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우리는 이유의 신뢰성이 늘 화자와 청중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짚어 볼 것이다. 이유를 제시하는 일은 언제나 관계 자체에 관해 무언가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 P3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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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 몸속에서는 끊임없이 산소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폐에서 98% 정도의 산소 포화도로 시작된 혈액은 몸을 돌며 산소를 전달하고, 최종적으로 75% 정도의 포화도로 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약 25%의 산소만이 사용되는데, 이는 우리 몸이 위급 상황에 대비해 여유분을 남겨두는 생리적 안전장치와 같다. - P282

많은 사람들이 산소 포화도가 80%대로 떨어져도 숨이 가쁘다거나 위급한 느낌을 받지 못한다. 이런 현상을 ‘조용한 저산소증Silent Hypoxemia’이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이전 코로나19 환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의료진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환자들은 겉보기에 편안해 보였지만, 그들의 산소 포화도는 위험 수준까지 떨어져 있었다. 당시 다른 말로 ‘행복한 저산소증Happy Hypoxia’이라고도 불렀다. 사람들이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산소 포화도에도 불구하고 호흡 곤란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이다. 이는 자동차의 연료 게이지가 고장났는데 운전자가 모르고 그냥 운전하는 것과 같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인체는 산소 부족보다 이산화탄소 축적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숨이 가쁘다고 느끼는 것은 주로 혈액 내 이산화탄소 수준이 올라갔을 때다. 일부 질환에서는 산소는 감소하지만 이산화탄소는 정상적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환자는 호흡 곤란을 느끼지 못한다. - P283

병원에서 환자의 산소 포화도가 일정 수준(보통 90%) 아래로 떨어지면, 의료진은 마약성 진통제 투여를 즉시 중단한다. 의사의 지시가 아닌 표준 프로토콜이다. 진통제를 계속 투여하면 호흡 억제가 더욱 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단하면 회복될까? 대부분의 마약성 진통제는 체내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사된다. 투여를 중단하면 몸은 점차 약물의 영향에서 벗어나 호흡 기능을 회복할 기회를 갖는다. 그러나 이는 환자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 갑자기 진통제가 중단되면 통증이 다시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환자들이 진통제 중단에 불만을 표하는 이유다. 하지만 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필요한 안전 조치다. 현대 의학에서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다중 모드 진통multimodal analgesia이라는 접근법을 사용한다. 다양한 종류의 진통제를 병용하여 마약성 진통제의 용량을 줄이면서도 적절한 통증 완화를 제공하는 방법이다. - P284285

펄스 옥시미터Pulse Oximeter는 단순한 의료기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주는 창이며,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과정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다. 이 작은 장치는 물리학, 생물학, 의학, 그리고 공학의 경이로운 융합을 보여준다. 빛이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 혈액의 생화학에 대한 지식, 그리고 신호 처리 기술의 발전이 어우러져 탄생한 결과물이다. 무엇보다 펄스 옥시미터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리 몸의 상태는 항상 우리의 주관적 느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괜찮다고 느낄 때도 몸은 조용히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호를 읽을 줄 아는 것이 현대 의학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 P286

수술 후 환자들이 인스파이로메타inspirometer를 사용하는 이유는 깊은 호흡을 통해 폐의 모든 부분, 특히 하부 폐염을 팽창시켜 허탈된 폐포를 열어주고 심호흡 훈련을 통해 정상적인 호흡 패턴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수술 후 통증 때문에 환자들은 깊은 호흡을 꺼리게 된다. 복부 수술 환자의 경우, 횡경막의 움직임이 복부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얕은 호흡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함정이다. 통증을 피하기 위한 얕은 호흡이 폐 허탈을 악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산소 포화도를 더욱 떨어뜨리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 P293

환자들은 종종 자신이 정규분포의 양 끝, 즉 평균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경우‘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통계는 냉정하다. 인스파이로메타를 열심히 사용하지 않은 채, 산소 포화도 감소를 경험하지 않을 확률은 매우 낮다. 정규분포의 꼬리 부분에 위치하기를 바라는 것은 단순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벗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는 보아뱀의 머리와 꼬리에 해당하는 운이 좋은 환자일지 모른다는 근거없는 우연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사실 모호한 통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부질없다. 회복을 위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살펴보는 게 더 유익하다. - P293

장은 길이가 긴 소장과 상대적으로 짧은 길이의 대장이 있는데, 음식물의 소화 속도는 소장이 훨씬 빠르다. 대장은 상대적으로 음식물이 오래 머물고 대장에 여러 미생물이 살게 된다. 유해균과 유익균이 동시에 공존하는 전쟁터로 염증도 잘 생긴다. 여러 이유로 유전적 변이도 잘 발생한다. 소장암은 흔치 않지만 대장암이 흔한 이유다. 대장 세포는 대략 4~5일마다 교체된다. 그렇다고 모든 세포가 새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 P298

암은 자연의 섭리이나 인류에게는 여전히 비극이다. 항암제 개발 분야에 헌신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자연의 법칙을 잘 알고 있음에도 가족처럼 가까운 이들의 상실이라는 개인적 동기가 연구와 암 치료 혁신에 깊은 영향과 동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CAR-T세포 치료는 기존 치료법으로 효과를 보지 못했던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공하며, 혈액암 뿐만 아니라 고형암 및 기타 질환으로 적용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 P332

1994년 폴리 마츠링거Polly Matzinger는 이러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그녀의 ‘위험 모델Danger Model‘은 면역계가 단순히 ‘낯섦‘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손상이나 스트레스로 인해 방출되는 ‘위험 신호‘에 반응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국경 수비대가 여권을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소방관이 화재에 출동하는 것에 가깝다는 비유였다. 마츠링거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반려견 스키Ski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키는 우리집에 들어오는 수많은 낯선 사람들—비자기—을 태연히 무시했지만, 친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기 시작했을 때—위험 신호—는 즉시 경계 태세를 갖췄다." 이는 면역계가 ‘외국인‘을 무조건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혼란’에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절한 비유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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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 Mr. 버돗은 미국 대공황기 시절, 캔턴의 지역 신문인 〈캔턴 리파저토리〉에 작은 광고를 낸다. 그는 이 광고를 통해 어려움을 겪는 75가구에게 10달러씩을 주겠노라 제안한다. 이 익명의 기부자는 처음에는 10달러씩 줄 계획이었으나, 너무나 많은 안타까운 사연을 외면할 수가 없어 수혜자를 두 배로 늘리고 각 가구당 5달러씩을 보냈다.
1933년 미국의 대공황기에 5달러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따지면 100달러 정도가 되는 돈이었다. 당시에는 빵 한 덩이가 7센트, 달걀 12개가 29센트였다. 버돗이 보내 준 5달러로 어떤 집은 석탄을 사서 집을 훈훈하게 데웠고, 아들의 소아마비나 딸의 황달, 늙은 아버지의 결핵을 치료해 주는 의사에게 밀린 진료비를 지불하는 가정도 있었다 - P56

버돗에게 편지를 보낸 이들 중에는 샘 스톤이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도 샘 스톤을 알았다. 샘은 거리에서 그들을 지나쳤고, 그들과 같은 식당과 상점에 드나들었으며 자식들을 같은 학교에 보냈다. 샘 스톤은 자기 옷 가게에서 그들의 소매 길이를 재고, 바짓단을 줄이고, 어깨를 고쳐 주고, 작업복을 팔았다. 따라서 그 일을 실행하는 것은 샘이 익명이어야만 가능했다.
이웃들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었기에 자신들의 처지에도 민감했다. 그러니 얼굴을 알고 다시 만나야 할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편지를 쓰는 일이 마음 편할 리 없었다. 그들이 버돗에게 쓴 편지는 단순한 구제 신청이 아닌 슬프고 힘든 현실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였다. - P31

외할아버지는 마술사이기도 했다. 25센트짜리 동전을 내 귀 뒤나 배꼽에서 꺼내기도 하고 손짓 한 번으로 사라지게도 했다. 그는 사람들은 늘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가 항상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그래야만 타인의 관심을 조종할 수 있고 그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33

외할아버지는 종종 그의 낙천성과 과거를 놓아 버리려는 각오가 담긴 금언과 경구를 인용하곤 했다. 1959년 외할머니가 병들자 그는 아내에게 이런 글을 써 주었다.
"아침마다 영혼이 새로 태어나므로 나는 매일 밤 오늘의 기록을 묻는다. 오늘이나 어제의 실망이 내일의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는다." - P34

높은 지위를 누리다 빈털터리로 전락한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런 처지를 견디지 못했다. 그것은 재산을 불시에 잃어서도, 일하고 희생한 세월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려서도 아니었다. 대공황과 어쩌지 못할 상황으로 인해 곤두박질친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실패에 따르는 굴욕감이 모든 것을 악화시켰다. - P74

미국에 온 지 20여 년 후인 1920년, 쉰여덟 살인 아버지 제이콥과 아들들인 데이비드, 이사도레, 모세스는 여전히 같은 집에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핀켈스타인‘ 으로 불리며 담배를 말았다.
샘이 새 직장, 새 이름, 오하이오 주 캔턴에서의 새 삶을 약속하며 스스로를 구제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평생 그곳에서 살았을 것이다. 캔턴은 다양한 이민자들과 뜻 있는 자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힘겨운 중서부 철강 도시 피츠버그의 축소판이었다. - P109

토요일이면(유대인의 안식일로 1주일의 7일째 되는 날) 거시는 딸을 데리고 피츠버그에 막 도착한 유대 이민자들의 집에 갔다. 셜리는 (어머니 거시에게 그러했듯) 그들에게도 글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종종 음식으로 보답했지만, 셜리는 배가 고파도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도록 미리 교육을 받았다. 셜리가 그걸 잊으면 엄마가 꼬집어서 알려 주곤 했다. 셜리는 잔돈조차 예의 바르게 거절할 줄 알았다.
그것이 으스대는 어머니가 미국인인 딸을 자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히브리어로 ‘계율‘을 뜻하는 ‘미츠바‘일 뿐 아니라 친절을 베푸는 행위를 뜻하기도 했다. - P110

자존심을 접고 가족복지부에 구제를 신청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수치스러운 상황들이 모든 것을 악화시켰다. 가족복지부는 자금이 워낙 부족해서 지원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데도 구제금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적합한 지원자를 골라내기 위해 심사 과정이 점점 길어지고 훨씬 더 꼬치꼬치 캐묻게 되었다. 사정이 악화되어 간절한 이들에게 서커스라도 하듯 더 많은 후프를 통과하라고 요구했고, 그럴수록 그들의 자존감은 줄어들었다
그 과정의 의도는 사람들을 겁주어 구제금 신청자를 줄이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가족복지부는 인원 초과된 구명보트처럼 이미 침몰하고 있었다. 그 무렵 가족복지부는 악명이 높았고, 지원자를 선별하는 과정이 너무 무례해서 그런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는 이도 많았다. 일부 관료들은 큰 원한을 샀다. 그들은 오만하고, 누가 먹고 누가 굶을지에 대한 결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것 같았다. - P118

(전략)
저는 구호품을 받거나 누구에게 불평해 본 적이 없습니다만, 선생님의 제안을 읽은 후 그저 처지를 말씀드리는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선생님이 주려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대단히 감사할 것이며 아들들과 저를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을 사는 데 쓰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신의 축복이 임하시길 바라며, 복된 크리스마스와 번성하는 새해를 맞이하세요.

레이철 드호프 드림. - P126

(전략)
저는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 않을 테니, 제가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면 다른 사람에게 주세요.

에디스 손더스 올림. - P134

1914년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샘 스톤은 위스콘신 주의 커노샤에 살며 블록 브러더스 백화점에서 판매 사원으로 일했다. 백화점 주인인 블록 형제가 유대인 이민자들이었다. 2년 후 그는 같은 도시의 ‘S&J 고틀리브 포목상 이라는 곳에서 일했다.
그 시절의 문서는 단 한 가지가 남아 있다. 구두 상점의 편지지에 샘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출신의 시인 에드먼드 밴스 쿡의 시를 옮겨 적었다. 제목은 ‘당신은 어떻게 죽었습니까?’이다. 첫 연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앞을 막아서는 고난을
단호하고 즐거운 심정으로 공략했는가?
아니면 두려움과 공포를 안고
환한 낮으로부터 얼굴을 숨겼나?
아, 고난은 1톤 혹은 고난은 1온스,
혹은 고난은 당신이 만드는 그대로이니.
중요한 것은 그대가 상처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고난을 어떻게 감수했는가가 중요할 뿐. - P138

샘의 인생에 있는 많은 모순 중에는 과거를 감추려는 의지가 강했으면서도 언제나 과거를 안고 살았다는 것도 있다. 그는 지속적으로 과거를 지혜의 창고로 이용하면서, 초라한 시작과 힘든 인생 고비, 교육 부족에 대해 항변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새로 만들었을지 모르지만(이름, 원래 국적. 생일을 바꾸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 P140

본래 모습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샘 스톤의 유일한 모순이었다. - P141

샘 스톤은 형제들과의 골 깊은 갈등을 헤치고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하지만 전혀 상처받지 않은 게 아니었다. 돈에 대한 태도, 어린 시절과 출생지를 지우려는 결심, 반유대주의와 나치에 대한 과민 반응은 초년에 입은 상처의 흔적들이었다. 또 오늘까지 내가 모르는 상처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랑을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과 연민이나 유머 감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런 장점들을 보존하기 위해 그는 자신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미국 태생이라는 주장만이 아니었다. ‘B. 버돗‘은 그가 타인들에게 준 선물이었지만 자신에게 준 선물이기도 했다. 그것을 통해 두 번째 기회를 얻고,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을 국가와 아버지라는 두 독재자 휘하에서 보냈다. 어릴 때와 사춘기에는 끔찍한 결핍과 불의에 휩싸여 무기력했다. 마침내 남을 도울 위치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삶에서 큰 변화를 의미했다. 그가 갈구한 것은 바깥의 인정이 아니라, 그런 베품이 주는 내적인 확인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선언이었다. 또 다른 세상에 살지만 많은 것을 공유한 이들의 가치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다. - P146147

피츠버그의 〈유대인의 기준〉에 실린 그의 부고 기사에 유자녀들의 이름이 실렸다. 아들들의 이름은 ‘새뮤얼 J., 맥스, 데이비드, 알 핀켈스타인‘ 이었다. 모두 오하이오 주 캔턴에 거주했다. 그리고 형제가 한 사람 있다고 나와 있다. 부고 기사이기는 하지만 ‘핀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다시 쓴 것은 고인에게 한 마지막 인사요. 양보였을 것이다.
그즈음 네 아들 모두 ‘스톤‘이라는 성을 쓴 지 이미 오래였다. 아들들은 원래 성에 담긴 부담을 멸시했지만, 아버지 제이콥은 가짜 성을 쓰는 것을 욕했다. 샘은 마지막 반항으로 아버지의 사망 신고서에 ‘핀켈스타인’이 아닌 ‘샘J. 스톤‘으로 서명했다. - P151152

샘 스톤과 민나 아돌프의 결합은 샘이 모든 기대를 초월해서 일어섰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또 그가 재산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얻기 어려운 ‘계급‘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 시절 캔턴에서는 샘과 민나처럼 큰 사회적 격차를 뛰어넘는 만남이 드물었다. 계층 간에 선이 명확했고 대부분 그 선을 지켰다. 캔턴에서는 재산보다는 문화나 매너, 가정 교육 같은 무형의 자산으로 사람을 구분했다.
샘과 민나의 교육 배경과 나이 차이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딸이 더 세련된 배우자를 얻기를 소망했던 민나의 부모는 몹시 실망했고, 벼락부자를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상류층에서는 비난을 했다. 하지만 이런 난관은 서로를 더욱 끌리게 만들었다. 또 샘은 부족한 세련미를 매력으로 채웠다. - P159

(조지프, 매티 리처즈 부부가 이룬) 가족은 엄격한 생활을 했지만 금요일 밤에는 아이들이 동네 친구들과 만화를 볼 수 있었다. 케네스는 사냥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탄알을 아껴야 했고 오발하면 아버지에게 총을 1주일간 몰수당했다. 조지프는 "난 그보다는 더 잘 가르쳤다"고 말하곤 했다. 과연 그랬다. 케네스는 나중에 특수 부대의 저격수로 명사수가 되었다. - P166167

75년이 흐른 후까지도 혈연, 사랑, 고난으로 연결된 브라이엄과 번브라이어 집안의 후손들에게 대공황은 멀리 있지도, 추상적인 일도 아니다. 모드의 손자인 예순여덟 살의 토머스 번브라이어는 집안에 내려오는 대공황기의 교훈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는 할머니가 고무줄을 버리지 않고 문 손잡이에 걸어 모은 일이며 할아버지가 나뭇조각을 버리기 전에 나사못을 빼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 역시 대공황의 유산이다. - P177

그(존 기시너)는 또 평화로운 사람이었다. 1930년대를 거치며 그는 지붕 사업을 잘하려 애썼지만,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다른 기회가 생겼다. 듀퐁 사에서 군수품 공장을 짓는 일에 참여하라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기시너는 군수 산업에 기여한다는 게 불편해서 사양했다. 대신 그는 아들 칼과 함께 고향인 테네시 주의 대규모 건설 현장으로 갔다.
(중략) 전쟁이 끝난 후에야 기시너는 자신이 일하던 시설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원자 폭탄에 쓰이는 농축 우라늄을 제조하는 곳이었고, 그 폭탄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군수 산업을 꺼리던 그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 P182183

‘충분함‘은 대공황기의 대표적인 표현이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의 척도였다. 그것은 소비가 아닌 보존에 대한 말이었다. ‘충분함‘은 전 가족이 모일 수 있는 말이고, 신뢰의 몸짓이었다. 또 반항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것은 축복을 크게 헤아리고, 영혼을 굳건하게 하고, 절망이 틈타지 않게 하는 말이었다. - P217218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샘의 18번 건배사를 떠올렸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매지 않았고, 술을 마시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가정부와 키스한 일도 없었습니다.
또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보험금은 지급이 거절되었습니다.
보험사 측은 그는 산 적이 없기에 죽지도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이 샘의 건배사를 수십 번 들었고, 그때마다 가장으로서의 눈빛을 보았다. 우리 손자들에게 그 건배사는 환영사요. 훈계할 수 있는 가장의 권한이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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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호텔을 나섰을 때 밖에는 비가 약하게 흩뿌리고 있었는데 이런 비는 10월의 도쿄에서 간간이 만나는 비다. - P9

멀찌감치서 봤음에도 어쩐지 몸을 가누는 자세나 걸음걸이만으로 얼굴이 확실히 분간되기도 전에 엄마임을 알아차렸다. 가까이에서 보고는 여전히 고심해 옷을 차려입는 걸 알 수 있었다. 갈색 셔츠와 진주 단추, 맞춤 바지, 자잘한 옥 장신구들. 늘 그랬다. 비싸지는 않아도 재단과 맵시와 질감의 세세한 조합을 생각해 선별한 옷을 입었다. 이삼십여 년 전 영화에 나오는 잘 차려입은 여성처럼 예스럽고도 우아해 보였다. - P10

여행 시기는 엄마도 나도 늘 선호해온 계절인 가을로 잡았다. 정원과 공원도 그때 가장 아름다울 터였다. 계절 끝자락, 대부분의 것들이 사라진 때. 여전히 태풍철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기상예보에서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고, 우리가 도착한 뒤로 비가 꾸준히 내리고 있었다. - P12

가끔은 잠시 멈추고 그간 일어난 일을 생각해도 좋은 것 같다고, 어쩌면 슬픔을 생각하는 게 정작 행복을 느끼는 길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 P24

수로의 가파른 벽에 난 식물이 아래로 줄기와 잎을 드리우고, 수면엔 물 위의 세계가 찰랑거리며 조심스러운 인상으로 번져 있었다. 거리를 따라 난 식당과 카페마다 낮고 어둑한 불빛만 각등처럼 밝히고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 있는데도 작은 마을에 온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내가 일본에서 특히 좋아하는 경험 중 하나로, 세상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이 또한 상투와 진실의 중간쯤 있었다. 아름답다고 내가 말하자 엄마는 웃음을 지었지만 동의하는 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 P2425

결국 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딸이 며칠이고 같은 옷을 입게 두고, 필요할 때 아랫단을 꿰매 달아주고, 저녁때 따뜻한 음식을 해 먹이고, 부족한 이해심으로 딸을 바라보고, 온갖 불충분한 방법으로 위로해주는 것뿐이라고 했다. - P33

나는 딱히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어쩐지 이제 와 그 안에 깃든 정겹고 공교한, 한 편의 시와 같은 가능성을 느끼고 있었다. - P35

그리고 아직 기운이 남았다면 같이 가봤으면 하는 미술관이 또 있다고, 한참은 아니고 몇 정거장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사실 이 미술관은 그보다 멀었다. 엄마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 말라고, 오늘은 충분히 봤으니 이만 호텔에 돌아가 쉬자고 하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제안을 돌이키는 대신 공기 중에 떠 있게 둔 채로 살갑고도 단호한 압박을 가했다. 잠시 후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그릇을 정리했다. - P42

그 강의에도 나는 늘 해왔던 대로 대처했다. 희곡 작품을 모두 찾아 읽었고 이어 그 작품을 다룬 책을 줄줄이 찾아 읽었으며 그 책에 대한 다른 책까지 찾아 전부 섭렵했다. 영화를 찾아보고 예술가와 감독과 시인에 대해 읽었다. 그럴 때마다 빛의 속도로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평생 한 차원에서 살아왔는데 그 차원의 직물 자체가 문득 부욱 찢어지며 전혀 다르고 전혀 별개인 우주가 드러난 것만 같았다. 텍스트 하나를 끝낼 때마다 이제 됐다. 끝에 다다랐다 싶었지만 그다음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어 어느새 내 사고의 원단이 터지고 사방으로 공기가 불어닥치고 모든 감각이 압도되는 가운데 막대하고 낯선 공간으로 또다시 낙하하는 경험을 반복하고 있었다. 앎이란 정말 영약이고 또 중독성 강한 약물이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기어이 손에 닿지 않는 것이 있었다. - P4748

하루는 지난 주말에 자기 아버지 집이 태풍의 여파로 물에 잠겼다고 공언했다. 모든 걸 잃었다고 했다. 어떻게든 구할 게 있나 싶어 함께 책과 가보, 사진 앨범 같은 걸 찾아 물을 가르며 잔해를 살폈다고 했다. 아버지와 아버지 반려자를 난민을 맞아들이듯 집에 들였고 친구들에게서 옷가지와 침구를 얻었다고 했다. 강사의 얼굴에 상실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설움이기도 할 자신의 설움을 숨기려 들지 않았고 나로서는 이 점이, 그러니까 어떻게든 그런 감정을 감추려 들거나 우리 가족이라면 부끄럽게 여겼을 소동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원통함과 슬픔으로 오롯이 누리는 것이, 갓 잡은 큰 짐승의 가죽처럼 몸에 두른 그 태도가 몹시 놀라웠다. - P49

나는 강사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과제 글을 쓸 때는 점수를 잘 받겠다는 생각에서 나아가 강사를 염두에 두며 어느 때보다 깊이와 다층적인 음영을 더하려 노력했다. 그런 한편 이런 성실함이 과한 건 아닐지, 좋은 인상을 남기는 대신 되레 이렇게 애쓰는 나를 강사가 싫어하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도 돼, 열심히 애쓰는 동시에 겉으로는 내게 제법 어울리는 외관임을 그사이 알아챈 차분하고 절제된 모습을 유지했다. - P4950

우리는 춤추듯이 대화를 나눴고, 의식이 혼미해질 때까지 춤을 췄다. 모든 게 더없이 아름답다고 저녁 내내 생각했고 어쩌면 입 밖에도 냈는지 모르겠다. 이런 세계가 존재하고, 내가 어쩌다 거기 발 들이게 되었다는 게 통 믿기지 않았던 것 같다. - P52

현관에 가방을 내려놓 고 방방을 오가며 구경했다. 대낮에 보고야 집 천장이 얼마나 높은지, 한쪽 창을 통해 빛발이 쏟아져 들어와 벽을 치는 모습이 현대 미술관의 덩그렇게 비워 둔 벽감과 얼마나 닮았는지 알 수 있었다. - P5455

과학 실험 방법을 상세히 정리한 매뉴얼을 따르듯 요리책에 적힌 조리법을 조심히 따라가며 매일 저녁 새로운 요리에 도전했고, 손에 쥔 묵직한 팬과 젓개의 무게와, 물이 끓으면 수증기를 어찌나 말끔히 흡입하는지 마법이 따로 없다 싶고 워낙 조용해 전원을 안 켰나 착각하게 만드는 배기팬에 쾌감을 느꼈다. - P56

그곳에서의 생활은 넉넉하고 포근했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집이 점차 편해졌다. 마지막날 밤에는 커다란 욕조 가득 살을 델 정도로 뜨거운 물을 채우고 호박색 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개가 욕실 바닥에 누워 쉴 동안 욕조에 몸을 담갔고, 물이 식으면 발로 온수 꼭지를 틀어 수온이 오를 때까지 물을 보충했다. 이렇게 두 시간 가까이 반복하며 수위가 욕조 가장자리까지 차올라 물이 넘쳐흐를 지경이 되어서야 마지못해 마개를 당기고 욕조에서 나왔다. - P5859

강사 집에서 내가 실험 삼아 해본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매일 저녁 와인 한 잔을 곁들여 퇴폐적이다 싶을 고독 속에 앉아 그날의 일과를 되새겼던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어쩐지 내 인생을 안에서 밖으로가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 P60

엄마는 늘 젊어 보였는데, 그 앳됨이 내가 품은 엄마의 상과 밀접히 연관돼 있음을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행 중간중간에 엄마의 옆모습을, 피곤해하거나 쉬고 있는 옆얼굴을 바라보며 이제 엄마도 할머니임을 깨달을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다시 이 사실을 잊었고, 어린 시절 내내 지녔고 이상하게도 고정되어 있는 엄마의 상과 동일한 모습밖에 보지 못하다가 며칠 뒤 다시 그 상이 깨지는 경험을 되풀이했다. - P9495

시중보다 격식에 방점이 찍힌 방식으로 손님 앞에 놓인 그릇과 접시 외 식기를 거둘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뒤치다꺼리하는 것에 다름 아닌 업무 특유의 극심한 고통이 누그러졌다. - P102

삶에 있어 최선은 욕망받는 것이라고, 내가 욕망하지 않더라도, 나를 욕망하는 사람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나만은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게 최선이라는 가르침을 어떤 경로로든 받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내가 어디서 배웠는지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 P104

나는 빈병을 들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내내 식당 뒤쪽에 혼자 남은 동료와 그가 혼자 곡예를 하듯 쌓고 내놓고 치우고 있을 그릇과 내가 놓치고 있는 다른 주문을 생각했다. 이 남자가 내 행동과 내 감정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정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쯤 되자 맹렬하다 못해 순수한 지경에 이른 내 여러 감정이 걷잡을 수 없는 열기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 남자가 드디어 말을 멈췄고, 나는 주방으로 돌아가 빈병을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그때 느낀 감정을 당시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서 무언가를 앗아간 기분이었다. 수영장에서 홀로 누리는 행복감과 맞닿는 무엇. 그 그림을 보며 느낀 기분의 언저리에 있는 무엇을. 이런 것들은 소중했고 내게는 아직 신비였는데, 이제 그로부터 내가 더 멀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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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의 청중이 보기에, 고루한 아리스텔레스주의 철학자는 수학자만큼이나 ‘전문적인‘(따라서 세련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 P256

1608년 무렵 갈릴레오는 군용 컴퍼스를 발명하더라도(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유용할지라도) 궁정의 고위직을 확보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컴퍼스는 성채축성술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상당수 끌어모으기야 했겠지만, 궁정 수학 교사의 자질보다 본인의 이미지를 기념하는 일에 더 정신이 팔린 위대한 군주가 그를 탐낼 만한 가신으로 여기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곤차가 가문은 컴퍼스 선물에 감사를 표했고, 메디치 가문 또한 컴퍼스 사용법을 설명한 책의 헌사를 반겼다. 하지만 두 가문의 어느 군주도 갈릴레오가 원하던 직위를 하사하진 않았다. 바로 그때 갈릴레오는 수학 교사나 군사기술공이 아닌 신사로서 궁정에 입성하려면 컴퍼스보다 기계적 성격이 덜한 선물이 필요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 P269270

과학적 경이를 궁정 담론으로(혹은 목성 위성의 사례처럼 특정한 가문의 담론으로) 번역한 갈릴레오의 작업에서 새로웠던 것은 자연철학이라고 해서 반드시 궁정 바깥의 활동일 필요는 없음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과학적 발견과 이론을 군주의 권력 이미지와 연결함으로써 그것들을 정당화했다는 사실이었다. - P273

그러므로 시선을 ‘끌어당겨‘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향상시키는 능력은 궁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다. 이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궁정 에티켓은 지위와 정체성의 미묘한 협상을 군주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도록 끌고 가는 틀이었기 때문이다. - P275

앞서 언급했듯이 절대군주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인 듯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그들의 소유였기에 그들에게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와 같은 자기표현은 신하로부터 받은 선물에 보답할 의무가 없다는 군주들의 주장을 정당화했다. - P283

갈릴레오는 《별의 전령》 헌사에서 그 에티켓을 상세히 설명했다. 절대군주와 독점적 후원 관계를 다지는 데 관심이 있는 가신은 본인의 선물을 실제로는 선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군주에게 속했던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책략에서 포틀래치의 특징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가신은 군주에게 도전한다거나 답례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또 관대함과 사치라는 귀족적 기풍을 군주와 공유하는 척할 수도 있었는데, 자신이 가진 제일 소중한 것, 즉 발견의 저자권까지 버릴 정도였다. 갈릴레오의 ‘자기 지우기‘는 궁정인다운 무심함의 몸짓이 극한까지 이른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군주를 상대하는 영웅다운 도전자가 아니라 ‘자기를 지우는 영웅다운 인물‘로 스스로를 내세웠다. 그렇게 ‘저자적 순교authorial martyrdom‘를 자처함으로써 그는 ‘영웅다움‘의 목적이 군주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를 기리는 것임을 강조하여 자신을 군주와 같은 부류로 내세울 수 있었다. - P284

갈릴레오의 발견이 별에서 온 징조(별의 소식)가 되려면 그에게는 별의 사자ambassador, 즉 대공의 철학자라는 지위가 반드시 주어져야 했다.•

•108 마찬가지로, 갈릴레오가 메디치가에 선물한 망원경은 과학 도구이자 일종의 가문 기념물이었다. 1610년 3월, 갈릴레오는 코시모 2세에게 망원경과 함께 《별의 전령》 헌정본을 보내면서 그 거칠고 조야한 도구는 지금 상태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썼다. "그토록 위대한 발견을 이룩한 바로 그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 대공은 세련되어 보이는 망원경을 더 많이 받게 되겠지만, ‘그 순간 그곳에’ 있었던 것은 자신의 망원경뿐이라고 말이다(Galileo Galilei, Sidereus Nuncius, or The Sidereal Mesenger, trans. Albert Van Helden 2nd edition, pp. 297~298). 모든 망원경 중에서 그것만이 특별한 현장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또 그것만이 단순한 망원경이 아닌 전령nuncius이었다. - P286287

갈릴레오는 두 가지 방법을 번갈아 사용했다. 메디치가를 곤혹스럽게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얻을 수 있는 밑천을 활용해 외부의 신뢰를 확보했고, 그렇게 끌어낸 동의를 활용해 메디치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자신의 발견을 그들의 이미지와 연결했다. 이 과정이 끝날 무렵 갈릴레오는 서서히 자신의 마차를 메디치가에 동여맸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의 권력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몇 달이 지나 철학자 겸 수학자가 된 갈릴레오는 메디치의 영광을 누리는 공식 대사로서 로마로 향할 수 있었고, 그의 발견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였던 교황의 지지를 받았다. 대공이 갈릴레오의 로마 방문을 승인했음을 알리는 빈타의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갈릴레오의 발견과 메디치 가문 이미지의 공생관계는 마침내 확립되었다. - P294

한편 갈릴레오 같은 대학의 수학자들은 그들과 철학자 간의 지위 격차에 맞닥뜨린 상태였다. 앞서 살펴보았듯, 지위의 격차는 수학을 도구로 활용해 자연현상의 물리적 차원을 연구하는 실천의 정당성을 격하시켰다. 따라서 장인들이 군주의 권력 신화를 회화와 조각과 건축으로 표현하여 아카데미 예술가가 되는 데 성공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 가문의 상징으로 표현하여 수학자에서 철학자로 변모했다. 궁정은 과학 아카데미는 아니었지만, 사회적 정당성을 제공하여 ‘철학자로 변모한 수학자들‘이 신뢰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 기관이었다. 분과학문 간의 위계와 기존의 사회기관 그리고 사회문화적 변화의 패턴을 고려하면, 갈릴레오에게 가장 유망한 선택지는 바로 궁정이었다. 비록 문제가 있는 선택지였지만 말이다. - P330

갈릴레오가 궁정의 기존 분류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사회직업적 정체성이 새로운 종류였다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그에게 부합할 만한 범주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메디치 궁정에서 갈릴레오가 경험한 것과 같은 특권적 주변성은 새롭고도 유례없는 사회직업적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시도에서 필수적인 단계였다. 그는 대학의 수학자는 물론이고 군주의 별점에 쓸 천문표를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궁정수학자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피렌체에서 확보한 궁정직은 두 가지 전문직업적 정체성의 이점을 전부 가지면서도 그것들의 많은 결점은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피렌체의 명예 궁정인이었다. 특권이 있으면서도 아직 확립되지 않은 사회직업적 공간이 갈릴레오의 활동 영역이었다. - P336337

르네 데카르트는 갈릴레오가 정연하고 일관된 사고를 하는 철학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하지만(오늘날 몇몇 역사학자와 과학철학자도 그의 평가에 동조한다) 갈릴레오의 연구가 체계적이지 않았던 것은 그의 지적 태도보다는 궁정의 보상 체계 탓이었을 수 있다. 갈릴레오가 활동한 궁정의 환경을 고려하여 나는 그의 과학이 ‘상연적performative‘이었다고 말하겠다. - P344

갈릴레오가 그러한 태도를 사적인 메모나 옹호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만 보였다는 사실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원인과 자신의 탐구 범위를 넘어서는 원인을 구분하는 태도가 권력의 표현이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갈릴레오 자신도 소유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던 권력이었다. - P424425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수학자가 물리적 성질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을 용인하지 않았고, 만일 그러한 탐구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분과학문 간에 확립된 위계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갈릴레오의 가정과 물리적 원리가 틀렸거나, 실제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틀렸다고 할 때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적 범주에 맞지 않음을 지적했다. - P433

《대화》(《두 우주쳬계에 관한 대화》)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희생시켜 웃음을 유발하는 일종의 내부자 농담insider’s joke이었다. 갈릴레오에게(혹은 그의 논쟁 방식에 반영된 문화에) 이미 동조적인 독자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그레도나 살비아티와 동일시하는 독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비웃게 하는 기능이었다. 《대화》는 비록 제목은 ‘대화‘였으나 사실 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타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18 《대화》를 읽은 후 캄파넬라는 갈릴레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심플리치우스[심플리치오]는 철학적 회극의 웃음거리로군요. 그 남자는 그들 학파의 어리석음, 말하는 방식, 비일관성, 고집스러운 태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 P453

철학자들이 수학적 가설의 물리적 실재성에 대한 수학자들의 주장을 사전에 일축한 것은 두 분과학문 간에 발전적인 대화가 단절되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철학자들은 수학자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활동하던 당시의 위계적 환경을 고려하면, 철학자들은 수학자들의 언어를 배우거나 그들의 물리적 원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 P465466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수학자들에게 정합적인 천문학뿐만 아니라 더욱 긴밀하게 통일된 강력한 사회직업적 정체성까지 모두 발달시킬 수 있는 ‘교리‘를 제공함으로써 이 모든 상황을 바꿔 주겠다고 약속했다. 태양중심설은 우주에는 정합성을, 천문학자들에게는 전문직업적 결속력을 가져다주었다.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철학자로 여기며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반면 프톨레마이오스주의자들은 그럴 수 없었다. - P471

철학자들은 수학적 무지에 대한 갈릴레오의 공격에 매우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그들은 그 공격에 답하려 시도함으로써 그것을 문제로 삼아 버리는 상황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코레시오는 부양성을 다루는 수학이 너무 단순해서 갈릴레오의 논증을 파악하고 배격하기 위해 수학자가 될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철학자들이 수학에 대한 무능을 인정하기는커녕 수학을 배척하려 했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51 코레시오는 그 자신이나 동료들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적 역량을 옹호했다. "그 당시에는 철학 학생들이 수학적 학문들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그 학문들을 먼저 공부하기 전까지 논리학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누구보다 플라톤의 제자들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최고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에 대한 지식 없이 [플라톤의 학교에] 발을 들었을 수 있었다고 어느 누가 믿겠는가?" - P476477

요컨대 수학자들은 계속 퍼즐을 풀면서 전통적인 수학의 경계 내부에 남아 있거나, 갈릴레오처럼 철학자들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퍼즐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갈릴레오가 점진적으로 코페르니쿠스주의에 헌신하게 된 데에는 그의 독특한 사회적 위치와 배경과 계층 이동, 그리고 그에 따라 부여된 정체성에 관한 인식이 영향을 미쳤다. 코페르니쿠스 본인에게도 비슷한 고찰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P490

도덕주의는 공약불가능성이 출현했음을 알리는 징후였다. - P493

서로 다른 우주론 및 사회적 기관/제도와 연관된 근본적으로 다른 두 사회직업적 문화가 부양성이라는 사소한 문제 뒤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철학자들이 수학을 배워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에 담긴 함의를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수학을 배운다는 것, 또는 수학을 자연에 대한 물리적 설명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원래는 종속적이었으나 이제 외부의 침입자로 변한 ‘타자‘의 언어를 학습한다는 뜻이었다. 이 결정에 수반되는 제도적·권력적 측면을 고려하면,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자멸을 권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P496

원론적으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자들이 보기에 기구의 사용과 그로부터 얻은 증거에 대한 믿음은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수학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낯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 이론으로는 망원경의 작동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을뿐더러, 증거를 만드는 기계라는 관념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양립하지 않았다. (체사레) 크레모니니Cesare Cremonini가 망원경을 들여다보기를 거부하고 1613년 출간한 《하늘에 대한 논쟁Disputatio de coelo》에서 갈릴레오의 발견을 언급하지 않은 것(그리고 피사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갈릴레오의 물리적 원리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수학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못하도록 한 것과 똑같은 정체성 유지 동역학이 작동한 결과였다. 갈릴레오가 제안한 것(그리고 그들을 위험한 것)은 단순한 부양성 이론과 망원경이 아닌 새로운 철학적 ‘삶의 형식‘이었다. - P494

결과적으로 이중언어를 단순히 언어의 개념으로만 본다면 지적·전문직업적 선택의 바탕에 놓인 정체성 형성과 유지의 동역학을 간과하게 된다. 더 나아가 ‘타자‘의 언어를 학습하는 것의 함의가 반드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직면한 것만큼 극단적이란 법은 없더라도, ‘타자‘의 언어를 학습하는 것이 또다른 사회직업적 정체성의 수용을 의미한다면 이중언어자가 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정신분열증‘을 겪는 셈이다. 다른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두 가지 다른 시각으로 동시에 같은 대상을 본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그저 분산된 관점을 갖게 될 뿐이다. - P499500

그러므로 비소통적 행동은 공약불가능성의 필연적 원인은 아니지만(공약불가능성을 산출하는 본질적인 원인은 없다) 어휘 구조를 심화하는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공약불가능성의 출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소통불가능성과 공약불가능성의 관계는 (양쪽 방향 모두) 인과적이지 않지만 과학적 변화의 기반이 되는 새로운 사회직업적 정체성의 심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 P508509

로마에서는 권력과 상관없이 모두가 세입자(혹은 단기 소유자)였다. 가톨릭교회는 성서와 그 해석에 기초한 강력한 문화적 전통을 가졌지만, 그러한 전통이 로마 궁정 문화의 구체적인 표현을 결정하지는 못했으며 주로 교황의 특정한 취향과 개성이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추기경의 궁정 문화는 종교적 전통이 중심을 이루지 않았으며, 그 궁정은 대체로 신학적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궁정의 담론에는 종교적·세속적 요소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신화 또한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게 섞여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의 궁정에는 교황 통치의 모호성, 즉 종교적인 동시에 세속적인 모호성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 P544545

로마의 권력이 전개되는 상황의 변동성, 군주가 관리하는 문화적 거대서사의 부재, 바로크의 중심지 로마에서 발견되는 특유한 절충주의와 문학적 재치 그리고 덧없음에 대한 감각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적 절충주의는 절대주의 담론(그리고 국가이성raison d‘état의 원칙과 나란히 맞물린 중립적 문화)과 공생했기 때문에 모든 바로크 궁정의 특징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그러한 문화적 상황이 로마의 독특한 특징인 ‘거대서사와 비교적 안정된 문화적 틀의 부재‘로 인해 극단으로 치달았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로마의 궁정인들은 복잡하고 일관된 프로그램이나 철학 체계보다는 고유성을 가진
‘문화적 보석들cultural gems‘을 높이 평가했는데, 이는 그들 자신의 정체성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공한 궁정인들은 그 자체로 ‘보석‘과 같았다. - P549

‘체제 중심의 정신‘이 로마의 문화에 이질적이었다면, 이는 궁정인들의 삶과 경력 그리고 정체성에 스며들어 있던 특유의 우연성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바로크라고 부르는 것이 로마에서 가장 안성맞춤인 장소를 발견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 P549550

아카데미 문화의 간단명료함compendiosità이란 궁정인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습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편리한 교훈 모음집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아고스티노) 마스카르디Agostino Mascardi는 야간 경영대학원 과정을 제안한 것이 아니다. 간단명료함은 얕은 지식이 아닌 풍부하고 다채로운 ‘보석‘ 수집품들로 구성된 지식을 의미했다. 아카데미 문화는 뮤즈의 정원에서 엄선해 만든 향기로운 꽃다발이었다. 궁정인은 정원을 무심하게 거닐면서도 꽃을 모을 수 있었다. 아카데미 문화는 또한 규칙 맹종과 대척점에 있었다. 그것은 자칭 철학자인 따분한 전문가들에게 오랜 교과과정을 거치며 배우는 문화가 아니었다. 사적인 경로"를 걸으며 "위대한 영혼들"(마스카르디는 여기에 자신을 포함했다)로부터 개인적으로(거의 내밀하게) 직접 흡수하는 것이었다. 수 세기 동안 이어진 교수들의 겉치레는 ‘싸구려‘로 거부되었다. "위대한 영혼들"(실질적으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아는 자들)은 어떠한 중개 없이도 로마 궁정인들에게 지식의 정수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전달되는 것은 전문 기술이 아닌 덕이었다. - P552553

《시금자》가 인쇄되는 동안 중차대한 후원 사건이 맞물려 오고 있었다. 갈릴레오의 좋은 지지자였던 마페오 바르베리니는 우르바노 8세로 성좌에 올랐다(마페오는 3년 전 〈위험한 찬양Adulatio Perniciosa〉이라는 시를 갈릴레오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76 〈위험한 찬양〉에서 마페오 바르베리니는 메디치의 별, 토성의 특이한 외관, 태양 흑점을 발견한 갈릴레오를 칭송했다. 마페오는 시를 첨부한 편지에 "형제로서como fratello"라고 서명했는데, 이는 추기경을 일컫는 비격식적 칭호로는 드물게 사용된 것이었다(GO, vol. 13, no.1479, p. 49). - P605

로마 최고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린체이 아카데미의 설립자인) (페데리코) 체시는 마지못해 궁정인이 되었다. 이른바 모든 로마 남작(오르시니, 콜론나, 사벨리, 체사리니, 콘티 등 소수의 최고 귀족 가문)과 마찬가지로 채시가문은 궁정의 사치스러운 생활양식으로 인해 서서히 파산해 갔다.• 정치적 절대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흔히 목격되듯이,로마의 귀족들은 정치적 권력이 쇠퇴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쓸모는 없지만 그럴듯한 작위를 받았다. 예를 들어 체시는 젊은 시절 산 폴로 및 산트 안젤로의 군주였으며 아콰스파르타의 공작이자 몬티첼리의 후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소들은 대부 분 인상적인 명칭만 그럴듯하게 붙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의 남작들은 정치권력이 거의 없었으며, (덜 고귀하더라도 훨씬 부유한) 새로운 교황 가문과 혼약을 맺거나 그들 가문에서 추기경을 거듭 배출해 체면치레에 필요한 특권을 얻음으로써 사회적으로 살아남았다.••

•83 대체로 체시 가문은 체사리니 가문과 함께 로마 남작의 두 번째 계층에 속했다(첫 번째 계층에는 콜론나, 오르시니, 사벨리, 콘티와 같은 가장 유서 깊은 가운들이 포함되었다). 로마 남작 계급의 재정적 쇠퇴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중략) 엔리코 스툼포Enrico Stumpo는 이렇게 말했다. "콜론나와 오르시니, 체사리니, 카에타니와 같은 영향력 큰 가문들이 관련되어 있었지만, 그들 가운은 이미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해 있었으므로 그들이 보유한 ‘자금원monte‘의 자산은 작위 시장에서 성공을 가져다주기에 충분치 않았다. 그들은 영지에서 상당한 수입을 얻긴 했으나 당시 로마에서 필요했던 매우 높은 생활 수준을 충족하고 유지하기에는 부족했다. 그것은 많은 교황의 자비가 없이는 보장받지 못할 수준이었다." (중략) 이런 쇠퇴를 동시대인들 또한 분명하게 감지했다. 트라이아노 보칼리니는 "사이프러스처럼 높이 자랐던 양귀비들"은 "초라하고 천박한 난쟁이 같은 제비꽃"이 되어 버렸다고 비꼬았다. (하략)

••85 예컨대 체시가 겪은 재정적 곤경은 추기경이었던 그의 삼촌 바르톨로메오가 1621년에 사망하자 더 심각해졌음이 분명하다. 바르톨로메오는 체시 가문의 부채를 갚을 자금원을 마련하고 갱신할 권한을 얻은 참이었다. 삼촌이 사망한 후 페데리코는 카에타니 가문 소속의 두 추기경을 이용하기 위해 빠르게 조치를 취했다(페데리코의 조모는 베아트리체 카에타니Beatrice Caetani였다). (하략) - P610611

갈릴레오는 《시금자》에서 사변적인 궁정 자유사상가라는 의미의 철학자를 자청했으나 《대화》에서는 우주의 물리적 구조를 연구하고 그에 관한 주장을 펼치는 ‘철학적 천문학자‘로 돌아가길 원했다. - P651

그 특유의 권력 주기로 인해 로마는 이례적인 지위 상승, 적극적인 가신들, 눈에 띄는 지출, 막대한 후원이 대표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은 공간이 되었다. 혈통이 사회적 신분과 경력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이었던 사회역사적 시기에 로마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사회적 정체성도 정당화할 수 있는 ‘카니발적‘ 장소였다. 마페오 바르베리니 같은 민간 신사들도 교황이 될 수 있었고, 갈릴레오 같은 수학자들도 철학자나 신학자를 대신할 수 있었다. - P664

로마는 고위험 고수익 내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으며, 자기형성을 위한 매우 유력한 선택지가 있는 곳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로마는 매우 보수적인 기관이 자리 잡은 곳이었으나 동시에 (그 틀 안에서) 변화와 새로움이 (로마의 틀로 볼 때) 당연시되던 곳이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잘못된 판단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고 위험으로 치닫는 공간이기도 했다. - P676

궁정사회의 이러한 이미지는 권력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비교적 넓거나 권력의 형태와 중심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근대와는 달리 어떤 유형의 권력이든 그 유일한 원천은 오직 군주임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권력 구조로 인해 궁정사회의 경쟁은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 궁정인은 성공이 아닌 은총, 즉 연봉이나 학술지 인용 횟수로는 측정되지 않는 목표를 추구했다. 은총은 군주가 가신을 총애한 결과였다. 궁정인이 정상에 오를수록 그의 경력은 군주와 맺은 친족 관계의 한 형태로 간주되었고 심지어 시적으로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로 표현되기도 했다. (마테오) 펠레그리니Matteo Pellegrin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주를] 사랑하는 두 사람은 사랑받는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없다. 총애의 옥좌는 두 명을 위한 공간이 없다."

몰락의 즉시성은 군주의 총애를 잃은 궁정인과의 관계를 주변의 모든 사람이 끊어 버린 결과이기도 했다. 운명의 여신 또한 과거에 보살폈던 이가 바치는 공물을 더 이상 받지 않았다. "(전략)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을 때조차 운명의 여신은 견고하지 않았다." - P687

갈릴레오와 마페오 바르베리니의 관계는 독립적이고 서로 경쟁하지 않으며 각자 매우 출세한 두 개인의 관계였다. 둘 다 1623년 무렵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 우르바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이자 마이케나스였고, 갈릴레오는 문화계에서 가장 돋보이던 유명인이었다. 마페오가 보기에 둘의 관계는 서로 다른 지위와 활동 영역의 간격을 메우는 사적인 친족 관계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군주와 총신의 관계와도 비슷했다. 총신들은 반드시 전문 궁정인일 필요도 없었고, 정치권에서 나타 날 필요도 없었다. 또 특별히 빼어난 배경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매우 예외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법에 해당할 규칙을 무시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총신은 궁정 분류 체계의 예외 사례가 제도화된 존재였다. 중요한 것은 군주와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관계였다. - P697

나의 의도는 궁정인의 물락과 갈릴레오의 재판을 엄밀히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두 사건의 유사성을 발견법적 도구로 삼아 기존의 해석이 재판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후원 의존적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으로의 분석은 총신의 몰락에 존재하는 두 가지 차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첫 번째 차원은 군주가 한때 긴밀했던 가신의 제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배신이라는 수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차원은, 군주의 권력이 절대적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총신의 몰락 또한 반드시 절대적인 것, 즉 끔찍하고 돌이킬 수 없으며 매우 확고하게 결정된 것으로 보여야 했다는 점이다. - P698

역설적이게도 갈릴레오는 교황의 궁정인이 되기 위해 남들의 눈에 띄고 논란될 만한 입장들을 취해야 했지만(그리고 그 입장들을 취하는 시기를 후원상의 맞물림에 맞추어야 했지만), 그의 연구에 수반되는 성서의 재해석은 가장 미묘한 문제였으며 모든 기략을 발휘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1623년에 체시에게 말했듯이 우르바노 교황의 임기는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맞물림이었다. 1630년 갈릴레오의 제자 카발리에리는 그 점을 다시 언급하며 갈릴레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 결과, 갈릴레오는 어쩌면 장기화될 수 있었을 미묘한 사회적·인식적 정당화 과정을 그가 유일하게 접근할 수 있었던 정당화 과정, 즉 군주 후원의 주기에 맞춰 단축할 수밖에 없었다. - P733734

우르바노는 《대화》가 마치 《시금자》처럼 가설을 향유할 수 있는 비르투오소의 작품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므로 그는 코페르니쿠스주의로 편향된 갈릴레오의 입장을 그저 신학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위험한 대상으로만 인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입장은 저속한 취향의 표시였다. 그 표시는 우르바노가 갈릴레오에게 느낀 지적인 동류의식을 망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학설의 결정적 증거를 찾길 고집함으로써 갈릴레오는 그가 소리의 우화에서 매미의 몸을 관통했다며 조롱한 남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결국 우르바노의 총신은 그에게 규칙맹종이 남아 있음을 스스로 보이고야 말았다. - P737738

지금까지 이 책은 정치적 절대주의 문화와 갈릴레오의 새로운 자연철학 간의 상호작용을 탐구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보면, 갈릴레오 재판은 궁정사회와 정치적 절대주의 덕분에 가능했던 사회직업적 정당화 방식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는 징후로 나타난다. 갈릴레오 재판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 토마스주의 신학, 근대 우주론 사이에서 일어나 충돌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바로크 궁정사회와 문화의 동역학과 긴장 사이에서 일어난 (구조적으로 예상 가능한) 충돌이기도 했다. - P738

실험적 실천이 도입됨에 따라. 구경거리의 특징이 강하면서도 반드시 종결될 필요는 없던 논쟁에서, 구경거리로서의 특징은 덜하지만(혹은 다른 의미에서 구경할 만하지만) 관리 가능하며 종결될 수 있는 논쟁으로 전환되는 장면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실험은 여러모로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고, 아카데미 회원들을 즐겁게 만들어 끌어들이고, 종교 또는 정치적 비정통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단을 제공하고, 공동으로 받아들일 만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기반을 만들어 협동 연구와 대화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실험은 후원 특유의 중립적 중재에서 비롯된 교착상태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실험적 실천은 후원 체계가 제공하던 가능성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까지 사회적 지위의 거리를 발전적으로 관리함으로써 과학기관이 발전한 결과만이 아니라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 P746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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