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즈) 파스칼은 수학 신동이었다. 그는 30대 후반에 이렇게 토로했다. "참된 증명이 있다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불확실성을 더욱 키울 뿐이다. 파스칼 말마따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 P310
라 로슈푸코 공작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미덕에서나 악덕에서나 우리를 인도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 덧붙이는데, 강물이 바닷물에 녹아들듯 미덕은 지기이익에 녹아든다. - P313
1950년대 초 존 내시가 랜드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냉전 정치 전략과 핵 억지를 연구하던 몇몇 박사후 연구원이 ‘수감자 딜레마’라는 게임을 생각해냈다. 이 이름이 하도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탓에 오늘날은 과거에 수감자 딜레마 없이 도덕철학을 연구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다. - P328
이기적 참가자는 상대방의 득실에 개의치 않는 사람인데, 둘 다 이기적이면 서로를 모래 늪에 끌고 들어가는 꼴이 된다. - P330331
분노는 요란하며 무언가를 널리 표출한다. 가장 비천한 폭력배조차 다음과 같이 존중을 요구한다.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안 되지. 이건 받아들일 수 없어. - P368
인류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전 세계에서 이른바 소규모 사회(목부, 어부, 유목민, 수렵 채집인 등)가 규칙을 집행할 단순한 제도를 어떻게 자발적으로 만드는지 기록하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 규칙이란 협력하고, 어장을 공정하게 공유하고, 지속 가능한 숲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스트롬은 이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오스트롬의 견해에 따르면 "제도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유인책을 제시하는 수단이다." 유인책은 보상일 때도 있지만 처벌인 경우가 훨씬 많다. 이 의미에서 보자면 사회계약은 철학자들이 퍼뜨린 창조 신화가 아니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자발적으로 소규모로 생겨날 수 있다. - P376
무지의 장막이라는 시적 표현은 존 롤스의 철학을 송두리째 욱여넣은 캡슐이 되었다. 자신의 사상이 이렇게 압축되면 사상가로서 성공하기 힘들다. 쇼펜하우어 하면 우리는 으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떠올린다. 라이프니츠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를 상징하고 다윈은 생존 투쟁을 상징하며 아인슈타인은 만물의 상대성을 상징하고 하이데거는 무화하는 무를 상징한다. 이런 무조건 반사적 연상은 무지를 가리는 간편한 장막 역할을 한다. 하지만 롤스가 말하는 ‘무지의 장막‘은 이런 뜻이 아니다. - P383
다시 말하지만 평판이 관건이다. 이것은 동료 처벌이 있는 상호부조 게임이나 간접적 대갚음과 분명 유사하다. 내가 부당한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제안자를 응징하는 셈이다. 나는 대가를 치르지만 큰 대가는 아니다. 내게 제안된 작은 이 전부다. 거절의 대가는 제안자가 훨씬 크게 치른다. 그뿐 아니라 나는 내가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입증하게 된다. 실은 나 자신에게만 입증했다. 실험자가 설명했듯, 실험 규칙에 따라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잠시당한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한다. - P393
의례적 싸움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슴은 경쟁자를 죽이거나 몰아낼 수 있다. 그러면 더 빨리 번식한다. 하지만 그 사슴의 새끼들은 싸움을 키우는 아비의 성향을 물려받는다. 그들은 무리 안에 퍼져 점점 자주 서로 맞닥뜨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전략은 같은 전략을 상대하기에는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자멸적이기 때문이다. 이 전략의 빈도가 억제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종의 유익은 부수적 보너스이지 의례적 싸움이 퍼지는 이유가 아니다. 영국의 이론생물학자 존 메이너드 스미스는 이런 종류의 논증을 처음으로 동원했으며 진화적 게임이론의 초석을 놓았다. 개체는 전략(이 경우는 확전 성향 x)을 물려받는다. 득실은 번식 성공률 증가로 평가된다. 득실이 크다는 것은 새끼를 많이 낳는다는 뜻이며, 이 새끼들은 부모의 성향을 물려받는다. 그러므로 빈도는 스스로를 조절한다. - P398
진화적 게임이론의 첫 번째 이론적 예측은 중무장한 종에서는 갈등이 쉽사리 확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예측은 기발한 방법으로 확증되었다. 종이 지닌 무기(이빨, 발톱, 뿔)가 치명적일수록 같은 종에게 무기를 쓰지 않으려는 행태가 더 흔히 나타난다. 반면에 무기가 빈약한 종(이를테면 평화의 상징 비둘기)은 상대의 목숨을 빼앗지 못하도록 하는 방지 장치가 전혀 없다. 이것은 단지 정상적 조건에서는 상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약한 비둘기가 달아나면 그만이니 말이다. 비둘기를 새장에 가두면 서로 공격하다 죽이기도 한다. 비둘기는 서로에게 자비를 구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고 늑대는 적응했다. - P399
비트겐슈타인은 다음 문장을 지침으로 삼았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사용이다"( 많은 부류에 대해서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 쓰임을 더 면밀히 들여다보기 위해 "언어를 말하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식의 일부임을 부각시키고자" 언어 게임이라는 방법을 고안했다. 수학철학자로서 그의 임무는 이 게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하는 것이었다. 게임에는 규칙이 있는데, 참가자들이 언제나 규칙을 자각할 필요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규칙들을 끈질기게 하나하나 밝혀내고자 했다. 그는 ‘수학‘이라고 불리는 것 뒤에 매끈한 실체가 숨어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학의 "다채로운 혼합"을 이야기했다. 행성, 전파, 은하, 암흑 물질 등 천문학이 다 루는 다양한 현상은 하늘에 있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수학을 하나의 대상이나 하나의 방법으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수학은 잡동사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본보기를 따라 우리가 민족지학자처럼 수학제도諸島에 있는 미답의 해안에 상륙하여 원주민(수학자)들이 서로 어떻게 소통하는지 관찰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그들이 따르는 삶의 규칙, 즉 (비트겐슈타인이 애용하는 용어를 쓰자면) ‘삶의 형식‘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P414
증명은 정리를 다른 정리로부터 유도하는 행위이며 정의는 다른 정의에 근거한다. 물론 이것은 어느 단계에선가, 즉 공리에서 끝나야 한다. 공리란 개념에 대해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명제다. 오늘날 수학에서 공리는 거의 언제나 집합론의 측면에서 정식화된다. 이 관례에서 보듯 집합론과 수리논리학은 수천 개의 가지를 뻗은 수학이라는 거목의 뿌리다. 두 분야는 일반적 의미에서, 이를테면 튜링의 수업에서 상정한 수학의 기초다. - P427
수학 분야가 수백 개에 이르는데도 그 통일성은 다른 학문의 시샘을 살 만큼 굳건하다. 수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매우 현실적인 예를 들자면) 복소수와 유클리드 기하학의 연관성 같은 뜻밖의 연관성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통설이다. 이러한 만장일치가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인 세계수학자대회는 올림픽 경기처럼 4년마다 열린다. 이에 반해 물리학이나 생물학에는 세계 대회가 없다. 이런 세계 대회에서 벌어지는 수학적 대화를 알아듣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나머지 참석자들은 끈기 있게 자리를 지킨다. 게다가 수학자들 사이의 내부 서열(누가 누구보다 위인지)에는 놀라울 만큼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를테면) 경제학에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 ‘사회학적‘ 의미에서도 수학은 여타 학문보다 더 통일되었다. - P430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수학이 엄청나게 넓은 응용 범위에서 주역을 맡음을 안다. 물론 몇몇 수학자에게는 이 측면이 (노골적으로 불쾌하지는 않을지라도) 부차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는다. 순수한 학문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수론을 연구한 영국의 수학자 G. H. 하디는 『어느 수학자의 변명』에서 모든 응용을 한낱 ‘부수적 피해‘로 치부했다. 다행히도 가능한 모든 응용에서 벗어났고 아마도 언제까지나 그러할 분야들이 있다고 하다는 덧붙인다. 그가 든 사례는 일반상대성이론과 수론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요즘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은 GPS에 쓰이고, 수론은 모든 이메일 플랫폼에서 쓰이니 말이다. 신용카드는 소인수분해를 거쳐 암호화된다. - P432
수학의 효율성에는 기이한 구석이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둘은 아마도 서로 연관되었을 것이다. 하나는 전혀 달라 보이는 이론들 사이에 놀랍고도 때로운 으스스하기까지 한 교차 연결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상의 사용이다. 이 성격은 수학을 혼란과 파멸로 직행시키는 오점으로 종종 간주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추상이야말로 수학이 성공한 비결이다. 추상이란 수백 가지 세부 사항을 지우되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하고 현실을 가능성과, 심지어 불가능성과 비교하는 자세다. 수학자들은 사고실험과 ‘~라면 어떨까‘의 장인이다. - P433
하지만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수학이 일조할 수 있다. 수학은 "부정확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언어이니 말이다. - P434
쿠르트 괴델조차 "플라톤주의적 견해는 수학자들 사이에서 별로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었다. 1940년 저명한 과학사학자 E.T. 벨은 이렇게 썼다. "예언자들에 따르면 수학에서 플라톤주의적 이상을 따르는 최후의 추종자는 2000년엔 공룡처럼 멸종한 신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새천년의 여명에 플라톤주의가 수학자들 사이에서 오히려 다시 득세했음을 안다. 공룡처럼 멸종한다니, 나 원 참! 실제로 오늘날 현업 수학자 대부분이 빅 스리의 동조자가 아니라 정체를 숨긴 플라톤주의자라는 것이 현재의 견해다. ‘저기 바깥에서‘ 한 단계 한 단계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객관적인 수학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다소 무의식적인 느낌이 수학자들을 이끈다. 이 수학자들은 스스로를 탐험가로 여긴다. 군, 다각형, 소수 같은 수학적 대상이 수학자에게 실재인 것은 두꺼비와 악어가 동물학자에게 실재인 것과 마찬가지다. - P440
(그나저나 수학이 이렇게 자립적이라고 해서 수학자들이 철학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많은 수학자는 수학이 발견되는 것인지, 발명되는 것인지를 놓고 몇 시간씩, 대개 늦은 시간까지 토론을 벌인다. 대체로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열정이 사그라들기는 하지만, 그것은 난제의 정답을 찾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체념했기 때문이다.) - P442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고찰하고 연구하면 완전히 이해하고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증명이 있다. 그것이 데카르트적 증명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 단계를 꼼꼼히 전개하고 한 줄 한 줄 기계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증명이 있다. 그것이 라이프니츠적 증명이다." 쾌락을 찾는 사람이라면 데카르트의 편에 서야 한다. 데카르트적 증명은 대체로 번득이는 이해, ‘아하!‘의 경험, 난데없는 깨달음과 관계있다. "이등변 삼각형을 증명한 최초의 사람.—그가 탈레스든 또는 다른 이름을 가졌든—에게 한 줄기 광명이 비쳤다." 이마누엘 칸트의 말이다. 이런 번득이는 이해는 결국에 가서는 섬광으로든 느린 여명으로든 덜 흡족한 다른 통찰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무언가를 간과했거나, 반례가 제기되거나, 증명이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틀렸을 수도 있다. ‘아하!‘에서 ‘아차!‘까지는 잔걸음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이 ‘아차!‘는 증명을 수선하거나 추측을 수정하거나 논박하는 방법들로의 통찰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결국에는 라이프니츠적 증명에서만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때가 되면 재미는 온데간데없다. - P474
하지만 약수의 합의 수열은 뚜렷한 재귀적 법칙을 따르는 반면에 소수의 수열은 (레온하르트) 오일러에 따르면 "질서의 기미를 조금도 나타내지 않는 듯하다. 소수의 수열은 누대에 걸쳐 수학자들의 어떤 시도에도 난공불락이었다. 오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정신이 결코 파고들 수 없는 어떤 신비가 있다고 믿을 이유가 충분하다." 소수는 두서없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 P486
리만 가설은 소수의 분포를 무작위 연쇄와 구별할 수 없음을 매우 분명하고 정확하게 선언한다. 자연수보다 규칙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한 반면 자연수의 구성 요소인 소수의 배열보다 불규칙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 P486
그건 그렇고 우리 고양이 몬티가 집필 시간에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내 요청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음을 꼭 언급해야겠다. 심지어 내 키보드를 고의로 밟고 지나가기까지 한다. 따라서 남은 실수는 모두 몬티 탓이다. - P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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