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5) p49이하
황제라는 칭호는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확립하면서 비롯됨.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제후들이 일어나 처음에는 '공'이라고 칭하다 후에는 '왕'이라 표방함. 서기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에서 황자와 제자를 따 황제라고 칭하였고 이때부터 황제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제후와 구분지어 붙임.
일본은 중국과 멀리 떨어진 탓으로 비교적 자주적인 호칭인 '천황'을 표방했고 우리의 삼국은 중국과 근접해 있어 황제도 왕도 아닌 '대왕'이라는 호칭을 주로 씀.
제후 나라는 황제 나라와 용어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했는데 이를 어기면 참칭이라 하여 제재를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명분에 충실한 후세 유가 사학자들의 비난을 면치 못함.
제후 나라는 연호를 독자적으로 쓸 수 없고 중국 황제의 연호를 써야 한다. 그런데 왕건은 왕위에 올라 '천수'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 다른 의식에서도 황제에 걸맞은 용어를 사용함.
ex) 왕이 자신을 부를 때 과인 대신 짐(朕)이라 했고, 신하들이 임금을 부를 때 전하(殿下) 대신 폐하(陛下)라고 했다. 임금의 명령을 전(傳)이나 교(敎)라고 하지 않고 조(詔)나 칙(勅)으로, 임금의 부모를 황고(皇考)와 황비(皇妃)로, 임금의 아내를 황후(皇后)로, 왕위를 이을 아들을 세자(世子)대신 태자(太子)라고 함.
특히 역대 임금의 시호에서 자주성을 분명히 알 수 있음. 제후 나라의 임금은 어디까지나 '왕'자를 넣어 시호를 지어야 하는데 삼국에서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모두 '왕'자를 붙임. 그러나 고려에서는 황제의 격식에 따라 조종(祖宗)을 붙임. 조는 국가를 세우거나 위기에서 구제한 임금에게 붙이고, 종은 수성한 군주에게 붙임. (ex) 태조, 광종 등. 이러한 시호는 원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이 상실되면서 충렬왕 따위로 대치됨. 사대적 명분에 충실했던 근세 조선에서도 조종의 시호만은 유지함.
황제는 천명을 바아 등극하였으므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치르고 이것을 원구제라 하고 제사지내는 장소를 원구단이라 한다. 고려는 원구단을 만들었으나 신라는 설치하지 않고 근세 조선의 중기이후부터는 이를 거의 폐지함. 그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원구단을 설치함.
황제는 문장에 용을 사용하고 제후 왕은 봉황을 사용. 고려는 용을 상징물로 삼았는데 조선은 봉황을 상징물로 삼음. 청와대에서 봉황의 문장을 쓰는 것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제후에 해당한다는 것인지?
고려가 비록 황제의 의식과 제도를 따랐으나 왕전하게 황제국 행세를 한 것은 아니고 국제 정세에 따라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기도 함.
cf. 사대의 예 - 1. 중국황실의 절일에 조공사 따위의 사신을 정기적으로 보내는 것. 2. 새 황이 들어설 때마다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것/ 그러나 이는 형식과 명분에 그치고 중국이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아니었음.
거대한 중국대륙을 통일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대국 앞에서 무수히 명멸을 거듭했던 유목민족과 같이 독립된 국가도 이룩하지 못한 채 흡수되어 버리지 않고(물론 미래에는 지금 중국에 속해 있는 여러 민족들이 분리 독립을 할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독립된 국가를 이루기 위해 중국의 황실에 사대의 예를 갖춘 것은 어찌보면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사대의 예를 갖춘 조선보다 융통성 있게라도 황제를 칭한 고려를 접하면서 속이 시원해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그리고 지금 대통령의 문장으로 봉황을 쓰는 것은 단순히 근세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으로 황제와 왕을 상징하는 문장으로서 용과 봉황이 갖는 의미를 고려한다면 과연 적절한 선택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쪽팔리지 않는가?