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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ㅣ 공연예술신서 48
김태웅 지음 / 평민사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 한바탕 꿈! 그 꿈이 왜 이리 아프기만 한 것이냐?”
인생을 꿈에 비유하는 일은 이제는 너무나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꿈과 인생을 연결하는 많은 이야기들과 어휘들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여전히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고, 이러한 의미를 담고있는 어휘들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그 표현은 진부할지언정 '인생은 꿈과 같다'는 의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희곡작가 김태웅은 인생을 꿈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신춘문예 등단작인 [달빛유희]를 개작한 [쑥부쟁이]와 연극판에 그의 이름을 휘날리게 한 [이(爾)]에서 그러한 특징이 뚜렷하게 보여진다. 그저 하룻밤의 꿈에서 깨어나듯 삶을 버리고 죽음을 향해 담담하게 걸어가는 주인공들의 인생이 무대 위에서 꿈처럼 사라져갈 뿐이다.
[쑥부쟁이]는 두 명의 사내가 무덤 속에 감추어진, 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을 도굴하려는 하룻밤동안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1999년 신춘문예에 당선될 당시의 제목은 [달빛유희]였다. 두 사내가 달빛 아래에서 자신들의 소망을 꿈꾸며 한밤중 무덤가의 으시시함을 이겨내는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또한 그러한 인간의 행동이 결국 하룻밤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도 담고있다. 이러한 제목을 [쑥부쟁이]로 고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극의 세부 내용도 수정되었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작가의 의식과 의도에는 변함이 없다. [쑥부쟁이]는 들국화처럼 생긴 들꽃의 이름이다. 도굴될 무덤에 바쳐지는 이 꽃은 결국 자신의 무덤에 바치는 꽃이 된다. [달빛유희]라는 제목이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를 상징하는 제목이라면 [쑥부쟁이]는 우리의 산하에 흔하게 피어나는 들꽃같은 불쌍한 인생과 그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상징하는 제목일 것이다.
[이(爾)]는 “문제적 인간, 연산”(이윤택 희곡의 제목을 인용함)이 지배하던 폭정의 시대를 살다간 광대들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밝혀놓았듯이 이 작품은 철저한 허구이며, 조선시대 연희에 대한 연구 실적의 도움을 받아서 창작된 작품이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작품이라는 뜻이며, 또한 조선시대의 전통 연희가 다시 현대의 한국 연극에서 그 특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뜻도 된다. 광란한 세상을 만든 연산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광대 공길과, 연산을 없애려는 광대 장생은 서로 절친한 친구이다. 그러나 두 광대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다르다. 공길은 훌륭한 공연으로 연산을 즐겁게 하기위해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광대들을 궁궐로 불러모아 그들을 가르친다. 장생은 공길의 행동을 못마땅해하며 연산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 궁궐을 떠난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이 뚜렷하게 선과 악으로 나누어져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공길은 연산의 총애를 받지만 연산의 폭정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극복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연산의 총애가 공길을 편하게 하는 것만도 아니다. 공길이 불러모은 광대들과 함께 벌이는 공연의 의도는 정확하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공길의 그러한 행동은 그가 처한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예술로의 도피로 보이기도 한다. 광란의 주범 연산은 결국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있다. 그 때가 다가오자 연산은 공길에게 반란군들로부터 살아 날 기회를 제공한다. 즉 자신의 목숨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길은 연산의 뜻을 거스르고 먼저 죽은 장생의 뒤를 따른다. 광대가 극의 중심에 서있는 이 작품은 폭정으로 인해 피폐되고 타락한 광란의 시대에 예술이란 과연 무엇이며, 예술가의 올바른 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다.
김태웅의 첫 번째 희곡집에는 총 6개의 작품이 담겨있다. 그러나 내가 위의 두 작품만을 이야기한 것은 나머지 작품이 못나서가 아니라, 위에 소개한 두 작품이 다른 작품에 비해서 나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꿈처럼 무대 위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면서 나를 몽롱하게 만든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