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내 편지가 왜 내가 해독할 수 없는 형태로 암호화되어 있는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요."
"음, 얕보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요. 대사님의 스테이션에서 대사님은 대단히 교육받은 분이시겠지요. 하지만 시티의 암호화는 대체로 시적 암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비시민이 이걸 배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모름지기 대사의 편지란, 대사가 제국과 제국의 시를 잘 아는 유식한 사람이란 사실을 자랑하기 위해서 암호화되어 있는 거예요. 관례죠. 진짜 암호가 아니라 게임이에요."
"르셀에도 시는 있어요, 알겠지만요."
"알죠." 세 가닥 해초가 아주 동정심 어린 어조로 말하기에 마히트는 그녀를 잡아 흔들고 싶었다. - P5152

"상호간에 이득이 있는 속임수를 통한 문화 교류죠." - P82

마히트는 당황한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굉장히 기쁘다는 게 그리 자랑스럽지 않았다. - P89

세 가닥 해초는 모범적인 안내자였다. 그녀는 마히트의 왼쪽 팔꿈치 근처에 있었는데, 호기심 많은 테익스칼란인이 함부로 야만인 외부자에게 다가와 타이밍 나쁜 질문을 해야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가까우면서, 마히트의 좁은 개인 공간을 지켜 줄 정도로는 거리가 있었다. 그녀는 역사적 관심 지역에서 건축적 특징과 주목점을 가리키고, 참아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을 때면 다음절多音節의 2행 시구를 자동적으로 중얼거렸다. 마히트는 관계된 시가 그렇게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나온다는 점이 부러웠다. - P100

마히트는 테익스칼란어로 ‘폭발‘이라는 단어를 알았다. 군사 시詩의 핵심 단어로 대체로 ‘충격적인‘이나 ‘타오르는 불길‘ 같은 묘사와 함께 쓰였다. 하지만 이제는 고함 소리로부터 추론해서 ‘폭탄‘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짧은 단어였다. 아주 크게 외칠 만했다. ‘도와 달라‘고 외치지 않을 때면 사람들이 그 단어를 외쳤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다. - P104105

"대단하기도 해라. 오전을 그렇게 보내고도 여전히 올바르게 행동하는군요."
마히트는 자신의 인내심이 다 했음을 깨달았다.
"제가 무례하게 구는 게 좋을까요?"
"물론 아니죠. 열아홉 개의 자귀는 디스플레이와 스크롤하던 투명한 창을 조수들에게 맡기고 마히트 쪽으로 다가왔다. "여기로 온 건 아주 잘했어요. 도착한 이래 당신이 한 첫 번째로 똑똑한 행동이었어요." - P124

항복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을까? 최소한 깨끗한 포로가 되어야겠다고 마히트는 생각했다 - P125

만약 농담이라면, 그 유머는 너무 날카롭게 찔러 왔다. 그런 농담은 사람이 고통을 알아채기도 전에 피부를 벗겨 버릴 수도 있다. - P133

차를 놓고 나눈 대화 이후로 마히트는 빈정거리는 말을 그다지 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열아홉 개의 자귀의 핵심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빈정거림을 주고받고 싶게 하는 화려한 언변의 정치인인 동시에 대화를 속속들이 헤집고 이해받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울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 - P147

마히트는 받은 인포피시 스틱에 편지들을 저장하고, 스틱을 열면 메시지가 제대로 나오는지 하나씩 확인한 다음에 뜨거운 왁스로 봉했다. 사무실 문 옆의 작은 테이블에 있는 실링 키트에서 나온 왁스는 소형 에탄올 라이터로 녹여야 했다. 마히트는 왁스를 붓다가 엄지손가락을 뎄다. 빛으로 만들고 시로 암호화하여 만든 메시지를,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물리적 물체로 전하다니 완벽하게 제국스러웠다.
그야말로 자원의 낭비다. 시간과 에너지와 재료의 낭비.
이런 게 즐겁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 P154

메시지를 보낼 때의 문제는 사람들이 거기에 대답을 한다는 거고, 그 말은 그 답으로 메시지를 더 작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 P156

두 번째 인포피시 스틱은 어떤 면에서도 익명이 아니었다. 내부의 전자장치만 빼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그것은 짙은 초록색 왁스로 봉하고 그 위에 태양바퀴의 하얀색 상형문자가 찍혀 있었다. 과학부다. 스틱을 열자 우아하고 거들먹거리는 조그만 글자가 떠올랐다. 열 개의 진주는 마히트의 대사직 임명을 축하하고, 이스칸드르의 불운한 죽음에 정형화된 유감의 말을 보냈다. 하도 정형화되어서 즉시 그가 어느 실용 수사학 책에서 유감의 말을 복사했다는 걸 알아챘을 정도다. 어쩌면 마히트가 작법을 배웠던 바로 그 책일지도 모른다. 암시적 글을 쓰려고도 하지 않은 노력 부족에 굉장히 테익스칼란인 같은 모욕감을 잠깐 느꼈지만, 곧 테익스칼란 시민의 교육을 흉내 내려고 애썼으나 어색하고 한심한 모방밖에 못 하는 멍청한 야만인 노릇을 성공적으로 잘했다는 굉장히 개인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 P158159

거울이 돼. 스스로에게 다시 말했다. 칼을 만날 때는 거울이 되는 거야, 돌을 만날 때는 거울이 되는 거야. 가능한 한 테익스칼란인이 되고, 가능한 한 르셀인이 되고, 또…… 아, 제기랄, 숨 쉬어, 그것도 해야 돼. - P163

"여기 사나요, 둘 다?"
"최근에는 그래요. 각하께서 우리에게 참 잘해 주세요."
"그분이 그러지 않으시는 건 상상도 할 수가 없군요." 그건 심지어 사실이었다. "당신은 그분의 사람이죠?"
"아주 오랫동안요. 맵을 갖기 한참도 더 전부터."
마히트는 다섯 개의 마노에게 여러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하나하나가 그 전 것보다 더 사생활 침해적인 질문이었다. 그분을 위해서 뭘 하죠?가 첫 번째 질문이고, 그다음으로는 어떻게 그분의 사람이 됐죠? 그리고 아마도, 그분은 당신이 아이를 낳는 것을 원했나요? 하지만 실제로 물은 건 이거였다.
"뭐가 달라졌나요? 당신이 이사 오기 전에, 최근에요."
우주선 전망창 위로 반反햇빛 코팅제가 내려오는 것처럼, 다섯 개의 마노의 얼굴에서 솔직한 표정이 일부 닫혀 버렸다. - P167

"아뇨. 나에게 황제 폐하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게 아니라면요. 어제 저녁 내내 뉴스피드를 봤는데, 시티 바깥에서 온 사람은 모를 이 지역의 정치적 정서에 대충 익숙할 거란 전제로 이야기하더군요. 테익스칼란인이 아닌 사람이 그런 걸 모르는 건 말할 필요도 없겠죠."
"제가 아는 것 중 뭘 알고 싶으시죠? 저는 심지어 귀족도 아니에요, 대사님."
다섯 개의 마노는 아들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라면 특유의 말하는 방식이 있었다. 자신을 아주 냉정하게 낮추기 때문에 유머 감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귀족은 아니지만 에주아주아카트의 하인, 황실에서는 급이 낮다고 해도 이건 훨씬 더 중요한 자리였다. - P168169

이상적인 때와 이상적인 장소에서 계승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요. 역사는 자극적인 변수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각하."
열아홉 개의 자귀는 마히트가 흡족한 대답을 한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황제에게 자신의 몸에서 나왔거나 자신의 유전자에 의한 자식이 있고, 그 자식이 연령으로도 정신적인 면에서도 성숙하면 황제가 공동 황제로 주위시켜요. 그리고 나이 든 황제가 승하하면 별들이 알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새로운 황제가 이미 있는 거죠. 피로 만들어지고 햇빛으로 칭송을 받는 존재가."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죠?"
마히트가 냉정하게 물었다.
"충성스러운 병사 10만 명의 지지를 받는 어느 군 사령관이 우주의 좋은 기운이 자신을 황제로 지목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적게 일어나죠. 대사, 역사는 자극적이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답니다."
그리고 얼마나 자주 황제가 자신의 후임으로 세 명의 통치위원회를 지명할까? 아마도 그리 자주는 아니겠지. 마히트는 생각했다. 뭔가가 잘못되었을 경우에만 그럴 거야. 적절한 후계자가 없을 때. 완벽하지는 않을 때. 설령 서른 송이 미나리아재비와 여덟 개의 고리가 90퍼센트 클론의 섭정 역할을 할 예정이라고 해도, 그건 길고 다툼이 잦은 섭정시대겠지. - P172173

두 번째 낭송은 각 행의 첫 글자들을 따면 시인이 잃어버린 가상의 연인의 이름이 되고, 그가 자신을 희생해 진공으로 뚫린 구멍에서 동료 선원들을 구하려 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는 아크로스틱(acronic, 각 행에서 처음이나 중간, 끝의 말을 서로 이으면 어구나 문장이 되는 시의 형태)이었다. 그것을 듣다가 마히트는 자신이 테익스칼란 궁중에서 테익스칼란 시 대회를 들으며, 손에 알코올 음료를 들고 재치 있는 테익스칼란인 친구와 함께 서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열다섯 살 때 원했던 모든 것이었다. 바로 여기가.
그 사실에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대신에 불쑥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단절. 비인격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 P214

골라에트의 손이 마히트의 팔로 돌아왔고, 마히트는 상대방에게 혐오감 섞인 동정심을 희미하게 느꼈다. 이 여자는 정부에 의해 여기에 파견되었고, 그 정부는 새로 테익스칼란의 보호국이 되었고, 여자는 혼자였다.(마히트가 혼자인 것처럼. 하지만 마히트는 원래 혼자일 예정이 아니었다.) 테익스칼란에서 혼자 있는 건 깨끗한 공기 속에서 질식하는 것과 비슷했다. - P226

"휘차후이틀림."
"그게 이 새들의 이름인가요?"
"여기 있는 것들은 그렇게 불리지. 원래 있던 저 밖에서는 다른 이름이야. 하지만 이것들은 황궁의 벌새야. 르셀에는 새가 없다지."
"네: 마히트가 천천히 말했다. 이 아이는 이스칸드르와 아는 사이였다. 그리고 이스칸드르는 아이의 머리에 르셀 스테이션이 어떤 곳인지 일종의 환영을 불어넣어 놓았다. "없어요. 저희는 동물들이 별로 없지요."
"그런 장소를 한번 보고 싶네."
마히트는 중대한 정보의 조각을 놓치고 있었다.(그녀는 혼자 비공식적으로 이 아이를 만날 일은 원래 없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실 수 있지요. 전하는 젊고 권력 있는 분이십니다. 나이가 차셨을 때에도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르셀 스테이션은 전하를 맞이하는 영예를 기꺼이 누릴 것입니다."
여덟 가지 해독제가 웃었을 때, 그것은 열 살 소년의 웃음이 아니었다. 약간 특이하고, 씁쓸하고, 영리한 웃음소리였고 마히트는…… 정확히 뭐라 특정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 들었다. 모성 본능의 흔적. 이 새들을 알고, 친구나 경호원도 없이 황궁에 홀로 남겨 둔 이 아이를 껴안고 싶었다.(어딘가에 분명히 경호원이 있을 것이다. 혹은 시티 그 자체가, 완벽한 알고리즘이 그들 둘을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 - P232

서른 송이 미나리아재비는 위험했다. 자존심 강하고, 영리하고, 남을 조종했다. 마히트는 왜 이 남자가 에주아주아카트가 되고 그다음에 황위의 공동 후계자가 되었는지 그의 활동을 직접 보면 이해하게 될 거라던 다섯 개의 마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는 홀로그래프처럼 유연하고, 빛처럼 굴절되고, 각기 다른 접근법에서 각기 다른 말을 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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