극 기사가 떴더만요. [자전거] 보고 싶은데 익산엔 공연소식 없나..연극은 아니지만 홍신자님 퍼포먼스도 보고 싶네요. 홍신자님이 황병기 '미로'에서 그 울적한 울음을 운 여인인가, 아닌가? 암턴, 이거 쉴라고 맘 먹고 업종전환했는데 띠발...개뿔이나 쉬지도 몬 허고 문화는 쥐뿔! 거그다 임금삭감까지 되아부라서 저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되았네요. 쩝! 쉭쉭~

메시지 2004-06-03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자전거]는 거창버전으로 경상도 사투리로 진행된다고하네요. 오태석 님이 사투리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자전거]는 몇 년 전에 전주에서 전라도 사투리로 진행된적도 있어요. 작년엔가는 오태석 님이 제주도 사투리로된 4.3관련 연극도 공연했었고.[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였던가. 제목이 가물가물하네요. 전 인터넷에서 동영상으로 대충..... 가끔 EBS를 통해서 접하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