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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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동구, 내 앞에 나타나면 ‘주리 삼촌’처럼 말없이 웃으며 뒤통수라도 몇 대 때려주고 싶은 녀석. 난독증때문에 읽기도, 쓰기도 엉망이고, 게다가 자신의 속엣말도 제대로 끄집어내지 못하는 그 녀석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맑고 깨끗한 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청량한데다가 서둘러 흘러내리는 시냇물처럼 빠르고 경쾌하기까지 하다.

  동구의 마음 속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놓여있다. 그곳에는 능소화가 곱게 피어있으며 황금빛 곤줄박이가 노래를 하고 있다. 동구의 아름다운 정원을 들여다보고 난 후, 나는 맑고 경쾌한 시냇물을 떠올렸다. 동구 녀석이 시냇물이 되어서 콧노래를 부르며 아름다운 숲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 숲의 생기가 새들을 노래하게 하며, 신나게 즐겁게 넓은 바다로 흘러가길 바라면서......

  아름다운 정원의 아름다운 ‘황금빛 곤줄박이’는 날개를 다쳐서 날 수가 없다. 동구의 난독을 풀어주시던 박영은 선생님과, 동구의 가족에게 행복을 일깨워주던 영주는 더 이상 동구의 곁에 있을 수 없다. 어디선가 날아온 돌맹이에 날개를 다친 ‘황금빛 곤줄박이’처럼 박영은 선생님과 영주도 어이없이 삶을 놓아버린다. 박영은 선생님이 없다는 것은 동구에게 난독을 풀어줄 사람이 사라진 것이고, 영주가 없다는 것은 행복의 사라짐이다. 결국 동구는 박영은 선생님과 영주를 잃어버림으로써 날개 잃은 ‘황금빛 곤줄박이’가 되는 것이다.

  동구는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감싸안고, 다른 사람의 상처까지 감싸안기로 결정한다. 스스로 난독을 해결하고,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비로소 홀로서는 것이다. 날개를 다친 ‘황금빛 곤줄박이’가 상처를 딛고 날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 ‘황금빛 곤줄박이’를 구름 위로 날려주고 싶다.

P.S.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의 애틋함이 나의 감성을 더욱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동년배 작가인 심윤경 님께 남다른 정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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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나무
고규홍 지음, 김성철 사진 / 들녘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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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얽힌 이야기 하나

 

  도심지에서 생활하던 어린 시절, 내가 실제로 볼 수 있던 나무는 ‘앞으로 나란히’를 한 것처럼 줄을 맞추고 서있던 은행나무와 이름을 모르는 가로수가 전부였다. 그런데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학교에 입학을 했더니 교문 옆에 은행나무와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큰 나무 한 그루가 하늘높이 솟아 있었다. 대뜸 조각구름이 걸린다는 커다란 나무가 바로 저 나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나무에 대한 나의 생각은 금세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어느 학교에서나 전해오는 이야기, 학교괴담의 주인공이 바로 그 나무였던 것이다. 머리를 풀어헤친 것처럼 푸른 가지들을 아래로 뻗어내린 그 나무는 밤 12시가 되면, 무서운 도깨비로 변해서 날이 샐 때까지 돌아다닌다. 만약에 그 도깨비를 만나면 절대로 다시는 학교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반별로 아침 일찍 학교 주변을 청소하고는 했었다. 우리 반이 아침 청소를 할 차례가 되었다. 제일 먼저 학교에 가보겠다는 생각으로 유난히 일찍 출근을 하셔야했던 아버지를 따라서 새벽에 벌떡 일어나 버렸다. 해가 뜨기 전, 나는 일등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나의 발걸음은 학교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하는 골목 입구에서 굳어버렸다. 어둠 사이로 희뿌연한 물체가 우뚝 서서, 휭휭거리는 바람소리에 맞추어 사납게 도리질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떠오르는 학교괴담. ‘걸음아 날 살려라’를 되뇌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등의 꿈은 사라졌다. 해가 뜨고 날이 환하게 밝아져서야 학교에 갈 수가 있었다. 왜 늦었냐는 질문에 늦잠을 잤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뿐이다.
  어른이 되어 학교에 가보았다. 굵고 허연 줄기가 뼈대처럼 남아있는 나무를 보았다. 가지치기를 했는가보다. 오랜 세월을 어떻게 지내왔을까. 한아름이 넘게 굵었던 나무가 이제는 커버린 나의 한품에 꼭 안긴다. 나무 한 그루가 나의 지나감을 생각하게 한다.

 

이럴진대, 하물며 산사에 이르면......

 

  오랜 세월을 절간의 한 켠을 차지한 나무들이 있다. 깊은 산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오다가 절집에게 말없이 자신의 자리를 공양한 나무들이 있고, 새로 태어난 절집을 아름답게 수놓기 위해 멀리 이국의 땅에서 찾아온 나무들도 있다. 산사의 고요함과 넉넉함을 온몸으로 수행하듯 조용히 싹을 틔우는 나무들이 있고, 불법의 고매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바꾼 나무들도 있다. 스님을 쫓아 수행과 고행의 길을 걷다가 산사로 돌아와 나무로 윤회한 지팡이도 있다. 절집나무들은 그렇게 자연의 일부가 되고, 산사의 일부가 되어 오랜 세월을 사람살이를 지켜보며 살아온 것이다.
  “절집나무”는 산사의 일부가 되어 오랜 세월 동안 사람살이를 지켜보던 절집나무들의 나무살이를 사람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지은이 고규흥의 글과 김성철의 사진을 따라 33개의 절집에 살고있는 나무들에게 눈길을 건네다보면 어느새 나무들이 말을 건네오기 시작한다. 눈으로만 보던 나무들을 귀로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산꼭대기 절인 화암사를 찾아 오르던 오솔길에서 들려오던 풀벌레의 지저귐과 청량한 바람 소리가 사실은 세속의 번거로움을 일깨워주려는 굴참나무와 상수리나무의 목소리였음을 뒤늦게서야 깨닫고, 내소사로 가는 전나무숲의 어둠 속에서 간간히 들려오던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스스로를 경계하지 못한 삶에 대해 회초리를 들려는 나무의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사람살이가 유한하고 고통과 시련을 동반하듯 “절집나무”의 나무살이에서도 고통과 시련의 옹이를 만나게 된다. 전쟁과 화재의 고통을 간신히 견뎌낸 나무들, 오랜 세월 열매를 맺기위해 혼신의 힘을 쏟다가 이제는 쓸쓸하게 삶의 뒤안길에 선 나무들, 단단한 바위덩어리의 한 줌 흙먼지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안간힘을 쓰는 나무들. 삶의 고통과 질곡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나무살이이다.
  “절집나무”에는 절집나무뿐만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우리 주변의 나무들과 그것에 얽힌 이야기들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암수가 바뀐 성균관 명륜당의 은행나무, 정원수로 자라나는 탱자나무의 특별한 모습, 나무들의 다양한 이름과 유래, 재산을 상속받아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있는 나무에 대한 이야기들은 신기함과 즐거운 웃음을 가져다준다.

 

일상에서 만나는 나무들의 새로운 의미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길을 걷다가 소나무를 만나면 꼭 다가가 솔잎의 숫자를 세어보고 소나무의 종류를 확인하기 위해 책에서 본 기억을 끄집어낸다. ‘솔잎이 두 가닥이면 육송, 여러 개의 가지가 낮게 퍼지고 있으면 반송, 잎이 세 가닥이면 수입종인 리기다소나무, 세 가닥이면서 줄기가 하얀색이면 백송으로 거의 대부분 천연기념물, 다섯 가닥이면 잣나무로 오엽송이라고도 한다.’ 이렇게해서 나무의 자세한 종류를 알게되면 친구와 비밀을 공유할 때 특별한 유대감이 느껴지는 것처럼 왠지 나무에게 더 많은 친근감이 느껴진다.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나무들이 있다. 그들은 아무런 말없이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며 나무살이를 할 것이고, 나는 나대로 그들 사이를 건너다니며 사람살이를 할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푸르게 빛나던 잎새가 빨갛게 또는 노랗게 변하는 나무의 모습에서 내 삶의 색깔은 어떻게 물드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고, 세상사의 번잡함을 견뎌내기 힘들 때, “절집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러 산사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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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7-0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까지 사투를 벌이신 보람이 있네요. 너무너무 잘쓰셨습니다. 제가 심사위원이라면 이주의 마이리뷰에 이 글을 선정할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책 얘기-->현재의 모습에 이르는 리뷰의 구성이 아름답기까지 하네요.

메시지 2004-07-0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과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냐 2004-07-0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마태우스님의 '안목'이 장난이 아니었군요..ㅋㅋㅋ

책읽는나무 2004-07-06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정말 뽑히셨네요!!
저도 참 멋진 리뷰라고 생각했더랬는데.......^^
마태님의 안목도 대단한데요!!
지난번 제서재에서 하셨던 말씀도 예리한 분석력이라고 생각했더랬습니다...ㅎㅎ
마태님......심사위원단에 참가하세요!!
이젠 알라딘도 심사위원중 알라디너대표자도 한명정도는 같이 포함시켜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ㅎㅎ
이거 뭔말입니까??
메시지님 축하라러 와가지구선!!!.....^^

메시지 2004-07-07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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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는, 그러나 맨정신으로는 대놓고 까발리기에 거북스러운, 때묻은 일상에 대한 적나라한 파헤침. 

 

최규석의 단편집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대한 나의 최종 판결이다.

6편의 단편들은 각각 나름의 주제의식을 가지고 만들어진 독립된 세계이다.
‘내사랑 단백질’은 동물세계에서 공인된 살육인 육식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와 그것을 통해 인간들의 세련되게 위장된 약육강식의 비정함을 돌려 말하고있다, ‘콜라맨’에서는 은폐된 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리바이던’과 ‘선택’은 현대 한국 사회의 병폐들과 그것에 감염된 암울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솔잎’은 권력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심이 사건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작품들이 말하고 있는 주제나 인식들이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이 각각의 단편들은 신선한 발상과 빠른 이야기 전개, 그리고 사실적이면서 섬뜩한 그림으로 하여금 충격을 넘어서 거부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 혹은 낯설게하기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6편의 단편 외에도 아스팔트 위에서 모질게 살고 있는 민들레처럼 단편들 사이에 조그많게 놓여있는 쪽만화 세 편도 함축적이면서 최규석의 신선함과 잔혹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밥그릇을 놓고 벌이는 정의롭지 못한 인간의 약육강식, 그러한 야만의 사회에서 야수의 가면을 벗어 던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잔혹한 사회에서 자신이 누군지 생각해 본 적 없이 남과 비교만 해왔던 ‘플라워’의 암담한 모습이 정답없이 문제만을 던져 놓는 최규석이라는 작가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유일한 해결책의 실마리는 아닐까. 자신을 돌아보라는.....

최규석의 작품집에서 유쾌한 만화 읽기는 표면적으로 성공한다. 기발한 발상과 재치있는 그림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서는 결코 유쾌할 수가 없는 최규석의 잔혹함이 이 작품집을 칭찬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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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6-1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혹하다... 우리 사회가 좀 많이 잔혹하죠? 이런 사회에서 좋게 사는 건 정말 위험하고 바보같은 일인가봐요. 잘 읽었어요.

비로그인 2004-06-1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동이었네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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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는 성석제의 소설집을 읽은 이후로 성석제하면 재이있다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래서 즐거움에 대한 기대로 성석제의 소설에  자꾸 손이 간다. 물론 성석제의 소설은 단순한 재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삶이 가진 두터운 무게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그의 장점일 것이다.

최근 '홀림'을 읽고, 이어서 곧바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작가란 글을 쓰기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야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또한번 느낀다. 특히 두 권 모두에 들어있는 도박에 대한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때, 이 작품들은 작가의 많은 경험과 준비, 그리고 노력의 댓가라는 생각이 든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힘없는 개인의 한맺힌 삶이 주는 무게감과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가 맞다아있어서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러나 '황만근'에 수록되어 있는 몇 편의 단편에서는 단지 술자리에서 펼쳐지는 재미있는 입담을 옮겨적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한 남자의 과장된 듯한 연애 경험이나 자아도취적 특성을 보여주는 부분에서 그런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그의 말솜씨(아니 글솜씨)는 그러한 부족함을 쉽게 넘길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정말 대단한 힘을 소유한 작가이다. 절대 지루함을 느끼지않고 그 이야기 속으로 푹 빠지게 하는 그의 문장들은 그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성석제를 다시 찾아보게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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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6-1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재밌게 읽었어요. 문장이 참 맘에 들더라구요.^^
 
공연예술신서 48
김태웅 지음 / 평민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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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한바탕 꿈! 그 꿈이 왜 이리 아프기만 한 것이냐?”

인생을 꿈에 비유하는 일은 이제는 너무나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꿈과 인생을 연결하는 많은 이야기들과 어휘들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여전히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고, 이러한 의미를 담고있는 어휘들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그 표현은 진부할지언정 '인생은 꿈과 같다'는 의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희곡작가 김태웅은 인생을 꿈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신춘문예 등단작인 [달빛유희]를 개작한 [쑥부쟁이]와 연극판에 그의 이름을 휘날리게 한 [이(爾)]에서 그러한 특징이 뚜렷하게 보여진다. 그저 하룻밤의 꿈에서 깨어나듯 삶을 버리고 죽음을 향해 담담하게 걸어가는 주인공들의 인생이 무대 위에서 꿈처럼 사라져갈 뿐이다.

[쑥부쟁이]는 두 명의 사내가 무덤 속에 감추어진, 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을 도굴하려는 하룻밤동안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1999년 신춘문예에 당선될 당시의 제목은 [달빛유희]였다. 두 사내가 달빛 아래에서 자신들의 소망을 꿈꾸며 한밤중 무덤가의 으시시함을 이겨내는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또한 그러한 인간의 행동이 결국 하룻밤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도 담고있다. 이러한 제목을 [쑥부쟁이]로 고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극의 세부 내용도 수정되었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작가의 의식과 의도에는 변함이 없다. [쑥부쟁이]는 들국화처럼 생긴 들꽃의 이름이다. 도굴될 무덤에 바쳐지는 이 꽃은 결국 자신의 무덤에 바치는 꽃이 된다. [달빛유희]라는 제목이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를 상징하는 제목이라면 [쑥부쟁이]는 우리의 산하에 흔하게 피어나는 들꽃같은 불쌍한 인생과 그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상징하는 제목일 것이다.

[이(爾)]는 “문제적 인간, 연산”(이윤택 희곡의 제목을 인용함)이 지배하던 폭정의 시대를 살다간 광대들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밝혀놓았듯이 이 작품은 철저한 허구이며, 조선시대 연희에 대한 연구 실적의 도움을 받아서 창작된 작품이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작품이라는 뜻이며, 또한 조선시대의 전통 연희가 다시 현대의 한국 연극에서 그 특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라는 뜻도 된다. 광란한 세상을 만든 연산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광대 공길과, 연산을 없애려는 광대 장생은 서로 절친한 친구이다. 그러나 두 광대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서로 다르다. 공길은 훌륭한 공연으로 연산을 즐겁게 하기위해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광대들을 궁궐로 불러모아 그들을 가르친다. 장생은 공길의 행동을 못마땅해하며 연산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 궁궐을 떠난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이 뚜렷하게 선과 악으로 나누어져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공길은 연산의 총애를 받지만 연산의 폭정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극복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연산의 총애가 공길을 편하게 하는 것만도 아니다. 공길이 불러모은 광대들과 함께 벌이는 공연의 의도는 정확하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공길의 그러한 행동은 그가 처한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예술로의 도피로 보이기도 한다. 광란의 주범 연산은 결국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있다. 그 때가 다가오자 연산은 공길에게 반란군들로부터 살아 날 기회를 제공한다. 즉 자신의 목숨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길은 연산의 뜻을 거스르고  먼저 죽은 장생의 뒤를 따른다. 광대가 극의 중심에 서있는 이 작품은 폭정으로 인해 피폐되고 타락한 광란의 시대에 예술이란 과연 무엇이며, 예술가의 올바른 길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다.

김태웅의 첫 번째 희곡집에는 총 6개의 작품이 담겨있다. 그러나 내가 위의 두 작품만을 이야기한 것은 나머지 작품이 못나서가 아니라, 위에 소개한 두 작품이 다른 작품에 비해서 나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꿈처럼 무대 위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면서 나를 몽롱하게 만든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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