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로켓과학을 발전시켰고 달까지 날아갈 수 있지만, 정작 필요할 때 간단한 합리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불확실성과 관점 대립을 해소하는 법을 늘 생각해내지는 못한다. - P18

의료 문제, 사업적 판단, 사회·환경 정책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개인적, 직업적, 정치적 삶에서 맞닥뜨리는 난관의 상당수는 고도로 기술적인 과학 정보를 처리하는 문제와 관계있다. 이 책은 정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의미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정서적, 도덕적, 철학적, 영적 질문 중에서 기술적 정보가 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답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들여다본다. 하지만 우리가 파악하고자 씨름하는 정보나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과학적‘이든 아니든 이 책의 과학적 얼개는 유용성을 발휘한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대학원 과정에 등록하려고 빚을 지는 것이 합리적일까? 새 췌장암 치료법 연구에 피험자로 자원해야 할까? 우리 아이의 학습 장애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외래종 수생 잡초를 없앨 제초제 살포를 마을에서 승인해야 할까? 태양광 패널 설치를 위해 우리 학교의 시설 예산을 써야 할까? 정부에서 자율주행차랑을 어떻게 규제해야 할까? - P2021

함께하고 힘을 합치는 현실적이고 원칙에 입각한 방법들을 더 많이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집단적 미래에 가장 중요한 열쇠인지도 모른다. - P23

이 기법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실험을 재현하거나 과학 분야의 까다로운 전문 지식을 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정직한 연구인지, 우리를 진리에 가까이 데려다줄 것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의 선입견을 악용하는 미사여구인지 평가할 수는 있다. 즉, 전문가와 사이비 전문가를 구별할 수 있다. 과학적 사고의 기법과 도구를 다루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 P34

위험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의사들은 위험이 얼마나 큰지는 알려줄 수 있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려줄 수 없다. - P35

우리가 언제 무엇을 먹고 어떤 약을 복용하고 어떤 의료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어떤 모임에 가입하고 어떤 운동을 하고 어떤 애인을 사귀어야 하는지를 전문가가 결정하는 사회는 설령 그들의 결정이 ‘옳을‘지라도 지옥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전문가‘의 조언을 귓등으로 흘릴 권리를 갖고 싶어 한다. - P38

요즘 사람들은 과학이 다방면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는 오늘날 과학 기술의 한계에 놀란다. 전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50

인터넷에서 ‘Spurious Correlations(허위상관)‘를 검색하면 나오는 웹사이트에서 수십 가지 사례를 볼 수 있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미국의 1인당 치즈 섭취량은 2000년부터 2009년까지 꾸준히 증가했으며 홑이불에 목이 감겨 죽는 사람의 수도 정확히 보조를 맞춰 증가했다. - P73

무엇이 무엇의 원인인지 알아내기란 힘든 일이지만, 우리 삶에서 달갑잖은 결과를 줄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늘리고 싶다면 꼭 알아내야 한다. 바이러스가 지역사회에 퍼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이 현상을 지배하는 과학 법칙이 무엇이고, 지금까지의 감염률이 얼마인데 1년 뒤 감염률이 열 배로 증가하리라는 것 등을 아는 일은 근사하다. 하지만 우리는 한낱 구경꾼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한다. 마스크를 쓰면 감염률이 달라질까? 우리가 먹는 음식이 바이러스의 인체 내 작용에 영향을 미칠까? 사회적 거리두기가 바이러스의 사람 간 전파를 예방하는 데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 이것들은 전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물음이다. - P7475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과학자들(특히 통계학자 로널드 피셔Ronald Fisher)은 우리가 아는 변인뿐 아니라 모든 무관한 변인을 통제하는 해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해법이란 사람들을 두 집단에 무작위 배정하는 것이었다. 통계학적으로 말하자면 100명 중 누구를 처리군에 넣고 누구를 대조군에 넣을지를 동전 던지기로 정하면, 한 집단의 여성 수와 16세 참가자 수는 다른 집단과 대략 같다. 근사하게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변인을 이런 식으로 통제할 수 있다. 표준화할 엄두를 결코 내지 못했을 변인도 문제없다. 두 집단은 테일러 스위프트 팬, 생일 별자리가 천칭자리인 사람, 골프 애호가, 아침을 굶은 학생 등의 수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무작위 배정 실험은 황금 표준(최적 표준)‘으로 간주된다. - P77

인과는 우리가 체계에 개입할 때 관찰하는 상관관계의 문제에 불과하다. - P79

단일 인과와 일반 인과의 이런 차이는 왜 중요할까? 둘 다 인과관계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을 확정하는 것이 주어진 목적에 맞는지 헷갈리기 쉽다. 우리는 위험한 제품(담배라고 하자)의 특정 쓰임새가 특정 결과(암이라고 하자)의 원인임을 입증할 수 없으므로 제조사에 결과의 책임을 물려서는 안 된다는 논증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분명 단일 인과 주장을 정확히 이해했지만 일반 인과 주장에 대해서는 올바르지 않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다른 인과 주장에 대한 반응을 어떻게 구조화하는지 생각하는 일은 흥미롭다. 전형적으로 우리는 일반 인과를 통해 해로운 결과를 낳은 무책임한 행위(이를테면 조명 기구에 설계 결함이 있으면 많은 구매자가 부상을 입을 수 있다)에 대해서는 이를 예방하기 위해 규제가 실시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단일 인과에 의해 해로운 결과로 이어진 무책임한 행위(이를테면 날림으로 설치한 조명이 누군가의 머리에 떨어진 경우)에 대해서는 소송을 제기(하고 비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단일 인과와 일반 인과 둘 다 이를 다루는 폭넓은 법적 메커니즘이 있다. - P8788

조금은 알지만 전부는 알지 못하는 현실과의 연결을 궁리하는 태도에 대해 과학은 극단적으로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만 다룰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확신의 정도가 다양한 것을 다룰 수 있으면 더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로 전환하게 해준다. 게다가 확신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는 개념을 이해하기만 해도 세상에서 명확한 답을 얻으려 할 때보다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증거는 우리가 원하는 절대적 확실성을 보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P9394

잠정적 태도를 가지면 자신이 그 순간 품은 믿음에 지나친 애착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진술이 매번 옳다는 것에 모든 자존감을 걸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진 과학자이면서도 "이 이론이 현상을 포착하고 있다고 상당히 확신합니다"라는 말이 이따금 틀릴 여지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스키에 비유하자면 각각의 명제에 무게를 다르게 싣는 셈이다. 즉, 옳을 확률을 다르게 부여한다.) 사실 목표는 매번 옳음(불가능하다)에 자신의 정체성을 거는 게 아니라 자신이 무언가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는지 얼추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있다. - P95

과학자는 무언가가 참임을 아주아주 확신하더라도, 즉 명백히 확실히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말하고 싶더라도, 훈련을 제대로 받았다면 "예, 100퍼센트 옳습니다. 명백히 확실히 절대적으로 참이라고요"라고 말하기를 주저한다. 그보다는 자신의 확신이 (이를테면) 99퍼센트 수준이라고, 심지어 999999퍼센트 수준이라고 말할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확신이 99.9999퍼센트 수준이라는 말은 "이것이 참이라는 데 목숨을 걸겠어"라는 말과 사실상 같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격이기도 하다.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절대적 진술에서 한발 물러서는 능력은 확률론적 사고 초능력을 얻는 첫 번째 열쇠다. - P96

0퍼센트에서 100퍼센트까지의 확신 범위는 누구나 세상을 다룰 때 쓸 수 있는 과학 도구 중 하나다. - P97

확률론적 사고의 이점 중에서 과학자들이 자신이 틀렸을 때 체면을 구기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미묘하지만 강력하다. 틀리더라도 신용이 깎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로서 그가 말한 거의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내포되어 있으니 말이다. - P9899

진술의 구체성과 자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확신도 사이에서도 반비례 관계가 관찰된다. 상세한 데이터 집합이 없는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진술의 진실성보다는 막연하고 일반적인 진술의 진실성을 더 확신할 수 있다(진실의 한 가지 버전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 P102

솔은 유쾌한 사례도 하나 떠올렸다. 사흘간 열리는 우주학 워크숍에 참석했을 때의 일인데, 과학자들은 확실한 정량적 추정값이 없는 경우에 다양한 결과의 확신도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확신도를 묘사하는 표현은 "여기에 목숨을 걸겠다."와 "여기에 집을 걸겠다"부터 "여기에 내 황무지쥐(미국에서 인기 있는 애완용 설치류-옮긴이)를 걸겠다"까지 다양했는데, 심지어 "여기에 당신 황무지쥐를 걸겠다"도 있었다! - P105

이 예들에서 보듯 세 번째 밀레니엄에 전문가가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적(또는 인식론적) 겸손이라고 불리는 것을 함양해야 한다. 심리학자 마크 리리Mark Leary는 이 특질을 오랫동안 연구했는데, 지적으로 겸손한 사람들이 "사실 주장에 대한 증거의 힘에 더 주목하고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말한다. "개방성과 유연성을 중시하고 불확실성과 모호성을 감내하는 정도는 문화마다 다르다." - P115

다음 그림은 여러 해 동안 학생들에게 보정 문제를 낸 결과다. 학생들이 50퍼센트의 확신도를 보고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작위 추측을 한다는 뜻인데, 그때 학생들이 정답을 맞히는 확률은 50퍼센트보다 약간 높다. 이것은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보다 많이 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답에 대한 확신도가 커질수록 정확도는 자신의 생각보다 일관되게 낮아진다. 과신을 향한 뚜렷한 추세를 보여주는 ‘고전적‘ 보정 패턴은 수많은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실시한 수많은 연구에서 거듭거듭 도출되었다. - P117

과신이 인간 심리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보정을 개선할 수 있다. 우리는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확신을 꽤 능숙하게 보정할 수 있다. 예측이 필수인 다양한 직종의 확신도 보정을 들여다보면 (이를테면) 기상학자들의 단기 예보가 놀랍도록 훌륭히 보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상 예보관이 이튿날 강수 확률을 80퍼센트로 예측한 경우를 전부 조사하면 실제로 비가 온 경우가 약 80퍼센트다. 그들의 보정은 왜 이렇게 훌륭할까? 관건은 기상학자들이 예측에 대한 즉각적 피드백을 끊임없이 받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상학자들의 직업적 명성은 자신의 지식(정확도) 못지않게 메타지식(보정)에도 좌우된다. - P121122

당신의 직종에서 확신도를 보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알면 당신을 과신으로 시나브로 밀어대는 힘을 발견하고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 P122

전문가들은 신뢰받을 만큼 확신도를 보정해야 한다. 하지만 정보 가치가 있을 만큼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희소식은 자신의 확신도를 정직하고 현실적으로 평가하면 전문성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125

전문가의 말을 들을 때는 그들이 자신의 불확실성과 자신이 틀릴 수도 있는 상황을 인정하는지에 주목하라. 우리야 전문가들이 100퍼센트 정확하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우리는 100퍼센트에 가깝게 보정된 전문가를 찾을 수 있고 찾아야 한다. "확고한 의견을 제시할 만큼 잘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전문가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보기에 그들이 해당 주제에 대해 가장 식견이 높은 사람이라면 그들은 방금 당신에게 이 주제에 대해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친 셈이다. 그때까지는 행동에 신중을 기하고 얼마나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았는지 감안해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다. - P126

과학자들은 신호 대 잡음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종종 더 근사한 통계학적 정의를 동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리는 같다. 당신이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이 가진 신호의 잉어 비해 잡음의 양이 얼마큼인지, 이 비율이 주어졌을 때 잡음에서 신호를 탐지할 가능성이 얼마큼인지다. 이런 이유로 ‘신호 대 잡음비‘는 중요하고 알아두면 요긴한 용어다. - P141

하지만 우선 잡음 속에서 유의미한 패턴을 찾는 필터링 게임을 할 때 맞닥뜨리는 고약한 문제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바로 우리 뇌가 무작위 잡음에서 패턴을 보고 그 패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제 보겠지만 일상적(이고 장기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온갖 잡음 출처 가운데에서 필요한 신호를 인식하는 능력은 같은 방식으로 속아 넘어가는 자신의 성향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달렸다. - P143

무작위 잡음에서 얼마나 자주 패턴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뛰어난 직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의 패턴 발견 노력에 늘 의문을 제기하는 법을 익히고, 무엇이 신호인가에 대한 직관이 틀릴 수 있으며 무작위 데이터에서 패턴이 나타나는 빈도와 비교해야 함을 명심하는 것이다. (통계학에는 이런 비교를 할 수 있는 수학 기법이 많다.) 당신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앞의 생각을 깊이 내면화한다면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 P146

그렇다면 데이터를 더 많이 수집할 때의 이점은 가짜 잡음 패턴을 보게 되는 빈도를 더 정확히 예측한 다음, 그 개수를 데이터에서 보이는 실제 패턴 더하기 가짜 패턴의 개수와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하면 자신이 보는 것이 한낱 잡음일 확률이나 반대로 잡음 속에 있는 진짜 신호일 확률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통계학 기법이 기본적으로 이런 식이다. - P391000000

위의 모든 예에서 과학자들은 잡음이 아니라 신호를 발견했다고 결론 내리기에 충분한 확신을 얻으려면, 자신이 적절한 양의 데이터를 수집했는지 판단해야 한다. 일상생활의 사례들에서도 우리는 진짜 패턴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한낱 무작위가 아닐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호를 발견했다고 잠정적으로 주장할 수 있기 위해 가능성이 얼마나 커야 하는지는 어떻게 판단할까? - P161

관습법 전통에서 배심원단에 제시하는 입증 기준은 무고한 사람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지 않는 쪽으로 편향된다. 영국의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 경Sir William Blackstone은 무고한 사람 한 명을 단죄하는 것보다 범인 열 명을 놓치는 편이 낫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므로 대체로 배심원단은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서" 피고인이 유죄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피고인에게 무죄 방면 평결을 내리라고 교육받는다.
어떤 사람들 눈에는 이것이 ‘범죄에 무른‘ 태도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편향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첫째, 형사사건에서는 시민 개인이 검찰이라는 공권력을 정면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검사는 피고인보다 인적•물적 자원이 훨씬 풍부하다. 둘째, 많은 경우(이를테면 범행이 저질러진 것은 알지만 누가 저질렀는지는 모르는 ‘범인 찾기‘ 범죄) 유죄 평결에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바람직하다. 무고한 사람을 단죄하는 것은 곧 진짜 범인을 풀어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 P166167

우리는 거짓양성의 위험과 거짓음성의 위험 사이에 진퇴양난 상충관계가 있음을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기준 점수를 정하는 것은 정책 결정이며 여기에는 오류의 상대적 비용에 대한 기관 차원의 결정이 반영된다. 이런 결정은 본질적으로 과학적 결정이라기보다는 가치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다. - P174

이 시점에서 과학자들은 두 종류의 불확실성을 구분하고 이름을 붙인다. 통계적 불확실성은 당신이 측정한 값을 올바른 값 주위에 무작위로 흩어지게 만드는 잡음원을 가리킨다. 호텔 체중계마다 몸무게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어떤 값은 더 높고 어떤 값은 더 낮다. 통계적 불확실성만 있을 때는 측정값을 점점 많이 평균할수록 참값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에 반해 계통적 불확실성은 모든 측정값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잡음원을 가리킨다. 측정할 때마다 값을 낮게 표시하는 당신의 부정확한 체중계처럼 값은 전부 더 높거나 전부 더 낮다. 계통적 불확실성만 있을 때는 측정을 몇 번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평균을 내봐야 참값이 아니라 ‘편향된‘ 결과를 얻을 뿐이다. - P182

요점은 계통적 불확실성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을 알아낸 뒤에는 연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확실성의 원인을 알아내고 이 원인 때문에 측정이 결정의 토대로 삼기에 너무 불확실해지지 않도록 각각의 측정을 통제하거나, 균형을 맞추거나, 적절히 실시하는 창의적 방법을 생각해내는 일은 과학자가 받는 훈련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 P190

게다가 어떤 약을 복용해야 하는지, 셰일가스 추출 정책에 찬성표를 던져야 하는지 등에서와 같이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서 계통적 불확실성의 범위를 충분히 탐색했는지 예민하게 점검해야 한다. 반대 견해를 가졌거나 맞수인 과학자들이 계통적 불확실성을 이미 들여다보았다면 더할 나위 없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든 자신이 어떤 과학적 발견을 왜 믿는지 설명하려면 계통적 불확실성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는 답변을 요구해야 한다 - P191

요는 우리 인간이 천성적으로 게으르다는 것이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게으르게 진화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끝똘히 생각하는 일은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가파른 언덕을 에돌 수 있으면 굳이 올라가려 하지 않듯, 힘든 생각을 가급적 피하려 한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골똘히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느림보 뇌에는 여러 부담이 가해지는데, 앞에서 보았듯 잡음 속에서 거짓 패턴을 신호로 착각해 스스로를 속일 가능성이 있는 때를 알아차리려면, 또는 중대한 측정을 편향시키는 계통적 불확실성의 잠재적 원인 목록을 짜려면 상당한 정신노동이 필요하다. - P199200

문제에 진득이 매달리지 못하는 이 인간적 속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좀처럼 논의되지 않는 과학의 비밀 도구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 도구는 과학 문화가 발명한 단순한 심리적 수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리는 과학적 낙관주의라고 부를 것이다. 과학적 낙관주의는 하루하루 느끼는 평범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할 수 있다‘ 정신이며 당면 문제가 당신에 의해서나 당신과 동료들에 의해 해결 가능하리라는 기대다. 복잡한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해법이 손안에 있는 것처럼 접근하면 문제를 풀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기본적으로 과학자들은 문 제를 풀 수 있다고 믿도록 (실제로 푸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을 고안한 셈이다. 이 책에서 스스로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대목은 이곳뿐이다! - P200201

반복적 진전이 충분하지 않고 막무가내식 ‘과학적 낙관주의‘ 추구를 미뤄야 한다고 결론 내리더라도, 이것은 목표의 폐기보다는 일시 중단일 수도 있다. 한데 어우러져야 하는 해법의 여러 조각들이 한꺼번에 준비되지 않았을 때가 있는가 하면, 새로운 보조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문제를 제쳐두어야 하는 때도 있다. 사실 과학의 ‘할 수 있다‘ 정신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문제를 오랫동안 묵혀두었다가 기술이 등장해 해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끄집어내는 능력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된 시점에도 이런 성격이 있었다. 페르마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학 분야에서 1980년대에 도출된 결과가 1995년의 증명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니 말이다.) - P208

과학적 낙관주의는 우리를 계속 나아가게 하고, 이상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필수 가속페달이다. 물론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10년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고작이다. 이런 점이 불만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반복과 끈기를 통해 목표에 도달하고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 중 하나다. - P206

페르미 추정은 일차 설명을 이차 설명과 구별하는 데 매우 실용적인 쓰임새가 있다. 숫자를 제시해 논점을 입증하는 세상에서 페르미 추정은 그 숫자가 말이 되는지 확인하는 데 매우 요긴한 기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페르미는 학생들이 이 빠른 추정 방법에 익숙해지면서 ‘할 수 있다‘ 정신을 체득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세상을 이런 식으로 다룰 수 있음을 깨달으면 커다란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 P217

방금 제시한 예들에서 페르미 추정을 위해 쓴 세 가지 요긴한 비법을 나열해보겠다.

낯익은 항목으로 추정할 것. 낯설고 접근하기 힘든 양을 낯익고 접근하기 쉬운 양으로 분해한다. (첫 번째 경우는 미국의 차량 대수보다 미국 인구가 낯익으므로 후자를 근거로 전자를 추정했다.)

근사적일 것. 추정값은 정의상 근삿값이지만, ‘충분히 가깝‘기만 하면 대체로 무방하다. 당신이 찾는 답은 위아래로 세 배 이내까지는 괜찮은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당신이 추정하려는 양의 참값이 100이라면 33부터 300까지의 추정값은 대개 적당하다. 이 말은 당신이 추정의 토대로 삼는 낯익은 숫자가 그 이상 정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자신이 없으면 상한과 하한을 먼저 추정한다. - P219220

우리는 ‘편향되었다‘라는 낱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다. 우리가 상대방을 편향되었다‘라고 공격하는 경우는 단지 그의 관점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때가 많다. 다행히도 9장에서 논의했듯 판단에서의 편향은 꽤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어떤 과정이 무작위 오류를 많이 만들어낼 때는 잡음이 많다고 말하지만, 계통적 오류를 만들어낼 때는 편향되었다라고 말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라. 계통적 오류란 정답보다 일관되게 높거나 낮은 오류를 말한다. 그러므로 객관적 기준이나 참값이 있을 때는 상대방의 반응을 그 기준이나 값과 비교해 편향을 확인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참인 것을 모를 때는 그 방법을 쓸 수 없지만, 편향을 근절하는 다양한 실험적 전략이 연구자들에 의해 개발되어 있다. - P236237

후견은 선견보다 훨씬 수월하다. 심리학자 바루크 피시호프 Baruch Fischhoff는 인간 판단의 일반적 특징을 하나 제시했는데, 결과를 알고 나면 그 결과가 처음부터 명백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1970년대 초 피시호프는 확률 판단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가능성이 희박해 보일 수도 있고 다분해 보일 수도 있는 미래 사건들을 선정했다. 때는 닉슨 행정부 시절이었다. 닉슨은 골수 반공산주의자였기에, 피시호프는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의 예로 닉슨이 퇴임 전 중국에 외교 방문을 할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공교롭게도 닉슨은 실제로 1972년 중국을 방문해 외교정책 전문가들조차 놀라게 했다. 피시호프는 빛나는 통찰력을 발휘해 이 사건 뒤 사람들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 그들이 닉슨의 중국 방문 사건에 대해 제시한 확률을 기억해보라고 주문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자신의 확률을 실제보다 높게 오기억했다. 한마디로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 P242243

지금껏 밝혀진 편향 탈피 전략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반대로 생각하기(더 복잡한 경우에는 대안을 고려하기)다. 미래의 결과에 대해 확고한 예상이 든다면 잠시 멈추고 정반대 결과가 생길 수 있는 이유를 모조리 생각해보라. 이 연습을 해보면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해 물론 좋은 이유가 있지만 다른 선택에 대해서도 좋은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4장에서는 학교의 전국 모의고사 확대를 주제로 한 토론에 대해 서술했는데, 참가자들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각각의 진술에 대해 확신도(예: 75퍼센트)를 부여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결과는 이렇게 했더니 참가자들이 자연스럽게 "반대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진술에 대해 확신도가 99퍼센트 미만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기‘는 과학 수업에서 정식으로 가르치지는 않지만, 실상으로는 대부분의 과학 방법론에 배어 있다. 이를테면 무작위 배정 실험을 설계하는 것은 반대(‘반사실‘) 조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탐구하기 위해서다. - P248

좋은 과학을 기준점으로 삼아 출발하자. 과학이 훌륭히 수행되어 정확한 결과를 내놓는 것은 이상적 상황이다. 당신이 과학 연구 결과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거나 과학 논문을 읽을 때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좋은 과학이 틀린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사실 4장에서 논의한 확신도를 생각해보면 좋은 과학 중에서 어떤 것은 반드시 틀린 결과를 낸다. 좋은 과학자는 당신에게 확신도를 제시해야 하는데, 확신도란 결과가 옳을 확률이다. 확신도야말로 당신이 과학자에게 기대하는 전부다. 하지만 과학자가 그 결과에 대해 95퍼센트의 확신도를 제시한다면, 그들이 최선을 다하더라도 논문 20건 중에서 한 건은 틀릴 수밖에 없다. 이 말은 틀린 결과를 내놓는 좋은 과학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확신도가 95퍼센트라면 논문 중에서 적어도 20분의 1은 그 범주에 속해야 한다. - P250251

앞에서 언급한 랭뮤어의 병적 과학 강연(노벨화학상 수상자 어빙 랭뮤어Irving Langmuir의 1953년 강연)에서는 과학적 결과가 이 수상쩍은 범주에 속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케 하는 실마리의 목록을 제시한다(문구는 살짝 바꿨다).

1. 간신히 탐지되는 원인에 의해 결과가 발생하며, 결과의 크기가 원인의 세기에 대해 대체로 독립적이다.
2. 결과 자체가 간신히 탐지되거나 통계적 유의성이 매우 작다.
3. 대단히 정확하다고 주장한다.
4. 경험과 상반되는 허무맹랑한 이론이 연구에 결부되어 있다.
5. 연구에 비판이 제기되면 임기응변으로 변명한다.
6. 지지자 대 비판자 비율이 초반에 50퍼센트 가까이로 급등했다가 0퍼센트 가까이로 급락한다. - P257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게 있다. 핵융합에 이르는 경로 중에서 훨씬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새롭고 이례적인 것을 찾으려는 탐구는 과학이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위대한 사례다. 심지어 결과가 재현 가능하지 않거나 실험에 결함이 있더라도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갈망하는 것은 한발 물러서서 오류를 선제적으로 찾아보는 능력이다. 묻고 더블로 가는 것은 여기서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적신호가 켜질 가능성을 외면하는 노골적 저항이다. - P265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사례들에는 더 기본적인 문제가 하나 예시되어 있다. 과학 연구를 실제로 수행하든 아니든 모든 사람은 무엇이 참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믿음에 홀딱 반할 수 있으며 그 믿음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모든 것과 아무리 모순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놀랍게도 내가 가장 생산적인 때는 과부하가 걸리고 여러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할 때야"). 또한 이 믿음이 통하지 않을 때마다 나쁜 핑계를 대며 앞 장에서부터 논의했듯 우리의 믿음과 잘 맞아떨어지는 최적 사례에만 주목한다("금요일에 여러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하다 실수를 저지른 것은 물론 전날 밤 숙면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확고한 발견으로 이름을 날린 저명 과학자들조차, 훈련을 통해 이런 정신적 고장모드에 저항력이 생겼어야 마땅하건만 두 사례 연구에서 보듯 이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스스로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잠깐 멈춰 ‘기억력을 가진 물’과 ‘상온 핵융합‘에 대해 생각하라. 그러고 나서 한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하라. "여기서 더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야겠어." - P271

문제는 이것이다. 신뢰할 수 없는 데이터를 찾아 거부하고, 소프트웨어 버그를 찾아 고치는 행위는 놀랍지 않은 답을 얻게 되는 시점까지 계속되는 경향이 있다. 즉, 당신은 뜻밖의 결과를 얻으면 불량 데이터나 버그를 찾지만 결과가 ‘옳게 보이면‘ 찾지 않는다. 근사해 보이는 결과가 잔류 불량 데이터나 컴퓨터 프로그램의 미발견 버그 때문일 경우에도 말이다. 이런 까닭에 최종 측정과 학술 논문의 결과는 과학자들이 예상한 쪽으로 계통적으로 편향된다. 과거의 물리학 측정이 무작위 잡음에서 예상되는 정도로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우주 팽창 측정이라는 더 극적인 경우에 결과가 50km/sec/Mpc(메가파섹, 태양계 밖의 천체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사이의 거리는 약 0.7메가파섹이다-옮긴이)과 100km/sec/Mpc으로 다르게 나타난 이유는 각 연구진이 어느 데이터를 신뢰할지에 대해 서로 다른 선택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 P281

모든 과학자가 이 절차를 접하자마자 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맹분석blind analysis은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데이터나 컴퓨터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는 방법 중 하나는 결과의 성격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맹분석에 익숙해지려면 핵심 결과를 도출하지 않은 채 이런 문제를 찾아낼 새로운 방법을 발명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재훈련이 필요하며 이따금 창의성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를테면 핵심 결과를 얻기 위해 대량의 측정 집합을 평균해야 하는 과학 연구를 상상해보라. 간단한 맹분석 방법은 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친구에게 모든 자료점(도표나 그래프 따위의 그래픽 좌표에서 하나의 점을 표시하는 정보-옮긴이)에 숫자 하나를 몰래 더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평균값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런 다음 최종 분석이 끝났다는 판단이 들면 친구가 알려주는 비밀의 수를 빼서 실제 평균값을 구한다. 이렇게 하면 핵심적 최종 답을 섣불리 공개하지 않고도 (숨겨진) 평균과 거리가 먼 자료점을 찾아내어 나쁜 데이터로 간주해 폐기함으로써(그날 검출기가 고장났으려나?) 실험을 디버깅할 수 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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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들도 대부분 동료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작되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나는 책을 모두에게 (적어도 그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로 생각하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내게 서간체는 (이러한 의미에서) 글쓰기와 소통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교수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네요. (올리버 색스/O) - P1314

우리의 발걸음이 우편함 앞에 멈춰 설 때마다 만년의 우정이 한 뼘씩 자라났다. (수전 배리/S) - P14

저는 도서관에 가서 과학 논문을 뒤졌습니다. 찾을 수 있는 입체시 검사를 모조리 다 해 봤고 전부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수술 이후에 선물받은 장난감 입체경에선 원래 3차원 이미지가 보여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부모님댁에서 그 오래된 장난감을 찾아 들여다봤지만 3차원 이미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볼수 있었는데도요. (S) - P20

2005년 1월 3일

배리 교수님께,

(STS-72 임무가 있기 전날이었던) 그날 밤과 몇 년간 두 분께 (또는 두 분의 가족 분들께) 크리스마스/새해 축하 카드를 받았던 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죄송하게도 제가 답장을 보낸 적은 없었지요.
그러나 교수님의 29일 자 편지를 받고 저는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새로 만난 (시각적) 공간의 ‘세계‘를 이토록 열린 마음으로 경탄하며 맞이하고—비록 카우아이에서는 고소공포증을 느꼈지만—그 경험을 이토록 섬세하고 시적이고 정확하게 설명하시다니요. (O) - P33

양안 체계가 양쪽 눈에서 얻은 이미지를 융합하려면 두 눈이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사시여서 양쪽 눈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봤다. 양 눈의 입력값을 동시에 처리하면 복시 증상이 나타났으므로, 어릴 때부터 한쪽 눈에 입력된 정보를 무시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 결과 나에게 있었을지 모를 양안 세포들은 한쪽 눈에서는 강한 입력값을, 다른 한쪽 눈에서는 매우 미약한 입력값을 얻었다. 그러나 시력 훈련에서 양안 통합 운동을 하면서 두 눈의 초점을 동시에 같은 곳에 맞추는 법을 배웠다. 이로써 양안 세포에 상호 연관된 입력값이 전달되었다. 이제 양안 뉴런은 양쪽 눈에서 얻은 정보를 융합할 수 있었고, 나는 세상을 3차원으로 보기 시작했다. (S) - P52

박사님은 대다수 사람이 입체시의 가치를 모를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죠. 사람들은 앞에서 언급한 안과 의사처럼 비운의 사건으로 입체시를 잃은 후에야 그 중요성을 깨달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은 그저 이 세상 자체가 3차원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세상이 3차원으로 보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끈 이론을 논외로 치자면요). 자신의 뇌가 2차원 망막에서 얻은 정보를 해석하고 처리해서 3차원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유클리드와 뉴턴, 다빈치 같은 초기 광학의 위대한 연구자들조차 입체시를 발견하거나 기술하지 않았죠. (S) - P5455

게다가 올리버의 편지에는 아주 솔깃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는 내 사례를 노벨상 수상자이자 시각 발달 분야에서 "결정적 시기"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장본인인 허블David H. Hubel 박사와 비셀Torsten Wiesel 박사에게 전달했다고 했다. 올리버의 말마따나 두 과학자가 정말로 "생각이 활짝 열린 사람"이라면 용기를 끌어모아 편지를 써 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2005년 5월 7일, 데이비드 허블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허블 박사는 5월 27일에 답장을 보내 늦어서 미안하다고, 이제 막 대상포진에서 회복했다고 썼다. (중략) 허블은 이렇게 썼다.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자면, 교수님에게는 줄곧 입체시 능력이 있었지만 안구 부정렬 때문에 그 능력이 발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구가 정렬 되어 이미지가 융합되자 입체시가 발현된 것이지요. 그리고 훈련을 계속하면 입체시가 개선될 거라고도 말했다(정말로 그랬다).
허블은 올리버에게도 편지가 와서 같은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편지를 마무리하며 내게 막 출간된 저서 《뇌와 시지각Brain and Visual Perception》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허블 박사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어느 정도는 결정적 시기를 발견한 공로 덕분이었다. 나의 시력 변화는 이 개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례였는데도 그는 내 말을 믿어 주었다. 이메일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을 때 내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S) - P7576

또 그는 내가 스스로 좀 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오로지 내 시각적 경험이 특이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밤늦게까지 정보를 찾고 편지 폭격을 퍼부은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대답했다. 네, 제가 좀 집요할 때가 있죠. 나는 올리버의 질문이 아무렇지 않았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동족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 (S) - P77

저는 책을 더 폭넓게 읽고 다른 분야의 개념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환원주의 과학을 거부할 필요는 없었어요. 그저 왕좌에서 끌어내리기만 하면 됐죠. 이렇게 저의 환멸은 해방감으로 변했답니다. (S) - P80

다음 날 아침, 올리버는 일찍 일어나 있었다. 식탁 한가득 종이를 펼쳐 놓고 만년필 쥔 손으로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에게 가장 처음 읽은 그의 책이 《깨어남》이었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파킨슨병을 앓았기에 그 책에 담긴 사연들이 대단히 감동적이었고 올리버의 글에도 푹 빠져들었다. 올리버는 그 책을 주의 깊게 읽으면 어깨 부상으로 직접 글을 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받아쓰게 했던 부분을 아마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S) - P91

그리고 올리버는 내게 (올리버 색스가 수전 배리의 입체시 획득 경험을 써서 《뉴요커The New Yorker》에 기고한 〈스테레오 수〉에서) 혹시 이름을 가명으로 바꾸고 싶은지 물으며 "개인적으로는 ‘스테레오 수‘가 마음에 들지만 교수님을 난처하거나 불쾌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덧붙였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스테레오 수라는 이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올리버에게 말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이름은 통통 튀는 데다 그 유명한 베토벤 5번 교향곡의 첫 소절과 리듬이 비슷하다! (S) - P9394

올리버의 앞선 편지는 2005년 12월 13일에 쓰였고 14일 자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그의 오른눈에 커다란 암점과 섬광이 나타났다. 결국 올리버의 시력을 빼앗고 10년 뒤에는 목숨까지 앗아간, 망막에 생긴 종양의 초기 증상이었다. 내 시력이 놀라울 만큼 향상되는 동안 올리버는 반대로 시력을 잃고 있었다. (S) - P104

올리버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서 그는 자기 책상에 앉고 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올리버가 1856년에 처음 출간된 데이비드 브루스터 경의 책 《브루스터의 입체경 연구 Brewster on the Stereoscope》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나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대답 없는 질문The Unanswered Question》을 선물했는데, 당시 올리버가 음악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지를 더 주고받은 뒤 올리버가 번스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올리버가 덤덤하게 암에 걸렸다고 말했다. 내 표정이 겁에 질렸었는지, 올리버는 암이 거의 전이되지 않았고 오른눈에 시력이 남아 있어서 아직 입체시로 볼 수 있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직후에 《뉴요커》의 올리버 담당 편집자인 존 베넷이 도착했다. 내가 곧 나올 《뉴요커》 기사의 핵심 주제였기 때문에 나와 편집자가 만날 수 있도록 올리버와 케이트가 미리 초대해 둔 것 같았다. 베넷의 은근한 텍사스 억양이 놀라웠다. 그가 자신이 키우는 잭 러셀 테리어의 우스운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왜인지 나는 《뉴요커》의 편집자가 은은하게 남부 억양이 섞인 말투를 쓸 거라고는, 또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S) - P112

그리고 《뉴요커》 최신호를 집어 들고 긴 특집 기사를 펼쳐 (2002년 여름 당시, 17년째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전직 역사학 교수인) 어머니께 소리 내어 읽어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사는 사람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포착해 그들의 생각과 의도를 알아차리는 비상한 능력을 지닌 남자에 관한 것이었어요(이 기사는 2002년 8월 5일 자 《뉴요커》에 실린 맬컴 글래드웰Malcom Gladwell의 〈벌거벗은 얼굴The Naked Face〉이었다.). 어머니는 주의 깊게 들으며 이따금 끼어들어 방금 들은 구절을 평했습니다. 저는 천천히 기사를 읽고 개는 코를 골면서 그날 오후는 그렇게 즐겁게 지나갔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몸에서 서서히 긴장이 풀리면서 운동이상증이 사라졌고, 움직임이 다시 우아하고 자발적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힘들었던 말년에 함께한 가장 행복하고 좋은 기억이고, 그때 이후로 《뉴요커》를 떠올리면 늘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S) - P117118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댄과 저는 가능한 한 책을 많이 읽어 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책 읽는 시간을 정말 좋아했어요. 제니에게 처음으로 읽어 준 진짜 ‘이야기책‘은 E. B. 화이트가 쓴 《샬롯의 거미줄》이었습니다. 어린애들이 대부분 그렇듯 제니도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싶어 해서, 한때 댄과 저는 이 책을 거의 통째로 외우고 있었어요.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마지막 문장은 암송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선가 읽었는데, 화이트는 지혜롭고 재주 많고 용감무쌍한 거미 샬롯뿐만 아니라 자신의 좋은 친구를 가리켜 그 문장을 썼다고 합니다. 동화 속 거미에 자신을 비유하는 것이 싫지 않으시다면, 이 마지막 문장에서 "샬롯"을 "올리버"로 바꿔 읽어 주세요. 그러면 제 마음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누군가가 진정한 친구이면서 뛰어난 작가인 경우는 흔치 않다. 샬롯은 둘 다였다."
사랑을 담아, (S) - P118119

우리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이 아닌 좋은 파트너였습니다—정말로요.
제게도 전례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사랑을 담아,
올리버 - P124

〈스테레오 수〉가 《뉴요커》에 실리기 두 달 전인 4월 27일, 미국공영라디오(NPR)의 과학 전문 기자인 로버트 크럴위치Rober Krulwich에게 깜짝 이메일을 받았다. "아주 오래전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시절부터" 올리버, 케이트와 친하게 지 낸 사이로, 가끔 올리버의 이야기를 라디오 콘텐츠로 만든다고 했다. 그는 올리버가 보여 준 〈스테레오 수〉를 읽고 NPR에 내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원고 작성을 위해 올리버를 비롯한 이야기의 핵심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싶어 했다. 그는 내게 물었다. "그전에 먼저 전화를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NPR의 열렬한 청취자였던 나는 NPR 과학 전문 기자의 전화해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잔뜩 신이 났다. 5월 15일에 맨해튼에 갈 일이 있어서 그때 맨해튼에 있는 NPR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그날 아침,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로버트는 나와 악수를 나눈 뒤 길 건너에 있는 편린도너츠에서 간단히 뭘 좀 먹자고 했다. 나는 쫄딱 젖은 우산을 보여 주며 바깥에 비가 퍼붓고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길 건너로 달려갔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로버트는 도넛을 몇 개나 허겁지겁 해치우며 대학 때 사귄 애인 이야기로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긴장해서 도넛을 깨작거렸지만, 로버트가 워낙 친절하고 재미있어서 서서히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아마 애초에 이것이 던킨도너츠 습격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 P127128

시모조(시모조 신스케Shinsuke Shimojo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실험심리학과의 거트루드 볼티모어 기금 교수로, 인간의 지각과 인식, 행동을 연구한다.) 박사는 (벨라) 율레스의 무작위 점 입체화를 보고 나서 지각 능력을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답니다. 하지만 막상 과학자로 자리 잡고 대형 연구소와 글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연구비까지 생기고 나니 연구의 마법 같은 매력을 잃어버렸었다고 해요. 그런데 박사님(올리버 색스)이 보낸 〈스테레오 수〉 초고를 읽고서 자신이 애초에 왜 지각 연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네요. (S) - P132

그러나 이 편지에서도 나는 마냥 솔직하지 못했다. 올리버의 표현을 살짝 바꿔서 말하자면, 우리는 어린 시절을 빠져 나오지만 결코 그 시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어렸을 때 나는 내가 실패자라고 생각했다. 눈이 사시였고, 그 탓에 글 읽기와 자전거 타기, 운전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든 경험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올리버에게 하소연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깨어남》에 나온 것처럼 수십 년 간 신체와 정신이 마비된 환자들을 돌본 사람이니까. 사시가 내 평생에 걸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지라도 그들에 비하면 내가 겪은 어려움은 사소해 보였다. (S)

*올리버 색스, 〈화학의 시인, 험프리 데이비〉. 먼저 《뉴욕리뷰오브북스》(1993년 12월 4일 자)에 실렸다가 나중에 축약된 형태로 《모든 것은 그 자리에》에 재수록되었다. - P151

편지로 제 공감각을 설명해 달라고 하셨지요. 다음 주에 휴가를 갈 예정이어서 그 전에 편지를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공감각은 어렸을 때부터 쭉 있었던 것 같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대략 8년 전입니다.
그때 저는 신경생물학과 학생들과 연구실에서 긴 오후를 보내며 다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기 아이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 주고 싶은지로 이야기가 흘러갔습니다. 저는 당연히 이름의 빛깔이 중요하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한 학생이 크게 관심을 보이면서 다른 것들에서도 색을 연상하냐고 묻더군요. 저는 글자와 숫자, 단어, 사람 이름 같은 고유명사, 월과 요일의 이름에서 색을 연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학생은 라마찬드란 박사*의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제게 공감각이 있다고, 라마찬드란 교수가 그 현상을 연구했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의심하면서 그냥 색채 연상이 좀 강한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학생은 공감각이 정말 존재한다고, 자기가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그 학생이 단어와 글자, 숫자 목록을 적은 클립보드를 들고 제 방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목록에 적힌 내용을 소리 내어 읽을 때 어떤 색상이 보이는지 말해 달라고 했어요. 제가 ‘보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자니 약간 바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알파벳 ‘C‘는 연분홍빛이 감도는 순백색이었고, 알파벳 ‘N‘은 색과 결이 참나무 원목 바닥과 똑같은 아름다운 황갈색이었습니다. 한편 알파벳 ‘H‘는 진녹색이었는데, 이 축축한 글자에서는 어느 집 지하실의 습한 콘크리트 세면대에 쌓인 냉하고 눅눅한 곰팡이가 떠올랐어요. 저는 그 학생에게 단어는 보통 첫 글자와 같은 색상을 띤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S‘는 초록색이고, ‘공감각synesthesia‘이라는 단어는 초록색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노란빛이 도는 주황색과 뒤섞이는데, 장음 E가 노란빛 도는 주황색이기 때문입니다. 숫자 3은 새순과 같은 색이고, 13은 색과 맛이 익힌 시금치와 똑같습니다. 저는 시금치를 정말 좋아해서 숫자 13도 좋아합니다. 그 학생은 다른 학생 다섯 명에게도 똑같이 질문한 뒤 대답을 꼼꼼하게 기록했어요. 그리고 2주 뒤에 다시 클립보드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저는 전체 항목에서 대답이 지난번과 완벽하게 일치했던 반면, 다른 학생들은 대답이 중구난방이었어요. (S)

*V. S. 라마찬드란은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학의 저명한 심리학 교수다. 공감각을 비롯해 인간의 뇌를 다각도로 연구해 왔으며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 (인간 의식으로의 짧은 여행A brief Tour of Human Consciousness》 등 여러 대중 과학서를 썼다. - P156158

내가 방문했을 때 올리버는 《뮤지코필리아》 집필을 마치고 음악과 뇌에서 시각과 환각으로 관심사를 옮기는 중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 전, 올리버는 오른눈의 종양 때문에 시력이 왜곡되어 오른눈 망막 중심부를 레이저로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문제없는 왼눈을 감고 오른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시야 한가운데가 검고 불투명했다. 길을 걸을 때면 오른눈으로는 사람들의 하반신만 보였다. 오른눈의 중심시를 잃자 입체시도 거의 사라져서, 우리의 대화는 입체맹의 삶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흘러갔다. 예를 들면 나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전체가 유리창과 같은 평면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정말로 그래요!" 올리버가 이렇게 맞장구치더니, 얼마 전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피아노 선생님을 보는데 창문 바깥의 나뭇가지들이 선생님 머리에서 자라난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S) - P188189

제 경험은 대부분 요즘 교수님이 하는 경험과 정반대입니다—거울에 비친 교수님의 모습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볼 때의 기쁨을 글로 아름답게 표현하셨지요. 저는 제 양복에 묻은 얼룩을 지우려다가 그 얼룩이 거울 표면 위에 묻은 것임을 발견합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거울 표면 위에 있어요—제 모습이 거울 속에, ‘거울 너머에‘ 있다는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O) - P201

우리가 움직일 때 멀리 있는 사물보다 가까이 있는 사물이 우리 시야에서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며, 이러한 상대운동 또는 운동 시차에서 원근감—무엇이 앞에 있고 무엇이 뒤에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발생한다. 나도 언제나 운동 시차를 사용해서 원근감을 추론하곤 했으나, 실제로 운동 시차를 통해 사물 사이의 공간감을 느낀 것은 입체시를 얻은 뒤였다. (S) - P202

프레드는 6개월 뒤 다시 찾아와서 피아노를 조율하고 이번에도 일주일 뒤에 전화를 걸어서 피아노가 어떻느냐고 물었습니다.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저는 만족스러워하며 뭘 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죠. 프레드는 정음 작업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번에 프레드가 왔을 때 정음 작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건반마다 연결된 해머의 펠트를 조정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어요.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하시잖아요." 프레드가 (언제나처럼 기계 같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니 소리를 부드럽게 만들어야지요?" 저는 깜짝 놀라서 제가 그런 소리를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조차 제가 어떤 소리를 좋아하는지 몰랐거든요.) "아." 프레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과 대화를 나눠 보고, 어떤 곡을 연주하시는지 보고, 피아노의 어떤 부분이 닳았는지 보면 알 수 있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피아노를 조율하려면 연주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해요."
잘 조율된 마음을 담아, (S) - P212

"제 생각에 [어린 시절의] 이 입체시 경험은 제게 늘 입체시를 습득할 잠재력이 있었고, 그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두 눈을 제대로 정렬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며칠 뒤인 2010년 2월 4일, 올리버에게서 답장이 왔다.

교수님의 (탁월한!) 편지를 이제 막 읽고 (제대로 된 편지지도 없이) 서둘러 답장을 보냅니다.

편지는 노란 리갈패드 종이에 쓰여 있었다.

교수님 주장에 전부 동의하고, 이렇게 깊이 고민해 주셔서 매우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사소한 점을 제외하고) 제안해 주신 내용을 모두 반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사소한 점"은 무엇일까? 올리버에게 단어는 무척 중요하고 강력한 것이었다.

(그 한 가지 사소한 점은 바로 "정렬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posture"라는 단어입니다. 교수님이 여러 차례 쓰시고, 또 제게도 권하신 단어이지요.) 이 단어를 대신할 다른 단어를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나이 많은 영국인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제게 이 동사는 거짓되게 행동하고 가식적으로 군다는 의미가 훨씬 큽니다—"사칭imposture"이라는 단어와 가깝달까요.
전문적인 측면에서는 교수님의 단어 선택이 옳겠지만, 저는 이런 느낌의 단어를 차마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올리버는 "posture"를 "position"이라는 단어로 대체했다. - P261263

2010년 5월 4일

수에게,

(언제나처럼) 근사한 편지(4월 19일 자)에 감사드립니다—교수님은 편지를 참 잘 쓰십니다—모든 편지에 새롭고 신선한 것이 담겨 있어요.
진심으로, 교수님이 (수전 배리가 앞 편지에서 자신이 읽었다고 전한 책, 《우정의 미적분학》의 저자인) (스티븐) 스트로가츠에게 편지를 보내 보면 어떨까요—스트로가츠는 재능도 무척 뛰어나지만 매우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기도 합니다—교수님의 개인적 감상을 전하는 것이지요. 교수님은 스트로가츠의 이상적인 독자입니다.
···
아름다운 조개껍질과 그 안의 깜짝 선물까지,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스트로가츠에게 편지 꼭 쓰세요. (O) - P272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제 어머니가 이스라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셨습니다—그래서 저도 그렇게 될 거라는 미신적 느낌이 있었지요—(상당히 비이성적이지만) 이것이 제가 그간(1955~1956년에 몇 달간 머무른 뒤로, 2014년까지) 이스라엘을 찾지 않은 여러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O) - P346

2015년 2월 5일

수에게,

슬픈 소식이 있습니다. 지난달에 저의 안구 (포도막) 흑색종이 간으로 전이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암은 원래 잘 전이되지 않는 편이지만, 저는 이 괴물이 몸에 퍼지기 전에 9년간 좋은(그리고 생산적인) 나날을 보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이된 암은 치료가 쉽지 않은데, 몇몇 처치로 속도를 지연시킬 수는 있습니다—아마도 ‘생존‘ 기간을 6~9개월에서 15~16개월로 늘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늘린 몇 달이 좋은 시간이라면, 그 동안에 글을 쓰고(일부 또는 거의 다 쓴 책이 여러 권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조금) 여행을 다니고, (철없이 군다거나 하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제가 이 상황에‘적응‘하고,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과 대상에게 ‘작별‘을 고하고, 내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이 갑작스러운 ‘시간의 끝‘ 앞에서 평정심을 구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지난 삶을 돌아보는 짧고 굵은 에세이(제목은 〈나의 생애〉)를 쓸 생각입니다. 흄이 (1775년에)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깨닫고 하루 만에 쓴 글처럼요. (후략) (O) - P361

2015년 5월의 만남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아니었다. 2015년 7월 9일, 82세 생일을 맞이한 올리버는 늘 그래왔듯 자기 아파트에서 생일 파티를 열었다. 이번이 올리버의 마지막 생일임을 본인도 알고 우리도 모두 알았지만, 그는 연민의 대상이 되거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중략)
대화를 나눈 직후 댄과 나는 시간이 늦기도 했고 올리버가 다른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조용히 아파트에서 나왔다. 올리버는 눈물 젖은 작별 인사를 원하지 않았다. (S) - P372373

올리버는 세상을 떠나기 겨우 3주 전에 내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그때 그는 빠른 속도로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지만 케이트와 사무보조원 헤일리 파커, 연인 빌리 헤이스의 도움을 받아 친구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다. 2010년 이후로는 내게 늘 손 편지를 썼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을 만큼 약해져서, 이 마지막 편지는 다른 사람에게 받아쓰게 했다.
편지는 ‘수에게"가 아니라 "친애하는 수에게"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 인사말을 보니 2009년 12월에 올리버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올리버는 "친애하는"이라는 말로 편지를 시작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친애하는"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쓸 수 있는 일반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로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만 쓰는 표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리버가 "친애하는 수에게"라는 말로 운을 뗐을 때, 나는 여기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S) - P380381

이 편지가 마지막 작별 인사는 아니지만, 그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이번 달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간 교수님과 나눈 깊고 고무적인 우정은 지난 10년간 제 삶에 추가로 주어진 뜻밖의 멋진 선물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을 가득 담아, (O)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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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 편지가 왜 내가 해독할 수 없는 형태로 암호화되어 있는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요."
"음, 얕보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요. 대사님의 스테이션에서 대사님은 대단히 교육받은 분이시겠지요. 하지만 시티의 암호화는 대체로 시적 암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비시민이 이걸 배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모름지기 대사의 편지란, 대사가 제국과 제국의 시를 잘 아는 유식한 사람이란 사실을 자랑하기 위해서 암호화되어 있는 거예요. 관례죠. 진짜 암호가 아니라 게임이에요."
"르셀에도 시는 있어요, 알겠지만요."
"알죠." 세 가닥 해초가 아주 동정심 어린 어조로 말하기에 마히트는 그녀를 잡아 흔들고 싶었다. - P5152

"상호간에 이득이 있는 속임수를 통한 문화 교류죠." - P82

마히트는 당황한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굉장히 기쁘다는 게 그리 자랑스럽지 않았다. - P89

세 가닥 해초는 모범적인 안내자였다. 그녀는 마히트의 왼쪽 팔꿈치 근처에 있었는데, 호기심 많은 테익스칼란인이 함부로 야만인 외부자에게 다가와 타이밍 나쁜 질문을 해야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가까우면서, 마히트의 좁은 개인 공간을 지켜 줄 정도로는 거리가 있었다. 그녀는 역사적 관심 지역에서 건축적 특징과 주목점을 가리키고, 참아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을 때면 다음절多音節의 2행 시구를 자동적으로 중얼거렸다. 마히트는 관계된 시가 그렇게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나온다는 점이 부러웠다. - P100

마히트는 테익스칼란어로 ‘폭발‘이라는 단어를 알았다. 군사 시詩의 핵심 단어로 대체로 ‘충격적인‘이나 ‘타오르는 불길‘ 같은 묘사와 함께 쓰였다. 하지만 이제는 고함 소리로부터 추론해서 ‘폭탄‘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짧은 단어였다. 아주 크게 외칠 만했다. ‘도와 달라‘고 외치지 않을 때면 사람들이 그 단어를 외쳤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다. - P104105

"대단하기도 해라. 오전을 그렇게 보내고도 여전히 올바르게 행동하는군요."
마히트는 자신의 인내심이 다 했음을 깨달았다.
"제가 무례하게 구는 게 좋을까요?"
"물론 아니죠. 열아홉 개의 자귀는 디스플레이와 스크롤하던 투명한 창을 조수들에게 맡기고 마히트 쪽으로 다가왔다. "여기로 온 건 아주 잘했어요. 도착한 이래 당신이 한 첫 번째로 똑똑한 행동이었어요." - P124

항복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을까? 최소한 깨끗한 포로가 되어야겠다고 마히트는 생각했다 - P125

만약 농담이라면, 그 유머는 너무 날카롭게 찔러 왔다. 그런 농담은 사람이 고통을 알아채기도 전에 피부를 벗겨 버릴 수도 있다. - P133

차를 놓고 나눈 대화 이후로 마히트는 빈정거리는 말을 그다지 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열아홉 개의 자귀의 핵심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빈정거림을 주고받고 싶게 하는 화려한 언변의 정치인인 동시에 대화를 속속들이 헤집고 이해받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울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 - P147

마히트는 받은 인포피시 스틱에 편지들을 저장하고, 스틱을 열면 메시지가 제대로 나오는지 하나씩 확인한 다음에 뜨거운 왁스로 봉했다. 사무실 문 옆의 작은 테이블에 있는 실링 키트에서 나온 왁스는 소형 에탄올 라이터로 녹여야 했다. 마히트는 왁스를 붓다가 엄지손가락을 뎄다. 빛으로 만들고 시로 암호화하여 만든 메시지를,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물리적 물체로 전하다니 완벽하게 제국스러웠다.
그야말로 자원의 낭비다. 시간과 에너지와 재료의 낭비.
이런 게 즐겁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 P154

메시지를 보낼 때의 문제는 사람들이 거기에 대답을 한다는 거고, 그 말은 그 답으로 메시지를 더 작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 P156

두 번째 인포피시 스틱은 어떤 면에서도 익명이 아니었다. 내부의 전자장치만 빼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그것은 짙은 초록색 왁스로 봉하고 그 위에 태양바퀴의 하얀색 상형문자가 찍혀 있었다. 과학부다. 스틱을 열자 우아하고 거들먹거리는 조그만 글자가 떠올랐다. 열 개의 진주는 마히트의 대사직 임명을 축하하고, 이스칸드르의 불운한 죽음에 정형화된 유감의 말을 보냈다. 하도 정형화되어서 즉시 그가 어느 실용 수사학 책에서 유감의 말을 복사했다는 걸 알아챘을 정도다. 어쩌면 마히트가 작법을 배웠던 바로 그 책일지도 모른다. 암시적 글을 쓰려고도 하지 않은 노력 부족에 굉장히 테익스칼란인 같은 모욕감을 잠깐 느꼈지만, 곧 테익스칼란 시민의 교육을 흉내 내려고 애썼으나 어색하고 한심한 모방밖에 못 하는 멍청한 야만인 노릇을 성공적으로 잘했다는 굉장히 개인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 P158159

/거울이 돼./ 스스로에게 다시 말했다. /칼을 만날 때는 거울이 되는 거야, 돌을 만날 때는 거울이 되는 거야. 가능한 한 테익스칼란인이 되고, 가능한 한 르셀인이 되고, 또······ 아, 제기랄, 숨 쉬어, 그것도 해야 돼./ - P163

"여기 사나요, 둘 다?"
"최근에는 그래요. 각하께서 우리에게 참 잘해 주세요."
"그분이 그러지 않으시는 건 상상도 할 수가 없군요." 그건 심지어 사실이었다. "당신은 그분의 사람이죠?"
"아주 오랫동안요. 맵을 갖기 한참도 더 전부터."
마히트는 다섯 개의 마노에게 여러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하나하나가 그 전 것보다 더 사생활 침해적인 질문이었다. /그분을 위해서 뭘 하죠?/가 첫 번째 질문이고, 그다음으로는 /어떻게 그분의 사람이 됐죠?/ 그리고 아마도, /그분은 당신이 아이를 낳는 것을 원했나요?/ 하지만 실제로 물은 건 이거였다.
"뭐가 달라졌나요? 당신이 이사 오기 전에, 최근에요."
우주선 전망창 위로 반反햇빛 코팅제가 내려오는 것처럼, 다섯 개의 마노의 얼굴에서 솔직한 표정이 일부 닫혀 버렸다. - P167

"아뇨. 나에게 황제 폐하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게 아니라면요. 어제 저녁 내내 뉴스피드를 봤는데, 시티 바깥에서 온 사람은 모를 이 지역의 정치적 정서에 대충 익숙할 거란 전제로 이야기하더군요. 테익스칼란인이 아닌 사람이 그런 걸 모르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제가 아는 것 중 뭘 알고 싶으시죠? 저는 심지어 귀족도 아니에요, 대사님."
다섯 개의 마노는 아들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라면 특유의 말하는 방식이 있었다. 자신을 아주 냉정하게 낮추기 때문에 유머 감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귀족은 아니지만 에주아주아카트의 하인, 황실에서는 급이 낮다고 해도 이건 훨씬 더 중요한 자리였다. - P168169

이상적인 때와 이상적인 장소에서 계승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요. 역사는 자극적인 변수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각하."
열아홉 개의 자귀는 마히트가 흡족한 대답을 한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황제에게 자신의 몸에서 나왔거나 자신의 유전자에 의한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이 연령으로도 정신적인 면에서도 성숙하면 황제가 공동 황제로 주위시켜요. 그리고 나이 든 황제가 승하하면 별들이 알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새로운 황제가 이미 있는 거죠. 피로 만들어지고 햇빛으로 칭송을 받는 존재가."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죠?"
마히트가 냉정하게 물었다.
"충성스러운 병사 10만 명의 지지를 받는 어느 군 사령관이 우주의 좋은 기운이 자신을 황제로 지목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적게 일어나죠. 대사, 역사는 자극적이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답니다."
/그리고 얼마나 자주 황제가 자신의 후임으로 세 명의 통치위원회를 지명할까? 아마도 그리 자주는 아니겠지./ 마히트는 생각했다. /뭔가가 잘못되었을 경우에만 그럴 거야. 적절한 후계자가 없을 때. 완벽하지는 않을 때. 설령 서른 송이 미나리아재비와 여덟 개의 고리가 90퍼센트 클론의 섭정 역할을 할 예정이라고 해도, 그건 길고 다툼이 잦은 섭정시대겠지./ - P172173

두 번째 낭송은 각 행의 첫 글자들을 따면 시인이 잃어버린 가상의 연인의 이름이 되고, 그가 자신을 희생해 진공으로 뚫린 구멍에서 동료 선원들을 구하려 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는 아크로스틱(acronic, 각 행에서 처음이나 중간, 끝의 말을 서로 이으면 어구나 문장이 되는 시의 형태)이었다. 그것을 듣다가 마히트는 자신이 테익스칼란 궁중에서 테익스칼란 시 대회를 들으며, 손에 알코올 음료를 들고 재치 있는 테익스칼란인 친구와 함께 서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열다섯 살 때 원했던 모든 것이었다. 바로 여기가.
그 사실에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대신에 불쑥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단절. /비인격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 P213214

골라에트의 손이 마히트의 팔로 돌아왔고, 마히트는 상대방에게 혐오감 섞인 동정심을 희미하게 느꼈다. 이 여자는 정부에 의해 여기에 파견되었고, 그 정부는 새로 테익스칼란의 보호국이 되었고, 여자는 혼자였다.(마히트가 혼자인 것처럼. 하지만 마히트는 원래 혼자일 /예정/이 아니었다.) 테익스칼란에서 혼자 있는 건 깨끗한 공기 속에서 질식하는 것과 비슷했다. - P226

"휘차후이틀림."
"그게 이 새들의 이름인가요?"
"여기 있는 것들은 그렇게 불리지. 원래 있던 저 밖에서는 다른 이름이야. 하지만 이것들은 황궁의 벌새야. 르셀에는 새가 없다지."
"네." 마히트가 천천히 말했다. 이 아이는 이스칸드르와 아는 사이였다. 그리고 이스칸드르는 아이의 머리에 르셀 스테이션이 어떤 곳인지 일종의 환영을 불어넣어 놓았다. "없어요. 저희는 동물들이 별로 없지요."
"그런 장소를 한번 보고 싶네."
마히트는 중대한 정보의 조각을 놓치고 있었다.(그녀는 혼자 비공식적으로 이 아이를 만날 일은 원래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실 수 있지요. 전하는 젊고 권력 있는 분이십니다. 나이가 차셨을 때에도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르셀 스테이션은 전하를 맞이하는 영예를 기꺼이 누릴 것입니다."
여덟 가지 해독제가 웃었을 때, 그것은 열 살 소년의 웃음이 아니었다. 약간 특이하고, 씁쓸하고, /영리한/ 웃음소리였고 마히트는…… 정확히 뭐라 특정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 들었다. 모성 본능의 흔적. 이 새들을 알고, 친구나 경호원도 없이 황궁에 홀로 남겨 둔 이 /아이/를 껴안고 싶었다.(어딘가에 분명히 경호원이 있을 것이다. 혹은 시티 그 자체가, /완벽한 알고리즘/이 그들 둘을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 - P231232

서른 송이 미나리아재비는 위험했다. 자존심 강하고, 영리하고, 남을 조종했다. 마히트는 왜 이 남자가 에주아주아카트가 되고 그다음에 황위의 공동 후계자가 되었는지 그의 활동을 직접 보면 이해하게 될 거라던 다섯 개의 마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는 홀로그래프처럼 유연하고, 빛처럼 굴절되고, 각기 다른 접근법에서 각기 다른 말을 했다. - P236

애국심은 극한에서 굉장히 쉽게 파생되었다. - P377

다시금 마히트는 /관할권/을 생각했다. 그들은 따라온 요원들의 목표물이 아니었지만, 뒤를 밟혔으니 그 자리에서 선리트에게 체포당할 수도 있었다. 마히트는 자신이 고마움과 분노가 동시에 느껴지는 상태임을 깨달았다.(그녀는 이런 조합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이중적인 것. 애초에 겪지 말았어야 했던 무언가에 감사한다는 기묘함. 테익스칼란은 그런 것들로 가득했다.) - P402

다섯 개의 포르티코는 혀끝으로 이를 두드려 작고 생각에 잠긴 쯧 소리를 냈다.
"믿어 줘서 고맙군." 하도 건조하게 말해서 마히트는 그녀가 화가 난 건지 기쁜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살아 있고 정신이 제대로 돌아가는 거란 말이지. 좋아, 대사. 그리고 이 작은 모험에 대한 대가는 어떤 식으로 준비했지?"
마히트는 자신이 어떻게 대가를 지불할지 생각조차 안 해 봤음을 깨닫고 경악했다. 마히트에게는 대사로서의 월급이 있다. 아직 받지 못했고, 테익스칼란 정부의 권력이 더 이동한다면 한 번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도 의심스럽지만. 그리고 르셀 은행 기계로만 읽을 수 있는 크레디트칩 당좌예금계좌가 있었다. 그런 상태로 이 수술이 황궁에 있는 레스토랑인 것처럼, 다른 사람의 후의나 다른 사람의 정치적 협상 자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여기에 왔다. /멍청했다./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마히트는 마치······
······아, 테익스칼란 귀족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기랄. - P416

"불사에 관한 게 아니었어. 그게 당신이 묻는 거라면 말이야. 육체는 죽고, 그게 정말로 중요한 거야. 인격의 대부분은 내분비물이지:"
열아홉 개의 자귀는 그것을 생각했다. 그녀의 벌거벗은 몸이 차갑게 평가하는 얼굴 표정에는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그녀가 그를 침대로 데려가기 전에 지었던 것과 똑같은 표정이다.
"그러면 당신은 내분비물의 양립성을 맞춰 봐?"
"우리는 인격을 맞춰 봐. 아주 비슷한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각기 다른 내분비 체계는 아주 많고, 인격이 병합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부분이야. 하지만 육체적 유사성이나 초기 인생 경험의 유사성이 있으면 더 쉬워져."
"폐하께서는 클론을 만들길 원하셔." 이스칸드르는 그 아이디어에 몸을 떨고서 열아홉 개의 자귀에게 자신이 그랬다는 걸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이스칸드르는 몸을 떤다. 이스칸드르-마히트는 몸을 떤다. 몇 가지 금기는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리 테익스칼란 사람에게 여러 번 유혹을 당해도, 사람이 아무리 오래 황궁 문화에 젖어 있어도 말이다. 이마고를 전임자의 클론에 넣으면 안 된다. 그건 지나치게 똑같다. 인격이 병합되지 않는다. 대신에 돌 중 하나가 이기고, 다른 한쪽이 뭘 제공하려고 했든 사라져 버린다.) - P430431

일종의 계획이 있을 때의 힘, 그게 아무리 말이 안 되고 불가능한 거라도. - P479

"작은 대가야. 짐은 늙은이고, 낯선 이득에 쉽게 넘어가지, 안 그런가?" - P532

"페탈은 나에 관해서 항상 옳았어요." 세 가닥 해초가 말했다. 마히트는 튀어나온 머리카락 한 가닥을 그녀의 귀 뒤로 넘겨주며 이야기를 들었다. ‘난 외계인을 좋아해요. 야만인도요. 새로운 것, 뭔가 다른 것들을, 하지만 나는······ 내가 당신을 황실에서 만났다면요, 마히트, 당신이 우리 중 한 명이였다면, 그래도 똑같이 난 당신을 원했을 거예요."
그 말은 아주 아름답고, 상처에 바르는 연고 같고 위안이 되었다.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당신이 우리 중 한 명이었다면, 그래도 똑같이 난 당신을 원했을 거예요./ 그리고 마히트는 다시 그녀의 입에 들어가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를 무릎에서 밀어내고 싶었다. 마히트는 테익스칼란인이 아니었다. 마히트는······ 더 이상은 잘 /모르겠다./자기가 테익스칼란인이 아니란 사실 말고는. 아무리 많은 사랑스러운 아세크레타가 눈물로 얼룩진 채 안아 주길 바라며 품에 들어온다 해도 마히트는 테익스칼란인이 될 수 없다. 그녀가 마히트를 위해서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한 다음 안아 주길 바란다 해도. - P538539

여섯 방향이 말했다. /테익스칼란에는 차분하고 침착한 지휘가 필요하다. 별의 우아함을 지닌 손, 준비된 혀, 햇빛을 잡는 주먹. 우리가 겪게 될 고통의 앞에서, 봉사가 뭔지 알게 된 이래로 그대들에게 봉사해 온 내가 이 신전과 다가오는 전쟁을 축성하도다./
"정말로 하시려는 거야."
세 가닥 해초의 목소리는 소파에서 바로 옆에 있는 마히트에게 너무도 진짜이고, 너무 크고, 너무 즉각적이었다. - P545

2014년 여름 애리조나주 카텔 커피 랩에서 현대 동아르메니아어 심화 코스 2주차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내 머리는 내 것이 아닌 단어의 형태로 가득했다. 2017년 봄의 와중에, 볼티모어에 있는 내 침실에서 이 책을 끝냈다. 아내가 깨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나는 천천히 도시 위로 다가오는 빛을 보았다. 추방에 대해서, 사람이 고향에 거의 다 오지만 완벽하게 돌아오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애리조나와 볼티모어 사이에는 세 개의 주와 네 개의 도시, 세 개의 직장, 그리고 이 책을 만드는 데서 내가 쉽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도움이 있었다. 감사의 말 부분은 당연하게도 내가 해야 하는 모든 감사의 인사말의 얇은 그림자일 뿐이다. - P576

바이어블 패러다이스 워크숍, 이게 없었다면 나는 친구도 훨씬 적고 기술도 훨씬 형편없었을 것이다. 뛰어난 대리인 송동원은 이 기획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전부 한꺼번에 봐 주었다.(다음에는 중요한 비즈니스 전화를 스웨덴에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편집자 데비 필라이는 가서 이 우주의 나머지를 찾아 여러분 모두를 위해 페이지에 옮기라고 말해 주었다. - P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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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즈) 파스칼은 수학 신동이었다. 그는 30대 후반에 이렇게 토로했다. "참된 증명이 있다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불확실성을 더욱 키울 뿐이다. 파스칼 말마따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 P310

라 로슈푸코 공작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미덕에서나 악덕에서나 우리를 인도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 덧붙이는데, 강물이 바닷물에 녹아들듯 미덕은 지기이익에 녹아든다. - P313

1950년대 초 존 내시가 랜드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냉전 정치 전략과 핵 억지를 연구하던 몇몇 박사후 연구원이 ‘수감자 딜레마’라는 게임을 생각해냈다. 이 이름이 하도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탓에 오늘날은 과거에 수감자 딜레마 없이 도덕철학을 연구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다. - P328

이기적 참가자는 상대방의 득실에 개의치 않는 사람인데, 둘 다 이기적이면 서로를 모래 늪에 끌고 들어가는 꼴이 된다. - P330331

분노는 요란하며 무언가를 널리 표출한다. 가장 비천한 폭력배조차 다음과 같이 존중을 요구한다.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안 되지. 이건 받아들일 수 없어. - P368

인류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전 세계에서 이른바 소규모 사회(목부, 어부, 유목민, 수렵 채집인 등)가 규칙을 집행할 단순한 제도를 어떻게 자발적으로 만드는지 기록하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 규칙이란 협력하고, 어장을 공정하게 공유하고, 지속 가능한 숲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스트롬은 이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오스트롬의 견해에 따르면 "제도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유인책을 제시하는 수단이다." 유인책은 보상일 때도 있지만 처벌인 경우가 훨씬 많다. 이 의미에서 보자면 사회계약은 철학자들이 퍼뜨린 창조 신화가 아니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자발적으로 소규모로 생겨날 수 있다. - P376

무지의 장막이라는 시적 표현은 존 롤스의 철학을 송두리째 욱여넣은 캡슐이 되었다. 자신의 사상이 이렇게 압축되면 사상가로서 성공하기 힘들다. 쇼펜하우어 하면 우리는 으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떠올린다. 라이프니츠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를 상징하고 다윈은 생존 투쟁을 상징하며 아인슈타인은 만물의 상대성을 상징하고 하이데거는 무화하는 무를 상징한다. 이런 무조건 반사적 연상은 무지를 가리는 간편한 장막 역할을 한다. 하지만 롤스가 말하는 ‘무지의 장막‘은 이런 뜻이 아니다. - P383

다시 말하지만 평판이 관건이다. 이것은 동료 처벌이 있는 상호부조 게임이나 간접적 대갚음과 분명 유사하다. 내가 부당한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제안자를 응징하는 셈이다. 나는 대가를 치르지만 큰 대가는 아니다. 내게 제안된 작은 이 전부다. 거절의 대가는 제안자가 훨씬 크게 치른다. 그뿐 아니라 나는 내가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입증하게 된다. 실은 나 자신에게만 입증했다. 실험자가 설명했듯, 실험 규칙에 따라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잠시당한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한다. - P393

의례적 싸움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슴은 경쟁자를 죽이거나 몰아낼 수 있다. 그러면 더 빨리 번식한다. 하지만 그 사슴의 새끼들은 싸움을 키우는 아비의 성향을 물려받는다. 그들은 무리 안에 퍼져 점점 자주 서로 맞닥뜨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전략은 같은 전략을 상대하기에는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자멸적이기 때문이다. 이 전략의 빈도가 억제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종의 유익은 부수적 보너스이지 의례적 싸움이 퍼지는 이유가 아니다.
영국의 이론생물학자 존 메이너드 스미스는 이런 종류의 논증을 처음으로 동원했으며 진화적 게임이론의 초석을 놓았다. 개체는 전략(이 경우는 확전 성향 x)을 물려받는다. 득실은 번식 성공률 증가로 평가된다. 득실이 크다는 것은 새끼를 많이 낳는다는 뜻이며, 이 새끼들은 부모의 성향을 물려받는다. 그러므로 빈도는 스스로를 조절한다. - P398

진화적 게임이론의 첫 번째 이론적 예측은 중무장한 종에서는 갈등이 쉽사리 확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예측은 기발한 방법으로 확증되었다. 종이 지닌 무기(이빨, 발톱, 뿔)가 치명적일수록 같은 종에게 무기를 쓰지 않으려는 행태가 더 흔히 나타난다. 반면에 무기가 빈약한 종(이를테면 평화의 상징 비둘기)은 상대의 목숨을 빼앗지 못하도록 하는 방지 장치가 전혀 없다. 이것은 단지 정상적 조건에서는 상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약한 비둘기가 달아나면 그만이니 말이다. 비둘기를 새장에 가두면 서로 공격하다 죽이기도 한다. 비둘기는 서로에게 자비를 구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고 늑대는 적응했다. - P399

비트겐슈타인은 다음 문장을 지침으로 삼았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사용이다"( 많은 부류에 대해서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 쓰임을 더 면밀히 들여다보기 위해 "언어를 말하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식의 일부임을 부각시키고자" 언어 게임이라는 방법을 고안했다. 수학철학자로서 그의 임무는 이 게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하는 것이었다. 게임에는 규칙이 있는데, 참가자들이 언제나 규칙을 자각할 필요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규칙들을 끈질기게 하나하나 밝혀내고자 했다. 그는 ‘수학‘이라고 불리는 것 뒤에 매끈한 실체가 숨어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학의 "다채로운 혼합"을 이야기했다. 행성, 전파, 은하, 암흑 물질 등 천문학이 다 루는 다양한 현상은 하늘에 있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수학을 하나의 대상이나 하나의 방법으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수학은 잡동사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본보기를 따라 우리가 민족지학자처럼 수학제도諸島에 있는 미답의 해안에 상륙하여 원주민(수학자)들이 서로 어떻게 소통하는지 관찰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그들이 따르는 삶의 규칙, 즉 (비트겐슈타인이 애용하는 용어를 쓰자면) ‘삶의 형식‘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P414

증명은 정리를 다른 정리로부터 유도하는 행위이며 정의는 다른 정의에 근거한다. 물론 이것은 어느 단계에선가, 즉 공리에서 끝나야 한다. 공리란 개념에 대해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오늘날 수학에서 공리는 거의 언제나 집합론의 측면에서 정식화된다. 이 관례에서 보듯 집합론과 수리논리학은 수천 개의 가지를 뻗은 수학이라는 거목의 뿌리다. 두 분야는 일반적 의미에서, 이를테면 튜링의 수업에서 상정한 수학의 기초다. - P427

수학 분야가 수백 개에 이르는데도 그 통일성은 다른 학문의 시샘을 살 만큼 굳건하다. 수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매우 현실적인 예를 들자면) 복소수와 유클리드 기하학의 연관성 같은 뜻밖의 연관성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통설이다.
이러한 만장일치가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인 세계수학자대회는 올림픽 경기처럼 4년마다 열린다. 이에 반해 물리학이나 생물학에는 세계 대회가 없다. 이런 세계 대회에서 벌어지는 수학적 대화를 알아듣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나머지 참석자들은 끈기 있게 자리를 지킨다. 게다가 수학자들 사이의 내부 서열(누가 누구보다 위인지)에는 놀라울 만큼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를테면) 경제학에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 ‘사회학적‘ 의미에서도 수학은 여타 학문보다 더 통일되었다. - P430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수학이 엄청나게 넓은 응용 범위에서 주역을 맡음을 안다. 물론 몇몇 수학자에게는 이 측면이 (노골적으로 불쾌하지는 않을지라도) 부차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 순수한 학문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수론을 연구한 영국의 수학자 G. H. 하디는 『어느 수학자의 변명』에서 모든 응용을 한낱 ‘부수적 피해‘로 치부했다. 다행히도 가능한 모든 응용에서 벗어났고 아마도 언제까지나 그러할 분야들이 있다고 하다는 덧붙인다. 그가 든 사례는 일반상대성이론과 수론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요즘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은 GPS에 쓰이고, 수론은 모든 이메일 플랫폼에서 쓰이니 말이다. 신용카드는 소인수분해를 거쳐 암호화된다. - P432

수학의 효율성에는 기이한 구석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둘은 아마도 서로 연관되었을 것이다. 하나는 전혀 달라 보이는 이론들 사이에 놀랍고도 때로운 으스스하기까지 한 교차 연결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상의 사용이다. 이 성격은 수학을 혼란과 파멸로 직행시키는 오점으로 종종 간주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추상이야말로 수학이 성공한 비결이다. 추상이란 수백 가지 세부 사항을 지우되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하고 현실을 가능성과, 심지어 불가능성과 비교하는 자세다. 수학자들은 사고실험과 ‘~라면 어떨까‘의 장인이다. - P433

하지만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수학이 일조할 수 있다. 수학은 "부정확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언어이니 말이다. - P434

쿠르트 괴델조차 "플라톤주의적 견해는 수학자들 사이에서 별로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었다. 1940년 저명한 과학사학자 E.T. 벨은 이렇게 썼다. "예언자들에 따르면 수학에서 플라톤주의적 이상을 따르는 최후의 추종자는 2000년엔 공룡처럼 멸종한 신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새천년의 여명에 플라톤주의가 수학자들 사이에서 오히려 다시 득세했음을 안다. 공룡처럼 멸종한다니, 나 원 참!
실제로 오늘날 현업 수학자 대부분이 빅 스리의 동조자가 아니라 정체를 숨긴 플라톤주의자라는 것이 현재의 견해다. ‘저기 바깥에서‘ 한 단계 한 단계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객관적인 수학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다소 무의식적인 느낌이 수학자들을 이끈다. 이 수학자들은 스스로를 탐험가로 여긴다. 군, 다각형, 소수 같은 수학적 대상이 수학자에게 실재인 것은 두꺼비와 악어가 동물학자에게 실재인 것과 마찬가지다. - P440

(그나저나 수학이 이렇게 자립적이라고 해서 수학자들이 철학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많은 수학자는 수학이 발견되는 것인지, 발명되는 것인지를 놓고 몇 시간씩, 대개 늦은 시간까지 토론을 벌인다. 대체로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열정이 사그라들기는 하지만, 그것은 난제의 정답을 찾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체념했기 때문이다.) - P442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고찰하고 연구하면 완전히 이해하고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증명이 있다. 그것이 데카르트적 증명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 단계를 꼼꼼히 전개하고 한 줄 한 줄 기계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증명이 있다. 그것이 라이프니츠적 증명이다."
쾌락을 찾는 사람이라면 데카르트의 편에 서야 한다. 데카르트적 증명은 대체로 번득이는 이해, ‘아하!‘의 경험, 난데없는 깨달음과 관계있다. "이등변 삼각형을 증명한 최초의 사람.—그가 탈레스든 또는 다른 이름을 가졌든—에게 한 줄기 광명이 비쳤다." 이마누엘 칸트의 말이다.
이런 번득이는 이해는 결국에 가서는 섬광으로든 느린 여명으로든 덜 흡족한 다른 통찰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무언가를 간과했거나, 반례가 제기되거나, 증명이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틀렸을 수도 있다. ‘아하!‘에서 ‘아차!‘까지는 잔걸음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이 ‘아차!‘는 증명을 수선하거나 추측을 수정하거나 논박하는 방법들로의 통찰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결국에는 라이프니츠적 증명에서만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때가 되면 재미는 온데간데없다. - P474

하지만 약수의 합의 수열은 뚜렷한 재귀적 법칙을 따르는 반면에 소수의 수열은 (레온하르트) 오일러에 따르면 "질서의 기미를 조금도 나타내지 않는 듯하다. 소수의 수열은 누대에 걸쳐 수학자들의 어떤 시도에도 난공불락이었다. 오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정신이 결코 파고들 수 없는 어떤 신비가 있다고 믿을 이유가 충분하다." 소수는 두서없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 P486

리만 가설은 소수의 분포를 무작위 연쇄와 구별할 수 없음을 매우 분명하고 정확하게 선언한다. 자연수보다 규칙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한 반면 자연수의 구성 요소인 소수의 배열보다 불규칙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 P486

그건 그렇고 우리 고양이 몬티가 집필 시간에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내 요청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음을 꼭 언급해야겠다. 심지어 내 키보드를 고의로 밟고 지나가기까지 한다. 따라서 남은 실수는 모두 몬티 탓이다. - P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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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이상적 통치자가 되려면 우선 10년간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다행히 아무도 그의 제안에 호응하지 않았다. - P15

19세기를 거치면서 유클리드의 정리들이 모두 옳지만 몇 가지 증명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따금 유클리드의 논증은 공리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자명성‘을 써먹었다. 이를테면 A, B, C가 직선 위의 세 점이고 B가 A와 C 사이에 있으면 C는 A와 B 사이에 있지 않다거나, 삼각형의 한 변과 교차하는 직선은 다른 변과도 교차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했다. 무의식적으로든, 적어도 부지불식간에든 올바르게 증명되지 않은 것들이 현실에서의 공간 추론 때문에 ‘명백‘해 보인 것이다. 이런 결함은 첫 정리에서부터 나타났다. - P34

(다비트) 힐베르트의 책은 유클리드의 『원론』에 있는 구멍 몇 개를 메우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자명성‘과 ‘직관‘을 둘 다 없애 최후의 보루인 기초 개념과 공리에서 배제했다. 힐베르트는 기초 개념에 대해 공리를 따른다는 것 말고는 어떤 의미도 부여하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 P3536

유도할 수 있다면 주어진 것으로 가정할 필요가 없다. - P39

항해사와 지도 제작자의 검증된 구면기하학은 영락없는 타원기하학이다. 수학자들은 수백 년간 구면기하학을 코밑에 두었으면서도 이것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모형으로 삼을 수 있다는 발상에 대경실색했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기하학 지식이 아니라 점과 직선 같은 낱말을 직관에 구애받지 않고 구사하려는 마음가짐이었다. - P48

기이하게도 시각과 촉각이 대립할 때는 촉각이 우선권을 가지는 듯하다. 연필은 물에 잠기면 꺾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연필이 곧다고 말한다. 촉각이 현실을 전달하고 시각이 외양만을 전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뭇가지 사이를 잽싸게 누비며 눈과 손을 협응시켜야 했던 유인원과 원숭이의 오랜 계보에서 우리가 진화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을까? 그런 존재에게는 촉각이 틀림없이 언제나 최종 결정권을 가져야 했을 것이다. 붙잡던 줄이 끊어지면 대가 끊길 테니 말이다. - P50

17세기 철학자들이 모두 위대한 기하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모두 그렇게 되고 싶어했다. 바뤼흐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유클리드방식(그의 표현으로는 모레 게오메트리코more geometrico)으로 썼다. 토머스 홉스는 원적문제§주어진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자와 컴퍼스로 작도하는 문제의 해법§을 거듭거듭 제시했다. 전부 틀리긴 했지만. - P52

양이 다른 양에 대해 음이라는 말은 다른 양 안에서 동일한 양만을 상쇄한다는 의미에서 반대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마누엘) 칸트는 이 주장을 설명하는 예를 몇 가지 제시한다. 범선 한 척이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항해한다. 어느 날에는 12해리 전진하지만 그다음 역풍을 맞아 3해리를 잃는다. 그러므로 ‘음의 3‘해리를 총 이동 거리에 더해야 한다. 교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빚은 음의 재산으로 간주할 수 있다(이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음수가 인도에서 처음 도입되었을 때 원래 이름은 ‘빛‘이었다). - P56

빈 학파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바이스만은 『수학적 사고 입문Einführung in das mathematische Denken』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원을 품는 것을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과 혼동하면 결코 안 된다." 바이스만의 수학과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았던 노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도 동의했을 것이다. - P57

실수는 격자점을 가르는 ‘절단‘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유리수를 크기순으로 정렬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지루하고 명백하다. (0, 0)을 지나는 각각의 선은 평면 위쪽 절반에 있는 반직선을 정의한다. (0, 0)에 달려 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는 시곗바늘이 (c, d)를 지나는 반직선에 도달하기 전에 (a, b)를 지나는 반직선을 가로지르면 유리수 a/b는 유리수 c/d보다 작다. - P61

복소수를 다루는 수학자가 자신이 실수 쌍을 다루고 있으며 각각의 실수가 유리수 집합의 쌍이고 각각의 유리수가 정수 쌍이고 각각의 정수가 자연수 쌍이라는 사실을 늘 자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문제를 곱씹기 시작하면 구두끈 묶는 동작을 머릿속에서 상상할 때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 십상이다.
현업 수학자들은 그저 익숙한 작업을 할 뿐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점점 깊이 파고들려 노력하며, 수에 대해 당연하게 간주되는 괴상한 규약들을 맞닥뜨렸을 때 아이가(또는 칸트의 독자가) 경험하는 어리둥절함을 자각하고 싶어한다. - P62

분수는 음의 양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리수는 모든 고등 문명에서 쓰였는데, 이따금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이상한 제약을 받기도했다. 이를테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1/n 같은 형식의 단위분수와 단위분수의 합만 썼는데, 어떤 단위분수도 두 번 나타날 수 없었다. 그래서 2/3은 1/3+1/3이 아니라 1/2+1/6로 표시된다. 이상하게 우회하긴 하지만 모든 양의 유리수를 이런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 P67

유리수는 정수에 없는 신기한 성질이 있다. 크기 순으로 정렬할 수는 있지만 ‘이 수 다음으로 가장 큰 수‘는 없다. 임의의 두 유리수 사이에는 수많은, 실은 무수히 많은 유리수가 있다. 유리수는 조밀하다. 수직선 위에 있는 임의의 두 점 사이에는 언제나 유리수가 있다. 유리수는 수직선을 뒤덮어 조그만 간격조차 남기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이 성질은 치수를 재기에 안성맞춤인 듯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유리수는 수직선을 덮긴 하지만 ‘채우진’ 못한다. - P68

플라톤 시대가 되자√2가 무리수라는 사실이 더는 당혹스럽지 않았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에서 동명의 새내기 수학자는 자신이 친구들과 함께 3부터 17까지의 모든 수의 제곱근이 무리수임을 증명해냈다고 지나가듯 언급한다(4, 9, 16의 제곱근이 무리수가 아니라는 사실과 2의 제곱근이 무리수라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았다. 너무 명백해서 지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플라톤은√2가 무리수라는 사실을 힘주어 지적한다. "정사각형의 대각선이 변과 공약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인간이라고 불릴 값어치가 없다." 그즈음 히파소스의 충격적인 비밀은 상식이 되어 있었다. "믿음직한 헬레네인들이여, 이는 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라네. 알지 못하는 것은 수치요, 안다 해도 별다른 덕이 아니라는 것이지." - P69

처음 무리수를 접했을 때의 경이감을 요즘도 느낄 수 있을까? √2가 무리수라는 사실은 (0, 0)에서 출발하여 (√2, 1)을 통과하는 반직선이 x와 y가 정수인 어떤 격자점 (x, y)와도 만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평면에는 무한히 많은 격자점이 있으나, 반직선 중에는 어느 격자점에도 걸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무한 속으로 항해하면서도 격자점을 하나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 P69

물론 실수를 복소수로 확장하면서, 그리하여 수직선에서 복소 평면으로 이동하면서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다. 실제로 실수는 크기순으로 정렬되는 반면에 복소수는 그렇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복소수는 여러 방법으로 정렬할 수 있지만 그때마다 일반적 산술 규칙에서 말썽이 벌어진다. 이 규칙들은 제곱수가 음수일 수 없음을 함축하는데도 √-1의 제곱은 음수다. - P7879

가장 오래된 셈 흔적은 이상고 뼈로, 약 2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성적 학자들은 뼈에 11, 13, 17, 19개의 새김눈이 파여 있다고 주장한다(뼈에 관한 여러 주장이 그렇듯 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수들은 10과 20 사이의 소수다(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 P83

귀납에 의한 증명은 수학자에게 대단한 기쁨을 선사한다. 수학자들은 이런 증명을 숱하게 보는데, 대학 1학년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각각의 증명은 무한히 많은 논리적 단계의 연쇄다. 지퍼처럼 자르륵 풀린다. - P89

(주세페) 페아노에 따르면 자연수는 각 원소가 ‘후속자‘라는 다른 원소 하나에 사상map하도록(화살표로 연결되도록) 대응이 정의되는 집합이다(이 사상을 S라고 부른다). 집합의 원소는 후속자가 저마다 다르다. 후속자가 아닌 원소는 하나가 있다(수학 용어로는 후속자 사상 S가 일대다사상이 아니라 일대일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전부 뭉뚱그리면, 공리에 따라 어떤 부분집합이 후속자가 아닌 원소를 포함하고 각각의 원소에 대해 그 후속자도 포함하면 이 부분집합은 전체집합이어야 한다.
이게 전부다. 산술에 필요한 공리들은 이게 다다.
후자가 아닌 원소가 하나뿐일 수밖에 없음은 쉽게 알 수 있다. 그 원소의 이름은 1이다. - P91

(게오르크) 칸토어의 생각에서 관건은 어떤 통찰이었다. 우리는 집합 A의 원소 개수가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하면서도 집합 B만큼 많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A의 원소와 B의 원소 사이에 일대일대응이 존재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면 두 집합은 원소 개수(수학 용어로는 기수)가 몇 개인지와 상관없이 같다. 이것을 대등하다라고 한다.
마라톤을 구경할 때는 선수의 인원수를 세지 않아도 왼발 개수와 오른발 개수가 같음을 알 수 있다. 거실에서 모든 찻잔이 받침에 놓였고 빈 받침이 하나도 없으면 찻잔 개수와 받침 개수가 같음은 세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P9697

지금까지의 결과는 모든 무한집합이 가산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하지만 칸토어가 발견했듯 그렇지 않다. 그의 집합론은 이 지점에서 신기원을 열었다. 무한의 크기가 하나뿐이라면 재미없을 것이다.
칸토어는 구간에 있는 실수(이를테면 0과 1 사이의 실수)를 열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칸토어 스스로 여러 증명을 고안했는데, 마지막 증명은 하도 기막히게 기발해서 자신의 논증이 빈틈없는지 몇 번이고 의심했을 정도다. 그는 (다비트) 힐베르트를 비롯한 동료들에게 걱정 어린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는지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증명은 어이없을 만큼 쉬워 보였다.
오늘날 칸토어의 대각선 논법은 충분히 검증된 친숙한 도구로, 간접적 방법을 활용한다. 0과 1 사이의 모든 실수를 열거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 실수들은 0.5000・・・ 이나 0.333・・・처럼 맨 앞에 0이 오고 다음에 점이 오고 그 뒤에 무한한 숫자 연쇄가 오는 십진법의 전개식에 대응한다. 실수가 위의 가정처럼 정말로 열거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목록을 전부 줄줄이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크기별로 배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이제 다음과 같은 전개식으로 수 하나를 구성해보자. n번째 자리에 있는 숫자에 대해 위의 목록에서 2번째 실수를 골라 n번째 자리에 있는 숫자를 다른 숫자로 바꾼다. 그러면 계단을 내려가듯 대각선을 따라 차례로 내려가면서 2번째 계단에서 만나는 모든 숫자가 다른 숫자로 바뀐다. 이렇게 하면 0과 1 사이의 실수에 대한 전개식을 얻는다. 그런데 이 수는 우리의 목록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실제로 n 자리에 있을 수 없다. n번째 숫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n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방금 구성한 0과 1 사이의 실수는 우리의 목록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모든 실수를 나열했다는 가정과 모순된다. 그러므로 실수는 열거 가능하지 않다. 실수는 비가산적으로 많다. - P99100

칸토어는 연속체보다 큰 기수(원소 개수)가 많음을 증명했다. 이를테면 ‘직선의 모든 부분집합의 집합‘ 크기가 있다. 실제로 그는 무수히 많은 무한 기수를 발견했으며 이내 수학자들이 그 기수들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계산 규칙은 놀랍도록 괴상하다. 하지만 연속체의 기수보다는 작지만 자연수의 기수보다는 큰 기수가 있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모든 비가산 실수 집합은 연속체 전체의 크기를 가져야 할까? 이 주장을 ‘연속체 가설‘이라고 한다.
칸토어의 혁명적 발상은 많은 반발을 샀으며 그는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 칸토어가 논쟁을 찾아다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칸토어는 수학을 연구하지 않을 때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진짜 저자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가설을 옹호했다. 이 주장은 실무한 못지않게 평생을 허비할 수 있는 논쟁거리다.
베이컨 가설과 달리 집합론은 인정을 받았다. 칸토어는 할레에 있는 군소 대학에서 일생을 보냈음에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897년 (자신이 출범에 큰 역할을 한) 제1회 세계수학자대회에 참석했을 때 그는 많은 강연에서 자신의 이론이 기정사실로 취급되는 모습을 보았다. 한 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 집합론은 모든 수학 분야의 공통 기초가 되었다. - P103

대부분의 수학자는 칸토어를 확고히 지지했으며 오리가 물을 좇듯 집합론을 좇았다. 언제나 카리스마가 넘쳤던 다비트 힐베르트는 이렇게 포효했다. "누구도 우리를 칸토어가 창조한 낙원으로부터 내쫓지 못하리라." - P104

자연수에 대한 (고틀로프) 프레게・(버트런드) 러셀 접근법은 수학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은 집합론에서 자연수를 도출하는 상향식 방법이 프레게・러셀 접근법을 대체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방법은 요한 폰 노이만이 제시한 것으로, 그가 갓 스무 살(영재가 은퇴하는 시기)이 되었을 때 발견했다. - P105

기수는 집합의 크기를 나타내며 서수는 배열을 묘사한다. 유한집합에서는 기수와 서수가 대략 같다. 기수는 "일, 이 삼"으로 세고 서수는 "첫째, 둘째, 셋째"로 센다는 것만 다르다. 무한집합은 사정이 달라서 기수적 무한의 산술 규칙과 서수적 무한의 산술 규칙이 따로 논다.
집합을 배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전문용어로는 정렬이라고 한다. 이 말은 모든 원소가 선형적 순서로 놓였다는 뜻이다(임의의 서로 다른 두 원소 x와 y에 대해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작다. 또한 x가 보다 작고 y가 2보다 작으면 x는 2보다 작다). 이와 더불어 정렬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에는 가장 작은 원소가 있다(가장 큰 원소가 있을 필요는 없지만). 이를테면 자연수 집합은 ‘자연적‘ 방식으로, 말하자면 {1, 2, 3, ・・・}으로 정렬되며 ω에 대응한다. 1을 맨 뒤로 보내 다시 배열할 수 있는데, 그러면 {2, 3, ・・・, 1}이 된다. 이 정렬은 ω+1에 대응한다. - P109

이 ‘생각의 표현법‘ 중에서 논리적으로 옳은 것은 열다섯 가지로 밝혀졌다. 전통적 설명에는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이는 고대인의 용법 중 일부가 오늘날 수학자들의 용법과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A는 B다"라는 명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A라는 성질을 가지는 대상이 존재함을 함축하는 데 반해 현대의 수학적 규약에 따르면 A라는 성질을 충족하는 것이 전혀 없어도 무방하다. 말하자면 대응하는 집합이 공집합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용은 귀엽다"는 애초에 용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옳은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마도) 대부분의 일반인은 이 명제를 거짓으로 여기거나, 만일 참으로 받아들인다면 용의 존재를 함축한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이 용법은 우연한 회심conversio per accidens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스콜라철학자들의 골머리를 썩였다. - P114

아래의 열 가지 전제가 성립한다고 가정하자.

1. 이 집에 있는 유일한 동물은 고양이다.
2. 달 바라기를 좋아하는 모든 동물은 애완동물로 적합하다.
3. 나는 동물이 혐오스러우면 멀리한다.
4. 어떤 동물도 밤에 돌아다니지 않는 한 육식동물이 아니다.
5. 어떤 고양이도 생쥐를 죽이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다.
6. 이 집에 있는 것 외에 어떤 동물도 내게 사근사근하지 않다.
7. 캥거루는 애완동물로 적합하지 않다.
8. 육식동물을 제외한 어떤 것도 생쥐를 죽이지 않는다.
9. 나는 내게 사근사근하지 않은 동물이 혐오스럽다.
10. 밤에 돌아다니는 동물은 언제나 달 바라기를 좋아한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논리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는 캥거루를 멀리한다(힌트: 달빛에 혹하지 말 것).
이 삼단논법 연쇄를 고안한 옥스퍼드대학교의 논리학자는 찰스 도지슨이다. 그는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하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썼다. - P115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놀라운 통찰은 논증을 순수한 형식 계산으로 기술한 것이다. 명제의 내용은 진위와 무관했다. 그가 수학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규칙은 형식화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 P116

(영국의 조지 불 이후) 영국의 오거스터스 드모르간과 존 벤, 미국의 찰스 퍼스, 독일의 에른스트 슈뢰더, 이탈리아의 주세페 페아노가 진행한 연구를 통해 논리학은 점점 수학과 비슷해졌다. 이와 나란히 수학도 점점 논리학과 비슷해졌다. 수학 추론은 점점 엄밀해졌으며 수학 증명은 고생스러울 만큼 명시적으로 바뀌었다. 이런 발전이 (무엇보다 해석 과정에서) 절실히 필요한 곳은 새롭고 더 명시적인 논증이 놀라운 결과를 밝혀내는 분야였다. 그 놀라운 결과란 이를테면 연속함수 수열의 극한은 불연속적일 수 있다거나, 몇몇 연속함수는 어디서도 미분 가능하지 않다 등이며, 그 밖에도 비슷한 문제들이 밝혀졌다.
새로운 엄밀성을 앞장서서 옹호한 사람은 오귀스탱 루이 코시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였다. 훗날 프라하에서 베른하르트 볼차노라는 저명한 성직자이자 철학자이자 수학자가 이 발전들 중 상당수를 예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가톨릭교회는 그의 책들을 금서로 지정했다. 공교롭게도 수학에 집합 개념을 도입한 사람도 볼차노였다. 그는 집합을 부분의 배열에 의존하지 않는 다수로 정의했다. - P117118

이를테면 함수(더 일반적으로는 두 항 사이의 관계)는 영락없는 쌍의 집합이다. - P119

어떤 학문도 모순을 반기지 않는다. 모순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신호이니 말이다. 하지만 형식적 수학 이론에서의 모순은 훨씬 고약하다. 더는 가망이 없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 실제로 A와 A 아닌 것이 둘 다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A의 타당함은 임의의 명제 B에 대해 "A이거나 B가 참임을 함축한다. "A거나 B가 참이고 A 아닌 것도 참이기 때문에 B는 무조건 참일 수밖에 없다. 이러면 모든 것이 올스톱된다. - P128

힐베르트 프로그램은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발전했으며 힐베르트 자신과 여러 제자가 실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느닷없이 암초를 만났다.
쿠르트 괴델이라는 박사후 연구원이 빈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하고 힐베르트의 노선을 따라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뒤, 힐베르트 프로그램이 결코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또한 같은 증명으로 괴델은 수학적 참과 형식적 증명의 간극이 메워질 수 없음을 입증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정합적인 형식적 수학 이론에서 성립하는 모든 것이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정합성 자체가 이론 안에서 형식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괴델의 첫번째 불완전성 정리와 두 번째 불완정성 정리인 이 두 명제는 철학적으로 의미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수학적 정리이지 결코 ‘한낱‘ 철학적 진술이 아니다.
20년 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괴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면서 불확정성 정리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수학적 진리‘로 천명했다. - P131132

현대에 들어 동료 평가는 새로운 수학적 생산물의 양에 짓눌리고 있다. 해마다 수천수만 명의 수학자가 수십만 개의 새 정리를 발표한다. 수학계에서는 동료 평가 학술지에 게재하여 정리를 검증한다. 이렇게 하면 각각의 새 논문은 적어도 한두 명의 평가자가 (바라건대) 비판적으로 읽었음이 보장된다. 하지만 평가자는 대체로 익명에 무보수여서 열심히 평가할 동기가 부족하다. 많은 오류가 걸러지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수학자들이 그 잘못된 결과를 이용하고 전파하게 된다. 증명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데는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현업 수학자가 독창적 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다른 수학자가 발표한 이전 결과를 검증 없이 활용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피하다. 궁극적으로 오류가 생길 것이 뻔한 사회적 과정에 의존하는 격이다. - P163

동료 평가에 따르는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그에 따라 정리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은 증명 보조기의 존재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머지 이유는 더 심오하다. 증명 보조기는 수학 전체를 완전하게 형식화하여 논리적으로 정당화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HOL 라이트의 핵심 프로그램을 이루는 500행의 컴퓨터 코드는 의심할 여지 없이 힐베르트를 놀라게 하겠지만 그의 인정을 받기에 족한 ‘기초‘다. 이 기초는 철학적 이상을 실현할 튼튼한 확실성을 선사한다. 그 도움을 받아 수많은 정리가 검증되었는데, 그중에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같은 가장 이름난 기념비적 결과도 허다하다. - P166

아르키메데스는 십진수를 쓰지 않았지만 원주율을 무한히 정확하게 구하는 기법을 개발했다. 그는 지름이 1인 원에서 출발하여 원에 외접하는 가장 작은 정육각형을 그렸다. 그 둘레 길이는 2√3이다. 이번에는 원에 외접하는 가장 작은 정12각형을, 그다음에는 정24각형을 그렸다. 이쯤 되면 변의 길이를 계산하는 일이 고약해진다. 제곱근을 어마어마하게 곱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끈기와 의지를 발휘하면 해낼 수 있다. 아르키데메스는 원에 외접하는 가장 작은 정48각과 정96각형의 둘레를 계산하고 그만두었다. 기진맥진해서exhaustion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원리는 명확했으며(‘실진법exhaustion principle‘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계산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184

극한에 도달하면, 거리의 계산은 무한히 작은 길이들을 무한히 많이 더하는 것과 같다. - P205

확률론은 종종 무작위성의 수학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볼테르는 무작위성을 부정했다.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우연을 이야기하는 것은 원인을 무시하고 결과만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볼테르가 자신의 기이한 복권 당첨을 의미심장하게 암시하려는 문장이 아니었다. 모든 근대 철학자의 확립된 견해였다. 적어도 뉴턴 시기에 이르자 세계관은 확고히 결정론으로 기울었다. 사실 수백 년 전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고 지금은 과학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만 다르다. (지난 100년을 거치며 인과율과 결정론에 대한 견해가 또 다른 변화를 겪었는데, 이번에도 물리학 때문이었다. 무작위성은 양자역학에서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독자 여러분을 저 지뢰밭에는 데리고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 P213

인간은 우연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도록 생겨먹었다. - P214

베르누이 법칙(그는 애정을 담아 ‘황금 정리‘라고 불렀다)은 다음과 같다. "실험을 충분히 자주 반복하면 어떤 사건의 상대빈도는 그 확률과 무작위적으로 작은 차이가 나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그럴 확률이 무작위적으로 크다."
(중략) 그의 법칙은 무슨 뜻일까? 원하는 만큼 여러 번 반복할 수 있는 실험(이를테면 동전 던지기)과 P(A)의 확률로 일어나는 사건 A(이를테면 50퍼센트의 확률로 일어나는 ‘앞면‘ 사건)를 생각해보자. 무작위적 정확도(이를테면 5퍼센트)를 하나 정하고 우리가 바라는 만큼 1에 가까운 확률(이를테면 99퍼센트)을 정하자. 베르누이의 황금 정리에 따르면 실험을 독립적으로 반복하는 횟수 N이 충분히 크면 사건 A의 상대빈도 N(A)/N와 그 확률 P(A)의 차이는 5퍼센트 미만이다. 달리 말하자면 상대빈도가 44퍼센트와 55퍼센트 사이에 있을 확률이 99퍼센트다. 충분히 여러 번 시도하기만 하면 된다.
이 법칙은 여러 번 반복하는 시도에서 사건의 빈도 N(A)/N를 추정하여 그 확률, 말하자면 P(A)를 구할 수 있다는 뜻으로 곧잘 해석된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베르누이의 큰수의 법칙은 A의 확률이 알려져 있을 때 A의 빈도에 관해 말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P224225

모든 보험 상품도 도박이며, 심지어 불공정한 도박이다. 어차피 보험 회사도 살아야 하며, 심지어 떵떵거리고 싶어하니 말이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주택 보험에 가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멍청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작은 확률로 큰 손실을 당하기보다는 큰 확률로(실은 확실히) 작은 손실, 말하자면 보험료를 감당하고 싶어한다. - P230

하나의 원리가 리하르트 폰 미제스를 인도했다. 그것은 우연을 이기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장기적으로 이길 수 있는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은행을 이기는 시스템을 발견했다고 믿은 무수한 도박꾼이 처참하게 실패한 것에서 보듯 이 원리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최대한 경험적인 듯하다. 영구 운동 기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박 시스템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유치한 ‘소원 원리‘가 현실에 무릎 꿇는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는 과학에 유익하다. 영구 운동 기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열역학의 토대다. 도박 시스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확률론의 토대다.
적어도 이것이 리하르트 폰 미제스의 취지였다. - P244245

고려할 만한 기술적 요소(이를테면 어떤 유형의 컴퓨터를 선택할 것인가)들이 있긴 하지만, 악용할 수 없는 연쇄, 규칙 없는 연쇄, 압축 불가능한 연쇄는 사실상 모두 동일하다. 세 가지 접근법은 리하르트 폰 미제스가 자신의 콜렉티프로 얻고자 했던 목표를 달성한다.
무작위성의 이 모든 규정이 활용하는 개념은 무작위성의 정반대, 말하자면 연산 가능성이다. 연산 가능성은 어떤 확률론적 맥락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발전했다.
무작위 연쇄 개념은 연산 가능성 이론뿐 아니라 확률론 개념들도 근거로 삼는다. 이 말은 명백하면서도 실은 얼토당토않은 듯하다. 무작위성이 확률과 잘도 관계가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확률론은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콜모고로프의 측도론 공리에 기초한 확률론이다. 사실 측도론은 확률이 100퍼센트나 0퍼센트인 결과의 집합에 관한 모든 수많은 진술에 필요하다. 이는 역설적 결과다. 리하르트 폰 미제스는 확률론을 무작위 연쇄라는 토대 위에 놓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무작위 연쇄를 이해하는 데 확률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 P250251

이론상 무작위 문자열은 온전한 동전을 여러 번 던지거나 방사성 원자의 붕괴를 관찰하거나 전력망의 변동을 측정하여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물리적 방법으로 무작위성을 생성하려면 대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효율도 낮다. 이런 까닭에 대부분의 난수는 가짜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이런 난수는 유사난수라고 부른다. 유사난수는 알고리즘으로 생성하며, 따라서 무작위성의 의미와 정반대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 P252

지금은 유사난수를 생성하는 방법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술邪術에 가깝다. 유사난수를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기대만큼 무작위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당혹스러운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유사난수를 이용하는 것은 여전히 불법의 냄새를 풍기는 도박이다. 요한 폰 노이만은 이런 농담을 남겼다. "난수를 생성하는 산술적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이 죄인의 처지에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필요가 없다." - P252

(프랭크 플럼프턴) 램지의 어머니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이 오점을 제외하면 램지는 뼛속까지 케임브리지인이었다. 아버지는 수학자로, 모들린대학교 학장이었다. 프랭크는 트리니티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금세 그를 자신의 품 안에 맞아들여 비밀에 싸인 엘리트 토론 모임 사도회에 입회시켰다.
사도회에서는 독일어로 쓰인 얇고 신비스러운 논리학 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어떤 교수는 제목으로 ‘논리·철학 논고‘를 제안했는데, 향후 판매 실적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했다. 이 소책자는 엄청난 부자로 알려진 빈 출신의 전직 사도회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적군의 참호에서 복무하는 동안 썼다.
프랭크 램지는 독일어를 배워가며 소책자를 번역했다. 학부생이던 그는 『논고』의 몇몇 표현이 꽤 불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니더 외스터라이히를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몇 주간 오후마다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갔으며 놀랍게도 둘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유일한 시빗거리는 지크문트 프로이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였다. 프랭크는 프로이트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및 비트겐슈타인과 동급에 놓았다. 루트비히는 자존심이 상했다. - P256

어떤 면에서 믿음은 틀릴 수 없다. 매번 관찰의 결과로 믿음이 갱신되더라도 이는 믿음이 올바르게 교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애초에 틀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 P269

이것이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 이면에 숨은 교훈이다. 개인이 가진 의지와 같은 의미에서의 의지를 집단이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콩도르세 후작으로 돌아간다. 그는 여느 계몽주의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장 자크 루소의 사상에 깊이 감화했다. 루소에 따르면 집단은 일반의지에 인도받아야 한다. 이 일반의지는 고귀한 개념이지만 콩도르세는 꼼꼼히 뜯어보니 일반의지를 명확히 규정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반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경우에 따라 현저히 부재할 수 있다. 이 통찰은 루소의 추종자들에게는 뼈아픈 타격이었다. 프랑스혁명의 광기 어린 시기에 얻은 현실적 교훈이 환멸을 키웠다. 결국 젊은 나폴레옹이 권좌에 오르자 ‘일반의지 volonté generale‘는 ‘장군의 의지volonté du général‘에 밀려났다. - P287

선거는 우세한 의견을 결정하는 측량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앞에서 보았듯 ‘우세한 의견‘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선거는 제의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참여의 제의다. 투표자들은 좋게든 나쁘게든 직접 참여한다. 선거에는 제의적 측면이 있다. 이 성질은 통계에 근거한 여론조사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표본이 (티코크라시tychocracy적으로 설계된 독재자의 경우에서처럼) 작든 크든 상관없다. 심지어 대표성이 가장 큰 여론조사조차도 총선거라는 참여 방식을 대체할 수는 없다. - P289

반박될 만큼 정밀해질 수 있다는 수학의 특징은 결코 사소한 미덕이 아니다. - P301

두 실험에서 대부분의 사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면 당신은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다. 실제로 첫 번째 실험에서 당신은 흰색 공이 나올 가능성이 회색보다 크다고 추측했다. 그러므로 ‘흰색이나 검은색’ 공이 나올 가능성이 ‘회색이나 검은색‘보다 커야 한다. 이 실험은 우리가 확률을 다루는 방식이 기이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대니얼 엘스버그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데,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70년대 초 화제의 펜타곤 문서를 유출한 것이다. 장년층은 이 사건을 여전히 똑똑히 기억하며 젊은 층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를 보고 알게 되었다.
펜타곤 문서는 미 행정부의 치부를 드러냈으며 엘스버그는 내부 고발자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방첩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15년형을 구형받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닉슨의 ‘배관공들‘(문서 유출에 대처하는 업무를 맡아서 붙은 별명)이 엘스버그를 진료한 정신과 의사의 사무실에 침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부의 중대한 부정행위를 이유로 소송이 기각되었다. 훗날 ‘배관공들‘은 다른 시급한 업무를 하달받았는데, 이번에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파견되었다가 또다시 일을 망쳤다. 한편 엘스버그는 MIT 교수가 되었으며 시민으로서의 용기와 학문 연구 양쪽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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